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독서 목록 Yujin's Book Story

1. 시인의 계곡(마이클 코넬리, 이창식 역. RHK. 2009. 496쪽)
: 해리 보슈 시리즈 10권. 사라졌던 시인이 돌아왔다. 전작『시인』에서 시인을 놓치고 좌천된 FBI 요원 레이철 월링에게 시인이 돌아왔다는 연락이 왔다. 비록 수사팀에게 홀대를 받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수사에 참여하려는 레이철. 한편 해리는 예전에 함께 수사했던 테리 매컬랩의 미망인 그라시엘라에게서 그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며 수사를 부탁받는다.

해리의 활약이 전작들에 비해 약하달까. 아무래도 FBI 사건이고 해리의 현재 신분이 사립탐정일 뿐이라는 게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하겠지만, 작가의 필력이 좀 떨어진 듯도 하다. 마무리도 시시한 느낌. 겨우 이렇게 하려고 사라지게 했다가 돌아오게 한 건가 싶다. 이 시리즈는 이제 잠시 쉬어야겠다.


2. 굿바이 세일 따윈 필요없어(클로에 콜스, 여채영 역. 다림. 2018. 216쪽)
: 뻔한 내용의 청소년 소설. 쉬고 싶어서 선택했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서점 베넷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페이지는 서점이 도시개발계획에 밀려 폐점된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릴 때의 추억이 깃든 곳이자 대학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서점을 살리기 위해 페이지는 절친 홀리와 함께 행동에 들어간다.

역시 짐작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중간에 로맨스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 남자의 본모습을 난 일찌감치 알아챘기에 설레거나 하진 않았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가 읽으면 재밌을 듯.


3.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오스카 와일드, 오겸심 역. 동인. 2010. 242쪽)
: 젊은 윈더미어 부인은 남편이 최근 사교계에 등장한 얼린 부인의 집에 드나든다는 소문에 괴로워한다. 이 틈을 타 윈더미어 부인에게 접근하는 달링턴 경. 윈더미어 부인의 생일 파티에 윈더미어 경의 초대로 얼린 부인이 등장하고, 윈더미어 부인은 남편을 떠날 결심을 한다.

당대의 풍속이 보이는 희곡. 재밌었다. 이야기는 숨겨진 진실과 오해와 뜸들이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전형적인 흐름을 보여주지만 즐거움 또한 놓치지 않았다. 제 역할에 충실한 전형적인 인물들을 읽는 것도 즐거웠다.


4. 마틸다의 비밀 편지(스텐 나돌니, 이지윤 역. 북폴리오. 2018. 403쪽)
: 마법사 어쩌고에 낚였다. 파흐로크는 평생을 마법사로서의 자신을 숨기며 스킬을 갈고 닦는다. 100살이 넘은 그는 손녀가 자신처럼 마법사의 기질을 갖고 태어났음을 알아보고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손녀에게 줄 편지들을 써내려간다.

전반적으로 자기계발서 느낌이 강하다. 소설과 자기계발서의 딱 중간에 위치한 느낌. 손녀에게 하는 충고들이라 더더욱 그런 듯. 마법사로서의 행동가짐에 관한 충고들이지만 일반인들의 사회생활에도 적용 가능하다. 가끔은 꼰대스럽기도 하고. 그래도 세계사와 맞물린 인생 얘기는 꽤 재밌었고 사랑 얘기도 꽤 달달했다.


5. 늑대의 역사(에밀리 프리들런드, 송은주 역. 아케이드. 2019. 420쪽)


6. 이 소년의 삶(토바이어스 울프, 강동혁 역. 문학동네. 2019. 462쪽)
: 자전 소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 후 막내인 화자 토비만 데리고 미국 전역을 떠돈다. 하나같이 폭력적인 남자들만 만나고 사귀다 그들을 피해 야반도주를 하면서. 그러다 갑자기 촌스럽고 딱히 끌리지도 않는 드와이트와 재혼하기로 한 엄마. 토비가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나쁜 짓을 저지르기 시작하자 토비를 산골에 사는 드와이트네 집으로 보내버린다.

가족에 속하고 싶어 학대를 참아내는 토비. 명백히 스톡홀름 증후군 증상을 보이는 이 가여운 소년의 이야기에 내내 화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읽어나간 이유는, 토비에게서 나와 비슷한 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토비처럼 의붓아버지에게 학대를 받거나 비행을 저지르거나 한 건 아니다. 문서위조 따위를 하기는 커녕 소심하고 눈에 안띄는 구석에서 책이나 읽곤 했지만 나도 토비처럼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면서도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생각했고, 모든 걸 거짓으로 꾸며내더라도 내가 지금 보이는 모습대로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상대방에게 믿게 한다면 그가 믿는 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토비의 나쁜 짓이 들키지 않기를 바랐고 그의 헛짓거리들을 응원했으며, 웰치씨에게 아무 말 못하고 서 있을 때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이 작가는 읽을수록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겨우 두 번째지만.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하지만 자신의 삶에서 이만큼의 작품을 뽑아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음 작품이 정말 기대된다.


7. 나의 아름다운 고독(크리스틴 해나, 원은주 역. 나무의철학. 2018. 659쪽)
: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뒤 흉폭한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 엄마는 아버지의 다정했던 옛 모습을 이야기하며 열세 살 레니를 달래며 아버지의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어느 날 아버지의 전우가 아버지에게 알래스카의 땅을 남겼다는 소식을 받고 아버지는 알래스카로 이주하기로 결심한다. 막상 도착한 알래스카는 1년 내내 겨울이 아니면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생활이 있을 뿐이다.

야생동물같은 아빠와 야생에서 살아내야 하는 삶. 가족의 사랑이 덫처럼 발목을 물어 조이는 삶. 사실 가장 화나게 하는 건 레니의 엄마였다. 딸을 그런 상황에 방치하면 안 되는 거다. 딸에게 넌 평범한 아빠와 사는 평범한 소녀가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무엇이든, 어떤 행동이든 해야만 하는 거다. 그래서 뒷부분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 그들이 다시 본토로 돌아온 뒤에. 삶이, 인생이 맘대로 안 된다는 걸 나는 책을 읽으면서는 종종 까먹는다. 책 속의 인물들에게도 인생은 녹록치 않다는 걸. 그래서 이 작품이 해피엔딩이어서 더 다행이었다. 레니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어서.


8.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윤대녕. 문학과지성사. 2019. 282쪽)
: 윤대녕에게는 윤대녕만의 슬픔이 있다. 슬픔 이상의 슬픔. 그게 더 깊어진 듯 하다. 상실 이후의 삶. 약간은 올드한 대화체들 속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상실을 견디는 인물들의 안간힘이 느껴진다. 정중동.


9. 웨딩케이크 살인 사건(조앤 플루크, 박영인 역. 해문. 2017. 367쪽)
: 진짜 오랜만에 읽은 한나 스웬슨 시리즈. 전작에서 드디어 결혼 상대자를 결정한 한나는 요리 대회에 나가게 되고, 결혼 준비와 대회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와중에 한나의 스몰 웨딩이 불만인 한나의 엄마는 역시 한 건 멋지게 해내시고, 요리 대회와 한나의 결혼식이 맞물리는 가운데 이번에도 시체는 한나의 눈에 띈다.

한나의 결혼 준비와 대회 준비 이야기가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다른 작품들보다 레시피도 많고. 당연히 살인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그저 마을의 흥미거리 이상 취급받지 못한다. 그 해결도 좀 시시하고. 그래도 시리즈의 다음 권이 나왔으면 좋겠다.


10.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허블. 2019. 341쪽)
: 워낙 화제가 되고 있는 소설이라 여기저기 도서관에 예약을 걸어두었다가 겨우 읽었다. 단편 하나하나는 완전히 새롭다고는 할 수 없었다.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이 보였던 「스펙트럼」이나 칭기스 아이마또프가 생각나는 「공생가설」등. 하지만 같은 소재나 겹치는 아이디어라도 작가의 솜씨에 의해 이야기의 결이 달라지는데, 이 작가는 그 결을 아름답게 다듬는 재주가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서 그 수단은 회화, 색채, 무늬인 듯.

이 작품집 자체는 열광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작가가 신인임을 감안하면 앞으로의 작품들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길고 긴 글쓰기와 이 작가만의 이야기를 기대한다.


11. 커먼 웰스(앤 패칫,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19. 427쪽)
: 이 작가의 책은 겨우 세 번째지만 전작들과는 다른 분위기의, 가장 맘에 들었던 작품이다. 자전적인 요소가 들어가서인지 진정성이 남다른 이야기들. 지방검찰청에서 일하는 버트는 어느 일요일 초대받지도 않은 파티에 참석한다. 경찰관 픽스의 딸 프래니의 세례 축하 파티. 파티가 끝날 무렵 버트는 픽스의 아내 베벌리와 키스하고, 이 키스는 두 집의 여섯 아이의 삶을 바꿔놓는다.

해체되고 재조직된 두 가정의 여섯 아이들이 함께 보낸 몇 번의 여름과 한참 후 그들이 모두 어른이 되고 각자의 삶을 견뎌나가야 할 때의 이야기들이 교차된다. 어렸기에 했던 행동들이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에피소드들을 불러오는 나비효과. 하지만 함께 겪은 일들이라도 그 파장을 견디는 건 각자의 몫이다. 다만 할 수 있는 건 빗속에서 함께 몸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는 것.

얘기했지만, 전작들과는 결이 다른 아름다움이다. 전작들을 읽고 이 작가를 더이상 안 읽기로 결정했더라도 이 작품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를.


12.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황세연. 마카롱. 2019. 383쪽)
: 조용한 시골 마을 중천리는 '범죄 없는 마을'을 오래 유지한 타이 기록을 올해 목전에 두고 있고, 여기에 내년까지만 유지하면 신기록을 세울 참이다. 이장 이하 모든 마을 사람들이 조심하며 살고 있는데, 5년 전 이주해와 조카와 단 둘이 사는 소팔희는 애지중지 키우던 소를 팔아 현금을 쥔 날 밤, 대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도둑으로 오인하고 그만 마을의 주정뱅이 신한국을 죽이고 만다.

캐릭터 설정이나 스토리가 전형적이다. 소팔희가 신한국을 죽였다며 전전긍긍할 때부터 허술한 느낌이 들었는데 전직 형사 출신의 사채업자가 등장하자 내 예상대로 스토리가 흘러갔다. 나름 잘 짜기 위해 고군분투한 소설인 게 티가 많이 났다. '시골마을', '기자','형사 출신', '범죄은폐'만으로 상상할 수 있는 TV 단막극 정도의 스토리. 그래도 가벼운 기분으로 즐겁게 읽기는 했다.


13. 잘못된 만찬(이스마일 카다레, 백성희 역. 문학동네. 2019. 247쪽)
: 알바니아의 작은 도시 지로카스트라. 1943년 이탈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난 알바니아에 그리스를 점령한 독일군이 행군해 오고 있고, 사령관은 지로카스트라를 우호적으로 지나가고자 한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하지만 도시 초입에서 독일군 전위대는 총격을 받고, 독일군은 알바니아 시민들을 인질로 잡는다. 한편 도시의 존경받는 외과의사 구라메토 박사는 독일군 사령관 슈바베 대령이 자신의 유학 시절 친구이며, 알바니아 관습법 '두카지니'와 '베사'에 따라 자신의 환대를 기대하고 있음을 알고 그를 위해 저녁 만찬을 연다.

건조하게 얘기하는 전쟁과 전후의 이야기. 만찬이 진행됨에 따라 석방되는 인질들을 이야기하지만 만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쉽게 얘기되지 않는다. 다만 전쟁이 지나간 후 뒤따르는 사건들 속에서 단편적인 진실들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게 정말 진실일까?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단 정치적인 입장에만 휘둘리는 건 아니다. 아니, 시각 자체가 정치성을 띄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을 왜곡하는 것일지라도, 망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일지라도 고수할 수 밖에 없는 건, 살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14. 메모리 북(하워드 엥겔, 박현주 역. 밀리언하우스. 2010. 301쪽)
: 실서증 없는 실독증. 쓸 수는 있는데 읽을 수는 없는 병이다. 저자가 직접 겪은 병이고, 이 책의 주인공인 탐정 베니가 앓고 있는 병이기도 하다. 어느 날 병원에서 깨어난 베니. 친절한 간호사가 자신이 8주 동안 코마 상태였다는 얘길 듣는데, 잠시 뒤에는 간호사의 이름은 물론 이곳이 어딘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모든 글자들이 마치 처음 보는 언어인양 읽을 수가 없는데...

스토리 자체는 단순하다. 안락의자 탐정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의 주인공은 상황 때문에라도 그런 식으로 사건을 탐색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이 책을 집어든 이유도 실독증이 궁금해서였는데 오랜 시간을 들여 집중하면 간신히 한 두 단어 정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긴 했다. 자신이 한 메모를 읽을 수도 없는 기분은, 악필인 나에겐 낯설지 않은 기분이다. 이 책 이전에 베니의 시리즈가 10권 정도 된다는데 국내에 번역된 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10권에 걸쳐 베니의 매력을 충분히 느낀 후에 읽었다면 모를까, 그냥 집어들기에는 딱히 큰 매력은 없는 이야기였다.


15.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마이클 코넬리, 조영학 역. RHK. 2015. 496쪽)
: LA의 여러 범죄자들을 변호해 주며 돈을 버는 미키 할러. 사람들에게 속물 취급을 받으며 이리저리 치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맘처럼 함께 할 수 없는 어린 딸, 검사인 전처가 있고 함께 일하는 또다른 전처도 있다. 어느 날 그에게 잘 나가는 부동산 업자 루이스 룰레가 찾아와 강간 상해 혐의를 받고 있지만 자신은 무죄이며 증거까지 있음을 어필하자 그동안 기다렸던 '결백한 의뢰인'이라고 생각한 미키는 사건을 수임한다.

해리 보슈의 이복형 미키 할러 시리즈 1권이다. 출간된 해리 보슈 시리즈를 다 읽고 나서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려 했지만 도서관에 내가 원하는 책이 늘 있는 건 아니라서.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잘 짜인 사건이 전개된다. 주인공 외 등장인물들을 호/비호가 분명한 것도 맘에 든다. 다만 결말이 기대만큼 시원하지는 않다. 번역도 너무 직역에다가 부적절한 단어들도 거슬리고. 당분간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없으니 이 시리즈를 다시 읽을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 날이 빨리 왔음 좋겠다.


16. 아이 러브 딕(크리스 크라우스, 박아람 역. 책읽는수요일. 2019. 439쪽)


17.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이기호. 현대문학. 2018. 169쪽)
: 조용한 시골 마을 목양면의 신축 교회인 목양 교회가 불에 탄다. 젊은 담임 목사 뿐 아니라 교회건물 원룸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방화로 추정되는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10명의 관계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목양 교회의 실질적 소유주이자 목사의 아버지였던 장로와 목사,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서서히 드러난다.

방화 사건의 진짜 범인은 다 읽고 난 후에도 확신을 못하겠다. 사실 중요한 건 누가 불을 냈느냐보다는 절망의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이 붙들고 올라와야 할 동앗줄은 과연 무엇이며, 아버지 최근직에게 주어졌던 동앗줄이 어떻게 아들 최요한에게는 올가미가 되었는지이다. 그리고 그걸 얘기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심판을 상징하는, 또 어쩌면 신이 모세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사용했던 불은 너무 많은 부수적 피해를 냈다. 과연 신은 누굴 구원하려 했던 걸까? 신이 누군가를 구원하려 하긴 한 걸까?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존재를 멸滅한다면 그게 과연 구원일 수 있을까? 최근직은 무엇이라 답할지 궁금하다.


18. 유리 동물원(테네시 윌리암스, 신정옥 역. 범우. 2010. 205쪽)
: 어릴 적 병을 앓은 후 한쪽 다리를 저는 로라. 결혼할 시기가 되었지만 구애자는 없고, 학교 다닐 때 짝사랑했던 제임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며 유리 동물들을 모으고 관리하며 지낸다. 로라의 동생 톰은 어릴 때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며 창고에서 일을 하고, 엄마 아만다는 남부 아가씨로 잘 나갔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로라를 번듯하게 시집 보내어 그 시절의 영광을 되살리고 싶어한다. 이 가족의 하룻 동안의 이야기가 톰의 해설과 함께 전개된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데 그래서인지 감정선이 정말 섬세하다. 지문도 상당히 디테일하고. 아마도 해설자가 작가의 페르소나여서인지 더욱 감상적이다. 다만 번역이 좀 올드하긴 하다. 스포일러 없이 리뷰하기가 쉽지는 않다. 로라에게는 그게 최선이었겠지. 난 일각수가 평범해진 게 조금 슬펐지만, 그건 내가 이야기 밖에 있기 때문일 거다. 내가 로라였다면 뿔 따위는 진작에 떼어버렸을 거라고 쉽게 얘기하지만 두려워하는 로라의 마음이 공감되지 않는 건 아니니까. 슬픈 결말. 역시 '읽는다'는 행위가 힘겨워질 땐 고전이 답이다.


19. 보이지 않는(폴 오스터, 이종인 역. 열린책들. 2011. 336쪽)
: 뭔가 '미국스러운' 이야기가 읽고 싶을 땐 늘 폴 오스터를 집어들고, 이 작가는 내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시인 지망생 워커는 한 파티에서 미묘하게 비호감인 루돌프 보른과 신비한 분위기의 마고 커플을 만난다. 쾌활하게 접근해 와 워커의 꿈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보른과 문학잡지 창간에 관해 논의하던 중 보른의 돌발 행동 때문에 그와 등지게 되고, 워커는 교환학생으로 파리로 떠나버린다. 40년 후 워커가 쓰는 소설의 첫 챕터가 유명 작가인 동창생에게 배송된다.

폴 오스터의 젠더 의식에 대해 그닥 거슬리지 않았는데 이 작품에선 묘하게 거슬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근친상간이나 폭력적인 요소들 때문은 아니다. 이 작가의 작품들에서 화자들이 대부분 남성들이고 여성 캐릭터가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도 난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세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작가가 여성에 대해 이해의 폭이 좁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야기 자체는 전형적인 오스터 특유의 이야기이다. 액자식 구성도 나쁘지 않았고, 워커의 이야기 또한 충분히 재밌었다. 객관적 사실이 무엇이든 각자가 가진 진실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다. 진실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20. 고통(마르그리트 뒤라스, 유효숙 역. 지만지. 2013. 286쪽)
: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들. 표제작은 2차대전 종전 무렵, 저자의 남편이 수용소에서 파리로 돌아오기까지의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저술한 일기이다. 하루하루 연락이 오기를, 소식이 들리기를 수소문하며 남편의 죽음을 혹은 무사 귀환을 상상하며 절망했다 다시 희망을 가지는 예민함을 생생히 보여준다. 2부의 5편의 단편들은 저자의 레지스탕스 경험이 녹아 있는 작품들이다. 뒤라스가 르포르타쥬를 더 많이 썼더라면 좋았을텐데... 이제껏 읽었던 저자의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좋았다. 저자의 많은 다른 작품들이 절판되기 전에 얼른 구입해뒀어야 했는데.


21. 폭풍의 언덕(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역. 민음사. 2005. 572쪽)
: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줄거리는 생략. 어릴 때 읽었던 건 축약본이 아니라 '미화본'이었나 싶다. 아니면 초반부터 흥미를 잃어서 대충 글자만 읽고 던져버렸을 수도(후자일 듯). 에드거 린튼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가 격정적이어서 너무나 피곤했다. 휘몰아치는 대사들의 센 단어들과 격한 뉘앙스를 머릿속으로 발음하려니 정말이지... 하지만 스토리는 잘 짜여 있다. 모든 캐릭터는 그렇게 태어났을 뿐 아니라 그렇게 키워진 것이다. 주위 사람들과 주어진 환경에 의해. 그만큼 당위성을 지니고 있었다.

운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과연 히스클리프는 어디에서, 왜 왔는가(물론 히스클리프가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고 할 수 만은 없다). 강한 악은 버티고 버텨 점점 더 강해지고 선은 약하여 견딜 수 없는 요크셔 들판. 하지만 과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었을까. 각자 자신의 사랑을 하며 자신을 위해서 살았을 뿐. 난 그동안 사랑에는 무조건 관대했지만, 그리고 모든 사랑은 결국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이들의 사랑에는 냉소를 보낼 수 밖에 없다.


22. 새하얀 마음(하비에르 마리아스, 김상유 역. 문학과지성사. 2015. 386쪽)
: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 밖에 안 된 테레사가 아버지와 손님들과 점심 만찬을 하던 도중 화장실에서 권총 자살한다. 40년 후, 테레사의 남편이었던 란스의 아들 '나'는 신혼 여행 중에 들른 아바나의 호텔에서 자신을 다른 남자로 착각한 여자와 맞닥뜨리고, 그녀와 그녀가 기다리던 남자의 부적절한 대화를 호텔 방에서 듣게 된다.

한 사람의 (작은)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 관계의 무게 혹은 하찮음. 관계의 양 끝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일지라도 그 무게감은 다를 수 있다. 그걸 관계의 밖에서 바라보는, 아버지를 닮은 여성적인 입술을 가진 제 3자로서의 화자. 대부분의 경우 관계의 무거움은 여성에게 더 치우친다. 이 작품에서도, 기다리는 것도 상처받는 것도 여성이다. 아바나 호텔 미리암의 한쪽 발이 더러워지고, 베르타는 한쪽 다리를 전다. I have done the deed. 어쩌면 관계의 무게는 말의 무게일 지도 모른다. 말이 불러온 관계의 변화. 친밀한 관계에서는 그 사이에 끊이지 않는 말. 하지만 때로는 침묵이 더 큰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지켜지는 비밀로 유지되는 관계도 있듯이.

마치 나비의 양 날개처럼, 혹은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사건은 대칭으로 진행되거나 초반의 사건이 되풀이된다. 하지만, '나'의 관계의 미래는 란스와는 다를 것이다.


23.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이탈로 칼비노, 이현경 역. 민음사. 2008. 249쪽)
: 2차 대전 중의 이탈리아의 빈민가. 핀은 독일군을 상대하는 매춘부 누나와 함께 살고 있다. 늘 하릴없이 술집에 모여드는 어른들 틈에 끼고 싶고 아니면 아이들 사이에서 으스대고도 싶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다. 어느 날 술집에서 낯선 한 명의 사내와 수군대던 어른들은 그 사내에게 뭔가 보여줘야 한다며 핀에게 독일군의 권총을 훔쳐내라고 이르고, 핀은 그 권총을 훔치지만 관심을 두지 않는 어른들에게 그걸 주는 대신 거미집 근처에 숨긴다.

비근한 레지스탕스의 생활상. 영웅은 커녕 긴박한 전투신조차 없다. 영웅이 되기 이전에 그저 생활인으로, 자연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힘겨움과 견뎌내야 할 지루함이 가득하다. 성장도 마찬가지이다. 권총을 훔치는 일 하나만으로 극적으로 어른들의 세계에 편입되거나 인정을 받을 수는 없다. 레지스탕스 부대에 들어가는 건 시작일 뿐. 그래도 함께 거미집을 들여다봐주고 손을 잡고 걸어줄 누군가가 있으면 앞으로 조금 더 자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