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독서 목록 Yujin's Book Story

1. 드롭(마이클 코넬리, 한정아 역. RHK. 2018. 443쪽)
: 해리 보슈 시리즈 15편. 부제가 '위기의 남자'여서 해리가 또 음모에 휘말렸나 걱정하며 펼쳤다. 미제사건 전담밤의 해리는 DNA 증거가 최근 사건의 전과자 정보와 일치하는 22년 전 강간살인 사건의 재조사를 맡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윗선의 호출을 받는데, 바로 해리의 앙숙이자 시의원 어빙의 아들이 호텔에서 추락사 한 사건을 조사하라는 것. 이 두 사건을 조사하면서 또한 해리는 일명 DROP으로 정년퇴직을 연장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두 가지 사건을 모두 핸들하는 해리는 역시 능력자. 어느 한 쪽도 소홀하지 않는 건 해리가 피해자를 진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해리가 은퇴 시한을 앞당길까 고민하는 걸 보며 이 시리즈가 꽤 오래 진행되어왔고 해리도 많이 늙었구나 싶어서 조금 숙연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미래의 시민을 키우고 있었다... (중략) 그러나 보슈는 미래의 전사를 키우고 있었다'(346쪽)는 문장을 읽으며 갑자기 마음이 확 편해졌다. 매디 보슈 시리즈를 기대하며.


2. 호랑이 이빨(모리스 르블랑, 바른번역. 코너스톤. 2015. 608쪽)
: 오랜만에 프랑스로 돌아온 돈 루이스 페레나. 친구 모닝턴의 유언장이 공개되고, 돈 루이스는 유언 집행인이 된다. 모닝턴의 유산 상속인들 중 1순위였던 포빌에게서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고 다음 날이 되면 증거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쪽지가 도착하고, 돈 루이스와 경찰청의 마즈루 형사는 포빌 부자를 밤새 지키기로 하지만 그들은 독살 당하고, 정원에서 이빨 자국이 새겨진 사과가 발견된다.

뤼팽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밖에 없어서 꽤나 격정적으로 읽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사실은 조금 피곤했다. 첫 장면 배로 형사의 죽음부터 시작해서 많은 죽음들이 계속된다. 게다가 말했듯 급변하는 상황에 따라 뤼팽의 감정은 널을 뛰고, 상황은 늘 예상치 못하게 흘러 용의자는 계속 바뀐다. 솔직히 읽은 지 몇 주나 지난 지금, 범인이 누구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인상깊었던 건, 이 작품이 발표됐던 당시에는 칭송받았을 뤼팽의 '애국심'. 그는 제국주의자였다(512쪽).


3. 초판본 땅속 나라의 앨리스(루이스 캐럴. 그여름. 2016. 192쪽)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펭귄 판본으로 갖고 있는데, 초판본도 갖고 싶어서 샀고, 머리 식히려 읽었다. 저자의 친필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삽화는 아름다웠다. 저자와 리델 자매 이야기는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 책에서 앨리스 리델이 둘째였다는 걸 알게 되어 그 점도 좋았다. 아이가 셋 이상 있을 경우 둘째는 첫째나 막내에 비해 아무래도 관심의 대상에서 좀 멀어지는 경우가 잦은데 저자가 둘째에게 이 책을 선물함으로써 관심과 애정의 대상으로 지목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괜히 흐뭇했다. 물론 나 혼자만의 지레짐작일 뿐이지만.


4. 드라큘라 그의 이야기(레이몬드 맥널리, 라두 플로레스쿠, 하연희 역. 루비박스. 2005. 363쪽)
: 난 뱀파이어를 좋아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뱀파이어라는 존재의 매력에 동의할 것이다. 이 뱀파이어 캐릭터가 대중화되는 데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의 공이 크다. 그리고 이 소설의 모티브는 15세기 루마니아 왈라키아의 영주였던 블라드 체페슈로부터 왔다. 이 책은 블라드 체페슈의 일생과 그가 어떻게 뱀파이어라는 캐릭터화가 되는지를 이야기해 준다. 그의 일생과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제외한 대부분은 이래저래 알려진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이 책의 오리지널 판본이 1970년대에 첫 출간됐음을 고려해보면 그 이야기들의 출처가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다. 상당히 쉽게 읽혔다. 좋아하는 존재에 관한 책이니만큼 재밌게 읽었고, 몰랐던 역사를 알게 된 점도 좋았다.


5.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줄리언 반스, 최세희 역. 다산책방. 2016. 407쪽)
: 불가지론자 저자가 부모님과 조부모님,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죽음과 더불어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한다. 상당히 현학적이면서 저자 특유의 시니컬한 위트가 가득하다. 무신론자였던 20대의 이야기와 철학자인 형과의 대화, 불가지론자라고는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과의 죽음을 겪고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질척'대는 - 그의 형의 표현이다 - 저자의 모습도 보여진다.

사실 죽음은 내게는 너무 추상적이다. 늘 생각하고는 있지만 입 밖에 꺼내기 힘든 단어이기도 하다. 해서 이 책을 읽으면 좀더 편안히 접근하게 될 줄 알았는데, 솔직히 얘기하자면 책 내용 따라가기에도 급급했다. 다만 쥘 르나르의 말이 인상 깊었다. "죽음과 마주할 때 우리는 어느 때보다 책에 의지하게 된다"는.


6.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레이먼드 카버, 정영문 역. 문학동네. 2005. 247쪽)
: 단편의 정수들. 저자 특유의 색이 잘 드러나있다. 삶의 한 순간들. 하지만 결코 평범하지는 않다. 생일에 사고를 당한 아이의 선주문된 케잌을 배달해야 한다면, 가진 모든 것을 앞마당에 내놓고 헐값에 팔아버려야 한다면, 친구들과 주말을 즐기러 낚시를 갔다가 시체를 발견했다면, 그리고 부부동반 모임에서 미묘한 대화들이 오고간다면. 이들 모두에게 공감이 가는 건 아니었지만 그 상황과 그 입장에 처해보지 못했으니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익숙한 듯 낯선 이야기와 사람들.


7. 웃음과 망각의 책(밀란 쿤데라, 백선희 역. 민음사. 2011. 423쪽)
: 7편의 연작 소설. 첫째 주에 노벨 문학상 발표 즈음해서 쿤데라 옹을 응원하는 의미로 읽었다. 오랜만에 읽은 저자는 내게 큰 기쁨을 주었다. 사랑 이야기들. 공산주의 체제에서 저자가 겪은 어려움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저자 자신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편안히 읽을 만 하다. 다행히 체제에서 탈출해 감시에서 벗어났지만 또다른 얽매임에 고통받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하는 사람들. 곳곳에『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과 등장 인물들이 많이 있다. 안 읽을 땐 몰랐는데 읽고 나니 나 이 저자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었나보다.


8.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모리스 르블랑, 바른번역. 코너스톤. 2015. 292쪽)
: 뤼팽 시리즈 11권. 8편의 연작 단편. 오르탕스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남편과 떨어져 시숙의 성에서 지낸다. 그녀는 사랑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와 도망치려 하지만 차가 망가져 성으로 되돌아 오고, 레닌 공작과 맞닥뜨린다. 다음 날 레닌 공작과 함께 버려진 성으로 산책을 나간 오르탕스는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오르탕스가 끌리는 레닌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7가지의 모험을 그와 함께한다. 한 편 한 편이 그 자체로도 완성도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오르탕스와 레닌이 과연 앞으로 어떤 관계를 정립하게 될지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만 번역이... 시리즈가 진행될 수록 번역에 오점이 눈에 띈다.


9. 설랑(윤이형. 나무옆의자. 2017. 234쪽)
: 베스트셀러 작가 한서영. 그녀만의 독특한 시리즈 물은 알파벳을 제목으로 하는 사랑 이야기이다. 그녀는 초승달이 뜨는 삭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보름이 되면 늑대(狼)으로 변해 연인을 죽이는 꿈을 꾼 후 연인과 헤어진다. 그리고 그(혹은 그녀)의 모든 것을 작품에 쏟아 붓는 것이다. 이제는 지친 그녀에게 새로 창간하는 잡지의 편집자에게서 인터뷰 요청이 온다.

설정도 나쁘지 않았고, 내가 퀴어 문학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부류도 아닌데 왜 재미가 덜할까 생각을 하다가, 문제는 내 연애세포의 사멸이라는 걸 깨달았다. 소운 캐릭터가 내겐 너무 비호감이었다. 너무 치기어려서. 나 꼰대인가봐. 어린 애들이 객관적인 척 자기합리화하는 것도, 노골적으로 상대방 감정에 훅 다가서는 것도 별로다. 사랑 자체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못된 말 한마디만 하자면, 그 사랑도 결국 변할 것이다. 한서영이 더이상 쓸 수 없다면 혹은 더 써야 한다면.


10.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게일 허니먼,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19. 487쪽)
: 9년차 직장인 엘리너. 늘 똑같은 옷차림에 똑같은 점심을 혼자 먹으며 크로스퍼즐을 풀고, 수요일마다 엄마와 통화하며 금요일에는 피자를 먹으며 와인을 마신다. 친구도 없고 직장 동료와 어울리지도 않지만 늘 합리적으로 판단을 하고 직장 동료들의 뒷담화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어느 날 두 개의 작고 큰 사건이 생겨 그녀의 생활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사회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면 그건 타고났다기보다는 그렇게 키워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 엘리너의 경우가 그렇다. 처음에는 그녀가 조금 흥미로운 정도였다. 순도 100%의 개인주의자인 그녀가. 주위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걸 알면서도 상처받지 않는, 혹은 티 안내는 그녀의 멘탈을 닮고 싶기도 했다. 사생팬 노릇은 좀 별로였지만 그건 그녀 자신도 비호감인 걸 인정했으니까. 그런데 그녀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그녀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어찌됐든 해피엔딩이다. 그리고 삶은 계속될 것이다.


11. 음식의 위로(에밀리 넌, 이리나 역. 마음산책.2020. 368쪽)
: 저자는 쌍둥이같던 한 살 위 오빠의 자살로 멘탈이 무너져 버린다. 남자친구와 함께 사는 동안 직장을 잃고 남자친구와 그의 딸을 거둬 먹이는 데 온힘을 쏟던 저자가 흔들리자 공감 능력이 없는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무너지고, 술에 취해 충동적으로 페이스북에 자신의 상태 - 돈도, 직업도, 남자친구도, 살 곳도 없는 - 를 고백하자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위로의 댓글을 단다. 특히 자신에게 오면 음식을 해주겠다는 댓글들. 저자는 그 글들을 보며 '위로 음식' 투어를 하기로 한다.

위로 음식은 반드시 가족이나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을 필요는 없다. 또 반드시 우울할 때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먹는 음식일 필요도 없다. 또한 누군가에겐 위로 음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가족의 죽음을 직면하고 또 자신의 가족이 해체된 걸 안타까워하는 상태였기에 계속 가족의 따뜻함이 스며있는 음식들에 관심을 가진다. 특히 가족 대대로 내려오는 레시피에. 그래서 저자의 투어는 사촌이나 숙모의 집, 사촌의 사촌 집, 사촌의 이모네 동네, 사촌네 동네 등에 주로 치우쳐 있기는 하다. 사실 내가 기대한 건 그냥 개개인의 위로 음식 레시피였는데. 하지만 음식과 개인사의 치유의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잘 균형을 이룬 잘 쓴 에세이이다. 어느 한 소재에만 치우쳤으면 지루하거나 우울했을 수도 있었을 듯.


12. 바비의 분위기(박민정. 문학과지성사. 2020. 260쪽)
: 여성에게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폭력들. 가볍게 시작하지만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다. 역사적 문제와 개인, 사회 분위기와 개인, 그리고 개인사 자체가 남기는 상흔들을 딱딱하지 않게 이야기한다. 최근에 사회 현상들이나 개인의 생활을 그냥 그대로 그려내기만 하는 작가들이 꽤 주목을 받고 있는데, 전에도 늘 얘기했듯 그런 작가들의 문학성에는 늘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 작가는 현재 이 곳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있음직한 생활을 솔직히 스케치하면서 그 이야기들을 통해 더 깊은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뛰어나다. 마음이 가라앉아도 이 작가를 계속 읽어나가야 할 이유이다.


13. 제인 스틸(린지 페이, 공보경 역. 문학수첩. 2020. 593쪽)
: 빅토리아 시대. 제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영지의 별채에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엄마와 살고 있다. 본채 하이게이트하우스에 사는 숙모가 가끔 차를 마시러 초대를 하기는 하지만 숙모와 엄마는 늘 날선 대립을 하고 멍청한 사촌 에드윈의 끈적한 눈길은 짜증날 뿐이다. 어느 날 아침 엄마는 약물 과용으로 죽은 채 발견되고 제인은 기숙 학교로 보내질 위기에 처한다.

아,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제인 스틸처럼. 어설프게 못되느니 죽이고 싶은 사람 다 죽이고 -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 갖고 싶은 사람은 다 가지고. 여성 연쇄 살인범의 이야기는 늘 매혹적이다. 많이 읽어보지 못했기도 했고. 『제인 에어』를 오마주했고 작품 중 제인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기도 했는데 난 오마주한 작품들은 계속 읽어나가면서 정작 『제인 에어』는 어릴 때 읽은 희미한 느낌에만 의지해서 기억하고 있으니.

정확한 현실 인식과 빠른 판단력, 그리고 그 와중에도 잃지 않은 감수성까지, 제인 스틸의 많은 부분들을 닮고 싶게하는 매력적인 책이었다.


14. 우아한 크리스마스의 죽이는 미스터리(에드 맥베인 외, 오토 펜즐러 엮음, 이리나 역. 북스피어. 2019. 445쪽)
: 크리스마스 미스터리 앤솔러지. 이 시리즈 꽤 좋아한다. 재밌다. 다만 먼저 읽은 이 시리즈의 두 권보다 옛날 작품들이 더 많이 포함된 것 같다. 오래되어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권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아무래도 이런 앤솔러지 자체가 신선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그래도 이 책에서 가장 재밌었던 작품은 조지프 시어링의 「차이니즈 애플」. 전혀 짐작 못 했다. 사라 파레츠키와 에드 맥베인의 다른 작품들도 꼭 읽어볼 생각이다. 아, E.W.호넝을 발견한 것도 좋았다. 코난 도일의 매제가 셜록 홈즈에 맞서는 천재 도둑의 이야기를 썼다니. 모리스 르블랑만 아니었다면 호넝이 지금의 르블랑의 자리를 차지했을 수도. 번역 교정 오류는 옥에티.


15. 웰컴 홈(루시아 벌린, 공진호 역. 웅진지식하우스. 2020. 263쪽)
: 루시아 벌린의 에세이. 유작이다. 앞 부분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쓰고 있던, 살았던 집들을 중심으로 그녀의 삶을 이야기한 작품들이고 뒷부분엔 그녀의 편지 - 주로 시인 에드워드 돈 부부에게 보낸 - 들이다. 에세이의 많은 부분들이 그녀의 소설집 두 권의 단편들과 겹친다. 장면 자체가 그대로 재현되기도 하고 소설을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해하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그녀를 깊이 이해하고 많이 공감할 수 있게 한 건 뒤의 편지들. 행간마다 그녀의 외로움과 불안함이 사무친다. 자신의 글을 봐달라거나 젋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점을 희롱하듯 평가하는 에이전트와 편집자에 대해 화를 내는 등의 솔직한 이야기들을 통해 그녀의 쉽지 않았을 삶과 매일의 생활과 하루하루의 성숙을 짐작할 수 있다. 왠지 마음쓰이는 애잔한 그녀의 이야기들.


16. 소설 제주(전석순 외. 아르띠잔. 2018. 216쪽)
: 제주를 소재로 한 6명 작가의 단편 모음집. 제주에 관한 앤솔러지라고 해서 휴양지 같은 소설들만 기대한 게 조금 부끄럽게, 주제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못 쓴 글들에는 화가 났다. 그래도 역시 윤이형과 구병모의 작품은 수작이었고 전석순의 문장력도 훌륭했고 이은선도 나쁘진 않았다. 가장 좋았던 건 구병모의 「물머리」.


17. 동행(폴 오스터, 윤희기 역. 열린책들. 2000. 252쪽)
: 윌리는 반려견 미스터 본즈와 함께 고등학생 시절 은사를 찾아 가고 있다. 홈리스에 알콜중독인 윌리는 산타 클로스의 계시를 받은 이후 써놓은 자신의 소중한 원고를 은사님께 전할 생각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보물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하게 믿을 만한 사람이기에. 마침내 은사님이 사는 도시에 도착하지만 윌리는 지쳐 주저앉고, 미스터 본즈는 윌리의 죽음에 관한 꿈을 꾼다.

처음에는 이 작가의 책답지 않게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의인화된 개 이야기는 이 책이 처음 번역출간된 2000년에는 더 재밌었겠지만 현재로선 좀 식상하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곧 미스터 본즈에게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영어로 생각할 줄 아는 이 개는, 팀벅투를 잊지 않는 이 개는 자신의 여정에 독자를 끌어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은 뻔하지만 꽤 뭉클했다. '금새'는 좀 짜증났다. golden bird냐? 번역자, 교정교열자, 편집자 모두 몰랐나보다, '금세'가 맞다는 걸.


18. 인형 공장(엘리자베스 맥닐, 박설영 역. B612북스. 2020. 555쪽)
: 빅토리아 시대 런던. 아이리스는 쌍둥이 언니 로즈와 함께 설터 부인의 인형 가게에서 인형 얼굴을 그리는 일을 하고 있지만, 기회가 되면 밤에 몰래 그림을 그리며 화가의 꿈을 놓지 않는다. 한편 어릴 때부터 기형과 죽은 것들에 매혹된 박제상 사일러스는 우연히 아이리스와 마주친 뒤 그녀에게 반하고 무심결에 단골인 화가 루이가 모델을 찾는다는 말에 그녀 이야기를 꺼낸다.

『제인 스틸』보다 이 책을 먼저 읽었어야 했는데. 시대 배경이 같아서 이 책의 재미가 반감되었다.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여성 화가는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 그림 모델은 창녀 취급을 받던 시대에 아이리스의 선택과 갈등을, 그녀 스스로의 두 번의 구출을 정말 높이샀을 텐데, 앞서 읽은 제인 스틸이 워낙에 강단있고 진취적이어서 아이리스는 상대적으로 답답했다. 게다가 그녀의 연인이 너무 맘에 안 들어. 그나마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그만한 남자도 드물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어쩌면 뻔하게 흘러가는 스토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두어 문장으로 압축하면 정말 평범한 소설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좀더 명확한 에필로그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흡입력이 나쁘지 않았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도 읽어볼 생각이다.

ps. 교정교열 오류 유감.


19. 빛의 과거(은희경. 문학과지성사. 2019. 344쪽)
: 1977년 두 학기 동안 여자대학 기숙사 두 개의 방에 살았던 학생 일곱 명의 이야기. 77학번인 국문과 김유경이 2017년 대학 동창이자 오랫동안 끊기듯 이어진 친구 김희진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시작된다. 기숙사 322호에 살았던 '나' 김유경이 자신의 방 선배였던 최성옥과 절친이었던 417호의 룸메이트 김희진의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읽으며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다.

처음에는 '나'가 기숙생 일곱 명 중 누구인지, 소설을 쓴 '그녀'는 누구인지가 드러나지 않아서 짐작해 보며 읽는 재미가 있기는 했지만 소설의 내용과 화자의 기억이 교차되면서 조금 피곤했다. 화자의 기억과 해석, 그리고 그것과는 대치되는 소설 속 내용 때문에 펜이 가진 권력이란 어느 정도일까, 나라면 나의 대학 생활을 이렇게 왜곡해 놓은 소설이 있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하지만 책 막바지에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334쪽)는 희진의 말을 읽고 그간의 뾰족함이 스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비단 이 책 속의 이야기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기에. 마무리가 편했어서 이 책이 좋았다.


20. 어딘가 상상도 못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켄 리우, 정성주 엮 & 역. 황금가지. 2020. 314쪽)
: 여러 작가의 앤솔러지는 좋아하지만 한 작가의 작품들을 다른 사람이 엮은 건 - 특히 역자가 -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책은 저자가 한국판 서문을 썼고 거기에서 자신은 '도래할 리 없는 미래'를 그린다고 해서 읽었다.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작품들이 좋았다. 역자는 '초월'을 이야기했지만 내가 읽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달라도, 서로 다른 차원에 있고 다르게 시간이 흘러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랑. 에로스 뿐 아니라 부성애, 모성애, 자매애, 우정 들을 이야기하는 이 작가의 방식이 좋았다. 다만 <모든 맛을 한 그릇에―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는 좀 지루했어서, 다음 작품들은 골라 읽을 것 같다. 전작은 읽어볼 생각이다.


21. 작은 동네(손보미. 문학과지성사. 2020. 314쪽)
: 시간 강사 일을 하며 동화책 번역도 하는 '나'는 연예 기획사에 다니는 남편과 잘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작년에 돌아가신 엄마는 병원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였다. 나는 오래 전 자신과 엄마를 떠난 아버지가 할 말이 있다며 연락을 해오자 어릴 적 떠나온 작은 동네를 기억해낸다.

처음에는 그저 '아빠가 떠나기 전에 함께 살던 작은 동네의 따뜻함' 정도의 이야기인 줄 알고 시큰둥하게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손보미만의 굳건한 무엇이 있다. 무심코 깨문 밀크 초콜릿 속의 아몬드 같은. '나'를 과잉보호하는 엄마와 자신의 의지에 반해 갇혀버린 과거의 여성과 무관심 속에 잊혀진 - 어쩌면 사라진 - 여성의 이야기가, 스치듯 지나가지만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또 한 여성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써놓고 보니 초콜릿과 아몬드의 비유는 부적절한 지도.) 손보미는 단편이 장편보다 더 좋다고 한 적 있는데, 전에 읽은 『우연의 신』에서 그 생각이 바뀌었고, 이 책에서 완전히 자리잡았다.


22. 블랙박스(마이클 코넬리, 한정아 역. RHK. 2019. 415쪽)
: 해리 보슈 시리즈 16권. 1992년 LA 폭동 당시, 넘쳐나는 살인 사건들 때문에 초동수사도 제대로 못하고 넘겨버린 사건들 중 '백설공주 살인사건'이 있다. 덴마크 여기자가 폭동 지역에서 처형된 모습으로 살해되어 발견됐었고, 해리는 현장에서 탄피 하나를 발견했다. 콜드 케이스가 된 그 사건은 20년이 지난 후 같은 총으로 살해된 갱단의 정보가 넘어오자 다시 수사가 재개된다.

이로써 국내 출간된 해리 보슈 시리즈는 다 읽었다. 해리도 많이 늙었고, DROP으로 은퇴를 유예하긴 했으나 몇 년 남지 않았다. 하지만 해리의 정의를 향한 의욕과 번득이는 감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해리는 피해자와 유가족 한정 따뜻함을 충분히 드러낸다. 사건의 전말은 마음 아프지만 개자식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고, 책 속에서나마 그들이 죗값을 치러서 다행이었다.


23. 데어 벗 포 더(앨리 스미스, 서창렬 역. 민음사. 2020. 442쪽)
: 한 남자가 있다. 우연히 알게 된 어떤 남자와 함께 그 사람의 지인 집에서 열린 디너 파티에 참석했다가 디저트 시간에 그 집 게스트룸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린 마일스. 집주인은 그의 핸드폰을 뒤져 20여년 전에 그와 알고 지냈던 애나에게 연락을 한다.

마일스가 중심이 되긴 하지만, 마일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임시 영구 센터'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둔 애나가 20여년 전 글쓰기 대회에서 선발되어 유럽 여행에 가게 된 청소년들 사이에서 마일스와 친해지게 된 이야기이고, 마일스를 디너 파티에 데려간 마크의 이야기이고, 마일스가 해마다 방문했던 노부인의 이야기이고, 마일스와 쪽지를 주고 받은 옆집 소녀 브룩의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왜'가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들겠지만 이 이야기는 이 저자의 다른 이야기들처럼 그저 사람 이야기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깊은 곳에서부터 따뜻하게 올라오는.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재미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내가 이 작가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24. 대도시의 사랑법(박상영. 창비. 2019. 341쪽)
: 연작 소설집. 퀴어의 연애 이야기. 나쁘지는 않았는데 좋지도 않았다. 내 연애세포 사멸 탓이었을까? 20대 남자아이의 연애 이야기를 적은 일기를 읽는 기분이었는데 그 일기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거라서 유치하고 치기어린 느낌. 처음에는 흥미를 갖고 읽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읽기를 위한 읽기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문장력은 탄탄해서 좋았고, 첫번째 작품 「재희」의 재희 캐릭터도 맘에 들었다.


25. 초록지붕집의 마릴라(세라 매코이, 손희경 역. 클. 2020.424쪽)
: 『빨강머리 앤』은 내게 특별한 책이다. 난 그 시리즈를 끝까지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을 생각이 없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앤 시리즈의 프리퀄이자 마릴라의 이야기인 이 책을 발견했을 때는 주저없이 집어들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도 자신이 좋아했던 『빨강머리 앤』속 마릴라가 무심코 한 한마디 때문이다. 길버트의 아버지 존 블라이드와 마릴라의 이야기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마릴라의 어린 시절 프린스에드워드 섬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보여진다. 특히 당시 북미대륙의 정치 상황 - 캐나다의 영국령 독립 운동과 미국의 남북 전쟁 발발 직전의 전운 등 - 이 꽤 흥미로웠다. 이제껏 읽은 흑인 노예 탈출기에서는 캐나다가 그저 도망 노예들의 천국으로만 그려졌었는데. 마릴라의 사랑이야기는,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다시피 가슴 아프게 마무리되지만, 앤 시리즈의 완고한 모습의 마릴라의 단단한 중심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26. 두 사람의 비밀(캐런 M. 맥매너스, 이영아 역. 현암사. 2020. 384쪽)
: 열일곱 살 쌍둥이 엘러리와 에즈라는 엄마가 약물치료센터에 들어가 있는 넉 달 동안 할머니와 살기 위해 엄마의 고향인 에코리지로 온다. 23년 전에 세라 이모가 실종됐고 5년 전에는 엄마의 베이비시터였던 멜러리의 딸이자 홈커명 여왕이었던 레이시가 살해된. 평소에 살인 사건에 관심이 많던 엘러리는 마을의 첫 행사에 참석했다가 레이시 사건의 주 용의자였던 데클런의 동생 맬컴과 마주치는데, 맬컴의 손에는 페인트 통이 들려있고 벽에는 홈커밍의 여왕을 노리는 협박 문구가 씌여 있다.

이야기는 엘러리와 맬컴의 시각을 번갈아 보여주며 진행된다. 그래서 더더욱 범인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스포일러일 수도 있겠지만 한마디 귀띔하자면, 엘러리는 추리 실력이 꽝이다. 엘러리의 시각을 따라가다보면 엉뚱한 사람만 계속 의심하게 된다. 물론 그게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난 엘러리와 다른 용의자 리스트를 갖고 있었단 말이다. 그럼에도 범인은 전혀 짐작 못했던 사람이었고, 제목은, 이 책의 수많은 '두 사람'들 - 여러 커플들, 쌍둥이, 친구들 - 중 특히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비밀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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