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독서 목록 Yujin's Book Story

1. 조용한 아내(A.S.A. 해리슨, 박현주 역. 엘릭시르. 2020. 431쪽)
: 심리상담가 조디는 토드의 아내로 20년이 넘게 살았다. 토드가 몇 번의 불륜을 저지르는 걸 알았지만 그냥 넘겨버리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토드의 불륜 상대는 토드의 절친의 대학생 딸이었고, 그녀는 조디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임신을 했다고 알려왔다.

스릴러라기 보다는 아들러 심리학에 기초한 심리 소설의 느낌이 더 강하다. 조디에게 공감하기 보다는 외부인으로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내가 누군가의 아내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일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응원하며 멀리서 지켜보는 친구의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 조디의 차분한 성격은 맘에 들었지만 안이한 태도는 안타까웠고, 그렇게 조용하던 그녀가 결심하기까지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정통 스릴러를 좋아하던 사람은 이 책이 좀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난 이 책의 섬세한 묘사가 정말 좋았다.


2. 명예(다니엘 켈만, 임정희 역. 민음사. 2011. 431쪽)
: 스마트폰으로 연결된 9가지 이야기. 연작 소설이라고 해도 좋고 - 등장인물들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각각을 독립적인 하나의 단편으로 보아도 좋다. 핸드폰과 인터넷을 통해 소통의 수단은 늘어났지만 그건 결국 불통의 가능성도 더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내 의도가 왜곡될 가능성. 내 존재가 오해될 가능성. 물론 그걸 의도하고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그로 인해 존재를 부정당할 위험이 더 큰 것이다. 가장 좋았던 건 두 편의 「위험 속에서」.


3. 모두가 나의 아들(아서 밀러, 최영 역. 민음사. 2012. 203쪽)
: 2차 대전 종전 직후. 조 켈러의 둘째 아들은 전사했지만 아내는 아들이 어디에선가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조 켈러는 전쟁 중에는 군수 산업으로, 전후에는 다른 쪽으로 방향 전환을 통해 크게 성공한 사업가이다. 간밤의 태풍으로 둘째 아들 래리를 위해 심은 사과나무가 부러지고, 큰 아들 크리스는 래리의 약혼녀였던 앤을 초청한다.

캐릭터의 변화가 흥미로웠다. 처음 보이는 대로 단선적으로 해석할 수 없었다. 켈러의 남자들은 교활하고 여자들은 맹목적이다. 자신의 과오를 숨기기 위해 거짓을 꾸민 조는 말할 것도 없고 이상주의자 크리스조차 자기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조지와 언쟁을 하고 진실을 외면한다. 작가의 필력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극의 구성과 캐릭터가 이제껏 읽었던 어떤 희곡보다 생생하고 치밀했다. 하지만 뒷표지와 알라딘 책소개의 스포일러는 유감. 모르고 읽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4. 아그네스 그레이(앤 브론테, 문희경 역. 현대문화. 2007. 307쪽)
: 이제껏 읽은 빅토리아 시대 배경 소설들 중 가장 신선했다. 보통 그런 소설들의 주인공은 상류층이거나 아니면 아예 하류층이었으니까. 아그네스 그레이는 목사인 아버지와 귀족 출신이지만 앙혼을 반대한 집안과 결연한 어머니의 둘째 딸이다. 집안 형편은 어렵지만 부모님과 언니는 막내인 아그네스를 곱게 키웠고, 책과 공부를 좋아하는 아그네스는 집안에 도움도 되고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은 열망을 이루기 위해 가정교사로 나선다.

굳이 따지자면 다른 두 브론테 보다는 제인 오스틴 쪽이다. 하지만 오스틴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오스틴 소설 속 착하고 귀여운 학생은 없다. 학생들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가정교사를 무시하고 이용하며, 귀족 청년들은 중류층인 가정교사 아그네스를 투명인간 취급한다. 아이들, 특히 되바라진 아이들을 싫어하는 내게 이 책의 초반은 약간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뒷부분에는 아그네스의 (밋밋하지만 당시의 분위기 그대로였을 듯한) 로맨스도 좀 나오고, 해피엔딩으로 가는 게 보여서 즐겁게 읽었다. 순한 소설.


5. 기록실로의 여행(폴 오스터, 황보석 역. 열린책들. 2007. 230쪽)
: 미스터 블랭크의 하루. 한 노인이 작은 방의 침대 위에 잠옷 바람으로 앉아 있다. 그를 감시하는 카메라와 녹음기가 계속 동작 중이다. 미스터 블랭크로 불리는 노인은 자신이 누군지를 기억해 내려 애쓴다. 노인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노인을 씻기고 먹이는 누군가와 노인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방문한다.

기록실로의 여행이 아니라 기록실 안에서의 여행이 맞다. 207쪽에 이르러서야 노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전까지는 그가 지그문트 그라프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래서 결말을 흥미진진하게 기다렸다. 내가 이름을 잘 기억하는 능력이 있었으면 진짜 재밌게 읽었을 텐데. 작가의 모든 작품 -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의 삶』은 제외 -을 읽고 가장 마지막에 이 책을 읽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와중에 블랭크의 성적 능력이 왕성하게 표현되는 건 작가의 농담일지 혹은 마초 근성일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그저 우스울 뿐. 남자들이란.


6. 아르센 뤼팽의 고백(모리스 르블랑, 바른번역. 코너스톤. 2015. 272쪽)
:뤼팽 시리즈 6권. 단편들이다. 당연히 재미있었고, 많이 심각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번 편은 약간은 코난 도일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전반적인 구성이라든가 뤼팽이 사람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고 다니는 모습이라든가... 하지만 이 책의 백미는, 정말 뤼팽의 고백이다. '미남의 팔자란.(123쪽)'


7. 포탄 파편(모리스 르블랑, 바른번역. 코너스톤. 2015. 332쪽)
: 뤼팽 전집에서 이렇게 훌륭한 전쟁 문학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엘리자벳과 막 결혼한 폴. 엘리자벳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구입해서 잠시 살았던 국경 근처 오르느캥 성에 신혼 살림을 차린다. 하지만 엘리자벳 어머니의 초상을 본 순간, 폴은 그녀가 예전 자기 아버지의 살인에 관련된 인물임을 알아본다. 마침 독일이 선전포고를 하고, 폴은 입대해 버린다.

지금까지의 뤼팽 시리즈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이다. 물론 미스테리를 놓치지는 않지만 폴과 엘리자베스의 사랑, 전장의 긴박함, 상황의 정치적 이용 등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전쟁 문학을 좋아하진 않지만 집중해서 읽었다. 다만 뤼팽은 겨우 한 장면에 아주 희미하게 등장하고, - 물론 결정적인 팁을 주긴 하지만 - 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어색한 번역투의 문장들이 보인 점은 아쉬웠다.


8. 연극적 환상. 오라스(피에르 코르네유, 김덕희 역. 책세상. 2003. 254쪽)
: 표제작은 액자식 구성. 희곡에서 액자식 구성은 처음 보는 듯하다. 희비극이 섞여 있다지만 전반적으로는 희극이다. 17세기에 이미 이런 실험적인 작품이 나왔다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런 재기발랄함을 고전 희극에서 읽을 줄이야... 이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이 작품으로 인해 비난도 많이 받았다는 데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오라스」의 경우, 비극이다. 로마와 이웃한 알바롱가가 전쟁을 하게 된다. 오라스의 아내 사빈은 알바롱가 출신이고, 오라스의 누이동생 카미유는 사빈의 오빠와 약혼한 사이이다. 두 나라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각국에서 대표 전사 3명을 뽑아서 결투를 벌이기로 하는데, 공교롭게도 오라스의 집안과 사빈의 집안 전사들이 선택된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려 노력하는 사빈과 이기적인 카미유. 사빈처럼 비극 앞에서도 침착하고 차분하게 행동하고 싶지만 난 내가 카미유라는 걸 알고 있다. 카미유의 대사가 입에 착착 붙었다. 아무래도 비극이어서인지 표제작보다 임팩트가 강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더더욱 궁금해졌다.


9. 그레이트 하우스(니콜 크라우스, 김현우 역. 민음사. 2011. 403쪽)
: 오래된 책상이 있다. 서랍이 열 아홉 개 달린, 원목으로 된 육중한 책상. 뉴욕의 작가 나디아는 칠레 출신의 유학생 다니엘에게서 그 책상을 보관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다니엘은 독재 치하의 비밀경찰에게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고, 25년 동안 그 책상에서 글을 쓴 나디아는 어느 날 다니엘의 딸에게서 연락을 받는다.

오래된 책상에 얽힌 4명의 이야기. 뉴욕에 사는 작가 나디아, 그보다 먼저 책상을 가졌던 홀로코스트에서 탈출한 유대인 여성, 고가구를 수집하는 유대인 사업가의 아들과 딸,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난 변호사 아들. 작가 자신이, 유대인 여성의 남편이, 사업가 아들의 연인이, 변호사 아들을 둔 아버지가 각각 그들의 이야기를 한다. 연작 소설이지만 각각의 이야기 자체로 완성도가 높고, 아름다웠으며 또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 다만 그들을 모두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건 아마도 내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보다 화자에게 더 공감했기 때문인지도.


10.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줄리언 반스, 공진호 역. 다산북스. 2019. 195쪽)
: 좋아하는 작가의 귀여운 요리 에세이를 기대했는데, '귀여운'은 빼야겠다. 번역판 제목도, 책을 팔기 위해 이렇게 했겠지만, 원제(The Pedant in the Kitchen)가 더 적절하다. 요리라는 행위를 접할 기회가 적었던 작가가 뒤늦게 주방에 뛰어들어 레시피를 보며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제목 그대로 레시피를 연구하며 느낀 것들을 유머있게 이야기한다. 비시 당근 부역자(28쪽)를 시작으로 챕터마다 한 번 이상씩 빵빵 터졌다. 나처럼 작가를 이미 사랑하고 있지 않더라도, 요리 레시피를 보며 한 번쯤은 절망해 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만으로 작가를 사랑하게 되기 충분할 것이다.


11. 불한당들의 세계사(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역. 민음사. 1994. 157쪽)
: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외에는 말 그대로 불한당들의 이야기. 사기꾼, 여해적, 마피아, 도둑놈, 살인자 등등 세계 곳곳의 나쁜 인간들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과거의 작품들을 다시 써냈다. 아직 마술적 사실주의적인 요소도, 라틴 문학 특유의 색도 보이지 않지만 편안하고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역시 흥미로웠던 건 저자의 색이 드러나는「장밋빛 모퉁이의 남자」.


12. 황금 삼각형(모리스 르블랑, 바른번역. 코너스톤. 2015. 404쪽)
: 뤼팽 시리즈 8권. 상이용사 벨발 대위는 연모하는 코랄리가 납치 위기에 처한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위기에서 구해준다. 그녀에게 추가적인 위협이 있다는 걸 알게된 벨발은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가 남편인 은행가 에사레스가 협박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처음에는 벨발 대위가 뤼팽인 줄 알았다. 대담하면서도 유쾌하고 여유있으며 사랑에 직진하는 모습이. 그런데 돈 루이스도 지적했듯 정말 큰 위기가 닥치고 돈 루이스가 등장하자 벨발 대위는 판단력을 잃고 우왕좌왕한다. 어쨌든 범인은 내가 처음 의심한 그 사람이었고 늘 그랬듯 돈 루이스의 기지로 해피엔딩을 맞이했으며, 우리의 멋진 뤼팽은 애국심마저 발휘한다. 다만, 난 이런 식의 대를 이은 사랑은 정서에 안 맞아서...


13. 서른 개의 관(모리스 르블랑, 바른번역. 코너스톤. 2015. 408쪽)
: 뤼팽 시리즈 9권. 읽었던 중 가장 끔찍한 이야기이다. 초반부터 사건 전개가 너무 휘몰아쳐서 중간중간 심호흡해야 했을 정도. 아름다운 베로니크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납치했던 보르스키 백작과 결혼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몇 년 뒤 복수하겠다며 베로니크의 아들을 데리고 가다 바다에서 조난을 당해 둘 모두 사망한다. 14년 후, 베로니크는 우연히 영화에서 자신의 이니셜 서명이 새겨진 오두막을 보게 되고, 탐정 사무소에 의뢰해 그 곳을 찾은 그녀는 손 하나가 잘린 시체를 발견한다.

분명히 어릴 때 읽었던 것 같은데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는 전혀 기억 나지는 않고 초반의 집단 살해와 무시무시한 예언에 무서움만 고조됐다. 밤에 읽다가 덮었을 정도. 하지만 역시 우리의 뤼팽이 구원자로 등판한다. 그리고 베로니크 또한 멘탈이 무척 강하다. 자신에 대한 저주를 알게 됐으면서도 차분하게 전쟁이 불러온 광기에 휘둘린 인간의 짓일 거라며 마음을 다잡는 베로니크는, 절망하지 않는 베로니크는 이제껏 이 시리즈의 여성 캐릭터 중 가장 멋있었다. 브르타뉴 지방을 배경으로 켈트 족과 드루이드 교 신화를 미스테리와 잘 버무린 이번 이야기는 최근 미스테리 작품들과 견주어도 절대 밀리지 않을 듯.


14. 서푼짜리 오페라. 억척어멈과 자식들(베르톨트 브레히트, 이은희 역. 열린책들. 2012. 310쪽)
: 표제작은 노래가 있는 극대본. 발라드 오페라인 18세기의 「거지 오페라」를 개작했다고 한다. 오페라보다는 뮤지컬을 상상하며 읽었다. 구걸 전문 회사를 운영하는 피첨. 딸이 조폭 우두머리 매키 매서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기함을 한다. 딸은 몰래 결혼식을 올리고, 피첨은 매키 매서를 밀고하지만 경찰청장 브라운은 매키와 전우일 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고 있다.

전반적으로 풍자적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연민이나 동정마저도 돈벌이의 수단이 되어버린 현실과 황금 만능주의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쾌락을 포기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다만 급작스러운 해피엔딩은 좀...

「억척 어멈...」.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데리고 전장을 따라다니며 장사를 하는 억척어멈. 아들들은 하나씩 모병관의 꼬임에 넘어가 군인이 되고 그 와중에도 억척 어멈은 물건이 실린 마차를 끌며 전장을 찾아다닌다.

역자는 해설에서 억척 어멈이 전쟁을 이용하고 살며 자식들을 잃었음에도 깨달은 게 없음을 저자가 풍자한다고 했지만 내 생각에 이는 너무나 부르주아적인 해석이다. 뭔가를 깨닫는다 한들, 가진 게 마차 한 대 뿐인 억척 어멈이 뭘 할 수 있을까. 없이 살아서 모르는 거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것만 생각하다보면 그렇게 되는 거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억척 어멈의 뒷모습에 마음 아픈 건 나 혼자뿐인가.


15. 인생의 베일(서머싯 몸, 황소연 역. 민음사. 2007. 342쪽)


16. 페르디두르케(비톨트 곰브로비치, 윤진 역. 민음사. 2004. 464쪽)
: 책 한 권을 출간한 작가인 서른 살의 '나'는 핌코 교수의 방문을 받고 학교로 납치된다. 다시 학생이 되어 교육을 받으며 획일화된 교육과 미성숙한 학생들/선생들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중에 핌코에 의해 현대적 여학생의 집에 하숙생으로 보내진다.

크게 두 부분이다. 학교와 현대적 여학생과의 에피소드의 전반부와 학교에서 알게 된 미엔투스와 함께 머슴을 찾아 시골의 이모 집에 머물게 되는 후반부이다. 읽으면서 에피소드를 온전히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주제는 뚜렷했다. 포스트모더니즘. 1930년대에 씌여진 작품이지만 이 작품만큼 포스트모더니즘을 명확히 보여주는 책은 읽어본 일이 없다. 대학 4년 내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그렇게 도서관에서 방황했는데. 그 때 이 책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훌륭한 작품이고 성숙을 방해하는 우민화 교육, 관음주의, 현대성과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표현하는 천재성도 돋보인다. 하지만 전반부의 여성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혐오의 시각은 유감.


17. 어위크(전건우 외. 캐비넷. 2019. 373쪽)
: 장르 앤솔러지. 알바와 부모님 등골 빼먹기로 연명하는 20대의 세 청년이 우연이 주운 권총을 가지고 은행 현금 수송차량을 털지만 계획은 어긋나고 '어위크'라는 편의점에서 알바생을 인질로 경찰과 대치하게 된다. 알바생은 자신이 겪었던 일이라며 7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장르 단편들인데, 어위크 편의점이 한 장면을 차지하긴 하지만 각 이야기들 사이에 공통점은 없다. 작가 스타일에 따라 발랄하거나 무겁거나 무섭거나 편안하거나 한 이야기들. 가볍게 읽었다. 가장 좋았던 건 역시 강지영의「러닝패밀리」. 재미와 메시지 둘 다 놓치지 않았다.


18. 세이디(코트니 서머스, 이나경 역. 황금시간. 2019. 439쪽)


19.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해(은모든. 민음사. 2020. 175쪽)
: 과외 교사인 경진은 정말 오랜만에 사흘을 쉬게 되어 기대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휴가 전의 마지막 과외 학생 해미의 할 말 있는 듯한 얼굴을 외면한 뒤 원래 계획이었던 쉼을 방해한 옛 룸메이트와 시간을 보내던 중 해미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해미 엄마의 연락을 받는다.

책 뒤의 추천사에도 있듯 산책하는 듯한 소설이다. 해미의 이야기로 무게를 잡아주는 듯 했지만 이는 일종의 맥거핀 같은 거고, 제목 그대로 경진의 친구를 시작으로 경진이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경진에게 자기 사연을 이야기한다. 편안하게 읽기는 했지만 뒷부분은 전주 가이드북 같아서 좀... 그래도 이렇게 편안한 게 이 작가의 스타일이라면 다음 작품도 챙겨 읽어보고 싶다.


20. 노벰버 로드(루 버니, 박영인 역. 네버모어. 2019. 435쪽)


21. 이름 뒤에 숨은 사랑(줌파 라히리, 박상미 역. 마음산책. 2004. 383쪽
: 인도의 아시마는 선을 봐서 결혼한 남편 아쇼크가 공부하고 있는 미국으로 온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지만 아이의 이름이 담긴 할머니의 편지는 분실되고, 출생신고 없이는 퇴원할 수 없기에 아이 이름은 아쇼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고골리로 지어진다. 집안에서 부르는 애칭과 공적인 이름인 본명의 구분이 있는 인도 관습에 따라 고골리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니클이라는 본명으로 서류를 꾸미려 하지만 고골리는 이를 거부한다.

'이민자 문학'이라는 단어, 나도 완전 별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민 세대 혹은 그 자식들이 발표하는 첫 소설은 왜 다 내용이 비슷한가? 부모 세대의 문화 적응기, 2세대가 부모의 나라에 심드렁한 것과 그에 따른 갈등은 정말 클리셰 중에 클리셰다. 물론 이 책은 인도의 특별한 이름 관습과 아쇼크의 개인사가 겹쳐 고골리(혹은 니클)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쌓는 과정을 의미있게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으로 이민 간 인도인 가정을 한국인 가정으로 바꾸고 고골리와 니클을 영훈이와 앤드류로 바꿔도 하등 어색할 것 없는 내용은 정말 날 질리게 했다. 이런 클리셰가 없는 작가여서 좋아했는데, 이 작가의 작품을 출간된 순서대로 읽었다면 아마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듯. 이 책 한 권 읽는데 3일이나 걸렸다.


22. 이상한 용손 이야기(곽재식. 창비. 2019. 84쪽)
: '나'는 네 살 때 아빠가 부부싸움 후에 엄마를 향해 '어쩌다 내가 용 반 인간 반인 사람이랑 결혼했을까'라며 한탄하는 걸 들은 기억이 있다. 이후 초등 6학년이 되어 자신이 용의 자손이라는 걸 확신하고, 자신의 기분에 따라 비도 오락가락한다는 걸 알게 된다. 아빠는 용의 자손이라는 걸 숨기라고 하는데...

짧고 재밌고 귀여운 소설. 애시당초 이 시리즈 자체가 문학 입문자를 위한 소설들이니만큼 그냥 편안하게 읽었다. 결말이 살짝 미진해서 뒷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행복하게 잘 살겠지 뭐. 근데 진짜 용손이 성인이 된 이후가 많이 궁금하긴 하다.


23. 공공연한 고양이(최은영 외. 자음과모음. 2019. 189쪽)
: 고양이에 관한 짧은 소설 10편. 가벼운 이야기도 있었고 무겁게 가슴을 누르는 이야기도 있었다. 고양이와의 행복한 동행/공생을 이야기하지만 단순히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고양이 이야기는 결국 생명에 관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다만 '고양이 시점'은 아니다. 집사 시점이다.


24. 인생을 고르는 여자들(레슬리 피어스, 도현승 역. 나무의철학. 2019. 341쪽)
: 1960년대 벡스힐. 법률사무보조원으로 일하는 케이티는 길 건너에 사는 글로리아네 집에 항상 낯선 여자들과 아이들이 검은 차에 실려 방문하곤 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밤 글로리아네 집에 불이 나 글로리아와 그녀의 딸이 사망한다. 방화로 추정되는 이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자상하고 늘 엄마의 언어 폭력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용의자로 체포되자 케이티는 글로리아네 드나들던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남편 중 한 사람이 범인일 거라 생각하고 조사를 시작한다.

제목이 좀... 원제 The House Across the Street를 그대로 살렸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책을 팔려고 이렇게 지었겠지만 가정폭력을 피해 도망치는 걸 과일 고르듯 인생을 '고른다'라고 표현한 건 거슬렸다. '선택'이라는 더 건강한 느낌의 단어를 쓰든가. 제목 뿐 아니라 본문 곳곳에 적정하지 못한 뉘앙스의 단어들을 사용한 것도. 이건 편집자의 잘못인지, 번역자의 잘못인지. 가정폭력과 스릴러를 결합한 스토리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스릴러적 요소와는 별개로 가정폭력에서 도망친 생존자들을 추적하는 게 너무 쉽다는 게 놀라웠다. 물론 긴박한 상황이기는 했으나 누구든 가서 이러이러한 사정이라고 얘기하면 정보를 준다는 게... 스토리 자체도 가정폭력과 생존자들을 다룬다기에는 부족했고 그렇다고 긴박함이 잘 조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읽을 게 정 없다 싶으면 읽을 듯.

덧글

  • 이요 2020/09/29 21:39 #

    뤼팽이 쓴 '미남의 팔자란' 무엇인지 읽어보고 싶군요. ㅎㅎㅎ
  • 달을향한사다리 2020/10/19 11:12 #

    짐작 가능하실 테지만, 읽어보면 재밌습니당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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