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독서 목록

1.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중섭, 박재삼 역. 다빈치. 2000. 228쪽)
: 이중섭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들. 앞부분에 '발가락군'이 아내를 지칭하는 애칭 중 하나라고 했는데 편지를 읽다 보니 아내 자체가 아니라 아내의 발가락을 의인화한 것이었다. 어쩌면 페티쉬가 있었을 수도. 아내에 대한 극진한 마음을 끊임없이 표현하며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이중섭은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2. 신탁의 밤(폴 오스터, 황보석 역. 열린책들. 2004. 417쪽)
: 크게 앓고 나서 회복 중에 있는 작가 시드니. 퇴원 후 산책을 나섰다가 우연히 들른 문구점에서 맘에 꼭 드는 노트를 발견하고 그 노트에 새로 작품을 시작하기로 한다. 닉 보언이라는 출판 에이전트가 <신탁의 밤>이라는 소설을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결국 이중 액자 구조(세 겹의 이야기)인 셈이다. 여기에 시드니와 아내 그레이스, 그레이스의 대부 트로즈의 이야기가 겹쳐지고 나누어지다가 합쳐진다.

문득 폴 오스터가 읽고 싶어서 집어들었는데 기대했던 딱 그 이야기였다. 우연에 우연이 끝없이 겹치는 9일. 이야기 속 이야기가 계속되는 9일. 시드니가 쓰는 보언은 방공호에 갇히고, 보언이 가진 소설 속 르뮈엘 플래그는 자살한다. 결국 진실을 깨닫고 그 진실을 폐기한 시드니는 트로즈의 죽음으로 인해 진실 속에 홀로 갇힌 셈이다. 어쩌면 신탁은 그렇게 주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3. 오래된 골동품 상점(찰스 디킨스, 김미란 역. B612북스. 2015. 757쪽)
: 읽으며 새삼 디킨스가 당대에 상당히 '먹히는' 작가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뒷표지에 있던 광고 문구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운영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넬. 할아버지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넬이 편하게 살려면 '이 방법' 밖에는 없다면서 밤이면 넬을 홀로 두고 밖으로 나가고, 넬은 그런 할아버지가 걱정되어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결국 할아버지는 도박빚을 엄청나게 지고 둘은 골동품 상점에서 쫓겨나 정처없이 길을 떠난다.

넬과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악당 퀼프, 그리고 넬을 기다리는 키트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주요 인물들이 전형적이면서도 나름의 복잡성과 인간으로서의 나약함을 드러낸다. 특히 할아버지가 연약하고 선량한 노인에서 도박 중독자로서의 포악함과 맹목성을 드러내는 묘사는 감탄스러웠다. 캐릭터들도 그렇고 이야기 자체는 전형적인 디킨스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700쪽이 넘는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었던 건 저자가 가진 힘이라고 할 수 있을 듯. 결말 또한 참 디킨스다웠다.


4. 토니오 크뢰거(토마스 만, 안삼환 외 역. 민음사. 2004. 548쪽)
: 문득 깨달은 어떤 감정들 혹은 자신의 불행. 어쩌면 열등감 어쩌면 너무 과한 자의식. 모르는 게 약이었을 지도 모를. 이 모든 것들은 비극으로 연결된다. 나라면 운명을 탓했을까? 아니면 이 모든 사건 혹은 감정들의 트리거가 된 그를 원망했을까? 처음부터 외면했으면 좋았을 진실. 도망치는 건 절대 비겁한 게 아니다.

가장 좋았던 건 <마리오와 마술사>. 뒤의 해설 읽다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스포일러 당함.


5. 여덟 개의 산(파올로 코녜티, 최정윤 역. 현대문학. 2017. 311쪽)
: 산을 좋아해서 산에서 결혼식까지 한 부모님과 함께 피에트로는 몬테로사 기슭의 그라나 마을에서 매해 여름을 보낸다. 첫 해에 사귀게 된 그라나 토박이 친구 브루노. 매년 떠났다가 돌아오는 피에트로와 늘 산에 있는 브루노의 이야기이다.

산은 피에트로나 브루노, 피에트로의 아버지에게 각각 다른 의미이다. 브루노에게는 삶의 터전이자 감옥일 테고 아버지에게는 남보다 우월함을 증명해야만 하는 필드일 테지만 피에트로에게는... 어떤 의미에선 고향처럼 돌아가고픈 유년 시절을 상징할 수도 있겠고 어떤 의미에서는 아버지와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치유의 장소일 수도 있겠지. 메루산의 정상에 오른 사람과 여덟 개의 산을 모두 다닌 사람 둘 다 인생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인생의 진리가 하나는 아니지만 기다리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의 진리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6. 죽은 시인은 추리소설을 쓰지 않는다(비에른 라르손, 이세지니 역. 현대문학. 2013. 446쪽)
: 스웨덴의 존경받는 시인 얀 Y. 닐손은 부모와도 절연한 채 정박해 놓은 배에서 혼자 산다. 순문학에 대한 열정만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던 그에게 담당 편집자 페테르센은 추리소설을 써보라고 제안하고, 고심 끝에 수락한 시인은 금융계 지인의 도움을 얻어 역대급 작품을 써낸다. 막 완성 단계에 이르러 유럽 각국에 선인세를 받고 팔려나갈 참에 시인의 목매단 시체가 배에서 발견된다.

정통 추리소설을 기대했다면 실망했을 작품. 하지만 출판계의 상업성에 집착하는 풍토와 자본주의에 휘둘리는 문학에 대해 생각이 많다면 읽어볼 만 하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추리소설의 유행(?)이 기껍지만은 않았는데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스웨덴 문학계 내부에서도 그에 대한 우려를 갖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할 수 있어서 안심된 기분이 들긴 했다. 다만 추리 소설로서의 이 작품은 좀 시시했다. 결말이 너무 뻔해.


7. 여성 작가 SF 단편모음집(뱍애진 외. 온우주. 2018. 343쪽)
: 여성인 SF 작가들의 단편을 모았다. 가볍게 집어들었고 원하는 이야기들을 읽어서 흡족했다. 소설들보다도 파출리 작가의 말 중 '처음으로 성별이 자격이 되었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물론 작품들도 다 나쁘지 않았다. 마냥 가볍지도 않았고.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작품도 있었고 아닌 것도 있었지만. 가장 좋았던 건 박애진의 「토요일」. 눈물났다.


8. 얼음나무 숲(하지은. 로크미디어. 2008. 425쪽)
: 이 작가 그만 읽기로 해놓고 도서관에서 대출 권수 채우려고 전전긍긍하며 책 고르다가 집어왔다. 17세기 유럽의 가상 예술도시 에단. 귀족 피아니스트 고요는 음악학교에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바옐을 만난다. 평민이지만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만심으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를 동경하다가 곧 그와 또다른 친구 트리스탄과 함께 견제와 질시와 동경이 섞인 우정이 시작된다.

스토리상 유치한 부분이 꽤 강한 이 작가를 왜 계속 읽게될까 생각하며 읽었다. 읽다 보니 이 작가의 강점이 보였다.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는 스토리와 잘 짜여진 플롯도 나쁘지 않지만 내가 발견한 건, 의외로 문장력이 꽤 좋다는 점이다. 비문이 적고 꽤 탄탄한 편이다. 물론 말했듯 스토리는 좀 오글거리고 기시감도 강해서 웹툰 보는 기분으로 읽긴 했다. 그리고 매 챕터가 과하게 드라마틱한 것도 부담스러웠고. 그래도 이 책을 집어든 목적은 달성했다.


9. 샬럿 스트리트(대니 윌리스, 엄일녀 역. 문학동네. 2015. 575쪽)
: 작가의 데뷔작이라는데, 평점을 주자면 100점 만점에 30점 정도? 교사를 그만두고 지역 무가지에 맛집 기사를 써서 먹고 사는 제이슨이 어느 날 저녁 샬럿 스트리트에서 인상 깊은 외모의 여자를 보게 되는데, 그녀가 택시를 잡으며 떨어뜨린 일회용 카메라 속 사진들을 단서로 그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이다. 스토리 요약만 봐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게 흘러간다. 구성 자체가 진부하고 캐릭터들도 어중간하다. 루저에 가깝긴 하지만 완전 대책없는 건 아닌 주인공과 돌아이 친구, 그리고 우연히 합류한 애매한 조력자와 함께 사생활 침해를 하고 스토커짓을 하지만 사랑으로 용서받는 이야기.


10. 이탈리아 구두(헤닝 만켈, 전은경 역. 뮤진트리. 2010.412쪽)


11. 파우스트 1, 2(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정서웅 역. 민음사. 1999. 272쪽, 412쪽)
: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신과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내기를 한다. 만물에 대해 늘 고민하고 연구하던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느끼게 해준다면 죽은 후 자신의 영혼을 가져가도 좋다고 하고, 악마는 우선 파우스트에게 젊음의 묘약을 먹인다.

역시 고전이 답이다, 는 생각을 하게 했던 독서. 줄거리를 대충만 아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사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조금은 유치할 수 있지만 줄거리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무래도 오랜 기간 동안 쓰였던 작품인 만큼 전체적인 일관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고 연극 대본인 만큼 상상력으로 채워넣어야 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역시 대작은 대작이었다. 이 작품을 읽기 전 뭘 읽어도 재미없고 시들한 상태였는데 이 책을 읽으며 독서력을 회복했다.


12. 거울로 드나드는 여자(크리스텔 다보스, 윤석현 역. 레모. 2019. 635쪽)
: 온화한 도시(아슈) 아니마. 손으로 사물의 역사를 읽는 오펠리는 박물관에서 일하며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나이가 차도록 결혼을 미뤘다는 점과 특이한 패션 감각 때문에 가족들의 구박을 받는다는 점 외엔. 결국 원로회에 의해 정략 결혼이 결정되고, 오펠리는 아니마와는 정반대에 가까운 겨울왕국 폴의 귀족 토른과 함께 그의 아슈로 간다.

소녀의 모험성장담. '프랑스의 조앤 롤링'이라는 문구를 보기 전부터 책을 읽는 내내 '해리 포터보다 몇 배나 재밌잖아!'라는 생각을 계속했다. 탄탄한 세계관에 친숙하되 진부하지 않고 가볍지만 유치하지 않은,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와 흥미로운 캐릭터들. 문장력도 나쁘지 않았고 행간에서 느껴지는 깊이도 있었다. 시리즈의 1권을 출간되자마자 읽은 게 오히려 아쉬웠다. 참았다가 전체를 한꺼번에 읽었어야 했는데, 어떻게 기다리나...


13.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제프 다이어, 김현우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4. 303쪽)
: 제목에 끌려 집어들다가 저자 이름을 보고 멈칫했지만 결론적으론 나쁘지 않았다. 집중 안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진부한 여행기가 아니어서 좋았다. 너무 많은 마리화나가 등장하긴 하지만, 내 나름으로 마리화나를 술로 대체하며 읽으니 어느 정도는 공감됐다.

폐허는 폐허인 채로 놔두어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외롭지 않기 위해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도, 때로는 자신의 안을 다 태워야 한다는 것도.


14. 죽은 자로 하여금(편혜영. 현대문학. 2018. 267쪽)
: 이인시의 유일한 종합병원인 선도 병원. 서울의 종합병원 구매팀에서 일하다가 불미스러운 일로 쫓겨나다시피 사표를 쓰고 이 병원에 재취업한 무주는 이 병원에서 가장 성실하고 오래 일한 이석 덕분에 쉽게 적응한다. 하지만 병원의 경영이 악화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꾸려진 위원회에 합류하게 된 무주는 이석의 비리를 발견한다.

무서운 이야기를 태연하게 하는 이 작가를 알고 있기에 피하다가 읽었는데 역시 필력은 대단하다. 주위에서 흔할 수 있는, 어쩌면 신문 사회면만 클릭해도 볼 수 있는 가장 비근한 이야기를 흡입력있게 풀어냈다. 특정 산업에만 기대왔던 도시의 몰락, 관행과 집안 사정이라는 면죄부를 가지고 묵인되어왔던 개인의 비리와 그 비리를 통해 또다시 이익을 얻는 부도덕한 경영진 그리고 원칙만 내세우다 결국 부러지고 마는 강직한 사람 등의 이야기를 진부하지 않게 풀어냈다. 명불허전.


15. 비밀의 도서관(랄프 이자우, 한미희 역. 비룡소. 2006. 589쪽)
: 미하일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의 프리퀄이라고 해야하나. 『끝없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에게 책을 건네주었던 고서점 주인 칼 코레안더가 처음 고서점을 맡게 된 이야기이다. 책을 좋아하는 소심한 청년 칼은 우연히 고서점에서 직원을 구한다는 글을 보고 오래 망설이다 취직한다. 고서점을 둘러본 다음날 서점 주인 트루츠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칼은 그가 자신에게 약속한 대로 서점에 대한 권리를 받기 위해 그를 찾아 환상 도서관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잘 쓴 환상 동화이긴 한데 아무래도 타겟 연령층이 어린 만큼 조금 시시하긴 했다. 많은 사건들이 스르르 해결되는 듯. 그래도 어린이들에게 읽히면서 2차 대전 직전의 '수정의 밤'이나 유럽 민담들에 대한 개념을 알려 주기에 적절한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어린이들은 이 책의 환상적인 이야기에 꽤 열광할 듯.


16. 행복이 찾아오면 의자를 내주세요(미리암 프레슬러, 유혜자 역. 사계절. 2006. 239쪽)
: 2차대전 종전 후 독일 기숙학교에 있는 폴란드 출신 유대 소녀 할링카. 자신을 학대했던 엄마에게서는 벗어났고, 이모와 함께 살고 싶지만 이모의 사정상 기숙사에 머물 수 밖에 없다. 기숙사의 아이들에게 맘을 열지 않고 그저 이모가 해줬던 말이나 자신의 생각들을 밤에 몰래 다이어리에 써넣으며 언젠가 이모와 함께 살 날 만을 기다리던 할링카의 성장이야기이다.

할링카가 아이들에게 맘을 여는 게 기특하면서도 조마조마했다. 상처받으면 어쩌려고... 계속 할링카에게 감정이입하며 나라면 저렇게 쉽게 말 안 할텐데, 나라면 저렇게 손 내밀지 못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던 난 아마도 할링카보다 덜 자랐나보다. 그래도, 행복이 오면 의자를 내주라는 말 만큼은 꽤 멋진 듯.


17. 저녁식사가 끝난 뒤(함정임. 문학동네. 2015. 221쪽)
: 이제는 사라진, 죽은, 혹은 죽어가는 누군가에 대한 애도. 부재하지만 기억 속에서 충만한 존재감을 내뿜는 사람들. 그럴 수 있는 건 애도하는 '나'의 순함 때문이다. 순하디 순한 감정들. 어쩌면 원망이 있을 지는 모르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고 애써 감추지도 않는. 무난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온 뒤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먼 노을 같은 소설들. 이 작가를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읽은 중에 가장 좋았다.


18. 환상문학 단편선2(강지영 외. 시작. 2009. 349쪽)
: 강지영과 배명훈의 이름을 보고 집어들었는데 강지영은 좀 실망스러웠고 배명훈은 그냥 그랬다. 작가들을 모은 거라서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당연히 없었고 세부 장르마저 각각이었지만 그래도 재밌게 읽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초반을 읽으면 이야기의 전개가 짐작되는 평이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김지현의 <방문자>나 은림의 <낙오자>, 정지원의 <시간을 팝니다>는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가장 판타지적인 건 이수현의 <쓰레기들의 왕>. 가장 좋았던 건 <방문자>.


19. 오이디푸스 왕 외(소포클레스, 강대진 역. 민음사. 2009. 387쪽)
: 그리스 비극 4편. 이야기의 내용이야 다 아는 거고 현대 기준으로는 단선적이지만 그리스 비극을 처음 읽는 나로서는 신선한 형식과 등장 인물들이 되받아치는 대사들이 인상깊었다. 표제작에서는 도시의 위기를 해결하고자 했던 탐구가 한 개인의 과오와 정체성을 밝히는 문제로 넘어가게 된 과정이, <안티고네>에서는 반대로 한 개인의 신념과 그에 따른 행동이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와 맞물려 집안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읽다가 문득 배명훈의 『은닉』이 안티고네의 이미지를 차용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고, 그런 단편이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작가의 어느 작품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안타까웠다. <아이아스>에서는 타이틀롤이 중간에 죽어버려 당황했지만 극을 전개하고 마무리하는 과정이 현대극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을 보여줘서 재밌었다. <트라키스 여인들>은 제목과는 달리 한 여인의 사랑이 불러온 비극...이지만 사실 난 이게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릴 때 그리스 신화를 읽으면서는 여인의 질투와 어리석음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읽어보니 어쩌면 진짜 승자는 데이아네이라라는 생각이 든다. 왜 있잖은가, 내가 가질 수 없다면...


20. 피와 뼈의 아이들(토미 아데예미, 박아람 역. 다섯수레. 2018. 663쪽)
: 마법이 사라진 오리샤 왕국. 제일리가 여섯 살 때 대습격이 있었고, 마법을 가진 '마자이'는 모두 살해당했다. 마자이였던 엄마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가진 제일리 또한 마법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신성자'이고, 검은 피부와 흰 머리칼을 가진 이 신성자들은 왕에 의해 엄청난 세금을 부과받고 박해의 대상이 된다. 한편 마자이 몰살 대습격을 지휘했던 왕은 딸 아마리와 아들 이난을 강하게 키우고자 하지만 아마리는 신성자인 하녀와 친구처럼 지낸다. 어느 날 마법을 되살릴 수 있는 신성물 두루마리가 발견되고, 왕이 친구인 신성자 베카를 살해하는 걸 목격한 아마리는 두루마리를 훔쳐 왕궁을 탈출한다.

현실에 이렇게 단단히 발 딛은 채로 완벽히 환상적인 소설은 진짜 오랜만이다. 캐릭터들이 생생히 살아있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서사가 이제껏 읽은 어떤 이야기보다 신선했다. 작가는 인종 차별에 대한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서아프리카 신화와 결합해서 독특하고 이국적이면서도 몰입감이 뛰어난 판타지를 창조해냈다. 다만 결단력있고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들에 비해 나이브하고 우유부단한 남성 캐릭터들이 살짝 짜증. 그들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 시리즈가 빨리 출간됐음 좋겠다.


21. 아는 척(최서경. 문학동네. 2013. 179쪽)
: 기성 세대가 청소년들에게 갖고 있는 선입견을 비판한다.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전교 1등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안 보이는 데에선 누구보다 큰 반항심을 갖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윤, 홀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피어싱 좀 많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문제아로 찍혀버린 여린 심성의 박, 가정 폭력에 시달리지만 손 내밀어주는 어른 따윈 없고 오히려 예쁜 얼굴로 남자 문제가 복잡하다는 오해만 받는 강. 이 세 친구의 열받는 학교 생활과 소소한 일탈 이야기이다. 작가가 이 책을 쓸 때 고등학생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사실적으로 느껴졌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이제껏 읽은 청소년 소설들 중 가장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과하게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설렁설렁 넘어가지도 않는 느낌. 결말 또한 그랬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청소년들을 보면서 아는 척 하는 거야말로 꼰대짓의 기본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22.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엘레나 페란테, 김지우 역. 한길사. 2016. 671쪽)
: 나폴리 4부장 중 2권. 1권을 읽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망설이다가 읽기 시작했는데 읽기를 잘했다. 오랜만에 정통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물론 그동안 읽은 책들을 평가절하하는 건 아니다.) 1권이 잘 기억나지 않았는데 앞부분의 등장인물 소개가 큰 도움이 됐다. 1권에서 부유한 청년과 결혼을 하게 된 리나. 그런데 리나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삐걱댄다. 리나가 디자인한 구두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길 것 같았던 남편 스테파노는 그 구두를 리나가 경멸해 마지 않는 솔라라 형제에게 넘기고, 결혼식장에서 미켈레가 그걸 신고 있는 걸 본 리나는 불같이 화를 낸다. 이게 발단이 되어서 신혼 여행길 내내 화를 내는 리나에게 스테파노는 폭력을 휘두른다.

1권에서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청소년이었던 리나와 레누가 이제는 여자가 되어간다. 1권에서 잡았던 방향에 따라 서서히 멀어지며, 끊임없이 서로를 그리워하고 시샘하고 애틋해 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갖고 있는 애증과 열등감의 폭은 너무나 커서 내 이해와 공감의 범위를 넘어서 버렸지만 난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작가의 뛰어난 필력이 아니었다면, 작가의 이야기 구성 능력이 아니었다면 집어던졌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화자가 레누이기에 레누의 입장에서 읽어나갈 수 밖에 없는데 그래서 더더욱 리나의 감정기복과 제멋대로인 행동과 이기심에 넌더리가 났을 지도. 게다가 역자는 그런 생각 안 들었다고 했지만 막장 드라마같은 짓거리들까지. 그러다 문득 리나야말로 진짜 마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고 나쁜 두 가지 모두의 의미로서의 마녀. 다만 리나 자신도 그 마법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며, 그 마력 또한 60년대 이탈리아 시골 마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강했다.


PS. 6월에는 책을 덜 읽을 생각이다. 사실 아예 읽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생각과 달리 도서관에 가서 책을 잔뜩 짊어지고 오는 바람에... 역시 습관이란.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9/06/04 12:51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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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19/06/04 13:1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19/06/05 12:23
비공개 답글입니다.
Commented by 이요 at 2019/06/04 18:42
편혜영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데 이제 한번 읽어봐야하나 생각이 드네요.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9/06/05 12:23
기대 안 하고 읽으시면 괜찮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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