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기환송(마이클 코넬리, 전행선 역. RHK. 2016. 532쪽)
: 미키 할러 시리즈 3권. 전권에서 안면을 튼 미키와 해리 보슈가 이번 작품에서는 의기투합한다. 미키의 전처이자 검사인 매기까지. 24년 전 열두 살 소녀를 납치 살해한 혐의로 복역하고 있는 제섭. 최근 그 사건의 증거물인 소녀의 드레스에서 양아버지의 DNA가 발견되었고, 파기환송된 이 사건을 다시 기소하기 위해 검찰에서 미키에게 특별 검사 자리를 제안한다. 미키는 해리 보슈를 수사관으로, 매기를 파트너로 임명하는 조건으로 수락한다.
범인의 무죄여부 보다는 수임료와 승리 자체가 중요한 미키가 검사측이 된 건 약간은 어색하다. 해리 보슈 시리즈였다면 정의구현을 기대하며 무조건 해리 편을 들어가며 읽었겠지만 미키 할러 시리즈는 정의보다는 승리를 기대하며 집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선 승리가 곧 정의구현이다. 그래서 범인의 마지막이 정말 맘에 안 들었다. 그래도 두 이복형제의 협업은 흐뭇했다. 특히 두 사촌 소녀의 우정이.
2. 레베카(대프니 듀 모리에, 이상원 역. 현대문학. 2014. 584쪽)
3. 탄제린(크리스틴 맹건, 이진 역. 문학동네. 2020. 372쪽)
: '그 사건' 이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집안에서 정해준 사람과 결혼해 모로코에 온 앨리스. 적응하려 애쓰지만 원래도 심약했던 그녀는 밖으로 나갈 수 조차 없다. 갑자기 그녀를 찾아온 베닝턴대학 시절의 룸메이트 루시. 앨리스는 얼떨결에 그녀를 맞아들인다.
스스로를 금치산자로 유폐시켜버린 여자들은 늘 나를 짜증나게 하면서도 내 맘을 쓰이게한다.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난 늘 그녀들이 제발 스스로의 발걸음을 내딛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하지만 소설 속 그녀들은 결코 그러지 못한다. 그러기에 난 루시가 앨리스의 구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프롤로그를 애써 외면하며.
잘 쓴 소설이다. 특히 문장이 정말 탄탄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난 그녀의 세계가 이렇게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뻔한 반전이나마 바랐다. 하지만 1950년대라면, 앨리스처럼 키워졌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정말 무섭고 무서운 이야기였다. 가스라이팅의 교과서.
4. 천 개의 파랑(천선란. 허블. 2020. 376쪽)
: 경마의 기수는 사람이 아닌 휴머노이드이다. 경마만을 위해 가볍고 단순하게 만들어진. 많은 부분에서 사람 대신 휴머노이드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때문에 고등학생 연재도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던 편의점에서 잘린다. 소방관이었던 아버지는 어릴 때 순직하셨고 걷지 못하는 언니와 식당일 때문에 늘 피곤한 엄마와 살고 있다. 어릴 때부터 로봇과학에 소질이 있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외면하고 있는 연재에게 한 휴머노이드가 나타난다.
소프트웨어 오류로 감정을 갖게 된 휴머노이드와 로봇에 진심인 소녀는 클리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이렇게 푸릇하게 풀어낸 작가의 솜씨가 너무나 훌륭하다. 동물 복지와 장애인에 대한 시선, 최소한의 권리조차도 자본주의 논리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근미래라고는 하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장애인과 동물에 대한 태도가 이와 같다면 절망적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장애가 극복되기 쉬운 환경이라면, 은혜처럼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게 이중 삼중의 차별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게. 그래도 난 작가가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 속이나마, 좋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니까.
5. 화이트 호스(강화길. 문학동네. 2020. 300쪽)
: 국내의 젊은 작가를 처음 읽을 때, 한 번씩 망설이게 된다. 대중성을 믿고 따랐다가 실망했던 게 몇 번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고 읽어야 할 작품들은 너무 많다. 이 작가도 도서관에서 자주 눈에 띄었으나 몇 번이나 망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집어들었고, 결과적으로 참 잘한 일이었다.
가부장제 하의 여성에 관한 서사는 뻔히 흐르기 쉽다. 제사상을 앞에 두고서나 폐쇄적인 작은 농촌 마을에서라면, 혹은 연쇄 실종 사건이 일어난 동네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라면 더더욱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작가는 그 이야기를 결코 뻔하게 풀지 않는다. 내용을 요약하는 건 의미 없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서술의 방식이, 대놓고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명확한 주제 의식이 정말 유니크하다. 이제라도 이 작가를 읽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6. 허풍선이의 죽음(M.C. 비턴, 전행선 역. 현대문학. 2018. 364쪽)
: 해미시 멕베스 시리즈 12권. 오래 기다려서 읽었다. 로흐두 마을에 다시 시체가 발견됐다. 죽은 사람은 역시 마을의 비호감 술꾼. 최근에 이주한 그는 자신이 미국에서 유명 레슬러였으며 전세계 오지를 다닌 모험가라며 마을 사람들에게 술을 산다. 하지만 거만하고 남을 모욕하는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결국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된다.
그냥 원제대로 마초맨의 죽음이라고 하는 게 더 좋았을 걸. 오랜만에 읽어서 데이비스 총경의 적대감에 놀랐다. 전권에서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해미시 편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공정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해미시는 여전하다. 가난하지만 성실한 면도 있고, 의뭉스럽기도 하면서 적당히 이기적이고. 프리실라와의 사이도 여전히 애매하다. 역시나 끼어드는 인간들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새로운 여인도 등장한다. 살인 사건은 늘 그렇듯 꽤나 간단하게 풀린다. 하지만 스케일은 꽤나 커졌다. 다음 권에 대한 기대감도.
7.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정유정, 지승호. 은행나무. 2018, 264쪽)
: '작가'로서의 정유정 자신이 이야기. 인터뷰이로서 자신의 '영업비밀'을 가감없이 내놓는다. 다른 인터뷰 등에서 읽은 적 있는 얘기도 있었고, 처음 듣는 얘기도 있었다. 난 작가가 될 생각은 없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팬심으로 읽었지만 작가 지망생이라면 밑줄 그으면서 읽을 만한 얘기들이 많았다. 특히 재밌었던 건 『7년의 밤』의 원제. 작가는 '해피 버스데이'로 하려 했다고. 그건 내가 책장을 덮으며 서원에게 마지막으로 속삭여 준 말이었다.
8. 파묻힌 거짓말(크리스티나 올손, 장여정 역. 북레시피. 2019. 528쪽)
: 시리즈 첫 권이라길래, 저자가 스웨덴 범죄 소설의 여왕이라길래 읽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스릴러는 아니었다. 맘만 먹으면 어떤 여자든 유혹할 수 있는 변호사 마틴 베너. 옛 연인인 루시와는 함께 로펌을 운영하는 파트너이자 가끔 함께 밤을 보내는 사이이다. 어느 날 그에게 바비라는 남자가 찾아와 5명을 살해하고 자살한 자신의 여동생 '사라 텍사스'는 범인이 아니라며 여동생의 억울함을 풀고 여동생이 살해했다고 알려진 조카도 찾아달라고 한다.
범죄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소설 첫머리에서 지 무덤을 지가 파고 들어간다. 내가 초반에 떠올린 이 문장을 주인공도 89쪽에서 스스로 인정한다. 이야기는 스웨덴을 벗어나 미국으로까지 흘러가고, 예상보다 꽤 복잡하게 전개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가 꽤 훌륭하긴 했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안 좋아한 건 전형적이라는 점 말고도 마틴의 조사로 피해가 복구될 수혜자가 없다는 점 때문이다. 사라는 이미 죽었고 바비는 너무 비호감이었다. 마틴(+루시)만 죽어라 고생하며 생고생하고 그 와중에 애먼 사람들만 죽어나간다. 게다가 이 모든 이야기는 시리즈의 다음 권을 위한 밑밥일 뿐. 다른 날처럼 책을 한 권 더 들고 나왔다면 이 책 안 읽었을 거다. 다음 권도 읽을지 말지 아직 결정 못 했다.
9. 빌라 아말리아(파스칼 키냐르, 송의경. 문학과지성사. 2012. 368쪽)
: 작곡가 안은 함께 살고 있는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잠시 절망하지만 곧 주변 정리를 시작한 안.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판 후 결별을 인정하지 않는 남자친구의 짐까지 정리하고 초등학교 동창인 조르주의 집 근처에 머물다가 문득 이탈리아로 떠난다.
꽤나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꽤나'라는 부사를 붙인 건, 중간중간 쌩뚱맞은 설정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령 뒷부분의 조르주의 갑작스러운 ** 이라든가... 하지만 그게 삶인걸. 하나의 문을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완전히 닫아버리고 다른 문을 활짝 여는 여성의 이야기는 늘 내게 불안함과 부러움을 함께 준다. 난 절대 하지 못할 선택이기에. 안은 빌라 아말리아에서 편안함과 아픔, 만남과 이별을 모두 겪지만 그게 꼭 그 곳이어야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곳이 아니었다면 안의 인생은 또 다르게 흘러갔으리라.
불문학의 정석 같은 작품이라고, 읽는 내내 생각했다. 내가 뭘 알아서 하는 얘긴 아니다. 다만 프랑스 문학이라는 걸 떠올렸을 때 기대하는 모든 아름다움이 이 안에 있다. 이 작가를 계속 읽어야 할 이유이다.
10. 진짜 그런 책은 없는데요(젠 캠벨,더 브러더스 매클라우드 그림,노지양 역. 현암사. 2019. 168쪽)
: 서점 점원인 저자가 겪은 특이한 손님들 이야기. 짤막한 에피소드들만 있어서 다 읽는 데 한 시간도 안 걸렸다. 블로그 포스팅 같은 느낌. 다 재밌었지만 인상 깊었던 건 셰익스피어와 디킨스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손님. 얼른 그들이 죽어야 더이상 신간이 안 나올 거라고... 하아...
11. 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카린 랑베르, 류재화 역. 레드스톤. 2016. 240쪽)
: 남자라면 수리공이나 피자 배달부도 금지인 완벽한 금남의 집. 대신 월세는 싸다. 꼭대기 층에는 여왕이 거주하고 모두 네 명의 세입자가 있다. 그 중 한 명을 대체하며 들어온 줄리엣. 아직도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며 연애에 몸달아하는 아가씨다. 나머지는 모두 그럴만한 사연이 있는데, 줄리엣만 완전 천방지축이다. 지 발로 기어들어와 놓고 금남이라고 집주인에게 짜증내고 다른 세입자들에게 '언니들은 후회할 것'이라고 말하는 줄리엣은 진짜 비호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비아냥대는 친구한테 여왕과 '언니들'이 얼마나 독립적으로 훌륭하게 사는지 역설하질 않나. 진짜 칙릿이며 로맨스 소설 웬만큼 읽어왔는데 이렇게 짜증나고 일관성 없는 캐릭터 오랜만이다. 출근길에 책은 꼭 두 권 이상 들고 다니자.
12. 폴링 인 폴(백수린. 문학동네. 2014. 278쪽)
: 더이상 소통의 수단이 되지 못하는 언어. 일곱 편의 단편들이 있는데 다 좋았다. 남들이 다 하는, 다 아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순간의 날카로운 반짝임이 있다. 가령 리가 고궁의 이방인에게 적극성을 넘어 근거없는 성적 자신감을 보이다가 역습을 당하는 장면이라든가(<까마귀들이 있는 나무>), 화자가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얘기한 날이 프랑스에선 만우절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고국에선 아직 만우절이었다든지(<거짓말 연습>). 연인의 나라에서 비자를 연장해가며 연인에게 얹혀사는 남자의 이야기라든가 이혼 위기에 유학길에 오른 여자의 이야기는 새로울 게 없지만 그 이야기를 그렇게 발전시킨 건 이 작가만의 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작가, 너무 늦게 읽었다.
13.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모리스 르블랑, 바른번역. 코너스톤. 2015. 340쪽)
: 라울 드 리메지 남작의 모험. 물론 그는 뤼팽이다. 13권. 라울은 우연히 아름다운 영국 아가씨를 어떤 남자가 뒤쫓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을 따라간다. 어느 카페에서 영국 아가씨와는 대조되는 분위기의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를 보게 된 라울은 초록 눈동자 아가씨와 노신사를 아까의 남자가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도와주지만 그 사이 그들은 사라지고, 다시 영국 아가씨를 좇던 라울은 그녀를 따라 열차에 올랐다가 살인 사건에 휘말린다.
이 작품에서야말로 뤼팽의 바람둥이 기질이 절정에 오른 듯 하다. 무턱대고 길에서 만난 아가씨를 구해주고자 하는 거야 늘 있던 일이지만, 자신을 피하기만 하는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를 끝까지 도와주고 구해주는 라울의 맹목적인 사랑과 믿음은 새삼 놀랍다. 게다가 그 달콤함은 정말이지...264쪽 읽으면서 정말 숨넘어갈 뻔 했다, 너무 달콤해서. 그냥 침을 꼴깍 삼켰는데 설탕맛이 났어... 하지만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는 그를 꿰뚫어 보았고, 아마도 그래서 시리즈의 다른 이야기도 전개될 수 있었겠지.
라울의 달콤함만 말했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라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를 둘러싼 20여 년에 걸친 유산과 애증의 복잡한 이야기이다.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14. 여름의 겨울(아들린 디외도네, 박경리 역. 아르테. 2020. 284쪽)
: 자신만의 싸움을 시작한 소녀의 성장기. 예쁜 표지에 이끌려서 선택했는데 이렇게 아픈 이야기일 줄 몰랐다. 열 살 '나'의 집에는 시체들의 방이 있다. 방을 가득 채운 박제된 동물들은 모두 아버지가 사냥해서 잡은 것들이다. 나에겐 네 살 동생이 있는데, 어느 여름날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아이스크림 할아버지가 내가 좋아하던 크림을 아이스크림 위에 쌓다가 싸이펀이 폭발한 뒤부터 동생 질은 웃음을 잃는다. 나는 동생의 웃음을 되찾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했다.
소녀의 삶에서 슬픈 일이 동생의 잃어버린 미소 하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녀는 하이에나로부터 동생을 지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총명한 소녀의 성장이야기인 줄 알았던 소설이 이렇게 고통스럽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난 소녀와 함께 숲 속에서 깊은 어둠 속을 달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소녀가 흘리지 못하는 눈물을 흘렸다. 결국 하이에나는 사라졌지만, 그리고 앞으로 소녀는 괜찮을 테지만 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하이에나들을 알기에, 한동안 슬플 것 같다. 이제 진짜 삶(La vraie vie)이다.
15. 제인 에어 1,2(샬럿 브론테, 유종호 역. 민음사. 2004. 447쪽, 437쪽)
: 너무나 유명한 줄거리는 생략. 어릴 때 축약본으로 읽었는데, 로체스터가 딱히 멋지지가 않았다. 어릴 때는 그가 못생겨서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성격 완전 별로. 너무 독선적이고 뻔뻔하다. 하지만 자존감 강하고 심지 굳은 제인은 멋있다. 어릴 땐 그런 생각 못했었는데. 로맨스 소설로서는 완벽하다고까지 할 수 있겠다. 비록 제인이 로체스터를 사랑하게 된 데에는 그녀의 세상이 좁았던 이유가 크다고 생각하지만. 로맨스 소설로서 완벽하다고 하는 데에는 잘 짜인 플롯말고도 수많은 아름다운 대사들도 그 몫을 했다. 어쩌면 신데렐라 이야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고, 전에 읽은 『아그네스 그레이』가 더 현실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지만 확실이 이 소설은 소녀들의 마음 속을 파고들 만 하다.
16. 바르네트 탐정 사무소(모리스 르블랑, 바른번역. 코너스톤. 2015. 248쪽)
: 아르센 뤼팽 시리즈 14권. 연작으로 8편이 있다. 뤼팽은 여기서 짐 바르네트라는 이름으로 탐정 사무소를 운영한다. 그동안 뤼팽의 이야기에서 여성을 빼놓고는 아예 전개가 불가능했지만 여기서 여성은 그저 의뢰인이거나 범인일 뿐이다. 그리고 그동안 여성을 위해 무료봉사하던 뤼팽은 여기서야말로 '괴도'라는 자신의 닉네임에 충실하게 조금은 비열한 방법으로 착실하게 자산을 불린다. 늘 그렇듯 모든 이야기들이 재미있었고 뤼팽 자신의 정체성을 환기해 줘서 좋았다.
17. 스토너(존 윌리엄스, 김승욱 역. RHK. 2015. 395쪽)
18. 성스러운 세 도시(J.M.G. 르 클레지오, 홍상희 역. 문학동네. 2001. 86쪽)
: 소설이라기보다는 시라 해야 할 글들. 뭔가를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려 하기 보다는 그냥 느끼면서 읽었다. 난해하기도 했고, 환상적이기도 했다. 다시 읽는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머리가 복잡할 때 읽으면 잠시나마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다. 존재하지 않는 그 곳들로.
19. 한 줌의 먼지(에벌린 워,안진환 역. 민음사. 2010. 363쪽)
: 토니 라스트는 자신이 나고 자란 헤턴 저택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아내 브렌다는 그냥 관성적으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어느 주말 백수 한량 존 비버가 저택을 방문하고, 부부는 여느 때처럼 심드렁하게 손님을 맞이하지만 토니 대신 비버와 시간을 보낸 브렌다는 런던에 아파트를 얻기로 결정한다.
1930년대 상류층을 풍자했다고는 하는데 난 웃기기보다는 많이 안쓰러웠다. 특히 결말이. 결말은 토니가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음을 알았지만 난 다른 결말이 더 좋았다. 문학적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처음의 결말을 유지하는 게 맞겠지만, 나같은 사람도 많으니 또다른 결말을 덧붙여 놓은 거겠지. 원래의 결말이 아니어도, 그들의 안간힘은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 즐거움이라고는 사교계의 연애(불륜) 사건들 뿐이고, 이혼을 허가받기 위해 사립탐정까지 고용해서 연극을 해야하며, 개인적인 비극보다는 예의차리는 데 더 신경써야 하는 위선 가득한 삶. 권선징악이라든가 주위의 비극을 통한 깨달음 따위는 없다. 이런 자신들이 안쓰러움은 당시에도 현대에도 그 안에서는 결코 모를 것이다.
20. 비밀의 저택(모리스 르블랑, 바른번역. 코너스톤. 2015. 280쪽)
:아르센 뤼팽 시리즈 15권. 보통 뤼팽 시리즈는 순서 상관없이 읽어도 좋지만 이 작품은 14권을 읽고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전권에서 등장한 뤼팽의 새로운 희생양(?)인 경찰청의 베슈 형사가 여기서도 활약한다, 뤼팽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로. 파리에서 자선 패션쇼가 열린다. 여배우 레진은 막대한 금액의 다이아몬드 장식을 달고 있다가 패션쇼 도중 벌어진 화재 소동 중에 자동차로 납치되어 다이아몬드를 뺏긴다. 얼마 후 아름다운 모델 아르네트도 같은 방법으로 납치되었다가 간신히 빠져나오는데, 그녀들이 납치됐던 장소로 멜라마르 백작의 저택이 지목된다. 데느리스 남작(뤼팽)은 다이아몬드를 되찾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기운을 되찾게 해주는 가벼운 마사지(24쪽)'를 읽고 빵 터졌다. 역시 뤼팽! '비밀의 저택'이라는 제목도 좋지만 '저택의 비밀'이라고 바꿔도 무방할 것 같다. 역시 기발하다. 게다가 보장된 해피엔딩까지. 좋다.
21. 자에는 자로(윌리엄 셰익스피어, 김성환 역. 동인. 2014. 216쪽)
: 비엔나의 통치자 공작은 인품이 강직한 최측근 안젤로에게 시정을 맡기고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사실은 수도사로 변장을 하고 비엔나의 민심을 알아보려 하는 것. 안젤로는 권한 대행을 맡자마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법을 근거로 연인과 혼전 임신을 저지른 클로디오를 구속하고 사형일을 잡는다. 클로디오의 누이이자 견습수녀인 이사벨라는 오빠를 구명하고자 한다.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됐었다. 작품의 발표 시기가 셰익스피어가 한창 활발하게 활동할 때여서 기량도 출중할 거라고 (혼자 근거없이)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역자 서문에서 스포일러가 딱! 아무리 유명한 작품이라도 - 내 입장에선 저자의 다른 작품보다 더 유명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 내용을 그렇게 얘기하다니.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내용만으로 읽는 건 아니지만. 내용만으로야 어쩌면 뻔할 수도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누구일지 처음부터 명백하니까. 하지만 어떻게 풀어나갈지, 그 전개를 읽는 것도 흥미롭지 않은가.
저자의 작품들 중 풍자에 있어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부족하지 않다. 사실 이 작품이 이제껏 읽은 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래 생각을 하게 했다. 원리원칙을 지키는 건 나쁘지 않다. 죽은 법도 법은 법이니까. 물론 죽은 법을 방치한 통치자의 게으름을 비난할 수는 있겠지. 다만 이 작품에서 안젤로는 아시타비가 너무 심하고, 클로디오는 인간적이긴 하지만 좀더 고결했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리고 이사벨라는, 역자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지만 난 신념과 자존감을 굳건히 지키는 멋진 캐릭터로 보았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의 대답까지 명확히 보여줬으면 좋았을 걸. 그런 면에서, 그녀의 침묵을 거절로 보는 페미니즘 비평 맘에 들었다.
22. 테레즈 라캥(에밀 졸라, 박이문 역. 문학동네. 2009. 360쪽)
: 센 강 퐁네프 파사주. 굴 속처럼 습하고 어두운 이 곳 한구석의 잡화점. 테레즈는 이 곳에서 고모이자 시어머니인 라캥 부인과 허약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녀의 단조롭고 우울한 생활에 변화가 생긴 건 남편 카미유가 어린 시절 친구 로랑과 우연히 마주친 후. 로랑은 순전히 재미로 그녀를 유혹하고 테레즈는 그동안 그녀 안에서 잠들어 있던 욕망을 마음껏 분출한다.
다들 알다시피 이 책에서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탄생했다. 영화를 먼저 봤기에 다행이었다.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영화가 별로 인상깊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의아했던 부분이 책을 읽으며 완전히 해소됐다. 평범하지만 욕망이 가득한 인간들이 범죄를 저지른 후의 정말 날것 그대로의 죄책감과 자기 합리화를 읽을 수 있었다. 세상의 어떤 욕망도 손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충족시킬 가치는 없다. 사랑 혹은 정욕의 허상.
23. 조야의 아파트. 질주(미하일 불가코프, 김혜란 역. 책세상. 2005. 366쪽)
: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두 편의 희곡. <질주>가 더 내 취향이었다. <조야의 아파트>는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 각 개인별로 할당된 주거 면적을 불법적으로 늘려 사용하려는 조야와 그 주변인들의 난리법석을 그린다. 매일밤 파티(와 매춘)을 벌이고 관리자에게 뇌물을 주고 마약을 흡입하는 인간들이 벌이는 소동이 실소를 자아낸다. 우울했던 내게는 실소도 웃음이라 꽤 즐겁게 읽혔다. '여덟 개의 꿈'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질주>는 내전 당시 백군을 풍자한 작품이라고 하지만 내게는 그저 안쓰러운 모습들이었다. 부제에 따라 장의 구분을 '..번째 꿈'으로 구분했는데, 내게는 첫 번째 꿈이 가장 꿈처럼 읽혔고 가장 좋았다.
: 미키 할러 시리즈 3권. 전권에서 안면을 튼 미키와 해리 보슈가 이번 작품에서는 의기투합한다. 미키의 전처이자 검사인 매기까지. 24년 전 열두 살 소녀를 납치 살해한 혐의로 복역하고 있는 제섭. 최근 그 사건의 증거물인 소녀의 드레스에서 양아버지의 DNA가 발견되었고, 파기환송된 이 사건을 다시 기소하기 위해 검찰에서 미키에게 특별 검사 자리를 제안한다. 미키는 해리 보슈를 수사관으로, 매기를 파트너로 임명하는 조건으로 수락한다.
범인의 무죄여부 보다는 수임료와 승리 자체가 중요한 미키가 검사측이 된 건 약간은 어색하다. 해리 보슈 시리즈였다면 정의구현을 기대하며 무조건 해리 편을 들어가며 읽었겠지만 미키 할러 시리즈는 정의보다는 승리를 기대하며 집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선 승리가 곧 정의구현이다. 그래서 범인의 마지막이 정말 맘에 안 들었다. 그래도 두 이복형제의 협업은 흐뭇했다. 특히 두 사촌 소녀의 우정이.
2. 레베카(대프니 듀 모리에, 이상원 역. 현대문학. 2014. 584쪽)
3. 탄제린(크리스틴 맹건, 이진 역. 문학동네. 2020. 372쪽)
: '그 사건' 이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집안에서 정해준 사람과 결혼해 모로코에 온 앨리스. 적응하려 애쓰지만 원래도 심약했던 그녀는 밖으로 나갈 수 조차 없다. 갑자기 그녀를 찾아온 베닝턴대학 시절의 룸메이트 루시. 앨리스는 얼떨결에 그녀를 맞아들인다.
스스로를 금치산자로 유폐시켜버린 여자들은 늘 나를 짜증나게 하면서도 내 맘을 쓰이게한다.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난 늘 그녀들이 제발 스스로의 발걸음을 내딛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하지만 소설 속 그녀들은 결코 그러지 못한다. 그러기에 난 루시가 앨리스의 구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프롤로그를 애써 외면하며.
잘 쓴 소설이다. 특히 문장이 정말 탄탄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난 그녀의 세계가 이렇게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뻔한 반전이나마 바랐다. 하지만 1950년대라면, 앨리스처럼 키워졌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정말 무섭고 무서운 이야기였다. 가스라이팅의 교과서.
4. 천 개의 파랑(천선란. 허블. 2020. 376쪽)
: 경마의 기수는 사람이 아닌 휴머노이드이다. 경마만을 위해 가볍고 단순하게 만들어진. 많은 부분에서 사람 대신 휴머노이드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때문에 고등학생 연재도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던 편의점에서 잘린다. 소방관이었던 아버지는 어릴 때 순직하셨고 걷지 못하는 언니와 식당일 때문에 늘 피곤한 엄마와 살고 있다. 어릴 때부터 로봇과학에 소질이 있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외면하고 있는 연재에게 한 휴머노이드가 나타난다.
소프트웨어 오류로 감정을 갖게 된 휴머노이드와 로봇에 진심인 소녀는 클리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이렇게 푸릇하게 풀어낸 작가의 솜씨가 너무나 훌륭하다. 동물 복지와 장애인에 대한 시선, 최소한의 권리조차도 자본주의 논리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근미래라고는 하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장애인과 동물에 대한 태도가 이와 같다면 절망적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장애가 극복되기 쉬운 환경이라면, 은혜처럼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게 이중 삼중의 차별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게. 그래도 난 작가가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 속이나마, 좋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니까.
5. 화이트 호스(강화길. 문학동네. 2020. 300쪽)
: 국내의 젊은 작가를 처음 읽을 때, 한 번씩 망설이게 된다. 대중성을 믿고 따랐다가 실망했던 게 몇 번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고 읽어야 할 작품들은 너무 많다. 이 작가도 도서관에서 자주 눈에 띄었으나 몇 번이나 망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집어들었고, 결과적으로 참 잘한 일이었다.
가부장제 하의 여성에 관한 서사는 뻔히 흐르기 쉽다. 제사상을 앞에 두고서나 폐쇄적인 작은 농촌 마을에서라면, 혹은 연쇄 실종 사건이 일어난 동네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라면 더더욱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작가는 그 이야기를 결코 뻔하게 풀지 않는다. 내용을 요약하는 건 의미 없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서술의 방식이, 대놓고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명확한 주제 의식이 정말 유니크하다. 이제라도 이 작가를 읽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6. 허풍선이의 죽음(M.C. 비턴, 전행선 역. 현대문학. 2018. 364쪽)
: 해미시 멕베스 시리즈 12권. 오래 기다려서 읽었다. 로흐두 마을에 다시 시체가 발견됐다. 죽은 사람은 역시 마을의 비호감 술꾼. 최근에 이주한 그는 자신이 미국에서 유명 레슬러였으며 전세계 오지를 다닌 모험가라며 마을 사람들에게 술을 산다. 하지만 거만하고 남을 모욕하는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결국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된다.
그냥 원제대로 마초맨의 죽음이라고 하는 게 더 좋았을 걸. 오랜만에 읽어서 데이비스 총경의 적대감에 놀랐다. 전권에서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해미시 편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공정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해미시는 여전하다. 가난하지만 성실한 면도 있고, 의뭉스럽기도 하면서 적당히 이기적이고. 프리실라와의 사이도 여전히 애매하다. 역시나 끼어드는 인간들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새로운 여인도 등장한다. 살인 사건은 늘 그렇듯 꽤나 간단하게 풀린다. 하지만 스케일은 꽤나 커졌다. 다음 권에 대한 기대감도.
7.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정유정, 지승호. 은행나무. 2018, 264쪽)
: '작가'로서의 정유정 자신이 이야기. 인터뷰이로서 자신의 '영업비밀'을 가감없이 내놓는다. 다른 인터뷰 등에서 읽은 적 있는 얘기도 있었고, 처음 듣는 얘기도 있었다. 난 작가가 될 생각은 없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팬심으로 읽었지만 작가 지망생이라면 밑줄 그으면서 읽을 만한 얘기들이 많았다. 특히 재밌었던 건 『7년의 밤』의 원제. 작가는 '해피 버스데이'로 하려 했다고. 그건 내가 책장을 덮으며 서원에게 마지막으로 속삭여 준 말이었다.
8. 파묻힌 거짓말(크리스티나 올손, 장여정 역. 북레시피. 2019. 528쪽)
: 시리즈 첫 권이라길래, 저자가 스웨덴 범죄 소설의 여왕이라길래 읽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스릴러는 아니었다. 맘만 먹으면 어떤 여자든 유혹할 수 있는 변호사 마틴 베너. 옛 연인인 루시와는 함께 로펌을 운영하는 파트너이자 가끔 함께 밤을 보내는 사이이다. 어느 날 그에게 바비라는 남자가 찾아와 5명을 살해하고 자살한 자신의 여동생 '사라 텍사스'는 범인이 아니라며 여동생의 억울함을 풀고 여동생이 살해했다고 알려진 조카도 찾아달라고 한다.
범죄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소설 첫머리에서 지 무덤을 지가 파고 들어간다. 내가 초반에 떠올린 이 문장을 주인공도 89쪽에서 스스로 인정한다. 이야기는 스웨덴을 벗어나 미국으로까지 흘러가고, 예상보다 꽤 복잡하게 전개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가 꽤 훌륭하긴 했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안 좋아한 건 전형적이라는 점 말고도 마틴의 조사로 피해가 복구될 수혜자가 없다는 점 때문이다. 사라는 이미 죽었고 바비는 너무 비호감이었다. 마틴(+루시)만 죽어라 고생하며 생고생하고 그 와중에 애먼 사람들만 죽어나간다. 게다가 이 모든 이야기는 시리즈의 다음 권을 위한 밑밥일 뿐. 다른 날처럼 책을 한 권 더 들고 나왔다면 이 책 안 읽었을 거다. 다음 권도 읽을지 말지 아직 결정 못 했다.
9. 빌라 아말리아(파스칼 키냐르, 송의경. 문학과지성사. 2012. 368쪽)
: 작곡가 안은 함께 살고 있는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잠시 절망하지만 곧 주변 정리를 시작한 안.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판 후 결별을 인정하지 않는 남자친구의 짐까지 정리하고 초등학교 동창인 조르주의 집 근처에 머물다가 문득 이탈리아로 떠난다.
꽤나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꽤나'라는 부사를 붙인 건, 중간중간 쌩뚱맞은 설정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령 뒷부분의 조르주의 갑작스러운 ** 이라든가... 하지만 그게 삶인걸. 하나의 문을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완전히 닫아버리고 다른 문을 활짝 여는 여성의 이야기는 늘 내게 불안함과 부러움을 함께 준다. 난 절대 하지 못할 선택이기에. 안은 빌라 아말리아에서 편안함과 아픔, 만남과 이별을 모두 겪지만 그게 꼭 그 곳이어야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곳이 아니었다면 안의 인생은 또 다르게 흘러갔으리라.
불문학의 정석 같은 작품이라고, 읽는 내내 생각했다. 내가 뭘 알아서 하는 얘긴 아니다. 다만 프랑스 문학이라는 걸 떠올렸을 때 기대하는 모든 아름다움이 이 안에 있다. 이 작가를 계속 읽어야 할 이유이다.
10. 진짜 그런 책은 없는데요(젠 캠벨,더 브러더스 매클라우드 그림,노지양 역. 현암사. 2019. 168쪽)
: 서점 점원인 저자가 겪은 특이한 손님들 이야기. 짤막한 에피소드들만 있어서 다 읽는 데 한 시간도 안 걸렸다. 블로그 포스팅 같은 느낌. 다 재밌었지만 인상 깊었던 건 셰익스피어와 디킨스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손님. 얼른 그들이 죽어야 더이상 신간이 안 나올 거라고... 하아...
11. 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카린 랑베르, 류재화 역. 레드스톤. 2016. 240쪽)
: 남자라면 수리공이나 피자 배달부도 금지인 완벽한 금남의 집. 대신 월세는 싸다. 꼭대기 층에는 여왕이 거주하고 모두 네 명의 세입자가 있다. 그 중 한 명을 대체하며 들어온 줄리엣. 아직도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며 연애에 몸달아하는 아가씨다. 나머지는 모두 그럴만한 사연이 있는데, 줄리엣만 완전 천방지축이다. 지 발로 기어들어와 놓고 금남이라고 집주인에게 짜증내고 다른 세입자들에게 '언니들은 후회할 것'이라고 말하는 줄리엣은 진짜 비호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비아냥대는 친구한테 여왕과 '언니들'이 얼마나 독립적으로 훌륭하게 사는지 역설하질 않나. 진짜 칙릿이며 로맨스 소설 웬만큼 읽어왔는데 이렇게 짜증나고 일관성 없는 캐릭터 오랜만이다. 출근길에 책은 꼭 두 권 이상 들고 다니자.
12. 폴링 인 폴(백수린. 문학동네. 2014. 278쪽)
: 더이상 소통의 수단이 되지 못하는 언어. 일곱 편의 단편들이 있는데 다 좋았다. 남들이 다 하는, 다 아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순간의 날카로운 반짝임이 있다. 가령 리가 고궁의 이방인에게 적극성을 넘어 근거없는 성적 자신감을 보이다가 역습을 당하는 장면이라든가(<까마귀들이 있는 나무>), 화자가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얘기한 날이 프랑스에선 만우절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고국에선 아직 만우절이었다든지(<거짓말 연습>). 연인의 나라에서 비자를 연장해가며 연인에게 얹혀사는 남자의 이야기라든가 이혼 위기에 유학길에 오른 여자의 이야기는 새로울 게 없지만 그 이야기를 그렇게 발전시킨 건 이 작가만의 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작가, 너무 늦게 읽었다.
13.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모리스 르블랑, 바른번역. 코너스톤. 2015. 340쪽)
: 라울 드 리메지 남작의 모험. 물론 그는 뤼팽이다. 13권. 라울은 우연히 아름다운 영국 아가씨를 어떤 남자가 뒤쫓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을 따라간다. 어느 카페에서 영국 아가씨와는 대조되는 분위기의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를 보게 된 라울은 초록 눈동자 아가씨와 노신사를 아까의 남자가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도와주지만 그 사이 그들은 사라지고, 다시 영국 아가씨를 좇던 라울은 그녀를 따라 열차에 올랐다가 살인 사건에 휘말린다.
이 작품에서야말로 뤼팽의 바람둥이 기질이 절정에 오른 듯 하다. 무턱대고 길에서 만난 아가씨를 구해주고자 하는 거야 늘 있던 일이지만, 자신을 피하기만 하는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를 끝까지 도와주고 구해주는 라울의 맹목적인 사랑과 믿음은 새삼 놀랍다. 게다가 그 달콤함은 정말이지...264쪽 읽으면서 정말 숨넘어갈 뻔 했다, 너무 달콤해서. 그냥 침을 꼴깍 삼켰는데 설탕맛이 났어... 하지만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는 그를 꿰뚫어 보았고, 아마도 그래서 시리즈의 다른 이야기도 전개될 수 있었겠지.
라울의 달콤함만 말했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라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를 둘러싼 20여 년에 걸친 유산과 애증의 복잡한 이야기이다.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14. 여름의 겨울(아들린 디외도네, 박경리 역. 아르테. 2020. 284쪽)
: 자신만의 싸움을 시작한 소녀의 성장기. 예쁜 표지에 이끌려서 선택했는데 이렇게 아픈 이야기일 줄 몰랐다. 열 살 '나'의 집에는 시체들의 방이 있다. 방을 가득 채운 박제된 동물들은 모두 아버지가 사냥해서 잡은 것들이다. 나에겐 네 살 동생이 있는데, 어느 여름날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아이스크림 할아버지가 내가 좋아하던 크림을 아이스크림 위에 쌓다가 싸이펀이 폭발한 뒤부터 동생 질은 웃음을 잃는다. 나는 동생의 웃음을 되찾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했다.
소녀의 삶에서 슬픈 일이 동생의 잃어버린 미소 하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녀는 하이에나로부터 동생을 지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총명한 소녀의 성장이야기인 줄 알았던 소설이 이렇게 고통스럽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난 소녀와 함께 숲 속에서 깊은 어둠 속을 달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소녀가 흘리지 못하는 눈물을 흘렸다. 결국 하이에나는 사라졌지만, 그리고 앞으로 소녀는 괜찮을 테지만 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하이에나들을 알기에, 한동안 슬플 것 같다. 이제 진짜 삶(La vraie vie)이다.
15. 제인 에어 1,2(샬럿 브론테, 유종호 역. 민음사. 2004. 447쪽, 437쪽)
: 너무나 유명한 줄거리는 생략. 어릴 때 축약본으로 읽었는데, 로체스터가 딱히 멋지지가 않았다. 어릴 때는 그가 못생겨서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성격 완전 별로. 너무 독선적이고 뻔뻔하다. 하지만 자존감 강하고 심지 굳은 제인은 멋있다. 어릴 땐 그런 생각 못했었는데. 로맨스 소설로서는 완벽하다고까지 할 수 있겠다. 비록 제인이 로체스터를 사랑하게 된 데에는 그녀의 세상이 좁았던 이유가 크다고 생각하지만. 로맨스 소설로서 완벽하다고 하는 데에는 잘 짜인 플롯말고도 수많은 아름다운 대사들도 그 몫을 했다. 어쩌면 신데렐라 이야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고, 전에 읽은 『아그네스 그레이』가 더 현실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지만 확실이 이 소설은 소녀들의 마음 속을 파고들 만 하다.
16. 바르네트 탐정 사무소(모리스 르블랑, 바른번역. 코너스톤. 2015. 248쪽)
: 아르센 뤼팽 시리즈 14권. 연작으로 8편이 있다. 뤼팽은 여기서 짐 바르네트라는 이름으로 탐정 사무소를 운영한다. 그동안 뤼팽의 이야기에서 여성을 빼놓고는 아예 전개가 불가능했지만 여기서 여성은 그저 의뢰인이거나 범인일 뿐이다. 그리고 그동안 여성을 위해 무료봉사하던 뤼팽은 여기서야말로 '괴도'라는 자신의 닉네임에 충실하게 조금은 비열한 방법으로 착실하게 자산을 불린다. 늘 그렇듯 모든 이야기들이 재미있었고 뤼팽 자신의 정체성을 환기해 줘서 좋았다.
17. 스토너(존 윌리엄스, 김승욱 역. RHK. 2015. 395쪽)
18. 성스러운 세 도시(J.M.G. 르 클레지오, 홍상희 역. 문학동네. 2001. 86쪽)
: 소설이라기보다는 시라 해야 할 글들. 뭔가를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려 하기 보다는 그냥 느끼면서 읽었다. 난해하기도 했고, 환상적이기도 했다. 다시 읽는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머리가 복잡할 때 읽으면 잠시나마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다. 존재하지 않는 그 곳들로.
19. 한 줌의 먼지(에벌린 워,안진환 역. 민음사. 2010. 363쪽)
: 토니 라스트는 자신이 나고 자란 헤턴 저택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아내 브렌다는 그냥 관성적으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어느 주말 백수 한량 존 비버가 저택을 방문하고, 부부는 여느 때처럼 심드렁하게 손님을 맞이하지만 토니 대신 비버와 시간을 보낸 브렌다는 런던에 아파트를 얻기로 결정한다.
1930년대 상류층을 풍자했다고는 하는데 난 웃기기보다는 많이 안쓰러웠다. 특히 결말이. 결말은 토니가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음을 알았지만 난 다른 결말이 더 좋았다. 문학적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처음의 결말을 유지하는 게 맞겠지만, 나같은 사람도 많으니 또다른 결말을 덧붙여 놓은 거겠지. 원래의 결말이 아니어도, 그들의 안간힘은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 즐거움이라고는 사교계의 연애(불륜) 사건들 뿐이고, 이혼을 허가받기 위해 사립탐정까지 고용해서 연극을 해야하며, 개인적인 비극보다는 예의차리는 데 더 신경써야 하는 위선 가득한 삶. 권선징악이라든가 주위의 비극을 통한 깨달음 따위는 없다. 이런 자신들이 안쓰러움은 당시에도 현대에도 그 안에서는 결코 모를 것이다.
20. 비밀의 저택(모리스 르블랑, 바른번역. 코너스톤. 2015. 280쪽)
:아르센 뤼팽 시리즈 15권. 보통 뤼팽 시리즈는 순서 상관없이 읽어도 좋지만 이 작품은 14권을 읽고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전권에서 등장한 뤼팽의 새로운 희생양(?)인 경찰청의 베슈 형사가 여기서도 활약한다, 뤼팽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로. 파리에서 자선 패션쇼가 열린다. 여배우 레진은 막대한 금액의 다이아몬드 장식을 달고 있다가 패션쇼 도중 벌어진 화재 소동 중에 자동차로 납치되어 다이아몬드를 뺏긴다. 얼마 후 아름다운 모델 아르네트도 같은 방법으로 납치되었다가 간신히 빠져나오는데, 그녀들이 납치됐던 장소로 멜라마르 백작의 저택이 지목된다. 데느리스 남작(뤼팽)은 다이아몬드를 되찾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기운을 되찾게 해주는 가벼운 마사지(24쪽)'를 읽고 빵 터졌다. 역시 뤼팽! '비밀의 저택'이라는 제목도 좋지만 '저택의 비밀'이라고 바꿔도 무방할 것 같다. 역시 기발하다. 게다가 보장된 해피엔딩까지. 좋다.
21. 자에는 자로(윌리엄 셰익스피어, 김성환 역. 동인. 2014. 216쪽)
: 비엔나의 통치자 공작은 인품이 강직한 최측근 안젤로에게 시정을 맡기고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사실은 수도사로 변장을 하고 비엔나의 민심을 알아보려 하는 것. 안젤로는 권한 대행을 맡자마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법을 근거로 연인과 혼전 임신을 저지른 클로디오를 구속하고 사형일을 잡는다. 클로디오의 누이이자 견습수녀인 이사벨라는 오빠를 구명하고자 한다.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됐었다. 작품의 발표 시기가 셰익스피어가 한창 활발하게 활동할 때여서 기량도 출중할 거라고 (혼자 근거없이)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역자 서문에서 스포일러가 딱! 아무리 유명한 작품이라도 - 내 입장에선 저자의 다른 작품보다 더 유명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 내용을 그렇게 얘기하다니.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내용만으로 읽는 건 아니지만. 내용만으로야 어쩌면 뻔할 수도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누구일지 처음부터 명백하니까. 하지만 어떻게 풀어나갈지, 그 전개를 읽는 것도 흥미롭지 않은가.
저자의 작품들 중 풍자에 있어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부족하지 않다. 사실 이 작품이 이제껏 읽은 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래 생각을 하게 했다. 원리원칙을 지키는 건 나쁘지 않다. 죽은 법도 법은 법이니까. 물론 죽은 법을 방치한 통치자의 게으름을 비난할 수는 있겠지. 다만 이 작품에서 안젤로는 아시타비가 너무 심하고, 클로디오는 인간적이긴 하지만 좀더 고결했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리고 이사벨라는, 역자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지만 난 신념과 자존감을 굳건히 지키는 멋진 캐릭터로 보았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의 대답까지 명확히 보여줬으면 좋았을 걸. 그런 면에서, 그녀의 침묵을 거절로 보는 페미니즘 비평 맘에 들었다.
22. 테레즈 라캥(에밀 졸라, 박이문 역. 문학동네. 2009. 360쪽)
: 센 강 퐁네프 파사주. 굴 속처럼 습하고 어두운 이 곳 한구석의 잡화점. 테레즈는 이 곳에서 고모이자 시어머니인 라캥 부인과 허약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녀의 단조롭고 우울한 생활에 변화가 생긴 건 남편 카미유가 어린 시절 친구 로랑과 우연히 마주친 후. 로랑은 순전히 재미로 그녀를 유혹하고 테레즈는 그동안 그녀 안에서 잠들어 있던 욕망을 마음껏 분출한다.
다들 알다시피 이 책에서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탄생했다. 영화를 먼저 봤기에 다행이었다.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영화가 별로 인상깊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의아했던 부분이 책을 읽으며 완전히 해소됐다. 평범하지만 욕망이 가득한 인간들이 범죄를 저지른 후의 정말 날것 그대로의 죄책감과 자기 합리화를 읽을 수 있었다. 세상의 어떤 욕망도 손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충족시킬 가치는 없다. 사랑 혹은 정욕의 허상.
23. 조야의 아파트. 질주(미하일 불가코프, 김혜란 역. 책세상. 2005. 366쪽)
: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두 편의 희곡. <질주>가 더 내 취향이었다. <조야의 아파트>는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 각 개인별로 할당된 주거 면적을 불법적으로 늘려 사용하려는 조야와 그 주변인들의 난리법석을 그린다. 매일밤 파티(와 매춘)을 벌이고 관리자에게 뇌물을 주고 마약을 흡입하는 인간들이 벌이는 소동이 실소를 자아낸다. 우울했던 내게는 실소도 웃음이라 꽤 즐겁게 읽혔다. '여덟 개의 꿈'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질주>는 내전 당시 백군을 풍자한 작품이라고 하지만 내게는 그저 안쓰러운 모습들이었다. 부제에 따라 장의 구분을 '..번째 꿈'으로 구분했는데, 내게는 첫 번째 꿈이 가장 꿈처럼 읽혔고 가장 좋았다.



덧글
이요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즐거운 독서 생활도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