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탕』, 이승우

캉탕 - 10점
이승우 지음/현대문학


절친이자 정신과 주치의에게서 하던 일 그대로 두고 심지어는 책상 정리도 하지 말고 그대로 일어서서 떠나라, 는 처방을 받은 한중수. 친구가 말한, 친구의 삼촌이 배에서 내려 그대로 머문 항구도시 캉탕으로 향한다. 그 곳에서 선원이었던 핍의 집에 세들어 살며 술집 피쿼드에 드나들며 선교사(였던) 타나엘과 만난다.

짝수 챕터는 한중수가 쓰는 글이다. 의무처럼 친구이자 주치의에게 보내는 글. 어쩌면 작가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가장 직접적으로 녹아 있었을 이 글들은 사실 내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내게 인상 깊었던 건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가진 원죄의식. 기독교식의 원죄 개념이 아닌 존재의 근원을 부정하는 원죄. 속죄를 위한 죽음으로의 유혹을 막아내는 화자의 이명증과 글쓰기, 그리고 이것들의 대척점에 있는 파다.

핍과 화자와 타나엘은 모두 죄책감을 갖고 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죄를 이해하고 속죄하고자 한다 - 누군가는 핍이 가진 건 그냥 그리움이라고 할 지 모르지만 내겐 버리고 온 것에 대한 죄책감, 취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읽혔다. 시계추처럼 병원과 집을 왕복하고 낯선 도시에서 떠돌고 쓸 수 없는 글을 쓰려고 노트를 펼치고. 하지만 진정한 속죄는 죽음으로만 가능한 게 아닐까. 인간은 신을 속이기 위해 파다라는 의식을 변형시켰지만 그 변형을 뚫고 진짜 속죄를, 혹은 대속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이 아닐까. 그 행위가 없었더라면 화자의 유랑은, 핍의 읽기는, 타나엘의 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모비딕』의 가여운 핍을 기억한다. 『모비딕』을 처음 읽을 때의 어린 나에게 핍은 그저 웃픈 캐릭터였다. 가엾긴 하지만 가느다란 목소리로 우는 소리를 하는 건 좀 웃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핍은 전혀 우습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다 핍일지도 모른다. 우연이 눌러 앉힌 이 곳에서 평생을 속죄하며 살아가는.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9/12/02 14:49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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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캉탕(이승우. 현대문학. 2019. 239쪽) 2. 무엇이든 가능하다(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19. 359쪽) : 『올리브 키터리지』와 비슷한 느낌의 연작 소설집. 『내 이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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