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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31   1월의 독서 목록 [2]

1월의 독서 목록

1. 이 얼마나 천국같은가(존 치버, 김승욱 역. 문학동네. 2016. 150쪽)
: 스스로 인생의 황혼기를 살고 있다고 느끼는 시어스. 겨울마다 종종 스케이트를 타러 가곤 했던 비즐리 연못이 쓰레기 매립지가 되어가는 것을 보고 이를 막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한편 연못 근처에서 이발소를 하며 살던 새미는 삼촌의 도움으로 비즐리 연못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수수료를 징수하는 일을 맡게 된다.

비즐리 연못의 오염이 이야기의 발단이지만 환경 소설은 아니다. 환경 오염은 이 소설에서, 인생에서 맞닥뜨려야 하는 수많은 문제들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이 문제들은 당장 내 눈 앞의 천국을 조금씩 흔들다가 무너뜨리지. 물론 인생을 흔드는 건 외부의 문제들만은 아니다. 르네를 향한 시어스의 마음, 엘리베이터 맨을 향한 시어스의 (본인도 이해 못할) 욕망, 벳시와 마리아의 갈등, 환경운동가 치솜의 마지막 선택... 인생은 살 수록 더 알 수 없다.

이 작가의 '최고의 장편'이라는 업다이크의 글을 봤는데, 솔직히 동의하진 않는다. 내게는 아직도 『왑샷 가문 몰락기』의 감동이 어렴풋하게나마 남아있다. 하지만, 아마도 시어스의 나이 즈음에 내가 다시 이 소설을 읽는다면 업다이크의 말에 동의할 지도 모르겠다.


2. 9번의 일(김혜진. 한겨레출판. 2019. 258쪽)
: 우울하고 우울한 이야기. 이제는 대기업으로 성장한 통신회사의 창업 초기부터 현장직으로 26년을 근속한 화자. 이제는 저성과자로 분류되어 권고사직 대상이 되지만, 버틴다. 회사는 그를 재교육장으로, 변두리 타지역으로, 지방 소도시로, 다시 오지의 통신탑 건설 현장으로 내몬다. 묵묵히 회사의 명령을 따르는 화자.

삶의 비근한 모습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너무나 흔하고 너무나 친숙하지만 너무나 무기력한. 늘 너무 늦는 게 문제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것도, 다세대 건물을 파는 것도, 개를 동물병원에 데려가는 것도. 그건 어쩌면 이 사회를 사는 누구나 마찬가지일 테다. 결말을 알면서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그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기에. 하지만 진짜 해야할 일은 마지막 장면에서야 하게 된다. 그렇게라도 하면, 됐다.


3. 올 댓 맨 이즈(데이비드 솔로이, 황유원 역. 문학동네. 2019. 622쪽)
: 9명의 유럽 남자들의 이야기. 장편이라기 보다는 연작 소설집. 대학 입학하고 친구와 여행 중인 영국인 사이먼. 삼촌과 일하다 잘리고 키프로스로 여행 온 프랑스인 베르나르. 런던으로 매춘을 하러 가는 엠머를 경호하는 헝가리인 벌라주. 여자친구 아버지의 새 차를 도버로 탁송해 주는 대학강사. 고위급 장관의 스캔들의 사실 관계 확인차 스페인으로 간 덴마크인 부편집장. 프랑스 알프스의 콘도를 홍보분양 하는 영국인.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는 영국인 머리. 요트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한 러시아계 영국인 억만장자. 이탈리아 별장에 머물고 있는 토니.

처음엔 장편인 줄 알고 각 챕터 사이의 공통점을 눈이 빠지게 찾았지만, 기껏해야 트럼프 카드가 등장한다는 점과 사이먼이 토니의 손자라는 점 외에는... 크게 감동을 받거나 공감을 하긴 힘들었지만 이게 유럽의 현재이고 유럽인 남성들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꽤 흥미로웠다. 1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남자들의 4월에서 12월까지의 이야기가 점진적으로 전개되고 그들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의 심각성이 점점 높아지는 것도 꽤 맘에 드는 구성이었다. 모든 주인공들이 진짜 나쁜 놈은 없다는 것도.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유럽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도 작게나마 기대해 봐야겠다.


4. 영의 기원(천희란. 현대문학. 2018. 331쪽)
: 작품집 전반에 흐르는 죽음과 종말의 이미지가 맘에 들었다. 모든 사건들은 죽음과 관련이 있거나 죽음을 향해 가거나, 혹은 (누군가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들이다. 살아남은 자의 시각으로 보는 죽음들. 죽음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운명이지만 그 이후를 증언하는 건 산 자의 몫이다. 그 시각이 특별히 비장하지 않아서 좋았다. 바로 코 앞에 다가왔든 혹은 막연한 먼 미래든 받아들여야 할 몫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의문이 있다해도 속으로 삭이는. 가장 좋았던 건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5. 내가 여기 있나이다 1.2.(조너선 사프란 포어, 송은주 역. 민음사. 2019. 491쪽, 477쪽)
: 워싱턴에 사는 유대계 미국인 블록 일가. 아이작 블록은 증손자 샘의 바르 미츠바를 앞두고 요양원에 들어갈 지 자살을 할 지 고민한다. 샘은 유대 학교에서 인종차별적인 단어들을 적은 쪽지를 갖고 있다가 랍비에게 들키고, 샘의 엄마 줄리아는 그럼에도 어떻게든 바르 미츠바를 치르려 한다. 샘의 아빠 제이컵은 골수 시오니스트 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있고, 먹고 있는 약으로 인해 남성성이 위축되는 기분이 든다.

신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고, 신의 민족인 유대인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언어를 만들어냈지만 결국엔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아내는 남편 주위를 일곱 바퀴 돌지만 남편이라는 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남편이 자신의 또다른 언어를 아내에게 숨기는 한 그들이 쌓은 건 바벨탑일 뿐이었다. 어쩌면 현대를 사는 우리는 모두 바벨탑을 쌓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함께 있기 위해 쌓는 탑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를 흩어놓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 탑에 벽돌을 올릴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누군가는 - 어쩌면 신이 - 알아 줄 것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6. 옥상에서 만나요(정세랑. 창비. 2018. 277쪽)
: 믿고 읽는 작가랄까. 대한민국을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평범하지 않게, 작가만의 독특한 필치로 그려내는 단편들. 한 편 한 편이 각각의 유니크함을 갖고 있는 게 좋았고, 대부분이 여성들인 화자들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게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7. 당신과 다른 나(임현. 현대문학. 2019. 153쪽)
: 읽을 땐 꽤 집중해서 읽었고 인상 깊었는데 리뷰 쓰려고 하니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 당황했다. Thanks to 알라딘. 홀수 챕터와 짝수 챕터의 화자가 다르다. 홀수 챕터의 화자는, 최근 달라진 남편을 이야기한다. 제약회사 연구원인 남편은 건망증이 점점 심해지다 못해 아내인 자기마저 못 알아보고, 있지도 않은 강아지를 찾으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목격되기도 한다. 짝수 챕터의 화자는 작가. 어느 날 '나'에게 자신의 남편과 정말 닮았다는 여자의 메일이 온다. 게다가 자신이 간 적 없는 곳에서 자신을 목격했다고 말하는 지인들. 화자에게 남편과 닮았다는 여자는 '나'와 만나고 싶어한다.

여성 화자의 질문은 '당신은 누구인가'이고, 남성 화자의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정체성의 혼란은 기존에 내가 읽었던 대부분의 작품들에선 여성의 몫이었다. 내가 되기를 원하는 존재와 남이 인정하는 아니 남이 내게 기대하는 존재의 괴리가 갈등의 중심인 서사가 많았다. 그게 이 작품에선 남자의 몫이다. 남성 화자를 따라가다 보면 이 혼란의 원인은 여성 화자 때문이지만 종래에는 그도 의심스럽다. 남성 화자의 행위는 이 사단의 원인인가 결과인가(남성 화자가 인정받고자 하는 대상도 여성 - 아내인 미양 - 이지만 감추고 싶은 대상도 그녀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8. 로스트 라이트(마이클 코넬리, 이창식 역. RHK. 2013. 411쪽)
: 해리 보슈 시리즈 9번째. 퇴직한 해리는 그간 모아놓은 미결 사건 파일을 살펴보던 중 헐리웃 영화 촬영 현장에서의 200만 달러 도난 사건과 연관이 있던 4년 전의 성범죄 살인 사건을 다시 수사하기 시작한다.

내 기억으로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화자가 '나' 해리이다. 여전히 컴맹에다가 조금은 꼰대 같고 마초 같지만, 피해자의 마지막 모습을 잊지 않으며 뚝심있게 수사하는 해리. 사실 시리즈물을 읽다보면 개개의 사건 보다는 주인공의 인생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 시리즈에서는 이 작품이 그 정점을 찍은 느낌이다. 이 시리즈의 어떤 결말보다 아름다웠던 마지막 장면. 해리만의 로스트 라이트. 해리를 세상에 머물도록 붙잡아 줄 빛.


9. 작은마음동호회(윤이형. 문학동네. 2019. 354쪽)
: 동류라고 믿었던 사이에서의 몰이해 혹은 강요, 폭력. 사실 외부에서 볼 때는 하나의 집단으로 묶일 수 있는 부류들일 지라도 그 구성원들은 하나하나 다 다른 상황과 사연, 성향과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과 사연과 성향과 생각이 갈등을 만들어낸다. 작품들 속 어느 누구에게도 다 공감이 갔다. 그 상황이라면, 그런 성향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으리라고. 다만 하즐라프 연작은 좀 - 아직도, 여전히 - 생경했다. 가장 좋았던 건 「역사」. 가장 공감했던 건「수아」.


10. 젤다(젤다 피츠제럴드, 이재경 편역. 어떤책. 2019. 222쪽)
: 작가의 아내가 아닌 작가로서의 젤다 피츠제럴드. 그녀의 에세이와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사실 스콧 피츠제럴드가 아내의 작품들을 훔쳤다는 걸 알게 된 직후에는 엄청 분노하긴 했지만 그의 지질함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그를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나니, 젤다는 사랑하게 됐다. 스콧의 풍광 묘사를 늘 감탄하며 읽곤 했는데 이 책을 읽으니 어쩌면 스콧이 훔친 게 젤다의 이런 표현력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남부 아가씨」.


11. 꿈의 책(니나 게오르게, 김인숙 역. 썜앤파커스. 2019. 479쪽)
: 10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아들 샘을 만나러 가는 길, 헨리는 강에 빠진 어린 여자아이의 목숨을 구했고, 갑자기 덮친 차량에 치여 코마에 빠진다. 소설은 '깊은 잠'에 빠진 헨리의 꿈 속과 그런 그를 매일같이 찾아오면서 그를 이해해 보려는 샘, 오래 전에 헨리에게서 자신의 사랑을 거부당했다고 알고 있지만 헨리가 자신을 의료의사결정권자로 지정했기에 그를 보러 온 에디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 작가의 전작을 읽을 땐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 작가가 발전한 건지 아님 내가 과소평가했던 건지. 결말의 분위기는 전작과 비슷하다. 전반적으로 환상적인 소설이지만 결말만큼은 약간의 현실이 보여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부모는 늘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한다. 그것을 위해 때론 자식의 손을 놓아야할 지라도.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 교정오류는 아쉽다. 특히 따옴표(열었으면 닫아야지).


12. 멜랑콜리 해피엔딩(강화길 외. 작가정신. 2019. 335쪽)
: 박완서 작가 8주기 추모 엔솔러지. 콩트들이다. 짧은 만큼 부담없이 읽었고 각 작가들 특유의 위트가 드러나서 좋았다. 다만 김사과는... 김사과의 작품은 처음 읽은 게 제일 좋았고 읽을 수록 실망한다. 그 외 작가들은 정말로 멜랑콜리하면서도 엔딩만은 해피한 이야기들을 잘 풀어냈다. 가장 좋았던 건 윤고은의 「첫눈 마중」.


13. 우리가 추락한 이유(데니스 루헤인, 박미영 역. 황금가지. 2018. 496쪽)
: 뛰어난 심리학자인 엄마와 단둘이 살던 레이철. 늘 생부에 대해 궁금함과 그리움을 품고 있었지만 엄마는 얘기를 해줄 듯 해주지 않는다. 갑자기 엄마가 교통사고로 사망해 버리자 레이철은 엄마의 몇마디 말을 단서로 사립 탐정에게 의뢰를 하지만 사립 탐정 브라이언은 그 정도 단서로는 찾을 수 없다며 돈만 날릴 거라는 충고를 한다. 이후 기자가 된 레이철. 브라이언은 그녀의 기사를 보며 때때로 이메일을 보낸다.

프롤로그에서 레이철은 남편을 죽인다. 그 남편이 과연 누구인지, 왜 죽였는지가 이 소설을 끌고 가는 원동력이다. 거기에 레이철이 앓고 있는 공황장애가 스토리에 긴박함을 더한다. 진짜 재밌었고, 레이철이 속 시원히 복수를 하기를 바라며 열심히 읽어나갔다. 결말을 살짝 스포하면 생각만큼 속 시원하진 않다. 하지만 처음으로 이 작가에게서 깊이를 느꼈다. 생부를 찾아 헤매는 레이철의 공허한 마음과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심리를 꽤 섬세하게 묘사했다. 몇 권 안 읽긴 했지만 이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좋았다.


14. 부스러기들(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 박진희 역. 황소자리. 2016. 527쪽)
: 추운 밤, 레이캬비크 항구에 두 명의 노인과 세 살 여자아이, 그리고 목발을 짚은 남자 하나가 요트의 입항을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요트가 나타나고, 천천히 입항하는 대신 항구로 돌진한다. 요트 안은 텅 비어 있는데, 과연 세 명의 선원들과 네 명의 가족(부부와 쌍둥이 딸)은 어디로 사라진걸까?

작가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 속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변호사 토라의 시점과 가족을 데리고 요트에 타고 있던 승객 - 아이슬란드 은행 분쟁조정위원회의 아이에르 - 의 시점이 번갈아 보여진다. 막판에는 작은 반전이 있고, 난 전혀 예측을 못했었다. 범인이 밝혀지긴 하지만 권선징악의 느낌은 별로 안 느껴지고 그저 이 소설이 지닌 깊은 비극에 압도 당했다. 결말은 마음이 아프다. 어쨌든 잘 쓴 소설.


15. 밤의 징조와 연인들(우다영. 민음사. 2018. 407쪽)
: 대놓고 얘기하지 않는 현대 한국에서의 여성의 삶. 있을 수 있는 연애와 사고와 우연한 만남에 관한 이야기들 한 겹 아래에 감춰져 있는 차분한 이야기들이 좋았다. 이런 문체로 장편을 써줬으면.


16. 올가(베른하르트 슐링크, 김재혁 역. 시공사. 2019. 367쪽)
: 19세기 후반 독일. 슬라브계 엄마에게서 태어난 올가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올가의 엄마를 못마땅해하던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부유한 집 아들 헤르베르트와 친해진 올가. 자신의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개척하기 위해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든 책을 읽고 공부를 계속하는 올가 곁을 계속 맴도는 헤르베르트. 둘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다.

일찍 사라져버림으로써 신화가 되어버린 사랑. 헤르베르트가 실종되지 않고 돌아왔다면 둘의 사회적 계급 차이, 부모님을 비롯한 주위의 반대, 독일의 정치가 나아가는 방향 때문에라도 결별했겠지. 둘은 성격에서나 성향에서나 맞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넘어서는 게 바로 사랑이긴 하지. 그리고 이 사랑이 이렇게 굳건한 건 올가 자신의 강인함 때문이기도 하다.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삶을 살아간 올가. 그래서 이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평이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았다. 믿고 읽는 작가.


17.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민승남 역. 민음사. 2009. 341쪽)
: 중산층의 위선과 자기합리화가 가득한 단편들. 특히 동류의식에 바탕을 둔 범죄의 묵인과 당연히 묵인되리라는 믿음들이 소름끼친다. 누구보다 교양있는 척 하지만 정신의 밑바닥은 그저 (잠재적)범죄자들일 뿐. 어쨌든 전작보다 재밌게 읽었다. 리플리 시리즈도 얼른 읽어봐야지. 가장 좋았던 건 「연」. 「양손의 떡」도 좋았다.


18. 춤추는 사신(배명훈. 미메시스. 2018. 77쪽)
: 死神인 줄 알았는데 使臣이다. 하늘에서 불덩이가 계속 떨어지는 종말 임박의 세상. 사신이 오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전국에서 문자 학자들이 모두 불려오고, 여자아이지만 스승에게서 문자를 배운 '나'도 수도로 온다. 하루에 한 번 움직이는 사신의 몸짓의 의미를 알아낸 '나'.

이 작가를 좋아하지만 이 작품은 단편임에도 읽는 데 오래 걸렸다. 그림 때문에. 그림이 오히려 상상력을 제한했다. 이야기를 읽으며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그 다음 페이지에 나타나는 건 은근 짜증나는 일이었다. 이야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언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이 작가만의 독특함이 드러나는 이야기.


19. 시인(마이클 코넬리, 김승욱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607쪽)
: '로키마운틴 뉴스'의 기자 잭 맥커보이는 어느 날 찾아온 형사들을 보고 직감한다. 형사인 쌍둥이 형 션이 죽었음을. 오래 전 누나가 익사한 호숫가 공원 주차장에서 권총 자살한 채로 발견된 션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경찰관들의 자살 사건들을 기사로 쓰려던 잭은 전국에 유사한 사건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고, 이게 연쇄살인임을 직감한다.

처음으로 이 작가에게서 문장력을 발견했다. 내가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자주 열받은 책이기도 했다. 책 속에 들어가서 아동성범죄자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어느 나라나 사법제도의 허점을 교묘하게 잡아내 이용하는 인간은 있기 마련이지만. 해리 보슈 시리즈보다 빠른 호흡으로 읽히는 건 큰 장점이다. 아무래도 내용상 더 긴박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모든 건 친부살해모델로 귀결된다고 생각했지만 책에도 나와있듯 시인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나니 뭔가 석연치 않다. 결말도 완전하지는 않고. 해리 보슈 시리즈의 10권을 읽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만 했던 책이어서 먼저 읽었는데, 먼저 읽기를 잘하긴 했다.


20. 첫사랑 위원회(DcDc 외. 르네상스. 2017. 319쪽)
: 귀여운 단편들. 청소년 대상이다. 부담없이 편하게 읽었다. 청소년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는 불안과 치기와 맹목과 용기들. 앞에서 '귀엽다'고 한 건 이들이 가진 이런 고민들을 폄하하거나 작품들 자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저 청소년이기에 귀엽다는 뜻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나를 돌아보는 기분. 강지영과 주원규는 다른 작품들과 결이 좀 안 맞는 느낌이긴 했지만 대체로 다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박애진의 「우리 반에 늑대인간이 있다」.


21. 블러드 워크(마이클 코넬리, 김승욱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495쪽)
: 전직 FBI 분석가 테리 매케일렙. 심장 이상으로 쓰러진 후 이식 수술을 받고 지금은 보트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의 근황이 신문에 실리고, 아름다운 여자가 그를 찾아온다. 그가 받은 심장의 주인이 자신의 동생이라며, 동생이 죽은 마트 강도 사건의 범인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간호사가 심장 수술을 한 사람에게 수사를 의뢰한다는 게 아이러니다. 물론 테리가 분석관이었기에 가능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그라시엘라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이식된 장기를 가졌던 사람의 유가족이라는 걸로 밀어붙이는 것도 비호감이다 - 이게 바로 금기시되는 그 '대가'가 아니면 뭔가? 그래놓고 후속작에선 테리가 수사에 참여한다고 못마땅해 하는 것도 모순이고. 암튼 범인은 처음 의심했던 그 놈이다. 내가 그 동안 읽은 장르문학 중 가장 빨리 범인을 찾은 책이다. 하지만 범인의 그 의도와 진짜 정체는 반전이어서, 밝혀졌을 때 꽤 놀랐다. 이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맘에 드는 결말.


22.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김미월. 문학동네. 2019. 336쪽)
: 정세랑의 「이혼세일」과 젤다 피츠제럴드의 「경매-1934년형」이 생각나는 제목이어서 집어들었다. 이 작가의 신작이 오랜만이라 반가움도 컸고. 하지만 읽고 나니 뭐랄까, 이 작가만의 유니크함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작가의 이름이 바뀌었다고 해도 그냥 그렇구나, 할 정도. 필력이 나쁘지는 않고 내용도 담겨 있는 의미도 다 인상적이긴 하지만 그냥 요즘 한국 소설들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이건 비단 이 작가만의 문제는 아니긴 하지만. 이번 달에는 의도치 않게 단편집을 많이 읽었는데, 지친다. 단편은 한동안 멀리해야겠다.

by 달을향한사다리 | 2020/01/31 14:12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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