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독서 목록

1. 빨강의 자서전(앤 카슨, 민승남 역. 한겨레출판. 2016. 254쪽)
: '괴물' 게리온의 이야기. 그리스 신화 헤라클래스의 12가지 과업 중의 10번째 에피소드의 괴물이지만, 이 작품에선 시처럼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된 한 소년일 뿐이다. 날개를 갖고 있는 빨강 소년. 어릴 때부터 자서전을 썼고, 소년이 되어 헤라클래스를 만난다. 연인과 친구 사이의 어디쯤. 이 지점에서 난 헤라클래스가 왜 게리온을 죽였나 궁금했기에 읽는 속도를 높였지만,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빨갛고 날개달린 게리온의 서사시. 용암 인간 게리온. 속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화산을 좇는 헤라클래스. '괴물'을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그의 어쩔 수 없는 사회 부적응 - 그가 사회에 등을 돌린 게 아니다 - 과 고독에 방점을 찍은 작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선 게리온이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헤라클래스에게 과하게 반응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니까, 비굴하거나 자존심만 내세우거나. 그냥 난 이 소년이 좋았던 것 같다. 이 작가의 문장만큼이나.


2. 남자, 방으로 들어간다(니콜 크라우스, 최준영 역. 민음사. 2008. 381쪽)


3. 저지대(줌파 라히리, 서창렬 역. 마음산책. 2014. 543쪽)


4.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테네시 윌리엄스, 김소임 역. 민음사. 2007. 182쪽)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오다가 '묘지'라는 이름의 전차로 갈아타고 '극락'에서 내린 블랑시. 여동생 스텔라를 만나러 왔다. 스텔라는 빈민가 출신의 거친 남편 스탠리와 함께 살고 있다. 무례하고 열등감이 가득한 스탠리와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블랑시.

블랑시의 파멸은 어쩌면 예정되어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나 저지른 과오에 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는 생각은 든다. 딱 한 번 구원받을 수 있었던 기회를 빼앗긴 것도, 너무나 현실적이지만 너무나 잔인하다. 작가는 당대의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여성이 견뎌야 할 삶의 무게를 신랄하게 보여주고 있다.


5. 위대한 유산(찰스 디킨스, 김태희 역. 혜원. 2005. 606쪽)
: 어린 핍은 부모를 여의고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누나 집에서 얹혀 살고 있다. 누나는 성격이 거칠고 우악스럽지만 매부 조는 순하고 착한 사람이라 누나에게 구박받는 핍을 감싸주곤 한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핍은 탈옥한 죄수를 만나 그를 도와주고, 그 일에 대한 두려움이 가실 때쯤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해비셤의 집에 불려가 에스텔러를 만난다.

오래 전에 영화만 봤던 터라 영화 내용을 생각하며 읽었는데 사실 영화는 내용을 많이 변형했다. 주제는 같지만. 역시나 이 작가의 복합적인 인물 묘사가 뛰어나다. 그리고 내가 이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핍은 그간 읽었던 작품들의 인물들 중 가장 복잡한 캐릭터다. 처음에는 가장 공감이 안 되었다. 하지만 핍이라는 인물 자체가 내용이 전개됨에 따라 점점 발전한다. 나이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나아가는 핍의 사고방식이 적절히 서술되어 있어서 나도 곧 공감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저자는 당시 영국 중산층 가정과 하인보다 무능력한 인물들에 대한 풍자도 잊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의 기회주의적인 태도 또한. 다만 짜증났던 건 어색한 번역. 진짜 이렇게 심한 직역과 비문들은 처음 본다.


6. 셰익스피어 5대 희극(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연구회 역. 아름다운날. 2006. 600쪽)
: 줄거리는 모두 생략.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이 못되게 구는 게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 책 앞쪽에 잘 설명되어 있기도 했고, 어릴 때 읽었던 축약본에서는 생략되어 있던 샤일록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꼭 필요하지만 자신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이 그 일을 떠맡았다는 이유만으로 유대인을 업신여긴다는 건 위선과 교만의 극치이다. 게다가 어릴 땐 멋지기만 했던 포셔가 인종차별주의자(2막 7장(68쪽) '얼굴 검은 사람들은...')라는 걸 알아버렸다. 사실 제일 지질한 건 돈 빌려서 여자 만나러 가는 바사니오. 그래서 이 커플보다는 로렌조와 제시카의 사랑이야기에 더 맘이 끌렸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이게 셰익스피어니까 받아들이는 거. 맨스플레인 작렬이다. 따라서 카트리나에게 감정이입하면 뒷골 땡긴다. 카트리나를 마치 짐승 길들이듯 길들이다니, 명백한 학대일 뿐 아니라 카트리나는 스톡홀름 증후군 증상까지 보이는 듯 하다. 다만 다른 여성 캐릭터들의 대사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당시에도 여성의 발언이 꽉 막혀 있던 건 아닌 듯 하다는 점은 맘에 들었고, 2막 1장의 티키타카(184쪽)는 무대에서 보고 싶다.
<한여름 밤의 꿈>. 전에 따로 읽었어서 이번에는 대충 훑기만 했다. 그런데 두 쌍의 엇갈리는 애정은 여전히 헷갈린다.
<뜻대로 하세요>. 5대 희극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만 하지 않는 실리아도 맘에 들었고, 모든 상황을 손에 쥐고 이끄는 로잘린드도 맘에 들었다. 3막 2장(420쪽)의 우울증 대 상사병의 대화도 재치있었다.
<십이야>. 역시 남장 로맨스. 어쩌면 희극이라는 장르에 가장 적합한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남매를 '일란성 쌍둥이'라고 하는 등 교정 오류가 많았지만 - 셰익스피어 자신이 잘못 쓴 경우도 있고 이 책의 출판사에서 잘못 교정한 것도 있었다 - 편안하게 읽었다. 다만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렇긴 하지만 사랑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옮겨가는 게 너무나 쉽고 당연하다.


7. 침실로 올라오세요, 창문을 통해(마이라 산토스 페브레스 외, 클라우디아 마시아스 엮음, 우선균 외 역. 문학동네. 2008. 332쪽)
: 라틴 아메리카 단편집. 뒤의 엮은이의 말을 읽고 나서야 알게된 거지만 마술적 사실주의에서 벗어난 작품들이 주로 수록되어 있다. 솔직히 나의 협소한 관심은 라틴 문학의 마술적 사실주의에 치중되어 있고, 물론 여기 수록된 작가들과 엮은이의 말처럼 '라틴 문학 = 마술적 사실주의'가 아니라는 건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라틴 문학을 집어들면서는 매번 마술적 사실주의를 기대하곤 한다.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작품 하나하나의 완성도와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건 물론 나같은 무지한 독자도 알 수 있었으나 내가 국문학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이야기하듯 라틴 문학만의 특색은 많이 옅어진 느낌이었다. 반드시 마술적 사실주의의 색이 드러나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지리적 배경과 등장 인물들의 이름을 바꿔서 다른 어떤 나라를 갖다 붙여도 상관없을 작품이라면 굳이 라틴 문학이라고 부를 이유가 있을까? 이게 세계적인 추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라틴 문학의 추세를 알 수 있었던 건 좋았고, 내가 사랑하는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들이 점점 사라진다는 건 조금 슬펐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듯 굳이 마술적 사실주의를 고수하기를 원하는 건 아니다. 다만 라틴의 색을 짙게 드러내줬으면 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아우렐리아를 위한 묘약」.라틴 문학이라는 기대감을 내려놓는다면 「짧은 작별」도 좋았다.


8. 겨울의 눈빛(박솔뫼. 문학과지성사. 2017. 246쪽)
: 이 작가는 읽을 수록 버겁다. 특히 의도적으로 쉽표 사용을 하지 않은 만연체 문장이. 모든 작품의 화자가 동일하고 중심 사건이 동일한 것도 지루했다. 물론 연작으로 읽을 수 있겠지만. 작가는 '우리의 말투가 우리를 구분지을 정도로 다르지도 못한다(<주사위 주사위 주사위>.162쪽)'고 말하지만 소설가에게 이건 변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내가 이 작가를 감당할 만한 그릇이 못 되나보다.


9. 살라미나의 병사들(하비에르 세르카스, 김창민 역. 열린책들. 2010. 294쪽)
: 1939년 스페인 내전 말기, 프랑스의 국경 숲에서 공화군에 의한 팔랑헤 당 포로들에 대한 총살형이 집행된다. 이 중에는 당의 창립멤버인 산체스 마사스가 포함되어 있다. 쏟아지는 비와 총알 세례의 혼란 속에서 숲 안쪽으로 도망친 그는 구덩이에 숨어 있다가 뒤이어 도망자들을 수색하러 나온 군인과 맞닥뜨리지만 그 군인은 그를 못 본 체한다. 이 이야기는 산체스 마사스의 행적을 좇는 작중 화자인 작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동화같을 수도 있다. 쫓기는 포로를 도와주는 시골 마을 청년들과 훗날 자신이 가진 영향력으로 은혜갚음을 하는 권력자. 하지만 파시스트의 생환이 과연 인류사에 긍정적이었을까? 그리고 그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 무명의 병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주어진 생을 성실히 살아야만 하는 이유. 산체스 마사스보다 미라예스를, 가르시에 세게스 형제를, 미겔 카르도스를 그리고 피게라스 형제와 다니엘 안젤라츠, 마리아 퍼레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역사의 큰 흐름을 만들고 이끄는 건 산체스 마사스 같은 사람들일지 모르겠지만 그 물살 한가운데에는 이른바 '망각협정'의 당사자인 이들이, 우리들이 있는 것이다.


10. 프랑켄슈타인(메리 셸리, 김선형 역. 문학동네. 2012. 316쪽)
: 남극을 향해 항해하던 로버트 윌턴은 얼음 덩어리 위에서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는 괴생명체를 발견한다. 다음 날 그를 뒤쫓는 사람과 마주쳐 배 위로 그를 구조하는데, 병약하지만 강한 눈빛을 가진 그 -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박사 - 에게서 자신이 창조한 괴생명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창조자의 이름이다. 아니, 괴물의 정의부터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와 태어난 대로 살아간단 이유로 배척당하고 거부당하여 세상을 증오하게 된 자 중 누가 과연 괴물인가. 저자는 피조물에 대해 '다시 미덕을 지'(133쪽)니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저자가 성선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창조자(부모 혹은 주 양육자)의 사랑이 필수일 것이다.

고전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인상깊었다. 알려졌다시피 이 작품은 처음에는 저자의 남편인 퍼시 셸리의 작품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이 책에도 퍼시 셸리의 서문이 실려 있는데, 솔직히 읽으면서 좀 고까웠다.


11. 진이, 지니(정유정. 은행나무. 2019. 386쪽)
: 유인원 책임사육사 진은 내일이면 이 직업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찾아 유학을 떠난다. 마지막으로 어릴 때부터 돌봐왔던 침팬지의 출산을 지켜보던 진은 인근 별장에서 침팬지가 발견되었지만 동물구조팀에서 구출할 수 없으니 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스승과 함께 도착한 곳에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보노보가 발견되고, 유인원과의 교감 능력이 특별한 진이 보노보를 구출해서 감싸안은 채 스승의 차를 타고 연구소로 돌아오던 중 교통사고가 난다.

가의 과거 작품들 중 『내 심장을 쏴라』와 결을 같이하는 작품이다. 진이 처하는 상황이나 진과 민주의 모험(?) 양상이 정말 많이 닮았다. 그래서 더 반갑고 좋았다. 딱 진이다웠던 결말도. 사실 난 『7년의 밤』이나『28』처럼 압도적인 서사를 가진 작품도 좋지만 이렇게 순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따뜻한 이야기가 더 좋다. 앞으로 더 잘 살아갈 지니와 민주를 응원한다.


12. 프랑스 유언(안드레이 마킨, 이재형 역. 무소의뿔. 2016. 381쪽)
: 알라딘 온라인 중고에서 정말 우연히 발견하고 상세 정보는 보지도 않은 채 순전히 육감에 의해 주문부터 한 책인데, 과거의 내가 이렇게 기특할 수가 없다.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다. 어릴 때부터 시베리아의 외할머니 댁에서 여름을 보내곤 했던 화자. 여름 밤 테라스에서 할머니에게 듣던 프랑스의 이야기와 러시아에서 프랑스 여인으로 살아온 할머니 자신의 이야기가 러시아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처절하고도 아련하게 펼쳐진다.

할머니에게서만 들을 수 있던 이국적인 이야기와 할머니만이 갖고 있던 미소와 할머니에게만 있던 작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통해 소년은 자신만의 '아틀란티스'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아틀란티스가 부서지는 날 소년은 어른이 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히 소년의 성장 이야기만은 아니다. 프랑스 여인으로서 러시아에서 살아온 할머니와 러시아인으로서 파리에 정착하려는 화자의 이야기가 아름답지만 아프게 교차되고,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의 비의가 드러난다.

아름답지만 아프기도 하다. 모든 삶이 아픔을 갖고 있지만, 그리고 이 삶도 난 밖에서 들여다 볼 뿐이고 차마 손 내밀 쓰다듬어 줄 수도 없는 삶이지만 이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읽는 동안 정말 행복했다.


13. 오리지널 오브 로라(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김윤하 역. 문학동네. 2014. 246쪽)
: 작가의 미완성 유작. 작품 초고의 사진도 있고 - 저자는 인덱스 카드에 휘갈겨 쓰는 방식으로 초고를 작성했다 - 당연히 해당 작품을 번역해 놓기도 했으며 각주도 충실하다. 다만 미완성 유작인만큼 이야기는 미쳐 전개되지 못한다. 아쉬울 수 밖에 없는 대목. 유작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작품만큼은 완성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에게 조금의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어쨌든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출간해 준 아드님께 감사.


14. 스코르타의 태양(로랑 고데, 김민정 역. 문학세계사. 2006. 319쪽)
: 공쿠르상 수상작이어서 집어들었는데 생각보다 단순한 스토리 라인이 좀 의외였다. 하지만 단순함이 가진 힘도 행간에서 느낄 수 있었다. 5대의 이야기라고는 하나 등장인물만 5대에 걸쳐 있을 뿐 중심은 3대의 3남매 이야기이다. 이탈리아 해안 마을, 강간인 듯 아닌 듯한 결합에 의해 태어난 로코는 말로 다 하지 못할 노략질과 강도로 큰 재산을 모으지만 죽기 직전 모든 재산을 기부하고, 남겨진 3남매는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사실 한 가문의 이야기라고 할 때 독자로서 기대하는 바가 모두 충족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역경과 고난은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이들이 살아낸 시기가 세계사적으로 꽤나 복잡했던 때였지만 그 모든 정치적인 흐름들도 지난한 이들 삶에선 그저 배경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도 있음직한 이 남매들의 비근한 삶을 들여다보면서 왠지 모르게 맘이 놓이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이렇게 삶은 계속되고, 아이들은 태어나고 자라고, 가문은 이어진다.


15. 코뿔소 가죽(에밀 졸라 외, 정정호 외 역. 생각의나무. 2007. 175쪽)
: 헤럴드 블룸 클래식 1권. 봄. 읽기 전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앤솔로지라고만 생각했지만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 아주 어린 아이에게는 좀 무리가 있을 듯 하다. 원래는 소설과 시가 섞여 있다고 하는데 국내에 출간되면서는 소설을 앞쪽에 몰아놓았다. 원래대로 했으면 좋았을 걸. 소설들보다 시가 더 좋았다. 더 직접적으로 봄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았고.


16. 점블리 사람들(마크 트웨인 외, 정정호 외 역. 생각의나무. 2007. 262쪽)
: 헤럴드 블룸 클래식 2권. 여름. 역시나 소설보다 시가 더 좋았다. 그래도 마크 트웨인의 번득이는 풍자는 즐거웠다.


17. 미친 정원사의 노래(루이스 캐럴 외, 정정호 외 역. 생각의나무. 2007. 223쪽)
: 헤럴드 블룸 클래식 3권. 여름. 계속, 소설보다 시가 더 좋다. 그래도 이 편에서는 다른 편과는 달리 동화의 비중이 높다.


18. 대머리 여가수(외젠 이오네스코. 오세근 역. 민음사. 2003. 198쪽)
: 이제껏 읽었던 부조리극 중 가장 재미있었던 세 편의 희곡. 중산층 영국 가정의 허례를 비꼰 표제작과 교육자가 가지는 우월한 위치에 잠재된 폭력성을 보여주는 <수업>. 그리고 부조리극의 정수처럼 보이는 <의자>. 다 좋았지만 마지막 <의자>가 가장 재미있었고 또 긴 생각을 하게 했다. 노부부는 섬에서 보이지 않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그들을 정성껏 대접하지만, 소외감을 이기지 못한다. 그들은 현대 사회의 누구라도 될 수 있다. 그들이 주절대는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안쓰러웠다.

작품들은 다 좋았지만 역주가 너무 장황했고, 번역 또한 의역이 너무 심해서 별로였다. 그나마 의역임을 밝힌 건 장점이랄까. 다음 번에 이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땐 다른 출판사를 골라 봐야겠다.


19. 키 작은 프리데만씨(토마스 만, 안삼환 역. 민음사. 2016. 114쪽)
: 작가의 단편 두 편이 실려있다. 표제작과 <타락>. 다른 데서 읽었던 작품들이어서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기 보다는 그냥 편안하게 읽었다. 두 편 모두 몰랐던 진실을 깨달은 비극을 그린다. 끝까지 몰랐으면 좋았을. 표제작은 어릴 때의 사고로 기형이 된 프리데만 씨의 이야기이고 <타락>은 순진한 청년의 첫사랑 이야기. 두 편 다 저자의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지만 사실 가장 좋았던 건 노벨상 수상 연설문.


20. 어둠 속의 남자(폴 오스터, 이종인 역. 열린책들. 2008. 252쪽)
: 2년 전 아내를 잃고 얼마 전 교통사고까지 당해 딸네 집에 머물고 있는 오거스트. 불면증은 오래되었고, 잠이 오지 않는 밤을 하얗게 새우며 오거스트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911 테러는 일어나지 않은 미국에 떨어진 생계형 마술사 브릭. 브릭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거스트를 죽이는 것이다.

불면의 밤에 머릿속에서 지어지는 또다른 세계. 그 바깥을 둘러싼 딸의 이혼과 테러 단체에 의해 남자친구를 잃은 손녀의 이야기는 나를 통해, 그리고 전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전쟁이 아니어도 그러하긴 하지만, 전쟁이라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불길 속에서 개인은 결코 원하지도 않았고 헤어나올 수도 없는 상황 속으로 휩쓸린다. 창조주를 죽여야만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는 상황은 어쩌면 존재의 근원을 부정해야 비로소 평안을 찾을 수 있는 현대인 모두의 인생 이야기인 지도 모르겠다. 이제까지의 이 저자의 작품과는 느낌이 좀 달랐다. 그래서 뭔가 안심되는 기분. 폴 오스터를 선택하는 건 틀린 게 아니구나 하는 느낌.


21. 잃어버린 거리(파트릭 모디아노, 김화영 역. 문학동네. 2018. 269쪽)
: 7월의 파리. 호텔로 향하는 '나'는 택시 기사가, 호텔리어가 내게 불어로 말을 걸지 신경을 곤두세운다. 일본 에이전시와의 계약을 위해 이곳을 찾은 나는 파리를 내려다보며 곧 20여년 전의 그 곳으로 향한다.

장 데케르로 떠나 앰브로즈 가이즈로 돌아온 파리. 화자는 그가 잃었던 거리를 되찾은 걸까? 이제 파리를 떠나는 그는 20년 전 떠났던 그와는 다른 사람이지만 완전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다시 그의 안에 돌아온 장 데케르는, 되찾으려 한 적도 없는 그는 과연 무엇을 간직한 채 파리를 떠나는 걸까.

이 작가의 책 중 가장 인상 깊은 책이다. 가장 재미있는 책이기도 했다. 저자 특유의 쓸쓸한 분위기는 많이 옅어졌고 여백도 줄어들었지만 화자의 20년 공백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자의로) 잊혀진 자의 귀환. 그리고 닮은 듯 다른 떠남. 아마 화자의 떠남이 20여년 전과는 달라서, 그래서 덜 쓸쓸했나보다. 그거면 됐다.


22. 하얀 성(오르한 파묵, 이난아 역. 문학동네. 2006. 271쪽)
: 한 대학생이 발견한 필사본을 이야기해 주는 액자 소설. 17세기 즈음 베네치아에서 출발한 배에 타고 있던 '나'는 투르크 제국 함대의 습격을 받아 콘스탄티노플에 끌려가고, 그곳에서 의학 및 과학 지식을 인정받아 궁중에 드나들던 호자(선생)의 노예로 살게 된다. 나와 주인 호자는 학문에 대해 가진 생각이 매우 비슷하고 심지어는 외모까지 스스로도 놀랄 만큼 꼭 닮았다. 나는 가진 지식을 모두 호자에게 가르쳐 주고 또 함께 천문학이며 무기학, 건축학 등을 연구한다.

나를 나이게 하는 건 뭘까. 그 수많은 속성들 중 외모는 과연 얼만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난 관상을 어느 정도는 믿는 편이다. 관상이 비슷하면 성격과 성향이 비슷하다는 걸 살면서 여러 번 경험했고, 정해진 운명을 전적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결국엔 성격이 운명이라고, 그러니까 성격과 성향에 의한 선택(에 더해 약간의 우연)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잡는 거라고 믿기 때문에 이 둘의 운명은 내게 깊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거울의 상 같았던 이들. 어쩌면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존재는 없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삶의 무게를 줄일 수만 있다면...


23. 야생의 숲(나사니엘 호손 외, 정정호 외 역. 생각의나무. 2007.203쪽)
: 헤럴드 블룸 클래식 4권. 가을. 여전히 소설보단 시. 그래도 덜 유명한 작품들을 새삼 다시 읽을 수 있는 건 좋았다.


24. 이제 그만 울어요(토머스 하디 외, 정정호 외 역. 생각의나무. 2007. 226쪽)
: 헤럴드 블룸 클래식 5권. 가을. 가을의 쓸쓸한 분위기가 드러나는 소설들이어서 전 편들보다는 나은 느낌. 그래도 소설보단 시. 원래 번역시는 잘 안 읽는데 - 우리말로 된 시도 이해 못하면서 무슨 - 이 시리즈를 읽어나가면서 번역시집들을 사들이고 있다.


25. 빨간 구두(안데르센 외, 정정호 외 역. 생각의나무. 2007. 211쪽)
:헤럴드 블룸 클래식 6권. 겨울. 왜 겨울편에 공포 분위기의 소설들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겨울의 긴 밤이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더 따뜻한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편을 읽은 뒤 다음 번에 읽을 책을 바꿔들었다.


26. 초콜릿(조앤 해리스, 김경식 역. 열린책들. 2004. 317쪽)
: 사육제의 따뜻한 바람이 불고, 사육제가 한창인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 랑스크네에 비안과 그녀의 딸 아누크가 도착한다. 비안은 성당이 마주보이는 옛 빵집 자리에 '천상의 프랄린'이라는 초콜릿 가게를 열고, 모든 욕망과 쾌락을 경계하는 레노 신부는 이게 마땅치 않다.

오래전 영화화됐던 그 소설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비안의 모습에서 배우의 얼굴이 떠오르진 않았다(내가 좋아하는 배우임에도). 그리고 의외로 단 게 당기거나 초콜릿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확실히 영화보다 더 깊고 다크하다. 당연히 비안이나 아드리안, 조세핀의 이야기에 공감하긴 했지만 독자로서 가장 흥미로웠던 캐릭터는 신부였다. 옳은 것에 대해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그에 대한 회의를 지울 수 없는, 강한 위선의 가면을 쓴 레노 신부. 작가가 비안뿐 아니라 신부의 목소리를 드러낸 것은 단순히 글쓰기 기법이 아니라 작가가 창조한 인물 자신의 강한 의지 때문인 것만 같다. 그래도 난 그가 밉지만. 영화와는 조금은 다른 결말도 좋았다. 이로써 이 작가의 국내 출간 책은 다 읽은 건데, 다른 책들도 어서 나왔으면 좋겠다.


다음 달,아니 이번 달에는 제발 리뷰를 미리미리 써둬야겠다. 읽는 건 재밌는데 쓰는 건 너무 힘들어.

by 달을향한사다리 | 2020/04/03 16:49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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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이요 at 2020/04/04 18:15
이달에는 셰익스피어부터 토마스만까지 고전들을 어마어마하게 읽으셨네요.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어릴 때 봤을 때(물론 책은 아니고 드라마였나 영화였나 그랬습니다)부터 뒷골 당겼던 작품이에요. <프랑켄슈타인>은 몰라도 남편이 썼다는 서문은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ㅎㅎㅎ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20/04/24 12:13
네, 아시다시피 도서관이 휴관이라서 사놓은 책들을 먼저 산 것부터 차례대로 읽고 있거든요^^ <프랑켄슈타인> 서문은 사실, 자체만 놓고 보면 좀 밋밋해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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