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독서 목록

1. 비와 별이 내리는 밤(메이브 빈치,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19. 426쪽)
: 그리스만큼 귀향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난 소설에서만 그 곳에 가보았지만, 여행자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리스의 섬으로 가는 것만 같다. 그리스의 아기아안나 섬. 항구에서 슬픈 사고가 난 시각, 언덕 위 안드레아스의 식당에 다섯 사람이 모인다. 아일랜드에서 온 간호사 피오나와 남자친구 셰인, 독일 저널리스트 엘자, 미국 교수 토머스, 영국 청년 데이비드. 이들은 사고 당시의 슬픔을 함께 나눈 이후 약간의 유대감과 친밀감을 바탕으로 자신이 가진 인생의 문제점들을 조금씩 공유하기 시작한다.

이 작가의 전작『그 겨울의 일주일』이 꽤 성공적이었나보다. 같은 패턴이다. 여행지에서 만나게 된 낯선 사람들이 서로의 문제점들을 공감해주고 해결해 주는. 따뜻하다. 큰 악역도 없고 - 말할 수 없이 짜증나게 하는 비호감 캐릭터는 곧 사라진다 - 슬픔은 곧 가신다. 실제 인생이 이렇게 아름답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소설 내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 딱 그정도만 기대하고 읽으면 나쁘지 않은 작가이다.


2. 파우스터(김호연. 위즈덤하우스. 2019. 542쪽)
: 메이저리그라는 목표를 목전에 둔 야구선수 준석.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을 한 병원에서 경이라는 여자가 자신에게 접근하여 준석의 모든 경험이 어떤 이에게 공유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머릿 속에 심어져 있는 장치를 통해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그의 인생을 조종하고 대리 경험하고 있는 노인이 있다고. 준석은 경이 준 피뢰침을 정수리에 꽂아 파우스터가 자신의 인생에 '접속'하는 시점을 체크하는 한편 이들 조직에게서 벗어나려 한다.

역시 이 작가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문장이 너무 엉망이다. 교정도. (읽으면서, 편집자도 교정을 보다보다 지쳐서 어쩔 수 없이 이런 문장을 출판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그리고 디테일도 부족하다. 속도감 있는 내용 전개는 큰 장점이고 사실 내가 이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도 딱 그거 하나지만 결말은 좀 김이 빠지는 경향이 있다.


3. 셀린(피터 헬러, 김선형 역. 문학동네. 2019. 485쪽)
: 『도그 스타』의 작가인 줄 모르고 집어들었는데 다 읽고 보니 역시... 나 이 작가 정말 좋다. 실종 사건 전담 사립탐정 셀린. 이미 노년에 이르렀지만 그간 사건 해결률은 90%가 훌쩍 넘는 그녀는 얼마 전 언니와 동생을 잃고 삶의 의욕이 가라앉은 상태이다. 이런 그녀에게 젊은 후배 가브리엘라가 20여년 전 실종된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달라고 의뢰해 온다.

이 책은 장르 소설이 아니다. 셀린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추리 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다. 대체 왜 가브리엘라의 아버지가 그렇게 사라졌는지, 정말 죽은 건지... 평범한 추리 소설이었다면 아마도 이 이야기가 작품의 굵직한 축이었겠지만 이 소설에서는 가브리엘라의 아버지를 좇는 것만큼 셀린의 이야기에도 집중하고 있다. 지금의 셀린을 만들어낸 지나온 역사와 사회와 가족의 이야기에. 그만큼 천천히 하지만 촘촘히 풀어 나가는 미스터리이다. 이 작가의 책은 겨우 두번째이지만 왠지 이 작가의 주인공들은 무조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리즈로 보고 싶기도, 그냥 이대로도 완벽하다는 생각도 드는 작품.


4. 몰리에르 희곡선(몰리에르, 민희식 역. 범우사. 1999. 318쪽)
: 블랙 코미디를 좋아하진 않지만 여기 실린 세 편은 모두 재밌었다. 사회 비판을 하는 작가들은 냉소적인 시각으로 비꼬는 강도에 따라 약간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이 작품들은 중도를 잘 타고 있다. 사실 「상상병 환자」는 조금 짜증나긴 했지만. 가장 재밌었던 건 「서민귀족」.


5. 블러디 프로젝트(그레임 맥레이 버넷, 조영학 역. 열린책들. 2019. 393쪽)
: 스릴러인 줄 알고 집어들었는데 장르 문학이라기보다는 순문학에 가깝다. 19세기 스코틀랜드 시골 마을, 이웃의 세 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열 일곱 소년의 이야기이다. 사건의 전말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로디는 이웃이자 자기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마을 치안관 매켄지와 그의 딸, 아들을 도끼로 살해한 뒤 도망은커녕 스스로 잡힌다. 하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기까지는 그 이전에 꽤 긴 이야기가 놓여 있다.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에 가진 것 없이 자존심만 셌던 로디의 아버지와 출산 중 사망한 어머니, 지주-마름-마을치안관으로 이어지는 착취 체계와 무엇하나 분명치 않았던 마을의 관습법과 약아빠진 이웃이 머리는 명석했지만 사회성 떨어지던 소년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론 힘겨운 상황에서 코너로 몰린다고 모두가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로디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간단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다양한 서술 방식 - 로디의 비망록, 주변인 인터뷰, 변호사 접견기록, 법정 기록 등을 통해 매우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이다. 건조한 문체와 객관적인 듯한 시선 아래 약자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던 소설이었다.


6. 오렐리아(제라르 드 네르발, 이준섭 역. 지만지. 2013. 136쪽)
: 화자의 백일몽 이야기랄까. 상당히 몽환적이다. 남의 꿈 속을 들여다보는 느낌. 화자는 자신을 둘러싼 지인들 특히 여인들과의 에피소드를 꿈꾸듯 얘기하는데, 책을 읽으면 내용이 궁금해서 오히려 잠이 깨는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는 잠이 왔다. 어른용 bedtime story로 딱.


7. 나의 빌라(이한나. 카노푸스. 2018. 191쪽)
: 1인가구의 삶을 그린 다섯 편의 단편들. 나쁘지 않았다. 첫 작품집이라서인지 꽤 신선한 느낌도 들었고, 기시감이 느껴지는 작품도 있었다. 가장 맘에 들었던 건 표제작.


8. 누군가는 알고 있다(르네 나이트, 김효정 역. 북플라자. 2015. 371쪽)
: 몇 년 전 유명했던 카피 문구가 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직업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캐서린은 이사온 집을 정리하던 중 한 권의 책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하는데, 그 책은 20여년 전 그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구도 모르는, 그녀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 아들 니콜라스가 죽을 뻔한 그 휴양지에서의 사건. 이 작품은 캐서린과 캐서린을 괴롭히는 그 책의 저자인 스티븐의 생활을 교차해서 보여주며 조금씩 진실을 드러낸다.

꽤 잘 쓴 스릴러이다. 저자의 의도에 완전히 휘말렸다. 위에서 얘기했던 카피는 카메라 광고였던 걸로 기억한다. 카피에서도 얘기하듯, 사진이나 글이 가진 힘은 크다. 거짓을 진실로 만들 수도 있을 만큼. 나도 처음에는 캐서린의 남편 로버트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부모는 자식, 특히 죽은 자식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 낸시가 진실을 외면한 이유는 바로 캐서린이 가진 것 중 외면당한 것, 모성애이다. 때로는 상대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진실을 가리고 거짓을 기록함으로써 진실로 만들어버린다. 어쩌면 캐서린이 성공한 직장여성이 아니었다면 진실이 이렇게 쉽게 호도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성공한 여성에 대한 편견과 모성애 신화,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2차 피해... 여러모로 씁쓸하다.


9. 여름, 스피드(김봉곤. 문학동네. 2018. 278쪽)
: 연애 소설인 것도, 퀴어 소설인 것도 모르고 집어들었다. 퀴어 부분은 괜찮았는데 연애 부분이 지루했다. 정리되지 않은 문장도. 물론 그 중에서도 반짝이는 몇 개의 문장을 찾아낼 수는 있었지만. 아마 첫 작품집인 것 같은데 저자 자신의 경험만으로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 물론 모든 작가들은 모든 작품에 자신을 갈아넣겠지만 이렇게 생으로 던져넣으면 좀...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 지 좀더 지켜봐야겠다.


10. 헬로 굿바이 헬로(크레이그 브라운, 배유정 역. 책읽는수요일. 2015. 519쪽)
: 막 정계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히틀러는 길을 걷다가 스콧엘리스가 모는 차에 부딪힌다. 곧 툭툭 털고 일어나 가던 길을 간 히틀러. 스콧엘리스는 후에 자신이 짧은 순간이지만 유럽의 역사를 쥐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 챕터는, 스콧엘리스가 어릴 때 아버지 집에 놀러오곤 했던 키플링과 만났던 이야기를 하고 이 만남은 다음 챕터에서 키플링과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만남의 이야기이긴 한데, 절대 간과하면 안 될 것은 이 이야기들의 연도가 뒤죽박죽이라는 것이다. 순차적이 아니다. 그러니까 키플링와 스콧엘리스가 만난 지 몇십 년 후에야 스콧엘리스가 히틀러를 차에 쳐죽일 뻔 하는 거다. 이런 식으로 101번의 만남이 한바퀴 돌아 히틀러로 돌아오는데, 몇몇 에피소드들은 그냥 어거지로 끌어다붙인 느낌이다. 예를 들어 드라이버그+크리스토퍼 히친스 이야기는 드라이버그+마틴 에이비스 에피소드라야 더 맞는 듯. 그래도 소소하게 수다 떨 만한 잡식은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101개의 이야기를 다 기억하기만 한다면.


11. 도리스의 빨간 수첩(소피아 룬드베리, 이순영 역. 문예출판사. 2018. 432쪽)
: 아흔 여섯의 도리스. 하나 뿐인 혈육인 종손녀 제니는 미국에 살면서 화상 통화를 하는 게 다이고, 매일 요양사가 방문하기는 하지만 맘에 들만 하면 바뀐다. 도리스에게는 소중히 여기는 빨간 수첩이 있는데, 이 수첩에는 도리스가 살면서 만나왔던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이름에는 줄이 그어져 있다. 도리스는 이 수첩 속 사람들에 관해 글을 쓴다, 제니를 위해.

맨날 펄펄 날아다니는 할머니들 - 경찰한테 총 쏘고 가라데를 하고 스파이 노릇하고 - 만 보다 도리스를 보니 정말 좋았다. 평범한 노인. 일어나려면 몸을 앞뒤로 흔들어 반동을 주어야하고 간병인의 무례도 지긋이 참아내야 하는. 물론 도리스도 컴퓨터를 다루는 비범함을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모두가 나이보다 젊게 살아야만 하나? 그냥 나이에 맞게 살면 안되나? 나이들었으니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하면 안되,가 아니라 무릎 연골을 좀 아껴서 천천히 움직이고 슬슬 주변 정리도 하면서 죽음을 기다리고. 물론 도리스가 꽤 현실적인 할머니이긴 하지만 책의 내용도 그런 건 아니었다. 한 인간의 삶에 전쟁이 개입하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좀더 드라마틱해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도리스의 삶은 특히 사랑은 영화같았다. 크게 기대 안하고 읽다가 나름 위로받았다. 비록 현실감은 도리스의 신체 상태에 국한된 얘기였지만, 그리고 이런 엔딩을 해피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12. 괜찮아(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공진호 역. 현대문학. 2018. 229쪽)
: 패트릭 멜로즈 5부작 중 첫 번째. 도서관에서 나란히 꽂혀 있는 걸 보고 가벼운 맘으로 집어들었지만 결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영국 상류 사회 출신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 이 첫번째 작품은 주인공 패트릭의 다섯 살 중 하루를 이야기한다. 가족들과 프랑스 별장에서 보낸 여름 휴가 중 하루.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의 그간의 패트릭에 대한 학대의 정점이 시작된 하루.

처음 몇 페이지는 전개가 너무 느리다 싶었지만 곧 집중할 수 있었다. 하루 동안의 일을 순차적으로 얘기해주면서 의존적이고 무기력한 엄마 엘리너와 악의로 가득하면서도 그걸 솜씨좋게 가릴 줄 아는 아버지 데이비드를 효과적으로 표현해냈고, 이 부부를 둘러싼 상류층 커플들의 위선을 드러냈다. 특히 가여운 패트릭 안의 희미하게나마 빛나던 반짝임이 꺼지던 순간의 장면은, 너무나도 화가 났고 믿기 힘들었지만 그랬기에 나도 패트릭과 함께 도마뱀붙이 안으로 영혼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가여운 패트릭. 전혀 괜찮지 않았던 하루.


13. 가만한 나날(김세희. 민음사. 2019. 324쪽)
: 화자들이 모두 여성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다 여성들의 이야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나쁜 일에는, 외면하고 싶을지언정, 예감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예감을 믿으라고 그녀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작품들에서 나쁜 일이 실제로 일어나진 않는다. 그저 불안만 계속될 뿐.

가장 좋았던 건 「말과 키스」.


14. 용서해 줘, 레너드 피콕(매튜 퀵, 박산호 역. 박하. 2014. 380쪽)
: 오늘 열여덟 살이 된 레너드 피콕. 레너드를 여기에 쳐박아 두고 뉴욕에서 연하 모델과 살며 디자이너 놀이에 빠져있는 엄마는 생일인데도 연락도 없고, 레너드는 주위의 의미있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건네고 초등학교때 단짝이었던 애셔 빌을 쏴죽이고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별다른 정보 없이 집어들었는데 뜻밖에 따뜻한 이야기를 읽게되어서 좋았다. 레너드는 아무도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자기는 혼자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혼자 있는 레너드를 지켜주는 건 친구도, 가족도 아니지만 그 '상관없음'이 오히려 따뜻했다. 외면할 수도 있는 옆집 아이, 피상적으로 대해도 그만인 학생에게 관심을 기울여주는 월트 할아버지와 실버맨 선생님의 따뜻함. 어쩌면 이 소설은 그저 외로웠던 소년의 깨달음과 한발짝의 성장이라는 전형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을 읽을 즈음의 나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15. 셀레스틴 부인의 이혼(케이트 쇼팽, 여국현 역. 푸른사상. 2019. 256쪽)
:단편집.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하는, 자신을 뛰어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어서 좋았다. 「바이우 너머」, 「마담 펠라지」, 「정숙한 여인」, 「실크스타킹」, 「바이우 세인트존의 여인」. 다만 일부 작품에서는 현실에 안주하는 - 특히 사랑 때문에 - 여성들이 보인다. 표제작과 「아보옐 방문」. 물론 전적으로 사랑탓은 아니다. 주변의 시선을 비롯한 사회적 억업을 배제할 수는 없다. 가장 맘에 들었던 건 「바이우 세인트존의 여인」. 비슷한 맥락에서 「한 시간 동안의 이야기」의 결말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데지레의 아기」는 이제껏 포크너 작품이라고 알고 있었다, 20년이 넘도록. 다시 읽어도 수작이다.


16. 더 글라스 캐슬(저넷 월스, 최세희 역. 북하우스. 2017. 455쪽)
: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신체적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걸 말하는 거다. 모든 사람이 부모가 될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뒤 출산을 해야한다는 말이 아니라, 최소한의 노력을 들일 마음가짐을 말하는 거다. 저자의 부모는 저자와 형제자매들을 학대했다, 방치함으로써. 나름대로 사랑은 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밤하늘의 별을 주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쏘기를 가르쳐주면서. 하지만 자식이 친족에게 성추행을 당해도 덮어버리고, 사춘기 딸을 미끼로 술집에서 내기당구를 치고, 아이들의 생활비롤 술을 마셔버리는 이 인간들은 부모의 자격이 없다.

책 광고에는 이 부모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높이 평가하지만 난 읽는 내내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이 와중에 아이들이 스스로의 살 길을 찾아 그 구렁텅이를 빠져나온 건 기특했지만 애시당초 가정을 그런 구렁텅이로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노력했는데도 어쩔 우 없었던 게 아니라 노력조차 안 한 부모라니. 유리성을 짓고 싶다면, 먼저 바닥을 단단히 다져야 한다. 허공에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17. 시스터스 브라더스(패트릭 드웟, 김시현 역. 문학동네. 2019. 366쪽)
: 나쁘지 않았던 피카레스크 소설. 골드러쉬 시기에 청부살인업자로 활동했던 두 형제 - '시스터스' 가 성이다. - 이야기이다. 화자는 동생 일라이. 주 고용주인 제독의 명에 따라 캘리포니아로 도망간 제독의 옛 부하를 찾아내 죽이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일라이의 살인업자답지 않은 섬세함과 나약함이라고도 할 수 있을 부드러움이 형 찰리의 냉혈한 기질과 충돌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곳곳에 코믹한 요소 - 난생 처음 사용해 본 칫솔, 금사빠 일라이 등 - 가 있고 환상 소설적인 특징들도 강하게 드러나서 맘에 들었다. '막간극'은 별로였지만. 이 작가 계속 읽어야겠다.


18.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존 버거, 강수정 역. 열화당. 2006. 230쪽)
: 화자가 다니는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마주치는 죽은 자들. 이들은 모두 화자에게 의미있는 타인들이다. 챕터의 제목이 도시명이고 화자가 고요히 부유하듯 움직이는 느낌이어서, 그리고 화자의 목소리도 조용하고 차분하여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작품은 현실 도시에 현실에서 떠나간 죽은 자들의 이야기이고, 이쪽이 더 내 취향이었다. 어쩌면 칼비노를 너무 오래전에 읽은 건지도 모르겠지만. 작품 하나하나가 다 좋았다. 날 이곳에 붙들어 두는 사람들이 변해간다해도 그렇게 멀리 떠나가서도 사랑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줄어든다는 게 슬프지 않을 것 같다.


19. 이슬라(김성중. 현대문학. 2018. 157쪽)
: 시간이 멈춰버렸다. 죽음을 낳는 신이 더이상 출산을 하지 않으므로. 임종 자리의 노인은 죽지 않고 만삭의 산모는 출산을 하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성장을 하지도, 늙지도 않은 채 백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물고기 섬의 열 다섯 '나'의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죽게 하면 시간이 다시 흐를 것이라는 믿음으로 마을의 신성한 선인장을 훼손하고 그날 밤 '나'는 섬을 떠난다.

시간이 멈춰버리는 건 늘 내겐 로망 같은 거였다. 딱히 지금이 행복해서가 아니라, 때로는 이대로 늙기 싫어서 때로는 미래가 두려워서. 꼭 내게만 멈출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 속 혼란들이 공감되지는 않았다. 내가 공감한 건 대학의 그 사람들이었고, 이슬라였다. 죽음을 낳는 걸 멈춰버린. 하지만 죽음이 누군가에겐 구원이 된다는 것도 공감한다. 죽음 뒤에 아무 것도 없다고 믿기에 더더욱. 그렇게에 소설의 결말이 필연적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화자의 마지막이 부럽기까지 했다. 어쩌면 클리셰일 수도 있지만, 완벽했던 결말.


20. 나쁜 소식(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공진호 역. 현대문학. 2018. 265쪽)
: 패트릭 멜로즈 5부작 중 두 번째. 어쩌면 나쁜 소식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 표면적으로는. 적어도 패트릭은 그렇게 받아들인다. 아버지의 부고가 전해지고, 스물 다섯 패트릭은 장례를 위해 뉴욕으로 날아간다. 이미 마약에 절어 있는 패트릭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버지 지인들과 자신의 지인들을 만나는 틈틈이 약을 삼키고 주사하고 흡입한다.

사실 진짜 나쁜 소식은, 아버지가 죽어버림으로써 패트릭이 그에게 받은 걸 되돌려줄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벗어날 길을. 패트릭은 죽음의 유혹을 느끼고 마약을 통해 죽음에 가까이 하려는 듯 보인다. 어쩌면 벗어나려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패트릭이 자신을 망침으로써 마땅히 자신을 사랑해야 했을 대상 - 부모 -에게 복수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많은 학대 생존자들처럼. 역시나 패트릭이 약에 취했을 때의 묘사가 뛰어났다. 패트릭 안의 수많은 인격이 튀어나와 패트릭의 현실을 엉망으로 뒤섞어버리는. 패트릭이 그들처럼 현실에 갇혀버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21. 일말의 희망(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공진호 역. 현대문학. 2018. 231쪽)
: 제목처럼 패트릭 멜로즈 5부작 중 가장 밝은 작품이었다. 패트릭은 약을 끊었고, 아버지의 지인 중 한 명의 저녁 모임에 참석하기 전 친구 조니와 저녁 식사를 하며 큰 고백을 한다.

패트릭은 한 발 앞으로 내디딘다. 이 작품의 하루 저녁은 1권의 하루 저녁과 닮아있지만 다르다. 상류층의 위선과 인습은 여전하지만 - 1권의 패트릭의 엄마 엘리너와 3권의 프랑스 대사, 1권의 패트릭의 아버지 데이비드와 3권의 마거릿 공주 등이 나란히 놓인다 - 패트릭은 이제 그걸 조롱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 물론 아버지의 그림자는 여전히 드리워있지만, 어쩌면 패트릭은 이 곳 - 과거의 그의 가정 그리고 이 사회 - 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22. 푸치니(유윤종. 아르테. 2018. 317쪽)
: 오페라로 보는 푸치니의 생애.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헌신 속에서 천재성을 인정받아 대가로서의 삶을 살다 간 그의 이야기가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설명되는 와중에 저자의 여행기가 끼어든다. 알라딘 책 소개에는 '특별한 여행기'라고 되어 있지만 방점은 여행이 아닌 생애와 작품에 찍는 게 맞는 듯. 이런 측면에서 보든 저런 측면에서 보든 잘 쓴 문장은 아니다. 잊을 만 하면 튀어나오는 비문도 그렇고 과한 수식어 사용도 그렇고. 하지만 읽다 보면 금세 익숙해져서 푸치니에게 집중하게 된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음악을 글로 배운다.


23. 우연의 신(손보미. 현대문학. 2019. 180쪽)
: 뛰어난 민간 조사원 '그'는 방콕으로 휴가를 떠날 참이었다. 공항 가기 전 고객 한 명을 잠깐 만나는데, 그를 통해 세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조니 워커 화이트 한 병을 회수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휴가를 포기한다. 뉴욕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는 '그녀'는 잠깐 다녔던 프랑스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서 유일하게 같은 한국계였던 자신을 괴롭히던 동창의 부고를 듣는다. 동창이 자신에게 유품을 남겼다는 소식에 망설이다 그것을 받으러 떠나기로 한다.

이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재미있었다. 가장 잘 씌여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우연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가장 큰 요소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건은 우연이 만드는 것인지도. 작가는 삶에서 우연이 만들어낼 수 있는 큰 방향전환을 아주 자연스럽게 얘기해준다. 살면서 '만약에'처럼 의미없는 말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이 책을 읽으면서는 계속 '만약에'를 중얼거렸다. 만약에 그가 공항에 좀더 일찍 가버렸다면, 만약에 그녀의 창밖 풍경이 달랐더라면, 만약에 그가 호텔 로비에서 그녀를 불렀다면...그런데 그랬더라도 이 이야기의 결말이 달라졌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말이 딱 적당했다는 얘기일 수도, 혹은 정해진 이야기는 바뀔 수 없다는 운명론적인 얘기일 수도 있겠다.


24. 나의 사랑, 매기(김금희. 현대문학. 2018. 149쪽)
: 뭐랄까, 지질한 사랑얘기랄까. '나'는 대학 때 잠깐 사귀었던 매기를 동창 모임에서 재회한 후 긴 망설임 끝에 다시 연인이 된다. 망설임이 길었던 이유는 매기가 유부녀이기 때문. 매기는 자신의 입장을 배려해 달라며 수많은 규칙들을 정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평범(?)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사랑얘기였다. 드러낼 수 없는 사랑. 보여줄 수 없는 사랑. 자랑할 수 없는 사랑. 드러냄과 자랑은 사랑의 유통기한을 늘리는 데 꽤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필요조건은 아닐 지 몰라도 충분조건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달까. 아니, 필요조건일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결말은 당연했고, 난 매기를 더이상 매기라고 부를 필요가 없어진 재훈에게 축하를 건네고 싶다.


25. 더 크라이(헬렌 피츠제럴드, 최설희 역. 황금시절. 2019. 411쪽)
: 스릴러인 줄 알았지만 장르 문학의 특성보다는 넓게는 성장 소설의느낌이 강했다, 적어도 내게는, 특히 알렉산드라의 이야기를 볼 때. 첫 챕터를 읽어나가면서 책 뒷표지의 줄거리 소개와 달라서 조금 당황했는데, 아무래도 리뷰에서도 뒷표지의 줄거리를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생후 9주인 아기 노아를 데리고 오랜만에 호주를 방문한 앨리스터와 조애나 커플. 산불이 무섭게 번지는 가운데 갓길에 차를 잠시 세우고 둘이 가게에 들어갔다 나온 사이에 아기가 사라졌다.

사건의 전말은 일찌감치 밝혀진다. 물론 뒤에 작은 반전이 있긴 하지만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를 볼 때 이 정도 반전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다만 쓰레기 분리수거를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가 궁금할 뿐. 쓰레기가 분리수거될 때까지 조금 갑갑한 건 각오해야 한다. 그래도 작가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탁월해서 지루할 틈은 없다. 캐릭터가 차근차근 빌드되는(정말이지 build라는 단어가 딱이다) 과정과 각 등장인물들의 과거사 서술과 현재의 심리상태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고, 특히나 상황을 전달하는 솜씨가 좋아서 비행기 장면들에서는 내가 그 비행기 안에 함께 타서 노아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듯 했다. 근래에 괜찮은 스릴러 작가들을 계속 발견해 내고 있어서 뿌듯하다.


26.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윤고은. 문학동네. 2019. 217쪽)
: 좋아하는 작가여서 편안히 읽었다. 서로 진심을 똑바로 드러내지 않고, 에둘러 보여주지만 그건 결국 상대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 오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간다면야 다행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삐끗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어긋남은 결국 오믈렛을 도망가게 만들지. 주파수가 맞아서 공진이 일어나는 일 따윈 없다. 그래서 이 작품들이 더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양말들」.


27. 모유(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공진호 역. 현대문학. 2018. 391쪽)
:패트릭 멜로즈 시리즈 네 번째 작품. 패트릭은 '그가 되고자 했던 종류의 아버지가 되지 못하'(321쪽)고 있다. 그의 아버지처럼 자식들을 학대하는 건 아니다. 술을 들이부음으로써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고 그로 인해 '진짜 실패'(321쪽)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전작에서 아버지로부터 한 발자국 벗어나는가 싶던 그는 이 작품에서 다시 한발짝 퇴보한 듯 보인다. 패트릭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아들 로버트에게서 자신과 닮은 특성 - 나쁜 부모로 인해 생긴 불안증이나 불면증 등 - 을 발견하는 것.

전작들과 달리 이 작품은 화자가 여럿 - 아들 로버트, 아내 메리 그리고 패트릭 자신 - 이고 시간적 배경도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매 8월의 휴가 기간이다. 이 작품이 맨부커상 최종심에 오르고 페미나상을 수상했다기에 기대가 좀 더 컸는데, 사실 내용상으로나 서술상으로나 기성 소설들보다 특출나게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다. 패트릭은 그냥 평범한 아버지 - 자식에게 관심이 없다가도 애틋해하기도 하고, 막내의 탄생과 함께 아내에게서 밀려난 걸 씁쓸해하며 질투하고 항의하다가 결국 외도를 하는 - 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이 의미있는 건 패트릭 5부작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 - 드디어 패트릭이 아버지가 되었다 -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옮긴이의 마지막 해설에는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때로는 글쓰기 행위 자체에서 얻는 위로가 있는 거라고. 꼭 그렇게 구체적인 뭔가를 얻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28. 여배우는 죽어야 한다(엘리자베스 챈들러, 박효정 역. 황금가지. 2012. 281쪽)
: 아버지가 유명 연극배우인 제니는 작년에 언니가 참가했던 연극 캠프에 간다. 무대공포증이 있는 자신과는 달리 예쁘고 스타로서의 자질도 한껏 뿜어내던 언니가 연쇄 살인범에게 살해당한 그 곳으로. 도착해서 무대를 둘러보던 제니는 언니의 향수 냄새와 희미한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무대에서 중얼거렸던 작년 언니의 연극 대사를 듣고 있던 언니의 남자친구 마이클과 마주친다.

재밌었다. 죽은 언니를 느끼고 언니의 죽음과 관련된 장소나 물건에서 환영을 보는 소녀. 그 와중에 로맨스는 피어나고, 진범 찾기도 진행된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 빗대서 해석을 해볼까 했지만 굳이 그럴 만큼 복잡하거나 깊이 있지는 않다. 머리 쓸 필요 없이 편하게 재밌게 읽었다.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9/10/02 15:29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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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에르고숨 at 2019/10/02 17:19
리스트가 끝이 없어서 깜놀랐어요. 하루에 거의 한 권 읽으신 셈이네요! (기력 저하 지난 달 벌충?) 축하합니다. 에너지 회복하셨기를요+다음달 1번 찍고 갑니다. 세인트 오빈의 ‘마침내’ㅋㅋ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9/10/29 16:51
땡! 틀리셨습니당~ㅋㅋㅋ세인트 오빈은 4번입니다. 1번은 며칠 뒤 공개됩니다(답댓글이 늦어서 죄송해용~~) 9월이 독서의 달이라고 도서관에서 대출권수를 두 배로 해줘서요, 열심히 읽었습니당ㅎㅎㅎ 이번달에도 열심히 읽었지만 9월만큼은 아니에요^^
Commented by 에르고숨 at 2019/10/30 13:57
힝. (1번은 아니지만) 그래도 4번이 어디예요? 라면서...ㅎㅎㅎㅎ 10월 목록 기대합니다.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9/11/07 14:44
10월 목록 기대하셨는데 리스트만 달랑 올려서 죄송하네요ㅠㅠ 일조량이 줄어서 우울한데 일 폭탄까지 맞아서 기력이 너무 달려요ㅠ 진짜 다 때려치고 책 만권 들고 무인도 들어가고 싶습니다ㅠㅠㅠ
Commented by 이요 at 2019/10/04 09:29
'누군가는 알고 있다' 찜. 윤고은 신작도 살까 말까 망설였는데 리스트에 넣어야겠어요.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9/10/29 16:52
전 윤고은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어요. 신작 코너에 있길래 얼른 뽑아들었답니다^^ <누군가는 알고 있다> 추천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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