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김기창 Yujin's Book Story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무엇일까. 훙의 잘린 손가락? 혹은 반장의 잔업 요청? 아님 모르는 새 훙을 한국에 데려다 놓은 러시아 배?

베트남인 훙은 공장에서 꽤 유능한 사원이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식사를 하러 오는 사장의 딸 정인을 눈여겨본다. 어느 날 3교대인 훙의 작업 시간이 지났음에도 반장은 잔업을 요청하고, 잠깐 정신을 놓은 사이 톱날은 훙의 손가락 세 개를 자르고 튕겨나간다. 일자리를 잃고 불법체류 사실마저 신고 당한 훙은 복수를 하기로 맘 먹는다.

읽으며 내내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 유독 아프게 다가오던 여성들의 고통. 물론 남성의 고통이 없는 건 아니다. 시작에는 훙의 고통이 있다. 하지만 훙은 그 고통을 잊은 채 방콕에서 살아간다. 적어도 린을 만나 잊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다른 남성들의 고통은 고통이라고 할 수 없다. 걱정이라고는 동물보호협회에서 일하는 섬머의 안전뿐인 해맑은 정우와 방콕에서 백인 부자 남성이라는 지위를 마음껏 누리는, 자유롭고 싶은 벤.

여성의 고통은 그 깊이가 다르다. 동물의 고통을 느끼는 섬머와 자신을 위해 벤을 묶어두어야 하는 와이, 그리고 훙의 고통의 대가를 치르는, 누구보다 가여운 정인의 고통은 잊혀지지도 않고 되갚아지지도 않는다.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남성(훙)과 달리 여성들은 고통을 안으로 삭이며 껴안는다. 대놓고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섬머 뿐이다. 한 생명체에게 지옥이 다른 생명체에게도 살만한 곳이 아님을 역설하는 섬머. 이건 단순히 섬머의 고통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다른 존재의 그것을 받아들여서만은 아니다. 섬머의 고통은 그 기원과 대상과 해결 방법이 더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통에 대해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옅어지거나 타인에게 옮겨가는 건 아니다.

눈물 흘리고 고통 받는 건 여성이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것도 여성이다. 살아남았으니 됐다, 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살아남는 게 끝이 아니니까.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누군가의 고통에 눈 감는 일'이라면 고통을 안고 살아갈 여성들은 타인의 고통에 눈 감지 않고 세상을 좀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지옥은 아닐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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