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가 통과한 밤(기준영. 문학동네. 2018. 283쪽)
: 마흔 살 채선은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오른다. 연기에 큰 뜻은 없지만 비교적 호평을 받으며 공연을 하던 중, 연극계의 원로 선배가 채선에게 꼭 한 사람을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하고, 약속 장소에 나간 채선은 지연과 만난다.
나와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지만 계속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문장들이 너무 좋아서. 지연은 너무 싫었다. 그렇게 밀고 들어와 힘주어 만드는 관계는 별로다, 내게는. 하지만 채선은 괜찮았나보다. 어쨌든 그래서 거리를 두고 차분히 읽어나갈 수 있었고, 그래서 문장을 잘 공굴릴 수 있었다.
2. 치과 의사의 죽음(M.C. 비턴, 문은실 역. 현대문학. 2018. 329쪽)
: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 13권. 이번에는 해미시의 이가 말썽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해미시는 믿을 수 있는 인버턴의 치과 대신 급한 대로 가장 가까운 길크리스트 치과의사에게 가기로 했다. 인근에서 일어난 호텔 절도 사건을 수사하는 한편 짬을 내서 치과에 간 해미시는 진료 의자에 누워있는 길크리스트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번 편에는 프리실라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프리실라의 친구가 해미시의 침대로 파고든다. 하지만 역시나... 해미시가 누군가를 만나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로맨스도 좀 안정이 됐음 좋겠다. 여전히 피해자는 비호감이고, 살인 이면에는 복잡한 인간 관계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해미시는 매력적이다.
3. 벨파스트의 망령들(스튜어트 네빌, 이훈 역. 네버모어. 2020. 446쪽)
4. 어떤 물질의 사랑(천선란. 아작. 2020. 334쪽)
: 따뜻한 시선이 좋았던 단편집. 마냥 따뜻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꽤 날카롭기도 했지만 난 '따뜻' 부분이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그 와중에도 지구에서 소수로 살아갈 '나'가 가엾긴 했지만, '나'의 사랑은 분명 축복이지.
5. 적대적 상황에서의 생존 메커니즘(올리비아 로젠탈, 한국화 역. 알마. 2020. 203쪽)
: 순진하고 무지했던 나는, 정말로 이 책을 통해 이 지랄맞은 사회에서 생존하는 방식을 알아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 물론 '생존 메커니즘'을 대놓고 알려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었고 또 이 책이 도움이 안 되진 않았지만, 이 책은 '적대적 상황'조차 구체적으로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은근히 드러나는 위협, 위험 들. 그리고 늘 가해자가 가해자인 것도, 피해자가 늘 피해자인 것도 아니다. 그게 조금 슬펐다. 서사가 익숙한 방식은 아니지만, 뭣도 모르는 나로서는 매혹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생존 메커니즘을 획득하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6. 기묘한 꽃다발(낸시 스프링어, 김진희 역. 북레시피. 2019. 215쪽)
: 에놀라 홈즈 시리즈 3권. 왓슨 박사가 실종됐다. 에놀라는 왓슨 부인을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고난 호기심은 물론 걱정스런 마음에. 상류층 여인으로 변장하고 왓슨 부인을 위로 방문하던 와중에 오빠 셜록이 그 집을 방문하자 서둘러 돌아나오는데, 피아노 위에 놓인 꽃다발이 눈길을 끈다.
이 시리즈를 관통하고 있는 꽃말 메시지가 여기서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거기에 더해 에놀라는 이제까지의 어떤 에피소드에서보다 더 활발히 뛰어다닌다. 셜록은 물론 마이크로프트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 낼 수 있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1,2권보다 더 몰입해서 읽었다.
7. 별난 분홍색 부채(낸시 스프링어, 김진희 역. 북레시피. 2019. 251쪽)
: 에놀라 홈즈 시리즈 4권이다. 퍼디토리언으로서 활약하고 있는 에놀라는 당시 처음 선보인 여성 전용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전에 구해준 적 있는 '왼손잡이 숙녀' 레이디 세실리와 마주친다. 세실리는 우스꽝스런 옷차림을 한 채 두 명의 샤프롱에게서 감시받는 듯한 모습이었고, 에놀라를 알아보고 분홍색 부채를 떨어트려놓는다. 세실리가 위험에 빠졌음을 알아챈 에놀라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
당시 상류사회의 그야말로 쓰잘데기 없는 유행들 - 핑크 다과회 - 뿐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인습 - 재산 보호를 위한 사촌 간 결혼 - 에 대해서 잘 설명해 준다. 두가지 다 21세기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 쓸데 없고 어처구니 없다. 그런데 에놀라는 19세기에 이미 21세기의 눈을 갖고 있었으니. 어쨌든 에놀라는 많이 자랐고, 오빠들과의 관계도 많이 발전한 듯 싶다.
8. 비밀의 크리놀린(낸시 스프링어, 김진희 역. 북레시피. 2020. 213쪽)
: 에놀라 홈즈 시리즈 5권.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에놀라의 하숙집 주인 터퍼 부인이 어느날 의문의 협박 편지를 받는다. 부인이 갖고 있지도 않은 뭔가를 요구하는. 에놀라는 부인을 대신해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지만, 터퍼 부인은 납치되고 만다.
역시나 재밌었다. 나이팅게일에 대한 저자의 상상이 특히 맘에 들었다. 나이팅게일의 말년이 저자가 서술한 대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사고방식은 저자의 상상처럼 진보적이었을 듯. 두 여인의 쿵짝이 즐거웠고, 에놀라가 터퍼 부인을 통해 모성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9. 집시여 안녕(낸시 스프링어, 김진희 역. 북레시피. 2020. 227쪽)
: 에놀라 시리즈 마지막 권. 그동안 런던에서 퍼디토리언으로 활동하며 엄마와 신문 광고란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 받던 에놀라. 고향의 집사에게서 특이한 문양의 봉투에 든 메시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셜록은 그걸 받으러 다녀오는 김에 에놀라의 강아지 레지널드를 데려온다. 한편 에놀라는 가녀린 외모의 아름다운 공작부인 실종 사건을 의뢰받는다.
시리즈가 끝나서 정말 아쉽다. 비록 오마주였긴 했지만 셜록을 다시 만나고 셜록이 개과천선(?)해서 기뻤는데. 그리고 에놀라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다. 나중에라도 작가가 이 시리즈를 다시 시작해주길 바라는 건 무리이려나...
10.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김희선. 현대문학. 2020. 187쪽)
: 일주일에 한 번 저수지를 건너는 배를 타고 팔곡 마을에 들르는 우체부. 어느날 우체통이 지난번에 배달한 우편물로 꽉 차 있는 걸 발견하고 마을을 둘러보지만 모든 집이 비어있다. 우체부는 노인들만 사는 이 마을에 변고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파출소에 신고를 하고, 박경위가 우체부와 함께 마을을 살피러 들어온다.
스릴러로 시작해서 블랙 코미디로 끝난다. 하지만 노령화가 심해지며 함께 심화되는 노인 혐오를 잘 그려냈다. 결말이 힘이 빠지긴 했지만 읽는 동안의 어두침침한 분위기는 꽤 소름끼쳤다. 그 분위기를 내내 결말까지 유지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11. 외투(헬린 던모어, 윤미나 역. 문학동네. 2021. 235쪽)
: 2차 대전의 상흔이 어느 정도 달래어진 시기의 영국 시골. 신혼의 이저벨은 막 의사 개업을 하게된 필립과 작은 집에 세들어 산다. 위층에선 집주인이 끊임없이 방 안을 걸어다니는 소리가 울리고, 낡은 판잣집은 외풍을 그대로 통과시킨다. 필립이 지역의로서 정신없이 일하는 동안 이저벨은 힘겹게 초보 주부 노릇을 하며 적응을 하려 발버둥치지만, 놓쳐버린 자신의 꿈은 아쉽기만 하다. 어느날 밤, 추위에 잠을 깬 이저벨은 벽장에서 낡고 큰 군용외투를 발견해 덮고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가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깬다.
자신만의 연옥에 갇혀버린 알렉, 그리고 그녀. 가여운 건 알렉이었고 미운 건 그녀였지만 더 괴로운 건 역시 그녀였을 것이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건 당연히 알렉이었지만, 알렉은 그래도 이저벨에게서 위안을 받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결말이 조금 찜찜했다. 그래도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된다면 읽어보고 싶다.
12. 우주를 삼킨 소년(트렌트 돌턴, 이영아 역. 다산책방. 2021. 674쪽)
13. 친애하고 친애하는(백수린. 현대문학. 2019. 148쪽)
: 휴학생 '나'는 엄마에게 등떠밀려 어릴 적 나를 키워준 할머니 댁에 내려가 지내게 된다. 엄마는 출산 직후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유학을 가버렸고, 교수인 엄마는 지금도 집안 보다는 연구를 더 중시하며 챙긴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의 진로는 커녕 지금까지의 학업도 그저 떠밀려서 진행해왔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화자의 여성 3대 이야기이다. 신파는 아니지만, 맘이 찌릿하긴 한다. 그거야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 피할 수 없는 감정일 테지만. 여느 엄마 같지 않은 엄마 대신 화자에게 엄마 노릇을 해주었던 할머니의 노후를 그저 담담하게, 어쩌면 철없이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 때문에 신파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길지 않지만 단단했던 이야기.
14. 두 사람 다 죽는다(애덤 실베라, 이신 역. 문학수첩. 2021. 451쪽)
15. 당신의 노후(박형서. 현대문학. 2018. 158쪽)
: 앞서 읽은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에서는 사회 평균 연령을 낮추기 위한 노력이 은근히 행해진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보다 직접적인 방법이 사용된다. 바로 국민연금공단 - 및 기타 관련 국가 기관 - 에 의한 연금 수급자 제거. 공단에서는 이를 위해 별도의 팀을 운용하고, 그들은 연금 수급자들을 '자연스럽게' 죽음에 이르게 한다. 70세의 장길도는 최근 연금공단에서 은퇴했다. 아픈 아내를 간호하던 중, 아내가 자신 몰래 연금에 가입하였고 이제 수급자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노인 액션스릴러물. 정말 재밌었다. 요즘 70대는 예전 60대라더니, 장길도 할아버지 아니, 아저씨는 완전 날아다닌다. 아니 60대라해도 이만큼의 액션은 정말이지 놀라울 수 밖에. 아내를 구하기 위한 장길도의 고군분투 사이사이, 고독사를 비롯한 노인들의 사망 이야기가 교차된다. 무거운 주제와는 별개로 페이지가 휙휙 넘어가는 멋진 소설이었다. 다만 현실이 많이 걱정스럽긴 하다.
16. 셜로키언(그레이엄 무어, 이재경 역. 비채. 2015. 419쪽)
: 해럴드 화이트는 세계 최고의 셜로키언 모임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스'에 최연소 회원이 된다. 2010년 정규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한 그는 다음날 발표될 코난 도일의 사라진 한 권의 일기에 관한 발표를 무척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호텔에서 만난 발표자 알렉스는 자신이 미행당하고 있다며 불안에 떨고, 다음날 아침 호텔방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코난 도일의 후손이자 알렉스와 일기를 두고 경쟁 관계였던 세바스찬은 시신을 발견한 해럴드에게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진범을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꽤 재밌었다. 2010년의 살인 사건 뿐 아니라 1890년대 도일이 셜록 홈즈를 라이엔바흐 폭포에서 죽여버린 후 자신의 집에 배달된 폭탄을 계기로 역시 살인 사건 수사에 뛰어든 이야기가 교차되어 보여진다. 셜록을 오마주하며 살인 사건의 범인과 사라진 일기를 찾는 헤럴드와 자신의 명성과 두뇌를 이용하여 살인범을 추격하는 도일은 각각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추리 소설이 될 수 있었고, 그들을 돕는 두 명의 왓슨 - 브램 스토커와 세라 - 또한 흥미로웠다. 다만 해럴드의 사건은 마무리가 좀... 모든 걸 알아낸 해럴드의 추리력은 맘에 들었지만 반전이랄까, 숨겨져 있던 진실이랄까 하는 부분이 영 맘에 안 들어. 어쩐지 어리바리 하더라니.
17. 연애의 결말(김서령. 폴앤니나. 2020. 221쪽)
: 꽤 속터지는 연애담. 재밌긴 했지만 갑갑하기도... 제발 그냥 헤어져! 이 작가 좋아하는데, 이렇게 경쾌한 이야기도 써줘서 더 좋아졌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서는 앞 쪽에 배치된 작품들이 더 좋았다. 연애의 결말이 결혼만이 아니라는 걸 얘기해줘서. 그냥 꾸역꾸역 결혼으로 걸어가는 얘기들은 꽤나 현실적이었고 그래서 좀 갑갑했다. 작가가 잘 못 썼다는 게 아니다.
18. 통조림을 열지 마시오(알렉스 쉬어러, 정현정 역. 미래인. 2011. 248쪽)
: 친구가 거의 없는 퍼갈. 뭔가 특별한 취미 생활을 하고 싶던 차에 마트의 세일 코너에서 라벨이 없는 통조림을 발견한다. 그런 통조림들을 모으던 퍼갈은 어느날 너무 많이 쌓인 통조림들 중 두 개를 개봉하는데, 귀걸이와 절단된 손마디가 나온다. 깊숙히 감춰두고 고민하던 중 마트에서 자기처럼 라벨 없는 통조림을 찾는 샬롯과 마주치는데...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괜찮았던 기억이 있어서 오랜만에 청소년 소설로 머리 좀 식혀볼까 하고 집어들었다. 조금은 황당하기도 했지만 저학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니... 내용은 꽤 긴박하게 흘러가고, 권선징악도 확실하다. 재미있었다.
19. 애서광들(옥타브 위잔, 알베르 로비다 그림, 강주헌 역. 북스토리. 2018. 411쪽)
: 11편의 책 이야기.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뿐 아니라 책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19세기 사람들의 책에 대한 생각들과 미래에 대한 예측, 동양에 대한 (현재의 기준으로 보자면 짜증나기 그지없는) 시각 등이 잘 드러나있다. 첫 작품( <『뮤즈 연감, 1789년』>)과 두 번째(<시지스몽의 유산>)이 가장 재미있었고, 뒤로 갈수록 재미는 떨어졌다. 그래도 계속 흥미롭기는 했다.
20. 꽃을 사는 여자들(바네사 몽포르, 서경흥 역. 북레시피. 2019. 475쪽)
: 마드리드의 오래된 꽃가게 '천사의 정원'. 화자 마리나는 얼마전 남편과 사별하고 작은 집으로 이사왔지만 이삿짐도 못 풀 만큼 실의에 빠져있다. 남편이 죽으면서 부탁한 게 있지만 엄두도 못 내겠다. 우연히 천사의 정원 앞을 지나다가 주인 올리비아와 마주치게 되고, 얼떨결에 그곳에서 일하기로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꽃을 보내는 카산드라, 아름답고 화려한 갈라, 사랑과 인생에 자신없는 화가 오로라, 가정과 아이들과 직장에 매몰되어 가는 빅토리아를 알게 된다.
내용은 나쁘지 않았으나 산만한 서술과 어색한 번역투, 비문 때문에 별로였다. 게다가, 불륜에 대해 활짝 열린 시각이야 문화적인 다름이라고 쳐도 프란치스코의 아내를 기생충 막시와 동일시하는 걸 보고 짜증이... 여자가 남자를 못 떠나는(쫓아내는) 건 여자가 약해서고, 남자가 아내를 못 떠나는 건 여자가 술수를 써서인가? 내 편이 하면 지켜보며 기다려야 하는 일이고 나와 친하지 않은 여자가 남편에게 매달리면 기생충이냐고?! 작가 이름을 기억해 둬야겠다, 거르게.
21. 참담한 빛(백수린. 창비. 2016. 316쪽)
: 여행자 혹은 이방인들의 이야기. 어디인지,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냥 머물 수 있는 한 머물고, 살아내야 하는 만큼 살아내는 것이다. 다만 공감은 조금 힘들었다.
22. 레드 조앤(제니 루니, 허진 역. 황금시간. 2019. 503쪽)
23. 여성 연쇄살인범의 초상(토리 텔퍼, 최내현 역. 눌민. 2020. 430쪽)
: 역사적으로 밝혀진 여성 연쇄살인범 14명의 이야기. 논픽션이지만 소설처럼 읽힌다. 범죄의 내용이 황당하리만치 끔찍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본문에서 지적했던 대로 여성의 범죄에 대해서는 믿고 싶어하지 않는 심리가 내게도 있기 때문일 게다. 이런 시각은 역사적으로 여성 살인범을 바라보는 여러 왜곡된 시각 중 하나였다. 여성 연쇄살인범은 물론 남성 연쇄살인범에 비해 숫자가 적긴 하지만, 매우 특수한 경우로 보고 그들이 특별히 성적 욕망이 강하기 때문에, 혹은 악마에 씌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져 왔다(물론 두 이유가 합해져서라고도). 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거나 돈과 권력을 가지게 되면 생기는 병폐로 취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살인범은 살인범일 뿐. 대부분은 개인적 성향 때문이다.
물론 헝가리 나기레브의 여인들처럼 삶의 압박에 의해 집단적으로 손쉬운 방법을 택한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살해 대상자들도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도 쉽게 생명을 빼앗았던 것이다. 14명 중 대부분의 사례에서 여성들은 독극물(특히 비소)을 사용했기에 중간에 비슷한 사례들이 반복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저자는 그들 자체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려 애썼고, 그래서 이 책이 더 좋았다. 앞에서 말했듯 성적인 프레임을 씌우거나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들을 향한 왜곡된 시선을 배제하고자 했기에. 저자는 유머러스한 시각을 견지하려 했다고 했지만 난 내내 심각하게 읽었는데, 다만 맨 뒤의 플레이리스트 추천에서 빵 터졌다.
24.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김금희. 마음산책. 2018. 253쪽)
: 좋았다. 짧은 소설 19편이 다 괜찮았다. 일상에서 한 번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순간을 포착해서 의미있는 장면으로 만든다. 금세 잊어버릴 별 거 아닌 이야기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간직할 예쁜 순간일 수도 있는. 좋았다.
25. 세컨드 라이프(베르나르 무라드, 박영수 역. 문학동네. 2019. 343쪽)
: 비오는 저녁 초라한 바에서 3시간 뒤 자신은 죽을 거라고 얘기하는 남자. 그가 지난 3개월을 얘기한다. 중소기업의 회계 담당으로 오랫동안 일하다 지리멸렬한 자신의 삶이 지겨워 생일날 자살을 결심했던 마르크는 퇴근 무렵 '구세주'에게서 온 메일을 확인하고 호기심에 그와 접촉한다. 그에게서 인생을 바꿔주겠다는 얘기를 듣고 '두 번째 기회'를 잡기로 결심한다.
뒷표지에서는 개인에 대한 미디어의 침투와 국가의 개입 등을 얘기했지만 난 그보다 주어진 상황에 대한 개인의 대응이 더 흥미로웠다. 지겹고 별 볼 일 없지만 무난하고 평범한 삶을 이어가던 마르크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된 후에 변한 건 과연 환경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마르크의 깊숙한 곳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싹이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모든 건 아르노와 국가의 계략이었나? 사실 가장 가여운 건 두 번째 아내와 딸.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아빠를 만났나 했는데... 나쁘지 않은 소재와 전개였지만 좀 우울했다.
26. 카리 모라(토머스 해리스, 박산호 역. 나무의철학. 2019. 285쪽)
: 뒷표지의 '한니발 렉터를 능가하는...'은 무시하라. 그 정도까진 아니다. 엽기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콜롬비아 출신 카리는 현재 마이애미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다. 마이애미 해변의 대저택 관리인으로 일하던 그녀는 이 저택에 마약왕 에스코바르가 숨겨둔 금을 찾기 위해 이 저택을 빌린 한스 피터 일당의 눈에 든다. 그들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피하지만 한스 피터는 그녀를 자신의 상품으로 삼을 계획은 세운다.
카리의 진가는 서서히 드러난다. 그래서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그녀가 점점 더 맘에 들었다. 다만 잊을 만 하면 엽기성이 훅 들어와 눈쌀을 찌뿌리게 하고, 카리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도 전에 너무 잡다한 이야기로 페이지를 채운다. 이게 시리즈물이고 카리의 활약이 2,3권으로 이어질 거라면 모를까 - 사실 그걸 기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 이 책 한 권으로 완결성을 말하기는 부족하다. 그래도 카리는 정말 맘에 들었다.
27. 아내들의 학교(박민정. 문학동네. 2017. 306쪽)
: 단편집. 첫 작품과 두 번째가 너무 지루해서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하다 읽었다. 작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여성 혐오와 약자에 대한 배척, 소위 지식인이라 하는 자들의 위선과 좁은 시야 등에 대해 공감하지 않거나 지루하다는 건 아니다. 분명 이 작가는 꽤 잘 쓰는 작가이고 자신만의 특성도 보이는 유니크한 작가이지만, 그냥 이 시기의 나와는 맞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28. 씨씨 허니컷 구하기(베스 호프먼, 윤미나 역. 문학동네. 2020. 478쪽)
: 기대하지 않았다가 위로받은 이야기. 씨씨는 정신질환을 앓던 - 아마도 조울증이었던 것 같은데, 작품 속에서는 정신증이라고 표현된다 -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씨씨는 남부의 이모 할머니 투티와 함께 살게 된다.
엄마를 외면하며 겉도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과거의 환상만 돌아보며 슬퍼하다 결국은 과거에 매몰되어 버린 엄마의 보호자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다가 갑작스런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못하게 된 씨씨가 투티 할머니의 보살핌과 요리사 올레타의 음식, 그리고 남부의 햇살과 주변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통해 슬픔을 치유하고 행복을 찾게 되는 이야기는 마치 동화같았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마냥 분홍빛이었던 건 아니다. 자신의 무책임함을 '너의 행복을 위해'라며 포장하는 뻔뻔스러운 아빠는 나를 짜증나게 했고 당시의 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열받게 했다. 그래도 모든 일은 결국 괜찮아진다. 그래서 위로받았다.
29. 29초(T.M. 로건, 천화영 역. 아르테. 2019. 481쪽)
: 만약 어떤 사람이 내게 빚을 졌다며 그걸 내가 없애고 싶은 단 한 사람을 없애는 걸로 갚겠다고 한다면, 난 어떻게 할까?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는 세라는 이런 제안을 받고, 고민과 망설임 끝에 자신을 성희롱하고 거절하고 도망치는 자신을 괴롭히며 공을 가로채는 학과장 엘런 러브록의 이름을 말한다.
설정이 재밌을 것 같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짜증이 나서 대충 읽어치웠다. 이야기 내내 고구마만 먹이다가 마지막 20페이지 남겨두고 사이다 한모금 찔끔 주는 이야기. 세라의 망설임이 공감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또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세라만큼 대처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세라가 겪는 일들에 대한 묘사를 읽는 건 힘들었고 - 난 현실에서 직간접적으로 겪는 일들을 책 속에서 다시 읽고 싶지 않다 - 세라의 대처 또한 답답했다. 어쨌든 해피 엔딩이긴 한데, 그 놈 하나 죗값 받았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책 속에서나마 시원한 복수를 읽고 싶었는데 뒷골만 땡겼다.
30. 책에 갇히다(천선란 외. 구픽. 2021. 371쪽)
: 책의 미래에 관한 엔솔로지. 종이책의 미래는 왜 늘 어둡게만 예측되는 걸까. 안 그러길 간절히 바라는데 말이다. 변형되는 책의 모습들 중 난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종이가 사라져 사람이 책이 되거나 모든 게 디지털화되면 난... 아마 주어진 대로 열심히 읽기는 하겠지만 조금 슬플 것 같다.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이 좋았고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천선란.
: 마흔 살 채선은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오른다. 연기에 큰 뜻은 없지만 비교적 호평을 받으며 공연을 하던 중, 연극계의 원로 선배가 채선에게 꼭 한 사람을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하고, 약속 장소에 나간 채선은 지연과 만난다.
나와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지만 계속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문장들이 너무 좋아서. 지연은 너무 싫었다. 그렇게 밀고 들어와 힘주어 만드는 관계는 별로다, 내게는. 하지만 채선은 괜찮았나보다. 어쨌든 그래서 거리를 두고 차분히 읽어나갈 수 있었고, 그래서 문장을 잘 공굴릴 수 있었다.
2. 치과 의사의 죽음(M.C. 비턴, 문은실 역. 현대문학. 2018. 329쪽)
: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 13권. 이번에는 해미시의 이가 말썽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해미시는 믿을 수 있는 인버턴의 치과 대신 급한 대로 가장 가까운 길크리스트 치과의사에게 가기로 했다. 인근에서 일어난 호텔 절도 사건을 수사하는 한편 짬을 내서 치과에 간 해미시는 진료 의자에 누워있는 길크리스트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번 편에는 프리실라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프리실라의 친구가 해미시의 침대로 파고든다. 하지만 역시나... 해미시가 누군가를 만나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로맨스도 좀 안정이 됐음 좋겠다. 여전히 피해자는 비호감이고, 살인 이면에는 복잡한 인간 관계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해미시는 매력적이다.
3. 벨파스트의 망령들(스튜어트 네빌, 이훈 역. 네버모어. 2020. 446쪽)
4. 어떤 물질의 사랑(천선란. 아작. 2020. 334쪽)
: 따뜻한 시선이 좋았던 단편집. 마냥 따뜻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꽤 날카롭기도 했지만 난 '따뜻' 부분이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그 와중에도 지구에서 소수로 살아갈 '나'가 가엾긴 했지만, '나'의 사랑은 분명 축복이지.
5. 적대적 상황에서의 생존 메커니즘(올리비아 로젠탈, 한국화 역. 알마. 2020. 203쪽)
: 순진하고 무지했던 나는, 정말로 이 책을 통해 이 지랄맞은 사회에서 생존하는 방식을 알아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 물론 '생존 메커니즘'을 대놓고 알려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었고 또 이 책이 도움이 안 되진 않았지만, 이 책은 '적대적 상황'조차 구체적으로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은근히 드러나는 위협, 위험 들. 그리고 늘 가해자가 가해자인 것도, 피해자가 늘 피해자인 것도 아니다. 그게 조금 슬펐다. 서사가 익숙한 방식은 아니지만, 뭣도 모르는 나로서는 매혹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생존 메커니즘을 획득하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6. 기묘한 꽃다발(낸시 스프링어, 김진희 역. 북레시피. 2019. 215쪽)
: 에놀라 홈즈 시리즈 3권. 왓슨 박사가 실종됐다. 에놀라는 왓슨 부인을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고난 호기심은 물론 걱정스런 마음에. 상류층 여인으로 변장하고 왓슨 부인을 위로 방문하던 와중에 오빠 셜록이 그 집을 방문하자 서둘러 돌아나오는데, 피아노 위에 놓인 꽃다발이 눈길을 끈다.
이 시리즈를 관통하고 있는 꽃말 메시지가 여기서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거기에 더해 에놀라는 이제까지의 어떤 에피소드에서보다 더 활발히 뛰어다닌다. 셜록은 물론 마이크로프트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 낼 수 있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1,2권보다 더 몰입해서 읽었다.
7. 별난 분홍색 부채(낸시 스프링어, 김진희 역. 북레시피. 2019. 251쪽)
: 에놀라 홈즈 시리즈 4권이다. 퍼디토리언으로서 활약하고 있는 에놀라는 당시 처음 선보인 여성 전용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전에 구해준 적 있는 '왼손잡이 숙녀' 레이디 세실리와 마주친다. 세실리는 우스꽝스런 옷차림을 한 채 두 명의 샤프롱에게서 감시받는 듯한 모습이었고, 에놀라를 알아보고 분홍색 부채를 떨어트려놓는다. 세실리가 위험에 빠졌음을 알아챈 에놀라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
당시 상류사회의 그야말로 쓰잘데기 없는 유행들 - 핑크 다과회 - 뿐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인습 - 재산 보호를 위한 사촌 간 결혼 - 에 대해서 잘 설명해 준다. 두가지 다 21세기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 쓸데 없고 어처구니 없다. 그런데 에놀라는 19세기에 이미 21세기의 눈을 갖고 있었으니. 어쨌든 에놀라는 많이 자랐고, 오빠들과의 관계도 많이 발전한 듯 싶다.
8. 비밀의 크리놀린(낸시 스프링어, 김진희 역. 북레시피. 2020. 213쪽)
: 에놀라 홈즈 시리즈 5권.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에놀라의 하숙집 주인 터퍼 부인이 어느날 의문의 협박 편지를 받는다. 부인이 갖고 있지도 않은 뭔가를 요구하는. 에놀라는 부인을 대신해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지만, 터퍼 부인은 납치되고 만다.
역시나 재밌었다. 나이팅게일에 대한 저자의 상상이 특히 맘에 들었다. 나이팅게일의 말년이 저자가 서술한 대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사고방식은 저자의 상상처럼 진보적이었을 듯. 두 여인의 쿵짝이 즐거웠고, 에놀라가 터퍼 부인을 통해 모성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9. 집시여 안녕(낸시 스프링어, 김진희 역. 북레시피. 2020. 227쪽)
: 에놀라 시리즈 마지막 권. 그동안 런던에서 퍼디토리언으로 활동하며 엄마와 신문 광고란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 받던 에놀라. 고향의 집사에게서 특이한 문양의 봉투에 든 메시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셜록은 그걸 받으러 다녀오는 김에 에놀라의 강아지 레지널드를 데려온다. 한편 에놀라는 가녀린 외모의 아름다운 공작부인 실종 사건을 의뢰받는다.
시리즈가 끝나서 정말 아쉽다. 비록 오마주였긴 했지만 셜록을 다시 만나고 셜록이 개과천선(?)해서 기뻤는데. 그리고 에놀라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다. 나중에라도 작가가 이 시리즈를 다시 시작해주길 바라는 건 무리이려나...
10.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김희선. 현대문학. 2020. 187쪽)
: 일주일에 한 번 저수지를 건너는 배를 타고 팔곡 마을에 들르는 우체부. 어느날 우체통이 지난번에 배달한 우편물로 꽉 차 있는 걸 발견하고 마을을 둘러보지만 모든 집이 비어있다. 우체부는 노인들만 사는 이 마을에 변고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파출소에 신고를 하고, 박경위가 우체부와 함께 마을을 살피러 들어온다.
스릴러로 시작해서 블랙 코미디로 끝난다. 하지만 노령화가 심해지며 함께 심화되는 노인 혐오를 잘 그려냈다. 결말이 힘이 빠지긴 했지만 읽는 동안의 어두침침한 분위기는 꽤 소름끼쳤다. 그 분위기를 내내 결말까지 유지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11. 외투(헬린 던모어, 윤미나 역. 문학동네. 2021. 235쪽)
: 2차 대전의 상흔이 어느 정도 달래어진 시기의 영국 시골. 신혼의 이저벨은 막 의사 개업을 하게된 필립과 작은 집에 세들어 산다. 위층에선 집주인이 끊임없이 방 안을 걸어다니는 소리가 울리고, 낡은 판잣집은 외풍을 그대로 통과시킨다. 필립이 지역의로서 정신없이 일하는 동안 이저벨은 힘겹게 초보 주부 노릇을 하며 적응을 하려 발버둥치지만, 놓쳐버린 자신의 꿈은 아쉽기만 하다. 어느날 밤, 추위에 잠을 깬 이저벨은 벽장에서 낡고 큰 군용외투를 발견해 덮고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가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깬다.
자신만의 연옥에 갇혀버린 알렉, 그리고 그녀. 가여운 건 알렉이었고 미운 건 그녀였지만 더 괴로운 건 역시 그녀였을 것이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건 당연히 알렉이었지만, 알렉은 그래도 이저벨에게서 위안을 받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결말이 조금 찜찜했다. 그래도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된다면 읽어보고 싶다.
12. 우주를 삼킨 소년(트렌트 돌턴, 이영아 역. 다산책방. 2021. 674쪽)
13. 친애하고 친애하는(백수린. 현대문학. 2019. 148쪽)
: 휴학생 '나'는 엄마에게 등떠밀려 어릴 적 나를 키워준 할머니 댁에 내려가 지내게 된다. 엄마는 출산 직후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유학을 가버렸고, 교수인 엄마는 지금도 집안 보다는 연구를 더 중시하며 챙긴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의 진로는 커녕 지금까지의 학업도 그저 떠밀려서 진행해왔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화자의 여성 3대 이야기이다. 신파는 아니지만, 맘이 찌릿하긴 한다. 그거야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 피할 수 없는 감정일 테지만. 여느 엄마 같지 않은 엄마 대신 화자에게 엄마 노릇을 해주었던 할머니의 노후를 그저 담담하게, 어쩌면 철없이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 때문에 신파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길지 않지만 단단했던 이야기.
14. 두 사람 다 죽는다(애덤 실베라, 이신 역. 문학수첩. 2021. 451쪽)
15. 당신의 노후(박형서. 현대문학. 2018. 158쪽)
: 앞서 읽은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에서는 사회 평균 연령을 낮추기 위한 노력이 은근히 행해진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보다 직접적인 방법이 사용된다. 바로 국민연금공단 - 및 기타 관련 국가 기관 - 에 의한 연금 수급자 제거. 공단에서는 이를 위해 별도의 팀을 운용하고, 그들은 연금 수급자들을 '자연스럽게' 죽음에 이르게 한다. 70세의 장길도는 최근 연금공단에서 은퇴했다. 아픈 아내를 간호하던 중, 아내가 자신 몰래 연금에 가입하였고 이제 수급자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노인 액션스릴러물. 정말 재밌었다. 요즘 70대는 예전 60대라더니, 장길도 할아버지 아니, 아저씨는 완전 날아다닌다. 아니 60대라해도 이만큼의 액션은 정말이지 놀라울 수 밖에. 아내를 구하기 위한 장길도의 고군분투 사이사이, 고독사를 비롯한 노인들의 사망 이야기가 교차된다. 무거운 주제와는 별개로 페이지가 휙휙 넘어가는 멋진 소설이었다. 다만 현실이 많이 걱정스럽긴 하다.
16. 셜로키언(그레이엄 무어, 이재경 역. 비채. 2015. 419쪽)
: 해럴드 화이트는 세계 최고의 셜로키언 모임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스'에 최연소 회원이 된다. 2010년 정규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한 그는 다음날 발표될 코난 도일의 사라진 한 권의 일기에 관한 발표를 무척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호텔에서 만난 발표자 알렉스는 자신이 미행당하고 있다며 불안에 떨고, 다음날 아침 호텔방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코난 도일의 후손이자 알렉스와 일기를 두고 경쟁 관계였던 세바스찬은 시신을 발견한 해럴드에게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진범을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꽤 재밌었다. 2010년의 살인 사건 뿐 아니라 1890년대 도일이 셜록 홈즈를 라이엔바흐 폭포에서 죽여버린 후 자신의 집에 배달된 폭탄을 계기로 역시 살인 사건 수사에 뛰어든 이야기가 교차되어 보여진다. 셜록을 오마주하며 살인 사건의 범인과 사라진 일기를 찾는 헤럴드와 자신의 명성과 두뇌를 이용하여 살인범을 추격하는 도일은 각각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추리 소설이 될 수 있었고, 그들을 돕는 두 명의 왓슨 - 브램 스토커와 세라 - 또한 흥미로웠다. 다만 해럴드의 사건은 마무리가 좀... 모든 걸 알아낸 해럴드의 추리력은 맘에 들었지만 반전이랄까, 숨겨져 있던 진실이랄까 하는 부분이 영 맘에 안 들어. 어쩐지 어리바리 하더라니.
17. 연애의 결말(김서령. 폴앤니나. 2020. 221쪽)
: 꽤 속터지는 연애담. 재밌긴 했지만 갑갑하기도... 제발 그냥 헤어져! 이 작가 좋아하는데, 이렇게 경쾌한 이야기도 써줘서 더 좋아졌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서는 앞 쪽에 배치된 작품들이 더 좋았다. 연애의 결말이 결혼만이 아니라는 걸 얘기해줘서. 그냥 꾸역꾸역 결혼으로 걸어가는 얘기들은 꽤나 현실적이었고 그래서 좀 갑갑했다. 작가가 잘 못 썼다는 게 아니다.
18. 통조림을 열지 마시오(알렉스 쉬어러, 정현정 역. 미래인. 2011. 248쪽)
: 친구가 거의 없는 퍼갈. 뭔가 특별한 취미 생활을 하고 싶던 차에 마트의 세일 코너에서 라벨이 없는 통조림을 발견한다. 그런 통조림들을 모으던 퍼갈은 어느날 너무 많이 쌓인 통조림들 중 두 개를 개봉하는데, 귀걸이와 절단된 손마디가 나온다. 깊숙히 감춰두고 고민하던 중 마트에서 자기처럼 라벨 없는 통조림을 찾는 샬롯과 마주치는데...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괜찮았던 기억이 있어서 오랜만에 청소년 소설로 머리 좀 식혀볼까 하고 집어들었다. 조금은 황당하기도 했지만 저학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니... 내용은 꽤 긴박하게 흘러가고, 권선징악도 확실하다. 재미있었다.
19. 애서광들(옥타브 위잔, 알베르 로비다 그림, 강주헌 역. 북스토리. 2018. 411쪽)
: 11편의 책 이야기.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뿐 아니라 책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19세기 사람들의 책에 대한 생각들과 미래에 대한 예측, 동양에 대한 (현재의 기준으로 보자면 짜증나기 그지없는) 시각 등이 잘 드러나있다. 첫 작품( <『뮤즈 연감, 1789년』>)과 두 번째(<시지스몽의 유산>)이 가장 재미있었고, 뒤로 갈수록 재미는 떨어졌다. 그래도 계속 흥미롭기는 했다.
20. 꽃을 사는 여자들(바네사 몽포르, 서경흥 역. 북레시피. 2019. 475쪽)
: 마드리드의 오래된 꽃가게 '천사의 정원'. 화자 마리나는 얼마전 남편과 사별하고 작은 집으로 이사왔지만 이삿짐도 못 풀 만큼 실의에 빠져있다. 남편이 죽으면서 부탁한 게 있지만 엄두도 못 내겠다. 우연히 천사의 정원 앞을 지나다가 주인 올리비아와 마주치게 되고, 얼떨결에 그곳에서 일하기로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꽃을 보내는 카산드라, 아름답고 화려한 갈라, 사랑과 인생에 자신없는 화가 오로라, 가정과 아이들과 직장에 매몰되어 가는 빅토리아를 알게 된다.
내용은 나쁘지 않았으나 산만한 서술과 어색한 번역투, 비문 때문에 별로였다. 게다가, 불륜에 대해 활짝 열린 시각이야 문화적인 다름이라고 쳐도 프란치스코의 아내를 기생충 막시와 동일시하는 걸 보고 짜증이... 여자가 남자를 못 떠나는(쫓아내는) 건 여자가 약해서고, 남자가 아내를 못 떠나는 건 여자가 술수를 써서인가? 내 편이 하면 지켜보며 기다려야 하는 일이고 나와 친하지 않은 여자가 남편에게 매달리면 기생충이냐고?! 작가 이름을 기억해 둬야겠다, 거르게.
21. 참담한 빛(백수린. 창비. 2016. 316쪽)
: 여행자 혹은 이방인들의 이야기. 어디인지,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냥 머물 수 있는 한 머물고, 살아내야 하는 만큼 살아내는 것이다. 다만 공감은 조금 힘들었다.
22. 레드 조앤(제니 루니, 허진 역. 황금시간. 2019. 503쪽)
23. 여성 연쇄살인범의 초상(토리 텔퍼, 최내현 역. 눌민. 2020. 430쪽)
: 역사적으로 밝혀진 여성 연쇄살인범 14명의 이야기. 논픽션이지만 소설처럼 읽힌다. 범죄의 내용이 황당하리만치 끔찍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본문에서 지적했던 대로 여성의 범죄에 대해서는 믿고 싶어하지 않는 심리가 내게도 있기 때문일 게다. 이런 시각은 역사적으로 여성 살인범을 바라보는 여러 왜곡된 시각 중 하나였다. 여성 연쇄살인범은 물론 남성 연쇄살인범에 비해 숫자가 적긴 하지만, 매우 특수한 경우로 보고 그들이 특별히 성적 욕망이 강하기 때문에, 혹은 악마에 씌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져 왔다(물론 두 이유가 합해져서라고도). 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거나 돈과 권력을 가지게 되면 생기는 병폐로 취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살인범은 살인범일 뿐. 대부분은 개인적 성향 때문이다.
물론 헝가리 나기레브의 여인들처럼 삶의 압박에 의해 집단적으로 손쉬운 방법을 택한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살해 대상자들도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도 쉽게 생명을 빼앗았던 것이다. 14명 중 대부분의 사례에서 여성들은 독극물(특히 비소)을 사용했기에 중간에 비슷한 사례들이 반복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저자는 그들 자체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려 애썼고, 그래서 이 책이 더 좋았다. 앞에서 말했듯 성적인 프레임을 씌우거나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들을 향한 왜곡된 시선을 배제하고자 했기에. 저자는 유머러스한 시각을 견지하려 했다고 했지만 난 내내 심각하게 읽었는데, 다만 맨 뒤의 플레이리스트 추천에서 빵 터졌다.
24.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김금희. 마음산책. 2018. 253쪽)
: 좋았다. 짧은 소설 19편이 다 괜찮았다. 일상에서 한 번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순간을 포착해서 의미있는 장면으로 만든다. 금세 잊어버릴 별 거 아닌 이야기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간직할 예쁜 순간일 수도 있는. 좋았다.
25. 세컨드 라이프(베르나르 무라드, 박영수 역. 문학동네. 2019. 343쪽)
: 비오는 저녁 초라한 바에서 3시간 뒤 자신은 죽을 거라고 얘기하는 남자. 그가 지난 3개월을 얘기한다. 중소기업의 회계 담당으로 오랫동안 일하다 지리멸렬한 자신의 삶이 지겨워 생일날 자살을 결심했던 마르크는 퇴근 무렵 '구세주'에게서 온 메일을 확인하고 호기심에 그와 접촉한다. 그에게서 인생을 바꿔주겠다는 얘기를 듣고 '두 번째 기회'를 잡기로 결심한다.
뒷표지에서는 개인에 대한 미디어의 침투와 국가의 개입 등을 얘기했지만 난 그보다 주어진 상황에 대한 개인의 대응이 더 흥미로웠다. 지겹고 별 볼 일 없지만 무난하고 평범한 삶을 이어가던 마르크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된 후에 변한 건 과연 환경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마르크의 깊숙한 곳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싹이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모든 건 아르노와 국가의 계략이었나? 사실 가장 가여운 건 두 번째 아내와 딸.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아빠를 만났나 했는데... 나쁘지 않은 소재와 전개였지만 좀 우울했다.
26. 카리 모라(토머스 해리스, 박산호 역. 나무의철학. 2019. 285쪽)
: 뒷표지의 '한니발 렉터를 능가하는...'은 무시하라. 그 정도까진 아니다. 엽기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콜롬비아 출신 카리는 현재 마이애미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다. 마이애미 해변의 대저택 관리인으로 일하던 그녀는 이 저택에 마약왕 에스코바르가 숨겨둔 금을 찾기 위해 이 저택을 빌린 한스 피터 일당의 눈에 든다. 그들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피하지만 한스 피터는 그녀를 자신의 상품으로 삼을 계획은 세운다.
카리의 진가는 서서히 드러난다. 그래서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그녀가 점점 더 맘에 들었다. 다만 잊을 만 하면 엽기성이 훅 들어와 눈쌀을 찌뿌리게 하고, 카리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도 전에 너무 잡다한 이야기로 페이지를 채운다. 이게 시리즈물이고 카리의 활약이 2,3권으로 이어질 거라면 모를까 - 사실 그걸 기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 이 책 한 권으로 완결성을 말하기는 부족하다. 그래도 카리는 정말 맘에 들었다.
27. 아내들의 학교(박민정. 문학동네. 2017. 306쪽)
: 단편집. 첫 작품과 두 번째가 너무 지루해서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하다 읽었다. 작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여성 혐오와 약자에 대한 배척, 소위 지식인이라 하는 자들의 위선과 좁은 시야 등에 대해 공감하지 않거나 지루하다는 건 아니다. 분명 이 작가는 꽤 잘 쓰는 작가이고 자신만의 특성도 보이는 유니크한 작가이지만, 그냥 이 시기의 나와는 맞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28. 씨씨 허니컷 구하기(베스 호프먼, 윤미나 역. 문학동네. 2020. 478쪽)
: 기대하지 않았다가 위로받은 이야기. 씨씨는 정신질환을 앓던 - 아마도 조울증이었던 것 같은데, 작품 속에서는 정신증이라고 표현된다 -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씨씨는 남부의 이모 할머니 투티와 함께 살게 된다.
엄마를 외면하며 겉도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과거의 환상만 돌아보며 슬퍼하다 결국은 과거에 매몰되어 버린 엄마의 보호자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다가 갑작스런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못하게 된 씨씨가 투티 할머니의 보살핌과 요리사 올레타의 음식, 그리고 남부의 햇살과 주변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통해 슬픔을 치유하고 행복을 찾게 되는 이야기는 마치 동화같았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마냥 분홍빛이었던 건 아니다. 자신의 무책임함을 '너의 행복을 위해'라며 포장하는 뻔뻔스러운 아빠는 나를 짜증나게 했고 당시의 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열받게 했다. 그래도 모든 일은 결국 괜찮아진다. 그래서 위로받았다.
29. 29초(T.M. 로건, 천화영 역. 아르테. 2019. 481쪽)
: 만약 어떤 사람이 내게 빚을 졌다며 그걸 내가 없애고 싶은 단 한 사람을 없애는 걸로 갚겠다고 한다면, 난 어떻게 할까?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는 세라는 이런 제안을 받고, 고민과 망설임 끝에 자신을 성희롱하고 거절하고 도망치는 자신을 괴롭히며 공을 가로채는 학과장 엘런 러브록의 이름을 말한다.
설정이 재밌을 것 같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짜증이 나서 대충 읽어치웠다. 이야기 내내 고구마만 먹이다가 마지막 20페이지 남겨두고 사이다 한모금 찔끔 주는 이야기. 세라의 망설임이 공감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또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세라만큼 대처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세라가 겪는 일들에 대한 묘사를 읽는 건 힘들었고 - 난 현실에서 직간접적으로 겪는 일들을 책 속에서 다시 읽고 싶지 않다 - 세라의 대처 또한 답답했다. 어쨌든 해피 엔딩이긴 한데, 그 놈 하나 죗값 받았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책 속에서나마 시원한 복수를 읽고 싶었는데 뒷골만 땡겼다.
30. 책에 갇히다(천선란 외. 구픽. 2021. 371쪽)
: 책의 미래에 관한 엔솔로지. 종이책의 미래는 왜 늘 어둡게만 예측되는 걸까. 안 그러길 간절히 바라는데 말이다. 변형되는 책의 모습들 중 난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종이가 사라져 사람이 책이 되거나 모든 게 디지털화되면 난... 아마 주어진 대로 열심히 읽기는 하겠지만 조금 슬플 것 같다.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이 좋았고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천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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