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에르브광장

2019/08/02   7월 독서 목록 [4]

7월 독서 목록

1. 숲 속의 은둔자(마이클 핀클, 손성화 역. 살림. 2018. 310쪽)
: 어린 시절 살던 집에서 직선거리로 48km도 안 떨어진 숲 속에서 27년 동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산 진짜 은둔자. 사람들에게 존재를 들킬까봐 불도 피우지 않고 반짝이는 물체도 지니지 않았던, 배고픔은 1000번이 넘는 절도로 해결한. 스무 살에 잘 다니던 회사에서 말없이 걸어나와 숲으로 들어가버린, 그냥 그러고 싶었던. 가족의 성향이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낯을 가렸다지만 그 외엔 어떤 학대나 큰 상처도 없었고 교육도 받을 만큼 받았으며 머리도 좋았던 순수한 의미의 도피자 이야기이다.

저자도 얘기했지만 여러 면에서 나와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이 사람에 대해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음식과 기타 물품들을 획득한 방식에는 반대하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나 도시가 주는 편리함과 꾸려나가기 힘든 생활의 세세한 부분들에 치여 이 책의 주인공만큼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깊은 공감까지 가지 못하고 흥미에서 그치고 말았는지도.


2.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1.2(말런 제임스, 강동혁 역. 문학동네. 2016. 487쪽, 687쪽)
: 1976년 자메이카에서 열린 평화 콘서트와 밥 말리를 살해하려는 시도. 그에 엮인 열 세 명의 이야기이다. 특정 시점에 각 챕터별로 한 명씩 이야기를 해준다. 시점은 76년 이후로도 계속 이어진다.

작법에 있어서 어쩌면 『루미너리스』의 정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등장 인물들 각자의 목소리가 뚜렷하고 개성이 강해서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3부에 이르러서는 챕터에 인물 이름이 없어도 읽으면 누가 화자인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옮긴이 말대로 인터뷰해서 그대로 녹취를 딴 것처럼 말이다. 그 맥락에서, 챕터별 재미와 이해도도 각각이긴 했다. 마치 저자가 독자와 밀당하는 듯한 느낌. 옮긴이가 말한 퍼즐은 별로 못 찾았다. 가장 관심이 있었던 인물은 니나. 아마도 등장인물 중 가장 평범한 인물일테고, 그만큼 무난한 이야기를 갖고 있긴 했지만 유일한 여성화자였던 만큼 시선이 갈 수 밖에 없었다.


3. 푸른 운하(박경리. 마로니에북스. 2014. 504쪽)
: 1959~1960년이 배경인 사랑 이야기. 마산에서 오빠와 아버지, 새엄마와 살던 송은경은 엄마의 후배이자 국회의원의 아내인 허찬희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다. 찬희의 집에 머물게 된 은경은 찬희 남편의 비서인 이치윤과 알게 되고, 냉담하지만 슬픈 눈빛을 지닌 그가 계속 신경쓰인다. 또 이치윤의 친구이자 찬희네 집안과도 가까운 김남식, 고향에서부터 잘 알고 지낸 오빠 친구 박지태 등도 은경에게 관심을 보인다.

아무래도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옛날 영화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대사와 등장 인물들의 성격도 좀 그렇고, 사건이 흘러가는 방식도 그렇고. 특히 인물들의 사고와 행동 방식이 낯설 수 밖에 없고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은경이 어느 순간 이치윤을 사랑하고 있다고 자각하는 부분은, 읽자마자 내가 대체 뭘 놓친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어쨌든 모든 선택은 조건이나 환경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닌 순수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은경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은경 뿐 아니라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사랑에 있어서는 매우 합리적이고 진취적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는, 뚜렷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은 맘에 들었다.


4. 블랙 에코(마이클 코넬리, 김승욱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15. 565쪽)
: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첫 권이다. 베트남 참전 용사인 해리 보슈. 아직도 악몽을 꾼다. 과거의 실수 때문에 LAPD에서 할리웃 경찰서로 좌천된 그는 그저그런 약물중독자 사망 사건을 확인하러 갔다가 그가 자신과 함께 복무했던 '땅굴쥐' 전우라는 걸 확인하고, 단순 사망 사건이 아님을 직감한다.

이 작가는 처음인데 정말 재밌게 읽었다. 어쩌면 이 시기에 내가 머릿속을 비우고 싶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흡입력이 상당하고 보슈 형사는 기대보다 훨씬 매력적이었다. FBI요원 엘리노어는 유감이었지만,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내 짐작이 맞아떨어져서 기뻤다. 이 시리즈의 다음 권을 도서관에 갔을 때 빌리지 못할까봐 초조한 마음까지 든다.


5. 보편적 정신(김솔. 민음사. 2018. 177쪽)
: 신비한 붉은 페인트가 있고, 그 제조 기법을 복원해야만 하는 창업주가 있다. 그리고 회사는 무너져간다. 책에도 언급되기는 하지만 작품 자체는 『백년의 고독』에 대한 오마주이며 질마재 신화의 차용이다. 그리고 연금술에 대한 작가의 이상과 로망. 그 로망이 내 취향과 일치하여 다행이었다. '연금술이란, 모든 물질 속에 내포되어 있는 보편적 정신을 찾아내고 추출하여 모든 재료들의 쓸모를 재조정하는 학문이자 실천 방법'(127~128쪽) 이라는.


6.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순간(톰 말름퀴스트, 김승욱 역. 다산책방. 2018. 381쪽)
: 만삭의 아내가 갑자기 숨을 쉬지 못한다. 진단명은 급성 백혈병. 결국 아내는 죽고 갓난 딸과 남겨진 아빠의 이야기이다. 책날개에는 절제된 문체라고 했지만 모든 대화에서 화자의 예민함이 드러난다. 상당히 솔직하고 사실적이지만 그래서 뭔가 산만하기도 하다. 마치 핸드헬드로 찍은 다큐를 보는 듯. 그래서 더더욱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로 읽힌다. 서술도 친절하지는 않아서 초반에 불쑥불쑥 등장하는 의료진이며 지인들이 너무 헷갈렸다. 게다가 정서도 맞지않아서 아내의 부모님이 혼수상태의 아내를 보지 못하게 하는 부분에선 혼자 분개하기도 했다.

그래도 뭔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얻고 싶어서 계속 읽었다. 스웨덴의 의료인들이 화자의 예민함을 이해해주고 달래주는 게 특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화자가 화장장에 전화해서 연기도 보관하냐고 물었을 땐 실소가 나오기도 했고 딸을 잃은 장인장모를 대하는 태도도 이해가 쉽지 않아서 감동이 반감됐다. 물론 난 배우자나 연인과 사별한 경험도 없고 아이를 키워본 경험도 없지만 이 남자는 아무리 맘을 열고 공감을 하려해도 그 범위가 만만치는 않다. 과거 회상 장면들의 간결하면서도 감정을 조금씩 드러내는 문장들은 좋았다.


7. 젠틀맨(심재천. 한겨레출판. 2019. 280쪽)
: 코믹 누아르랄까. 포주 노릇을 하며 말단 조폭으로 사는 화자는 우연히 모든 조직원이 살해되는 참사에서 혼자 살아남는다. 그는 영업장에서 주운 학생증 속 사진이 자기와 쌍둥이처럼 닮은 걸 발견하고 대학으로 가서 그 학생으로 살기 시작한다.

적당히 가벼운 필치로 한 남자의 인생을 이야기하는데, 흥미롭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다만 읽은 후 뭔가가 묵직하게 남거나 하진 않는다. 적당히 낄낄거리면서 무게 잡을 줄 아는 작가의 스킬이 느껴지는 작품.


8. 우리와 당신들(프레드릭 배크만, 이은선 역. 다산책방. 2019. 619쪽)


9. 에르브 광장의 작은 책방(에릭 드 케르멜, 강현주 역. 뜨인돌. 2018. 341쪽)
: 프랑스 작은 마을 위제의 중심 에르브 광장에 서점을 연 나탈리가 손님들과 교감하는 이야기이다. 한 명 한 명씩 챕터가 나뉘어 있고 그 챕터의 주인공 이야기는 다른 챕터로 이어지지 않거나 이어지더라도 단편적이어서 마치 나탈리의 에세이를 읽는 듯 하다. 큰 갈등이나 사건도 없이 9명 손님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의 나열이다. 나쁜 사람도 없고, 중간중간 마치 책에 관한 자기계발서 같은 작가의 훈수(?)가 있지만 지루하거나 불쾌하지 않다. 엄청 잘 쓰거나 감동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볍거나 비현실적인 로맨틱 코미디도 아니다. 진짜 위제에는 이런 작은 책방이 있고 적당한 오지랖을 부리는 평범한 주인이 있을 듯 하다. 다만 번역의 문제인지 인물들의 문어체 대화가 묘하게 어색하다.


10. 굿 하우스(앤 리어리,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18. 426쪽)
: 바닷가마을 웬도버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힐디 굿. 이혼한 남편과는 친구로 지내고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큰 딸이나 결혼 후 시댁에 완전히 동화된 듯 보이는 작은 딸과도 큰 문제는 없다. 자수성가한 데 대한 자부심이 강한 그녀의 유일한 문제는 술 뿐. 어느 날 그녀의 중개로 바닷가 저택에 리베카 부부가 이사오고, 작은 마을다운 사건들이 시작된다.

딸들과 지인들의 압력으로 몇 년 전 알콜 중독 치료를 받은 후에는 몰래 술을 마시는 이 아줌마는 이제껏 봐왔던 어떤 알콜 중독자보다 사랑스럽다. 작가는 '더, 더'라는 내면의 욕구를 너무도 생생하게 풀어놓았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악마의 속삭임. 게다가 현실에 대한 판단이 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작은 비극이 일어나고... 『올리브 키터리지』가 생각나지만 그보다 밝고 따뜻했던 분위기가 뒤집어지지는 않지만 모든 밝은 면은 그림자를 갖고 있듯 이 소설의 이야기 또한 그러했고, 그것이 이 이야기에 무게감을 주었다. 그래서 더욱 좋았다.


11.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뮤리얼 스파크, 서정은 역. 문학동네. 2018. 180쪽)
: 이런 정신나간 선생을 봤나. 블레인 여학교에는 브로디 무리라고 불리는 소녀들이 있다. 초등반일 때 브로디 선생에게 '발탁'되어 그녀에게서 특별수업을 받은. 그 수업이란 브로디의 여전히 형성중인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

중고등학교 때에도 이런 선생이 있긴 했다. 학생들의 호오가 갈리긴 했지만. 그래도 2차대전 직전의 영국 기숙학교 만큼의 영향력을 미치진 못했지.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의 비밀(?)은 금세 독자에게 드러나고 그 전성기 어필보다 더 심각할 수 밖에 없는 헛소리는 소녀들 중 일부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끝이 있다. 재밌게 읽었지만 읽는 동안에도 읽고 난 후에도 '크림 중의 크림'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 같은 선생이 있는 학교에서는.


12. 버드 스트라이크(구병모. 창비. 2019. 253쪽)
: 이 작가를 좋아하는 편이고 대부분의 작품을 읽었지만 이 작품이 가장 아름다운 듯. 도시 청사 건물을 습격한 익인(翼人)들. 그 중 가장 작은 날개를 지닌 약한 한 명이 생포당하고, 시 청사에서 살고 있지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루는 탈출하는 그에게 인질로 잡혀 고원지대로 가게 된다.

작은 책 속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인의 문턱에 선 불안감과 단 하나의 사랑을 알아보는 기쁨, 혼혈로서 혹은 장애인으로서 경계에 선 소외감과 부족한 능력을 극복하려 이 악무는 오기와 열망.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아름다운 교감과 연대. 어쩌면 평범하지만 아름답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결말까지. 이 작품이야말로 내게 구병모의 대표작으로 남을 것 같다.


13. 달빛 코끼리 끌어안기(네이선 파일러, 박아람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16. 343쪽)
: 다운 증후군을 앓던 형이 죽었을 때 매슈는 아홉 살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매슈는 지역 보건 센터에서 케어를 받으며 치료의 일환으로 글을 쓴다. 10년 전, 낮에 어떤 여자아이가 파묻은 인형을 보러 가기 위해 형을 깨웠던 그 밤 이후 매슈의 머릿 속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줄거리만 요약해 놓고 보면 진부할 수 있지만 이야기는 독특하게 흘러간다. 결말 또한 뻔할 수도 있지만 응당 그래야만 하는 결말이고. 매슈의 머릿 속이 뒤죽박죽 된 건 형 때문만도 아니고 매슈 자신의 탓만도 아니다. 어쩌면 모든 건 일어나야만 했던 대로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얘기하는 게 매슈의 뜻과는 반대된다는 걸 알지만, 결국 제자리를 찾았다면 조금 돌아가는 것도 괜찮다.


14. 너무 한낮의 연애(김금희. 문학동네. 2016. 286쪽)
: 일상을 흔드는 위협들. 위협 자체가 아닌 그 위협들이 틈입한 후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 '깨어나면 그만인 악몽 정도일지도'(「고기」.143쪽). 전반적으로 다 좋았다. 크게 동요하지 않는 인물들이 특히. 감정기복이 심하고 포커페이스가 안 되는 나로서는 늘 소설 속 그런 인물들을 동경한다. '사랑하죠, 오늘도'라고 무심히 얘기할 수 있는 멋짐을. 표제작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15. 마녀의 씨(마거릿 애트우드, 송은주 역. 현대문학. 2017. 427쪽)
: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재창조했다. 필립스는 연극 축제 총예술감독이다. 이제껏 올렸던 어떤 연극에서도 전복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작품을 선보였던 그는 천재 예술가답게 행정적이고 사교적인 일들은 모두 부하직원 토니에게 맡긴 채 창작에만 몰두한다. 아내와 어린 딸이 잇따라 사망하자 더더욱 연극 『템페스트』를 올리는 데만 몰두하던 그는 토니의 배신으로 하루아침에 자리에서 쫓겨난다.

필립스의 복수극이다. 현대의 프로스페로 필립스가 연극을 이용해서 자신을 몰락시킨 사람들에게 되갚아주는 이야기.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 이야기의 결말은 착하다. 악당들은 모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무 것도 잃지 않은 채 용서를 받는. 하지만 16세기의 대중적인 결말은 21세기의 못된 독자를 만족시키기에는 너무 순하다. 마지막 챕터의 '그 후' 이야기도 흥미롭긴 했지만 좀 늘어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처음 읽은 이 작가의 스타일은 맘에 들었다.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16. 쇼팔로비치 유랑단(류보미르 시모비치, 김지향 역. 지만지. 2012. 147쪽)
: 2차대전 중 세르비아의 작은 마을에 공연을 하기 위해 찾아간 쇼팔로비치 유랑 연극단의 이야기. 희곡이 읽고 싶었고, 길지 않지만 나름의 깊이에 만족했다. 주제는 Show must go on. 삶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예술은 계속되어야 한다. 나도 알고 있고 동의하지만, 당장 아들이 누명을 쓰고 어용 경찰에게 잡혀간 마당에 예술과 예술가들을 존중할 마음 따위는 사라질 수 밖에 없는 필부필부의 마음 쪽에 더 공감이 쉬웠다. 어쩌면 정답은 필립에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17. 바다(존 밴빌, 정영목 역. 문학동네. 2016. 257쪽)
: 첫 문장을 읽자마자 이 작가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내와 사별한 후 어린 시절 여름을 보냈던 바닷가로 온 맥스. 50년 전, 그가 신들의 집이라 생각했던 시더스와 그 곳에 머물던 그레이스 가족을 추억한다. 그의 열망의 시작이었던 그레이스 부인과 곧 마음을 가져가버린 클로이를. 그 기억 사이사이에 죽어가는 아내의 기억이 끼어든다.

천천히 오래 읽었다. 출근길 첫 문장을 읽은 후 얼른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다른 책을 꺼내어 읽었고, 이 책은 주말에 선선한 바람이 부는 베란다에 앉아 푸른 숲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읽었다. 역자 해설의 스토리가 없다는 평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이 이상의 이야기는 필요없다. 두 번의 작은 반전과 무심하게 툭 던지는 진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18. 하트리스(마리사 마이어, 김지선 역. 에이치. 2019. 607쪽)
: 수수께끼의 정답과 가짜 바다거북의 시작. 그리고 하트 여왕이 레이디 캐서린이던 시절의 이야기.『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프리퀄이다. 하트 왕국의 바다거북 만의 공작 영애 캐서린. 귀족의 딸답지 않게 손에 밀가루 잔뜩 묻히며 제빵하는 걸 세상 무엇보다 좋아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왕에게 시집보낼 생각 뿐이고, 왕 또한 그녀를 눈여겨 본다. 왕의 무도회 날 아침 캐서린의 방 안에는 하룻밤 사이에 레몬 나무가 자라있고, 무도회에서 캐서린은 왕의 새로운 조커와 마주친다.

그 어떤 로맨스보다 달콤하다. 스치는 손끝의 미묘한 설렘.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안겨야만 하는 약간의 위험. 나만 아는 그의 비밀을 간직하는 뿌듯함. 하지만 함께 있을 때마다 나타나는 괴물과 내 손에만 쥐어진 검. 이건 결국엔 성장담이다. 부모와 환경으로 인한 제약에서 벗어나, 신분과 외모를 기반으로 한 혼약이 아닌 능력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에 오르는 진짜 여왕의 이야기이다. 비록 심장은 대가를 치렀지만. 이건 나에게만 해피엔딩.


19. 선의 법칙(편혜영. 문학동네. 2015. 267쪽)
: 집의 가스선을 잘라 자살한 아버지. 윤세오는 아버지를 자살로 몰아간 사채업체의 회수팀 직원 이수호를 추적한다. 이복 동생의 익사. 신기정은 그 아이를 너무 몰랐다는 자책으로 동생의 발자취를 따른다.

착함[善]이자 관계[線]이다. 관계 맺기. 관계에서 발생하는 악의. 언제 살의 - 타인 혹은 자신을 향한 - 는 생겨나고 사라지는가. 착한 마음으로 시작된 일이 결국에는 관계를 망칠 수도 있는 것. 혹은 관계에서 시작된 뭔가가 선을 악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20. 몽유병자(제바스티안 피체크, 염정용 역. 단숨. 2015. 349쪽)
: 이 작가는 처음 읽는데 스토리를 진행하는 방식이 상당히 흡입력 있었다. 몽유병을 가진 레온. 어릴 때 부모님과 누나를 사고로 한꺼번에 잃고 임시보호 가정에서 몽유병 중에 폭력의 징후를 보인 전력이 있다. 좋은 집으로 입양되어 잘 자라고 결혼까지 한 지금, 한밤중에 깨어나 보니 피투성이가 된 아내가 울면서 짐을 싸고 있다.

상당히 직관적인 서술이다. 장면장면이 다 영상으로 떠오르는 듯 하다. 읽으면서 꽤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서술 방식이며 스토리의 전개가. 결말은 좀 김빠지는 감이 있긴 하지만 필력을 가릴 정도는 아니다. 다만 번역은 좀 유감.


21. 로봇의 별(이현. 푸른숲주니어. 2011. 496쪽)
: 로봇이 상용화된 22세기. 인간과 가장 유사한 마음을 가진 로봇 나로, 아라, 네다는 기초 교육 후 각각 다른 곳으로 간다. 아이 없는 부부에게 간 나로. 지난해에 돌아가신 아빠의 무덤에 가기 위해 엄마와 우주여행 정류장에 갔다가 로봇은 우주여행을 할 수 없도록 규제되었다는 얘길 듣고 보관함에 들어가게 된다. 로봇을 향한 적대적인 정책이 점점 확산되고, 나로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눈을 뜬다

청소년보다는 어린이용. 어른의 눈에는 새롭지 않은 캐릭터들과 뻔한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사실 이야기 전개의 속도감이 빨라 어린이들은 정말 좋아할 듯. 다만 읽힐 때 학습지도가 필요할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로봇이 선한 캐릭터이며 옳은 판단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 캐릭터는 매우 미약하고, 그나마 눈에 띄는 캐릭터들은 악역이다. 또한 언제든 인간이 원하면 로봇은 쉽게 제어당하고 파괴되는 듯 보이는 것도 경계해야 할 점. 어쨌든 난 인간이라 로봇 3원칙 제거에는 반대한다. 그래도 이 책의 세 주인공 로봇에는 분명 귀감을 살 만한 부분이 있다. 사실 나로가 이렇게 용감하고 바른 건 인간 엄마 덕분이다. 인간이건 로봇이건 잘 키우고 볼 일이다.


22.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닉 혼비, 이나경 역. 문학사상사. 2006. 404쪽)
: 한 해의 마지막 날, 자살 명소인 건물 옥상에서 네 명의 사람들이 맞닥뜨린다. 성추문으로 몰락한 토크쇼 진행자 마틴, 평생을 지체장애 아들에게 묶여 산 중년의 모린, 애인 때문에 영국에 와서 밴드를 했었지만 이젠 애인과 음악 모두를 잃은 미국인 제이제이, 그리고 연인에게서 버림받은 10대 제스. 사실 이 중 제대로 된(?) 이유를 갖고 있는 건 모린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소설 속 캐릭터라고 해도 각자의 짐의 무게는 각자 판단하는 것. 모린이 자살자들은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고, 제대로 된 정신으로 숙고한 후에 결행하는 거라고 한 말이 인상깊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책은 좀... 특히 제스가 너무 짜증이 나는 캐릭터였다. 10대 치고도 신경을 너무 많이 긁어대. 하지만 작가는 제스에게 상당히 의존한다. 제스로 하여금 에피소드를 만들고 끌어나가게 한다. 잘 팔리는 작가로서 영리한 선택이긴 하지만 작위의 냄새는 지울 수 없었다.


23. 아웃 오브 아프리카(카렌 블릭센, 민승남 역. 열린책들. 2009. 368쪽)
: 영화는 보지 않았다. 아름답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다. 책을 읽으면서도 배우를 상상하지는 않았다. 첫 챕터를 읽을 때까지도 화자의 목소리에 젠더가 드러나지는 않아서 그저 문장이 묘사하는 풍광 자체에 빠져들 수 있었다. 케냐의 백인 농장주가 이야기하는 아프리카에서의 삶. 밤처럼 차분하다. 덤덤하게 커피 농장의 부침과 원주민 하인들과의 우정과 생활, 부족들 사이의 갈등과 방문객들과의 우정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중동(靜中動)이다. 아프리카의 낮만큼 뜨거운.


24. 시트콤(배준. 자음과모음. 2019. 276쪽)
: 제목이 딱이다. 이게 말이 되?하며 읽다가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계속 뭔가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하지만 어쨌든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약간은 김빠지는 해피엔딩을 기대하게 했고, 역시나 그러했다. 전교 1등을 하는 딸을 더 채찍질해서 전국 1등을 만들고 싶어하는 엄마와 이제껏 잘 따라왔지만 기숙학원까지는 못 가겠다는 딸의 이야기가 주변 인물(이라고 쓰고 돌아이라고 읽는다)들과 얽히면서 전개된다. 가볍게 읽을 만 했다.


25.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분노(베키 매스터먼, 박영인 역. 네버모어. 2018. 499쪽)
: 전 FBI 요원 브리짓. 비무장 용의자를 사살했다가 은퇴했다. 선한 남자를 만나 결혼한 초로의 그녀는 연쇄 살인범에게 후배 요원을 잃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이 66번 고속도로 살인범이 잡혔고 후배 요원의 시신 위치를 불었다는 말에 시신을 수습하러 가는 길에 동행한다. 그런데 살인범을 신문한 콜먼 요원이 도움을 요청해온다.

오랜만에 숨죽이며 흡입하고 싶은 스릴러물을 찾았다. 진짜 재밌었다. 스토리의 짜임새와 주인공의 매력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잘 잡았다. 이게 데뷔작이라니. 어서 시리즈의 다음 권들을 읽고 싶다.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9/08/02 14:59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4)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