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독서 목록

1. 현명한 피(플래너리 오코너, 허명수 역. IVP. 2017. 266쪽)
: 광신자의 기질을 지닌 방랑 설교가였던 할아버지를 둔 헤이즐 모츠.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대한 뒤 남부로 가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여러 사람들과 엮이는 이야기이다. 일면 부조리하며 해학적이지만 일면 씁쓸하고 안타깝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환멸나는 느낌. 헤이즐 주위에는 정상적으로 먹고 살려는 인간이 없고 - 이건 당시 사회적 상황과 헤이즐이 주로 돌아다니는 지역 특성이기도 하겠지만 - 헤이즐 또한 현대의 일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역시 한편으로는 당시의 특수한 상황과 환경이 그와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었으리라는 생각에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편하지 못한 기분으로 덮은 책.


2. 창백한 범죄자(필립 커, 박진세 역. 북스피어. 2017. 402쪽)
: 베를린 누아르 두 번째. 1938년, 베르니 귄터는 아들의 동성애를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있는 랑게 부인에게서 의뢰를 받아 해결하는 과정에서 파트너를 잃는다. 한편 전형적인 아리아인의 특징을 가진 소녀들만 살해당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귄터는 경찰로 복귀해서 살인 사건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보통 추리소설들은 가볍게 읽히고 그 안의 범죄들은 개인적인 동기와 영향을 지니지만 이 시리즈에선 아니다. 무거운 미스터리. 전권처럼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잘 묘사했다. 회색빛 암울한 베를린. 정신병자 같은 나치들. 억압과 폭력을 묵인하는 사람들. 역사적 사실이 어디까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의 내용들이 다 사실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범죄는 물론이거니와 범인과 동기 자체도 너무나 씁쓸한 역사이다.


3. 세 개의 관(존 딕슨 카, 이동윤 역. 엘릭시르. 2017. 511쪽)
: 초자연 현상을 연구하는 그리모 교수. 동네 주점에서 늘 하던 대로 자신의 모임을 갖고 있는데, 수상쩍은 사람이 찾아와 그리모 교수를 도발하는 이상한 말을 던진다. 얼마 후 집에서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손님을 맞이한 그리모 교수는 살해당하고, 모든 도주로가 막혀 있던 상황에서 범인은 사라진다.

저자가 밀실 살인 소설의 거장이라는데, 이야기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내가 이해력이 안 좋아서일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작가도 후반부에서는 타임라인까지 던져준다. 독자를 헷갈리게 하기 위한 꽤 많은 장치들이 있고, 그 중 코트 이야기는 좀 잉여인 듯. 그거 없이도 이미 충분히 헷갈린다. 게다가 중간에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납득이 안 된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종잡을 수 없고. 결말도 그동안 빙빙 돌린 것에 비해선 좀 시시한 편이다. 그래도 가장 복잡한 밀실 살인 이야기라는 점에선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4. 대식가의 죽음(M.C. 비턴, 문은실 역. 현대문학. 2017. 287쪽)
: 할버턴스마이스 대령의 집을 개조한 토멜 성 호텔은 경영난에 봉착하고, 프리실라는 결혼정보회사의 단체미팅 숙박건을 유치한다. 싱글 남녀들이 속속 도착하고, 결혼정보회사의 사장인 마리아가 동업자 피타 몰래 이 모임을 무사히 시작하게 되어 한숨 돌리는 순간 거구의 피타가 호텔에 나타난다. 피타는 게걸스런 식욕으로 모든 사람들의 비호감을 산다.

역시 최고 비호감이 살해당하고, 해미시가 살인범을 잡는다. 이 시리즈의 전형적인 패턴을 답습하는데, 이전 작품에서 약간의 변화를 주었던지라 다시 이 패턴으로 돌아온 게 반갑기는 했다. 하지만 사건 해결 방식은 전보다 퇴화한 듯. 프리실라와 해미시의 썸도 다시 돌아오는 건가...?


5. 여행자의 죽음(M.C. 비턴, 전행선 역. 현대문학. 2017. 253쪽)
: 해미시가 승진을 하고, 부하 직원이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이질적인데 부하 직원이 은근 비호감이라서 거슬리기까지 한다. 그래도 살해 당할 정도는 아니고. 게다가 해미시의 신경을 긁는 건 부하 직원만이 아니라 갑자기 나타나 자리잡은 이른바 여행족 숀과 셰릴. 사실상 떠돌이인 이들이 온 후 마을에는 미묘하고 불쾌한 변화가 시작된다.

살인이 일어나는 것도 해결하는 것도 좀 질질 끄는 느낌. 게다가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번 이야기는 꽤 음울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고, 로흐두 마을 사람들과 해미시의 관계가 미묘하게 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재밌게 읽었다.


6. 아도니스의 죽음(M.C.비턴, 전행선 역. 현대문학. 2017. 337쪽)
: 프리실라와의 관계가 변화된 후 답답함을 느낀 해미시는 이웃 마을로 탈출을 하고, 이웃 마을에 엄청난 미남이 이주한 후 마을 분위기가 술렁임을 알아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미남이 아주 수상한 흔적을 남긴 채 사라진다.

이 시리즈 처음으로 시체 없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해미시의 사생활이 가장 많이 얘기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장 이질적이었고, 가장 재미있었다. 가장 cozy하면서도 일반적인 장르 문학적 특성에 충실한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어쩌면 가장 얼렁뚱땅 해결한 사건이기도 했다.


7. 영국 양치기의 편지(제임스 리뱅크스, 이수경 역. 북폴리오. 2016. 375쪽)
: 별 기대 안하고 읽었는데 좋았다. 영국 시골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정말로 양 목장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저자의 사계가 담겨있다. 제목에 충실하게 - 원제는 The Shepherd's Life 이다 - 양치기의 생활을 수식어 없이 수수하게 이야기해준다. 전형적이지 않으면서도 솔직하다.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에 찾아드는 관광객들에 대한 시선과 목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 계층적 차별, 특히 내 고향이자 생활 터전이며 일터인 공간에 대해 외부인의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에 대한 못마땅함에는 크게 공감했다. 워즈워드가 태어났기 때문에 이 곳이 소중한 게 아니니까. 물론 이런 무게있는 이야기 뿐 아니라 양을 치고 양치기 개와 호흡하며 생활하는 과정에서의 재밌고 뿌듯한 에피소드들도 많다. 다만 번역과 편집의 문제인지 비문이 좀 많고, 저자가 옥스포드를 다니지 않았다면 이런 이야기들이 먹혔을까 싶은 삐딱한 마음도 든다. 그래도 쉬어가는 느낌으로 읽기에 참 좋았다.


8. 타자기가 들려주는 이야기(톰 행크스, 부희령 역. 책세상. 2018. 498쪽)
: 원래 유명 배우가 쓴 책에는 약간의 선입견이 있어서 잘 안 읽게 되는데 웬일인지 이 책은 도서관에서 그냥 집어들게 되었다. 소품같은 단편들 모음이다. 각 작품마다 타자기가 등장한다(모든 작품들이 그런지는 확인 못했다. 읽다보니 타자기가 눈에 걸리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왠지 코니 윌리스가 생각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윌리스와는 다른 방향으로 삶의 편린들이 나름의 반짝임을 드러내는, 친숙한 편안함을 주는 단편들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1953년, 크리스마스이브」.


9. 아서 페퍼(패드라 패트릭, 이진 역. 다산책방. 2017. 431쪽)
: 아내가 죽은 지 일년. 아서는 정해진 틀 안에서만 움직이며 자신을 가둔다. 이제는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 정리하기 시작한 아내의 유품 중 처음보는 하나하나 갚져 보이는 참(charm)들이 달린 팔찌를 발견하고 그 중 코끼리 참에서 연락처를 발견하고 연락해본 후 아내가 자신을 만나기 전 인도에서 살았던 적이 있음을 알게 된다.

아내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이야기는 새로울 것 없다. 해피엔딩이 보장되어 있기도 하고. 그래도 머리 식히며 재미있게 읽었다.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로맨틱하고 잔잔한 이야기.


10. 바르도의 링컨(조지 손더스, 정영목 역. 문학동네. 2018. 497쪽)
: 무덤의 목소리들.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혹은 모르는. 링컨의 어린 아들은 후자에 속한다. 여러 목소리들이 바르도에 머물며 어린 영혼을 위무하고 자식 잃은 아버지를 지켜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생각만큼 어둡지 않은 분위기이다. 처음에는 이들 목소리들을 구분하지 못해서 애먹었다. 이야기가 들쭉날쭉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일관되어 있고, 물리적인 행간이 넓어서 진도는 빨리 나간다. 중간중간 여러 자료들의 인용도 흥미롭다. 마냥 해학적이거나 음울하지도 않다. 하지만 메시지는 꽤나 묵직하다. 작가의 이름 하나만 보고 집어들었으나 역시 잘했다 싶다.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한.


11. 잔소리꾼의 죽음(M.C.비턴, 문은실 역. 현대문학. 2018. 320쪽)
: 역시 해미시의 휴가에는 늘 죽음이 따라간다. 프리실라와의 일 때문에 씁쓸하기만 한 해미시는 해변으로 휴가를 떠나고, 예약한 비앤비가 광고와는 달리 허름할 뿐 아니라 주인들이 엄청나게 인색하게 구는 데에 실망한다. 게다가 투숙객들 중에는 끊임없이 아내를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해리스라는 인간까지 있다. 그리고 역시나 그는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휴가지에서의 살인사건이 새로운 건 아니지만 이번 건에서는 해미시가 용의자로 조사를 받는다. 그리고 그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여성도 있고. 그래서인지 이번 에피소드에서 해미시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여전히 귀찮아하기는 하지만. 처음 이 시리즈를 읽기 시작했을 때 해미시는 비호감에 가까웠는데, 어느새 해미시의 매력을 인정하게 된 듯. 해미시에게 들러붙는 여자들이 이해가 된달까. 어쨌든 이번 에피소드도 재밌게 읽었다.


12. 가장 어두운 방(요한 테오린, 권도희 역. 엘릭시르. 2018. 606쪽)
: 정말 제대로 된 북유럽 문학을 접한 기분이다. 스릴러라는 외피를 쓰고 있긴 하지만, 겨울이 길고 해가 먼 나라에서만 나올 수 있는 시린 삶의 이야기이다. 오래 된 집과 등대, 헛간의 숨겨진 벽과 거기에 새겨진 이름들. 그리고, 돌아올 수 밖에 없던 유령들... 어릴 적 머물던 외딴 섬의 고택으로 가족과 함께 돌아온 아내가 갑자기 죽고 마치 유령과 만나는 듯 알 수 없는 잠꼬대를 하는 딸을 보며 불안해 하는 남자의 모습은 어쩌면 스릴러 소설의 클리셰일 지 모르겠지만 미리암의 노트와 요양원의 노인 옐로프가 이야기의 방향을 잡아주고 무게감을 더한다. 물론 스릴러로서의 흥미진진함도 꽉 차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좋았던 건 크리스마스 직전 헛간에서의 그 밤. 요아킴의 마음만큼 나도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13. 비밀의 집 1.2.(크리스 콜럼버스, 네드 비지니, 송은주 역. 비룡소. 2015. 576쪽, 529쪽)
: 워커 가의 세 남매 코델리아, 브랜든, 엘리너는 아버지가 저지른 의료사고로 살던 집에서 나와야 하는 상황에서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나온 크리스토프 하우스로 이사하게 된다. 집을 보러간 날 정원에서 이상한 동상을 발견하고, 이삿날에는 그 동상과 같은 모습의 이상한 노파가 찾아와 갑자기 저주를 걸어 세 남매는 집과 함께 다른 세계로 떨어진다.

속도감있고 스케일이 큰 초등학생 대상 판타지 소설. 새로울 건 없지만 편안하고 무난하게 읽었다. 그런데... 초등학생 대상 소설이라 그런건지 은근히 잔인한 면도 있는 듯.


14. 여기 없도록 하자(염승숙. 문학동네. 2018. 327쪽)
: 일정 기간동안 고용되지 않으면 햄이 되어버리는 세계의 '나'가 들려주는 이야기. 햄이 되지 않는 것만이 목표인 채로 하루하루 노동을 하며 보내고, 어쩌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햄이 되어버리면 또 누군가가 주워가주길 바라는 세계. 전혀 낯설지 않고 너무나 잘 이해되는 세계이다. 햄이 되지 않기 위해 일자리만 주면 무턱대고 찾아갈 수 밖에 없는 세계에서 없어지고 싶지만 그것조차 맘대로 안 되는 화자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15. 리틀 드러머 걸(존 르 카레, 조영학 역. RHK. 2014. 658쪽)
: 냉전 시대, 베를린의 이스라엘 공보관 집에 폭탄이 터진다. 이스라엘 정보국의 쿠르츠가 독일에 들어와 조사가 시작된다.

이건, 결국은 사랑 이야기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사랑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영국인 여배우를 포섭하는 아랍계 남자는 마치 할리퀸 로맨스의 주인공을 연상시켰지만 그의 행동은 당시의 국제 정세와 그 뒤의 숨겨진 상황들 만큼이나 복잡했고, 그녀만큼 나 또한 혼란스러웠으며 그녀보다 훨씬 깊이 의심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해피엔딩이다.

출간 당시에는 하기 힘들었을 이야기를 굳건한 필력으로 써내려간 작가 덕분에 작품 하나를 읽었을 뿐인데도 뭔가 든든한 느낌이다. 다만 번역 교정은 유감스럽다. 한 문장 내 동어반복이 너무나 심하고 문장력도 떨어진다. 잊을 만 하면 튀어나오는 비문도 역시 유감.


16. 곰탕 1.2.(김영탁. 아르테. 2018. 332쪽, 367쪽)
: 전혀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 부제들을 보고 조금 짐작하기는 했지만 - 이런 이야기인 줄 몰랐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다. 곰탕을 배우기 위해 타임리프를 하다니. 2063년, 알 수 없는 '그것'의 고깃집에서 일하는 천애고아 우환은 곰탕의 맛을 잊을 수 없다며 그 비법과 재료를 구해오라는 고깃집 사장의 제안을 받고 귀환이 보장되지 않는 시간 여행길에 오른다. 우환이 도착한 2019년 부산에서는 알 수 없는 무기로 살해당하나 사람이 발견된다.

흡입력이 강해서 몰입해서 읽었다. 사실 시간 여행으로 도착한 곳에서 그렇게 딱 맞는 가게를 발견한다거나 하필이면 그 살인사건이 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다거나 하는 우연들은 막 꼬투리잡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 구성 능력은 인정. 재미있었고, 다음 작품이 나온다면 읽어볼 생각이다.


17. 앉아 있는 악마(김민경. 비룡소. 2010. 217쪽)
: 센 제목과는 달리 순한 청소년 소설이다. 의사인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고등학생 지원. 외출한 할머니가 주말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실종 신고를 하고, 지원이 알 지도 못했던, 지원의 아버지 명의로 된 빈 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다. 그 동안 할머니의 관리로 잘 유지되고 있던 집으로 옮겨간 지원은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한다.

사춘기 시기에 유일한 보호자를 잃지만 잘 준비되어 있는 덕인지 타고난 성격 덕인지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화자가 어쩌면 과하게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깊이 있고 차분한 서술이 맘을 다독이는 느낌이었다. 나쁜 사람은 한 명도 안 나오는, 어쩌면 청소년들은 시시하다거나 현실과 동떨어진다고 외면할 지 모를 이 얇은 소설을 읽으며 난 위로 받았다.


18. 술 취한 원숭이(로버트 더들리, 김흥표 역. 궁리. 2019. 245쪽)
: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생각보다 단순한 내용이었다. 인간은 왜 술을 마시게 되었나를 동물학/진화인류학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했는데, 책 내내 하는 얘기는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쉽지 않다'가 대부분.

알콜에 관한 많은 자료들에서 유인원이 처음 알콜을 섭취하기 시작한 건 우연히 발효된 과일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알고 나서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이 책에선 거기에 더해 건강상의 이유 - 일정량의 알콜을 꾸준히 섭취하는 것이 질병 발생 확률을 줄여주기 때문 - 와 세균 제거, 칼로리 보충의 이유도 있다는 걸 얘기해 주는데 이런 관점은 처음 접해서 신선했다. 이 밖에도 원숭이들이 의도적으로 과일을 발효시키기도 한다거나, 곤충들 뿐 아니라 영장류도 자연에서 알콜향을 감지 가능하다거나 하는 얘기들은 꽤 흥미로웠지만 역시나 계통적 연구가 부족하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 길지 않은 책이어서 그냥 가볍게 흥미롭게 읽었다.


19. 올드 스쿨(토바이어스 울프, 강동혁 역. 문학동네. 2019. 351쪽)
: 문학적 분위기가 충만한 60년대 명문 기숙학교. 이 학교에서는 당대의 유명 작가들을 초빙해서 강연을 듣고, 졸업반 학생들 중 한 명을 뽑아 그 작가와 개인 면담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전통이 있다. 그리고 그 영광의 주인공은 작가가 직접 뽑은 단편 소설로 가린다.

단순히 기숙학교 문학 소년들의 허세 가득한 학교 생활 이야기가 아니라 나름의 치밀하고 치열한 어린 청년들의 분투기이다. 자신의 사회적 민족적 정체성을 숨기고 작은 사회 속에서 스스로 자리 잡기 위한 물 밑의 몸부림. 하지만 수면 위는 차분하고 고요하다. 그래서 나 또한 차분히, 때때로 메모를 위해 책을 덮어가며 읽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주인공이 한 일에도 놀라지 않았을 지도 모르고,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지도. 어쨌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았다. 좋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소설.


20. 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크리스틴 페레플뢰리, 최정수 역. 현대문학. 2018. 245쪽)
: 매일 같은 시간에 지하철 6호선을 타고 출퇴근 하는 쥘리에트. 늘 같은 칸에 같은 책을 읽는 몇몇 눈에 익은 사람들이 있다. 어느 날 쥘리에트는 두 정거장 먼저 내려 출근을 하고, 그 출근길에 '무한 도서 협회'를 발견하게 된다.

재미없지는 않았지만 감동적이거나 인상 깊지도 않았다. 그냥 이건 소설, 이라는 느낌.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내가 아무리 매일 지하철에서 책을 읽어도, 아무리 두 정거장을 먼저 내리거나 지나쳐도 내게는, 아니 나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이상적인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지겨웠다거나 어이없었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21. 경애의 마음(김금희. 창비. 2018. 354쪽)
:국회의원 아버지 덕에 취직했지만 능력이라고는 없는 미싱 회사 영업사원 상수. 연차가 쌓여서 회사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팀장 대리'라는 직함을 달아주자 회사에 팀원을 요구하고, 회사에선 골칫거리 사원인 경애를 팀원으로 발령한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어우러져가는 이야기.

줄거리를 단 몇 문장만으로 요약하기가 아쉬운 소설이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노동 운동과 사내 성폭력과 성 고정관념과 온라인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감추는 일과 '피해자다움'의 강요와 미성년자들에 대한 억압과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 등등. 이 많은 이야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잘 짰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 이야기와 저 이야기가 잘 섞여서 이질감없이 하나의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흘러갈 수 있게. 그래서 마지막 부분이 오히려 좀 아쉬웠다. 좀 더 담백했으면 좋았을 걸. 그래도 좋은 소설이었다.


22. 나를 봐(니컬러스 스파크스, 이진 역. 아르테. 2019. 551쪽)
: 잘 쓰는 로맨스 작가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믿고 집어들었는데, 역시나 나쁘지 않았다. 어린 시절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탓에 분노조절장애를 갖게 된 콜린. 간신히 교도소행은 면했지만 그를 늘 지켜보는 형사의 감시 아래 폭력성을 격투기 선수 생활로 억누르며 교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다니고 있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격투기 경기로 엉망이 된 얼굴로 차를 몰고 가다 빗속에서 차가 고장나 꼼짝 못하고 있던 마리아를 도와주고, 둘은 마리아의 동생이자 콜린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세레나에 의해 다시 만나게 된다.

마냥 달달한 로맨스는 아니고, 스릴러가 가미되어 있다. 프롤로그에서부터 등장하는 스토커의 정체는 읽으면서 충분히 짐작 가능하고 - 단서도 중간에 꽤 분명하게 준다 - 설마설마 하면서도 해피엔딩을 확신하고 있긴 했지만 꽤나 조마조마하게 읽었다. 그래도 포커스는 스릴러보다는 로맨스. 막 시작하는, 전혀 다른 성향과 배경을 가진 연인들의 달달하면서도 불안한 심리를 잘 묘사했고, 특히 그걸 단순 서술이 아니라 둘 사이의 핑퐁같은 대화를 통해 구성해 낸 게 이 작가의 역량을 보여준다. 다만 마리아의 캐릭터가 별로. 너무 답답하고 소심하다 못해 때로는 무지하기까지 해 보인다. 마리아의 직장 동료 질이 맘에 들었다.


23. 화재의 색(피에르 르메트르, 임호경 역. 열린책들. 2019. 618쪽)
: 전작 『오르부아르』이후의 이야기. 에두아르를 잃은 후 아버지 페리쿠르가 죽는다. 성대한 장례식이 막 시작되는데, 페리쿠르의 손자이자 마들렌의 아들 폴이 3층에서 뛰어내리고, 할아버지의 관은 폴의 피로 얼룩진다. 폴은 하반신 마비가 되고 마들렌은 아버지의 은행 지분을 물려받지만 은행장 귀스타브에게 모든 것을 의존한다.

역시나 재미있었다. 사실 전작보다 더 흥미진진했고 페이지가 잘 넘어갔다. 역시 사기극보단 복수극. 다만 앙드레는... 벌을 덜 받았다. 그 정도로는 부족해. 그래도 나머지 인간들, 특히 귀스타브가 받은 대가는 아주 흡족했다.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사회적으로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여성(마들렌), 아이(폴), 노동자(뒤프레, 블라디) 들이 힘을 모아 이른바 사회지도계층을 엿 먹이는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통쾌할 수 밖에. 3부작의 마지막이 될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24. 파리의 클로딘(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윤진 역. 민음사. 2019. 317쪽)
: 파리로 이사온 열 일곱 클로딘의 사랑 찾기. 내숭없이 솔직하고 도발적이기까지 한 클로딘. 사춘기의 미숙함과 근거없는 자신감을 지닌, 마치 야생 고양이 같은 클로딘의 이야기이다. 정서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클로딘 3부작의 두 번째 이야기인데, 왜 첫 번째부터 번역 출간하지 않은 걸까? 좋아하는 작가여서 읽은 책인데 초반에는 좀 당황스러웠다. 클로딘의 독백에선 전에 읽은 『여명』의 그 작가인 게 느껴졌으나 대화와 에피소드들은 도저히 공감이 안 되었다. 그래도 클로딘의 매력을 느끼며 잘 읽었다.


25. 골짜기의 백합(오노레 드 발자크, 정예영 역. 을유문화사. 2008. 416쪽)
: 매우 낭만주의적인 이야기.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냉대 속에서 가족과 떨어져 지낸 펠릭스. 어느 날 파티에서 자신의 이상형 모습을 지닌 한 부인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결례를 범한다. 얼마 후 그녀를 한 시골 영지에서 다시 만나고 펠릭스는 그녀에게 중세의 기사도적 사랑을 바친다.

꽤 재미있었다. 펠릭스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과연 얼마나 유지될 지를 바라보는 것도 흥미있었지만 무엇보다 나폴레옹 몰락 후 부르봉 왕가의 목고 시기에 시의 적절하게 펠릭스가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그를 이끄는 모르소프 부인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자신에 대한 펠릭스의 애정을 인정하고 그걸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용하려는 그녀의 모습은 어머니로서의 모습과 한 여성으로서의 모습이 전략적으로 섞여 있었고, 지난 세기의 귀족 사회에 대해 읽을 때면 늘 들던 의문 - 대체 왜 이렇게 젊은 남성들이 나이든 귀족 여성과 불륜을 저질렀을까 - 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다. 딱 기대했던 만큼, 원하는 바를 얻었던 책읽기였다.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9/05/02 17:50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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