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단순한진심

2019/12/31   12월 독서 목록 [2]

12월 독서 목록

1. 말괄량이 아가씨(미겔 데 세르반테스, 박철, 신정환 역. 오늘의책. 1997. 175쪽)
: 제목을 완전 잘못 붙였다. 역자 해설을 읽으면서 코웃음친 거 진짜 오랜만이다. 혼전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낳은 게 '말괄량이'니? 아무리 90년대에 출간했어도 그 때도 이 단어가 그 뜻은 아니었다. 스페인 명문 귀족 자제인 돈 후안과 돈 안또니오는 이탈리아에서 유학 중 우연히 길에서 결투를 하던 공작을 구해주고, 모르는 아기를 보호하게 된다. 공작과 꼬르넬리아 아가씨 사이에서 어긋난 상황을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하게 된 두 귀족의 이야기. 비록 읽기 전 제목에서 기대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지만 재밌게 읽었다. 현재의 기준으로는 조금 싱겁긴 했지만 해피엔딩이 보장된 편안한 독서여서 즐거웠다.


2.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슈테판 츠바이크, 박광자, 전영애 역. 청미래. 2005. 552쪽)
: 평전이라 해야하나, 역사소설이라 해야하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황녀가 프랑스의 왕자비가 되는 순간부터 기요틴의 이슬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이야기이다. 기존에 알려진 여러 에피소드들 중 가십거리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여러 기록들과 뒤늦게 알려진 편지들을 토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고, 마리 앙투와네트는 물론 주변인물들에 대해 심리학적인 분석을 시도했다. 그럼에도 작가가 이 가여운 여인에게 가지 연민이 가리워지지는 않는다. 겉보기에는 알려진 대로 명랑발랄부박한 왕비와 굼뜨고 사람좋은 국왕이지만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과 합리적인 분석 덕분에 객관화된 평가가 가능하다. 속도감 있는 문체도 이 작품에 빠져들 수 있게 한다. 다만 번역은 좀 예스러운 편.

필부필부였다면 혹은 내내 철들 필요가 없었다면 그냥 역사 속에서 조용히 잊혀졌을 왕과 왕비.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런 철없고 부박한 왕비와 우유부단하고 생각이 깊지 못한 왕이 없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저 시대를 잘못 타고났을 뿐. 그렇다고 그녀의 죽음이 아무 의미없었다거나 불필요한 희생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혁명은 이렁나야했고 왕정은 무너져야했으며 그 상징성으로 인해 죽음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다. 다만 평생을 철딱서니 황녀로 살다 2년만에 평생 했어야 했을 성장을 하고 마지막 순간에서야 진정한 왕비로 죽은 그녀를 226년이 지난 지금도 애도한다.


3. 캐롤(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김미정 역. 그책. 2016. 468쪽)
: 무대 디자이너 테레즈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돈을 벌기 위해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 일한다. 인형을 사러 온 캐롤과 마주친 테레즈는 그녀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고,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낸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그녀의 집을 방문하면서 점점 그녀에게 빠진다.

이 작가를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난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작품 자체가 나쁘지는 않은데 다만 사건 서술이 친절하지는 않다. 단락과 단락이 너무 큰 보폭으로 성큼 뛰어넘는 느낌. 하지만 때론 놀랄만큼 섬세한 묘사가 나온다. 252쪽의 학교 잔디에 관한 묘사처럼. 내용적으로도, 당시 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나 - 이건 현재에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지만 - 두 여자 사이의 점점 발전하는 감정이라든가 서로를 향한 확신이 미쳐 생겨나지 못한 상황에서의 - 특히 테레즈의 - 불안함 등이 행간에 잘 나타나 있다. 다만 번역이 너무너무너무 올드하다. 80년대에 출간된 작품인줄. 물론 척 출간은 옛날이지만 그렇다고 등장인물들이 굳이 그렇게 늙은이 말투로 얘기해야 하는 건지. 특히 남자들, 그 중에서도 리처드의 말투는 진짜 거슬린다. 거기에 더해 교정오류까지. 그것만 아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4. 검은 튤립(알렉상드르 뒤마, 송진석 역. 민음사. 2011. 380쪽)
: 17세기 네덜란드, 공화주의자였던 드 비트 형제가 분노한 국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형 코르넬리스의 대자이자 지방에서 조용히 튤립 품종 개량을 하며 살던 코르넬리우스는 대부인 코르넬리스가 맡긴 서신을 미쳐 없애지 못해 감옥에 갇히게 되고, 간수의 딸 로자와 만나게 된다.

나라 외적으로는 루이 14세의 프랑스에 의해 두들겨 맞고 있고 그로인해 내적으로는 강한 왕권에의 요구가 높아지고 있던 정치 분위기와 튤립 품종 개발을 향한 열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사회 분위기가 잘 반영되어 있다.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연극적이며 전개가 상당히 빠르다. 전형적이긴 하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활약도 즐겁다. 왜 당대에 작가가 대중 소설 작가로 평가절하됐는지, 또 왜 현대에 와서는 이 작가의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해 준 작품이다.


5. 브레이크 다운(B.A. 패리스, 이수영 역. 아르테. 2018. 403쪽)
: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캐시는 남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안전하지만 돌아가는 길 대신 조금 무섭지만 질러가는 숲 속 길로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한다. 숲 속 한가운데에 서 있는 차를 발견하고 혹시 도움이 필요할까 싶어 잠시 멈췄지만 차 안 여성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찜찜하지만 그냥 집으로 온 캐시는 다음날 그 여성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죄책감을 느끼고, 그 뒤로 집에 캐시가 혼자 있을 때마다 아무 말없는 전화가 걸려온다.

치매 가족력이 있는 캐시의 불안감과 점점 어그러지는 생활을 잘 묘사했다.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긴 하지만 장르가 장르이니만큼 뭔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높이는 효과가 있었다. 범인은 내가 처음 의심했던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고, 중간에 내가 범인이 아니길 바랐던 사람조차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구성을 잘 했다. 우연이라는 요소가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악인에 대한 확실한 응징은 전작보다는 조금 약하긴 하지만, 재밌게 읽었다.


6. 나이트 워치(세라 워터스, 엄일녀 역. 문학동네. 2019. 667쪽)
: 이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평이(?)한 작품인 듯. 전후(1947년)와 전쟁 중(1944년, 1941년) 런던의 여섯 명의 생활을 이야기한다. 1947년, 결혼 상담소에서 일하는 헬렌과 그녀의 파트너이자 작가인 줄리아, 크리스천사이언스 전도사 윗집에 세들어 사는 케이, 크리스천사이언스 전도사에게서 치료를 받고 있는 먼디 씨를 도와주며 양초 공장에서 일하는 덩컨, 덩컨의 교도소 동기인 프레이저, 덩컨의 누나이자 헬렌의 직장 동료인 비브의 이야기이다.

전후와 전쟁 중의 생활에 대한 묘사가 꽤 섬세하다. 전쟁 중에도 사랑은 시작되고 힘들어도 삶은 계속된다. 다만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황폐함을 견디는 건 각자의 몫이다. 전쟁 중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구급대원 역할을 해낸 케이가 전후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건 어쩌면 전쟁보다 잃은 사랑 때문인지도 모르고, 비브가 헬렌과 달콤한 휴식 시간에 함께 담배를 피우며 나누는 대화 중 갑자기 입을 다무는 건 숨겨야만 하는 자신의 사랑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사랑은 그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한지도. 이야기되는 순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1947년에는 복잡다단하고 흐릿하게만 보이던 등장인물들의 마음은 1944년을 읽으며 좀더 분명해졌고, 1941년에는 더 투명해졌다. 외부의 명시적인 위험은 삶을, 마음을 단순하게 만드니까.

전작들처럼 정신없이 빨아들이듯 읽게 하는 흡입력은 덜하다고 할 수 있지만 섬세함은 여전하다. 사실 이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좋았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그들과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는 섬세함이 느껴져서.


7. 단순한 진심(조해진. 민음사. 2019. 263쪽)
: 조해진의 인물들은 모두 부유하고 있다. 정착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한다. 35년 전 프랑스로 입양되어 배우와 극작가로 살고 있는 나나. 한국에 한 번 오긴 했지만 철로에서 헤매는 자신을 처음 발견해서 1년간 임시보호해 준 기관사가 불러주던 문주라는 이름 외엔 아무 정보도 없는 그녀는 친부모도 찾지 못했고 한국에 딱히 정도 없다. 다큐멘터리 감독 서영에게서 그녀의 사연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메일을 받은 나나는 문득 자신이 우주라고 태명을 붙인, 뱃속의 아이를 떠올리며 한국에서의 작업을 수락한다.

아이가 생기는 순간 그 엄마에겐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걸까. 난 잘 모르지만, 나나에게는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우주를 유영하기 위해서는 그 우주를 만든 나의 근원에 대해 알 필요가 있어야 하겠지. 모국에 대해, 자신을 거둬줬지만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했던 한 사람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태어나게 했던 누군가에 대해 나나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결코 복잡하지 않게, 차분하고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려냈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라는 걸 이번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8. 미친 사랑의 서(섀넌 매케나 슈미트, 조니 랜던, 허형은 역. 문학동네. 2019. 415쪽)
: 작가들의 연애 이야기. 제목만큼 강렬한 에피소드들도 있고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얘기들도 있다. 다만 많은 에피소드에서 남성 편향의 시각을 보이기는 한다. 피츠제럴드와 젤다의 이야기라든가, 먼로와 아서 밀러의 이야기라든가. 알라딘 책 소개에는 흔한 찌라시 같지는 않다고 했지만 당대에는 분명히 가십으로 소비되었을 이야기들을 풀어낸 것도 많다. 특히 플로베르와 시인 루이즈 콜레의 마차 에피소드 같은 거. 어쨌든 머리 식히는 기분으로 슬슬 읽었고, 문학 작품들 속 정부의 흔적(?)에 관해서 알게 된 것도 재밌었다.


9. 밤으로의 긴 여로(유진 오닐, 민승남 역. 민음사. 2002. 235쪽)
: 여름 별장에서 보내는 티론 가의 하루. 유명 배우지만 지독한 구두쇠인 아버지 제임스와 쇠약한 엄마 메리 - 그녀의 병은 나중에 밝혀진다 - 술을 좋아하며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하는 장남 제임스 2세와 형을 우러러보며 형과 닮고 싶어하는 병약한 에드먼드의 이야기이다.

공연보다는 낭독에 더 적합할 듯 하다. 실제로도 작가가 이 작품을 쓸 때 공연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것 같다. 연극보기보다 희곡읽기를 더 좋아하는 내게 딱 맞는 작품이었다. 그래도 읽다보니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르면 어떨까 상상하게 되었다. 공연을 한다면 메리 역의 연기력이 관건일 듯.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의 말이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쓰면서 그러했을 것처럼, 나 또한 이 작품을 읽으며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특히 '운명이 우리에게 시킨 일들은 변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거'라는 메리의 대사에서.


10. 청소부 매뉴얼(루시아 벌린, 공진호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9. 647쪽)
: 단편집인 줄 모르고 선택했다. 책 소개에서는 '전설적'이라고 칭송했으나 사실 이 작가만의 유니크함이 돋보인다기 보다는 익숙하고 평범한 듯한 이야기를 간결한 문체로 무심한 듯 서술하는데 그 속에서 배어나오는 삶의 페이소스가 진하다. 어리석은 선택과 어쩔 수 없는 행동 들. 읽는 건 심상하고 무던하지만 읽는 중간중간의 휴지시간 - 잠시 책장을 덮고 눈을 쉬게 한다거나 화장실에 갔다 손을 씻는 사이 - 에 방금전에 읽은 내용을 생각해보면 이야기 속 그들의 생각이 날카롭게 가슴 속에 휙 지나간다. 가장 좋았던 건 「멜리나」. 가장 공감했던 건 「회귀」.


11. 상냥한 사람(윤성희. 창비. 2019. 310쪽)
: 형민은 38년 전 인기 절정의 드라마에서 아역 '진구'역할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 후로 화면에서 사라져 지금은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오랜만에 토크쇼에 나와 그 때를 회상한다.

형민과 형민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 하지만 그 자신들에게는 다른 어떤 삶보다도 치열하고 무거웠을 인생들을 형민의 인생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얽었다. 그저 타인에게는 상냥한 사람일 뿐이지만 한걸음 더 다가서 보면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 되기 위해 속으로 삭여야만 하는 많은 아픔과 불행들. 작가가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이 사연들을 읽으며 나만이 아니라는 위로를 받았다.


12. 어느 작가의 오후(페터 한트케, 홍성광 역. 열린책들. 2010. 149쪽)
: 이 작가의 작가론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집어들었다. 제목 그대로 작가가 오전 글쓰기를 마친 후 산책을 하러 집을 나서면서 시작되는 12월의 어느 오후를 그려낸다. 저자의 작가론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다. 신문과 비평에 회의적이고, 작가를 바라보는 독자의 시선을 예민하게 의식하기도 한다. 특히 자신에게 비판적이고 적대적인 시선을 알고 분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저자의 행보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재능만으로 볼 때는 감탄스럽다. 글만 놓고 보면 노벨상이 전혀 아깝지 않다. 환상과 현실이 유려하게 섞인 산책길이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잊게 만든다.


13.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마이클 코넬리, 김승욱 역. RHK. 2015. 509쪽)
: 해리 보슈 시리즈 7편. 그런데 이 작가가 창조한 다른 인물이 화자이다. 『블러드 워커』의 주인공 테리 매케일렙. 게다가 조연이긴 하지만 다른 시리즈인 『시인』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까지 등장한다. 은퇴 후 요트 대여업을 하며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조용히 살고 있는 전직 FBI 프로파일러 테리. 예전에 함께 일했던 윈스턴 형사가 살인 사건의 자문을 구하러 자료를 들고 오고, 이를 검토하던 테리는 이 사건의 세부 정보들이 모두 해리 보슈를 가리킨다는 걸 발견한다.

드디어 우리의 해리와 동명이인인 5백년 전의 그가 등장했다. 언젠가 한 번은 관련 에피소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이 화가가 이 시리즈에 등장할 땐 분명 해리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걸까? 하지만 난 해리의 결백을 한순간도 의심한 적이 없다. 우리의 해리는 법정에서 다른 사건의 범인을 심판받게 하기 위해 증인으로서 고군분투 중이고 테리는 자신의 직감과 증거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한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잘 짜놓은 대로 전개되는 사건들. 이는 소설 속 이야기일 뿐 아니라 이 시리즈 전체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사건은 예상대로 흘러가긴 하지만 다른 시리즈의 매력을 발견한 것이 큰 수확이었다.


14. 알리바이(안드레 애치먼, 오현아 역. 마음산책. 2019. 296쪽)
: 장소에 관한 작가의 긴 생각들. 책 제목은 라틴어로 '다른 곳에'라는 뜻이라고 한다. 작가 자신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14살에 로마로 망명해 3년 살고 다시 미국으로 이주한 터키계 유대인으로서 디아스포라이다. 미국에서 생애의 가장 긴 시간을 살고 있지만 스스로를 유럽인이라고 생각하고 모국어는 프랑스어라는 작가. 이 책은 작가 자신이 '겉싸개'(133쪽)라고 말하는, '내면의 여행'(133쪽)을 위한 '장소의 기억'(133쪽)들이다. 아름다운 문장들 속에서 가끔은 길을 잃기도 했지만 섬세한 감정들에서 위로 받기도 했다. 진실이란 '우리가 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어떤 것(288쪽)'이라는 말이 특히 크게 공감됐다.


15.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장강명. 아작. 2019. 376쪽)
: SF 단편집. 사실 SF의 표피를 쓴 사랑 이야기들이다. 남녀 간의 사랑 뿐 아니라 모녀간의 혹은 자신에 대한 사랑들이다. 필력 좋은 작가답게 재밌었다. 사실 <아스타틴>은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건 내가 SF 액션 활극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 가장 좋았던 건 <데이터 시대의 사랑>. <당신은 뜨거운 별에>도 좋았다.


16. 유골의 도시(마이클 코넬리, 한정아 역. RHK. 2015. 491쪽)
: 해리 보슈 시리즈 8편. 할리우드 언덕 근처에 사는 주민이 강아지 산책을 나갔다가 강아지가 물고 온 뼈가 어린아이의 뼈라는 걸 알고 신고한다. 해리는 나머지 뼈를 수색하는 한편 발견된 뼈를 분석실에 보내고, 유골의 주인이 20여년 전에 사망했고 죽기 전에 지속적인 학대를 받았던 12세 가량의 아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이래서 해리를 좋아하지. 어린아이 유골이 든 상자가 조수석에서 떨어지지 않게 손으로 꼭 잡고 운전하는 해리를. 사건은 큰 반전 없이 흘러가지만 해결 과정에서 너무 많은 죽음이 있어 안타까웠다. 20년도 넘은 사건이 해결된 건, 책 속에서나마 다행이었지만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은 범인도 또 그 외의 범죄자들도 책 밖의 현실과 함께 나를 슬프게 했고, 해리의 마지막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17. 브링 미 백(B.A. 패리스, 황금진 역. 아르테. 2019. 394쪽)
: 이 작가의 후속작이 나왔다는 걸 몰랐다가 도서관에서 발견해서 꽤 반가이 집어들었는데 내용이 내 취향이 아니었다. 12년 전, 핀은 어린 애인 레일라와 프랑스 스키 여행을 간다. 돌아오던 길 고속도로변 피크닉 구역에 잠시 멈춰 핀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레일라가 사라졌다. 12년 후 현재, 핀은 레일라의 언니 엘런과 동거 중이며 곧 결혼할 예정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 엘런이 잃어버렸고 레일라가 몰래 간직하고 있던 러시아 인형의 가장 안쪽 작은 인형이 그들이 살고 있던 집 담장에서 발견되고, 핀에게는 이상한 메일이 온다.

도대체 실종된 여친의 언니와 사귀는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하는 의문이 이 인간의 간헐적 분노조절장애와 어우러져 이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게 한다. 읽을수록 이 인간이 범인인지 피해자인지 모르겠다 싶은데, 내가 범인을 추정하는 속도와 이야기 전개 속도, 즉 핀이 주변인들을 의심하는 속도와 방향이 얼추 비슷하다. 이게 이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인 듯. 하지만 말했듯 내용이... 주요 등장인물 셋이 다 미친 인간들이었다. 조연들 - 특히 해리와 루비 - 이 없었다면 단번에 읽지 못했을 수도. 필력이 괜찮은 작가이긴 한데 이번 작품까지 읽으니 패턴이 빤히 보인다. 반전 부분은 설마 했던 거. 300여 쪽 읽었을 때 짐작했다. 다음 작품도 읽기는 읽을 것 같긴 한데...


18. 섬의 애슐리(정세랑. 미메시스. 2018. 91쪽)
: 이 작가의 전반적인 '선량한 분위기'는 유지하면서도 상당히 이국적인 단편이다. 그림에 대해선 1도 모르지만 이 책의 삽화는 내 취향은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본토인처럼 생겨서 섬에 사는 애슐리. 본토인에게서도 섬에서도 은근히 배척당하며 숨겨진 폭력의 희생양으로 살아가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성장을 이루어낸 그녀가 기특했다. 리의 역할이 마지막까지 약간은 조마조마하게 했던 것도 소설 구성적인 면에서 좋았고. 작가의 엔딩을 믿었기에 - 늘 내가 원하는 엔딩이었다 - 큰 부담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맘으로 읽었는데, 엔딩까지도 좋았다.


19. 채식주의자(한강. 창비. 2007. 247쪽)
: 난 내가 이 책 읽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예전에 이 작가의 단편 <그 여자의 열매>를 읽은 거였어. 가정 폭력에 희생당하면서 자란 여성의 이야기이다. 줄거리야 이미 이런저런 경로로 많이 알려져 있을 테니 생략해도 되겠지. 이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작품들이다. 특히 첫번째와 두번째 작품의 화자를 남성으로 한 건 꽤 영리한 서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많은 오해도 불러일으켰을 듯.

이 작품들에 나오는 미친 인간들이 결코 책 속에만 있거나 일상에서 마주치기 힘들거나 하지 않다는 게 씁쓸하다. 예전에는 남자들도 가부장제의 희생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살아갈수록 희생자보다는 수혜자가 더 많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 것도 슬프다. 물론 가해자와 희생자, 방관자와 수혜자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긴 하지만.


20. 사탄탱고(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조원규 역. 알마. 2018. 408쪽)
: 1980년대 헝가리. 공산주의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고 초라하나마 모두에게 보금자리였던 집단농장은 해체되었다. 갈 곳 없이 남아 있던 사람들. 1년 동안 어찌어찌 모은 품삯을 들고 이 곳을 뜨려던 그들에게 1년 반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이리마이시가 농장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작가에 대한 수식어가 너무 현란해서 오히려 기대를 내려놓고 읽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의 배경 때문에 재미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모든 걸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의사가 가장 인상깊었다. 그리고 소설에 관한 한 내 예감은 꽤 잘 맞는 편이지. 각 챕터의 장소적 배경이 협소해서 연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엄청나게 흥미롭거나 전개가 빠르진 않지만 서술이 친절해서 페이지가 빨리 넘어간다. 환멸나는 현실과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섞여 있는 이야기.


21. 무민은 채식주의자(구병모 외. 걷는사람. 2018. 205쪽)
: 동물권 테마 단편집. 난 아무 정보 없이 그냥 제목만 보고 대출했다. 이런 테마 소설집을 읽을 땐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길 기대하게 되는데 이 작품집에선 딱히... 다만 전에도 좋아했던 작가들의 역량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가장 좋았던 건 정세랑의 <7교시>. 가장 평이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더욱 편안했다. 표제작도 인상깊었다.


22. 수수께끼 변주곡(안드레 애치먼, 정지현 역. 잔. 2019. 336쪽)
: 다섯 개의 사랑 이야기. 장편이라 해도 좋고 혹은 연작 소설이라 할 수도 있고, 그냥 각각 독립된 이야기로 읽어도 무방하다. 열두 살 이탈리아 남부의 섬에서 시작된 사랑의 음악은 때로는 질투하고 때로는 혼자 삭이고 때로는 모른 척하며 변주된다. 화자보다 나이 많은 목수를 향한, 아침마다 마주치지만 말 한 마디 건네 본 적 없는 테니스장의 그를 향한, 혹은 마치 별처럼 4년마다 한 번씩 마주치는 그녀를 향한 사랑들. 모든 사랑이 아름다웠다. 사랑과 사랑 사이의 간극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 작품을 장편으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각각의 사랑이 그 자체로서 이미 완성되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장 깊이 울렸던 사랑은 「별의 사랑」.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9/12/31 16:25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2)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