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러브 딕』, 크리스 크라우스

아이 러브 딕 - 10점
크리스 크라우스 지음, 박아람 옮김/책읽는수요일


제목 때문에 성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고 미리 알았고 지루할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페이지가 빨리 넘어갔다. 예전에 읽었던 『북회귀선』이 꽤나 지루했던 기억에. 읽기도 전에 왠지 이 책이 『북회귀선』 분위기일 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나 보다. 근데 이 작품에선 성 자체보단 욕망에 초점을 둔다. 자신의 욕망을 마주한 솔직한 심리 고백이랄까.

1994년 12월, 크리스와 실베르 부부는 실베르의 지인 딕과 저녁 식사를 한다. 비디오 아트를 하는 크리스는 실베르와 딕이 나누는 지적인 대화에 '지식인이 아닌' 자신은 끼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또한 딕이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것도 알아챈다. 눈보라가 닥칠 거라는 일기예보에 딕은 그들 부부에게 자신의 집에 묵어가라고 권하고, 쇼파에서 자고 일어난 부부는 다음날 아침 딕이 사라졌음을 발견한다. 이후 크리스는 딕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고, 실베르도 동참한다.

정신적인, 그리고 당사자는 모르는 일방적인 manage a trois(3인의 결혼생활). 어쩌면 크리스는 욕망을 가장하는 지도 모르고 딕은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그녀가 딕에 대해 잘 모르면서 그가 자신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욕망의 대상화하고 더 나아가 그를 마치 신처럼 추상화한 데서 드러난다(86쪽). 하지만 이는 서영은의 「먼 그대」나 은희경의 「연미와 유미」에서처럼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느낌의, 시장에서 에누리 흥정을 못하게 하고 혼자 있는 방안에서도 이불 속에서 속옷을 갈아입게 하는 신격화와는 다르다. 오히려 맡겨놓은 듯 당당하고 뻔뻔하다.

2부에선 양상이 또 달라진다. 크리스의 글은 이제 편지라기보단 일기에 가까워지고, 내용도 좀더 관념화되어 욕망의 주체인 자신(개인)을 넘어 20세기를 사는 유대인 여성예술가로서의 자신(공인)에 더 집중한다. 이는 남편과 헤어지고 이미 딕과의 과제를 치름으로써 그녀가 한 단계 더 도약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사유는 책이 진행될수록 확장되어 예술계 내의 젠더 문제를 뛰어넘어 사회 내에서의 젠더와 빈곤 문제에까지 이른다.

뒤의 해설에서도 얘기하듯, 이 작품은 매우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봐야 한다고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읽을 때도 소설이라기보단 프로젝트 일지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현실에 기반을 두고 허구가 가미된 이야기라는 점에서 난 이 작품이 확실히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주목해야 할 건 이 작품의 장르가 아니라, 20세기 아니 그 이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여성의 삶과 욕망과 사랑이다. 다르지만 닮았고 나아진 듯 하지만 제자리인. 사실 여성의 욕망에 대해 적나라한 작품이 처음도 아니고, 또 그런 작품들에 비해 이 소설은 약하다고 할 수도 있다. 또 크리스의 행보가 엄청나게 진보적이거나 굉장한 성장 서사를 보여준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관계의 민낯을 이 작품만큼 솔직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드물지 않을까. 멋부리지 않으면서, 비참함을 과장하지 않으면서 사랑이라는 관계의 허무와 공허를 이야기해 준 이 작품을 읽는 건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by 달을향한사다리 | 2020/02/19 17:08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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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들도 거슬리고. 당분간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없으니 이 시리즈를 다시 읽을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 날이 빨리 왔음 좋겠다. 16. 아이 러브 딕(크리스 크라우스, 박아람 역. 책읽는수요일. 2019. 439쪽) 17.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이기호. 현대문학. 2018. 169쪽) : 조용한 시골 마을 목양면의 신축 교회인 목양 교회가 불에 탄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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