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독서 목록

1. 고무보트를 타고 상어 잡는 법(모르텐 스트뢰크스네스, 배명자 역. 북라이프. 2016. 344쪽)
: 그린란드 상어를 잡겠다고 고무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간 두 명의 노르웨이인 이야기.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어부의 피가 흐르는 아티스트 지인 휴고와 함께 특정 날씨를 기다리고 있다. 저자의 모험심과 휴고의 실질적 필요 - 상어 기름 - 를 충족시키기 위한 포획에 적합한 날씨. 이윽고 기다리던 날씨가 되자 휴고와 저자는 상어의 미끼가 될 소의 부속물들을 싣고 바다로 나간다.

단순한 모험기가 아니다. 저자는 1년간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중간중간 상어와 생태계, 미세 플라스틱을 비롯한 환경오염, 바다라는 거대한 유기체와 지구와 인간,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초라함, 신화와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박식함을 위화감없이 솜씨좋게 드러낸다. 필력이 꽤 좋다. 기대했던 것보다 깊이있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어 즐겁게 읽었다.


2. 나의 오컬트한 일상 1.2. (박현주. 엘릭시르. 2017. 288쪽, 420쪽)
: 가벼운 소품으로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 읽었다. 화자가 오컬트 관련 컬럼을 쓰기로 하고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엮이는 여러 이야기들이 중심이다. 기대보다 훨씬 더 가볍고 내용이 좀... 아예 오컬트로 밀고 나가 적당히 으스스하게 결말을 내도 좋았을 텐데 에피소드들을 열심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것 같아서 좀 시시했다. 물론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둔 부분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원래의 목적은 이뤘으니 됐다.


3. 피츠버그의 마지막 여름(마이클 셰이본, 이선혜 역. 다산책방. 2009. 406쪽)
: 피츠버그 대학을 졸업한 화자 아트의 한 번의 여름 이야기. 도서관에서 만난 아서와 도서관 직원 플록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여러 관계들의 이야기이다. 1인칭 시점이긴 하지만 아트에게 추파를 던지며 끊임없이 영향을 주는 아서가 이 관계들의 중심이며 이 이야기의 핵이다.

딱 그 나이대의 청춘만큼 혼란스럽고 뜨겁고 무질서하다. 모든 행동들은 치기어린 과장으로 범벅이 되어 있고, 한순간도 자신이 진실하지 않은 적 없다고 믿고 있지만 그 믿음의 진실성 또한 그저 허세일 뿐인 이들의 하루하루는 위태롭다. 책 뒷표지에 언급된 『위대한 개츠비』나 『호밀밭의 파수꾼』과는 다르게 불안하고 다르게 성장한다. 나로서는 아트가 정말 성장한 것일까 의문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좋은 책이었다.


4.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그레이스 페일리, 하윤숙 역. 비채. 2018. 283쪽)
: 초반의 두어 작품이 앨리스 먼로를 생각나게 해서 도서관에서 얼른 빌려왔는데 뒤로 갈수록 지루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가 추천한 책을 빌렸을까 싶었다. 하루키가 말한 대로 '중독적인 맛'을 느끼려면 아주 오래오래 천천히 여러 번 읽어야 할 듯. 하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세상에 좋은 책은 너무 많다.


5. 달콤한 나의 블루 캐슬(루시 모드 몽고메리, 김고명 역. 예담. 2016. 379쪽)
: 저자를 루이자 메이 올콧과 혼동하는 바람에 빌려온 책이지만, 난 원래 빨강머리 앤도 좋아했으니까. 딱 소녀같은 감성의 귀여운 로맨스 소설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딱! 내려오는 해피엔딩도 당연. 스털링 가의 애물 단지 노처녀 밸런시. 집안 어른들의 오만가지 충고와 이상한 법칙과 신념들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고 늘 공상 속에서나 블루 캐슬을 꿈꾸며 현실에서는 지질하게 위축된 삶을 살던 그녀는 어느 날 심장에 통증을 느끼고 진찰을 받았다가 살 날이 1년밖에 안 남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집안 어른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쏘아댄 뒤 마을에서 따돌림 당하던 미혼모 병자를 도와주러 짐을 싸서 가출을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결혼 안 한 여자들을 어린애 취급하는 건 여전하다. 밸런시가 하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행동들을 맘껏 하는 걸 지켜보는 건 나름 시원했지만, 혼자가 아니어서 좀 아쉬웠다. 물론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겠지만. 기대만큼 재밌고 좋았다.


6. 시나몬 스틱(고은주. 문이당. 2018. 255쪽)
: 결혼 생활의 이면. 동화는 늘 '결혼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나지만 모든 결혼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유지되는 건 아니다. 생활에 치이고 상황에 눌려서 으깨진 감처럼 망가지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는 깨진 곳을 교묘히 가리고 살기도 하고 때로는 외면하기도 하며 때로는 아둥바둥 깨진 곳을 붙여보고자 발버둥치기도 하지만 진실은 언제든 드러나게 되어 있다. 대부분이 여성인 화자들이 답답할 때도 있고 이해가 될 때도 있었지만 덤덤하게 읽었다. 딱히 맘에 들 것도 싫을 것도 없었던 작품들이었다.


7. 터너 하우스(안젤라 플루노이, 문동식, 엄성은 역. 시그니처. 2017. 576쪽)
: 쇠락해가는 도시 디트로이트. 터너 가 13남매의 장남 차차는 거동이 불편한 엄마를 대신해 가족의 집을 처분하려 한다. 도박 중독인 막내 레일라는 빚 때문에 살고 있는 곳에서 쫓겨나 비어 있는 옛 집으로 숨어들어가고, 형제들은 다들 터너 하우스의 처분에 의견이 분분하다.

차차의 시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상당 부분 우리나라의 장남들과 비슷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부모님과 가족들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차차의 눈에만 보이는 건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고, 가여운 차차가 감당해야할 것도 그것만은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장남의 모습을 한국 소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게 좋았다. 우리나라 장남들의 모습이 엿보였다고는 했지만 내가 공감하는 건 한계가 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사실 한국 소설이었다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너무 뻔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정말 세렌디피티 같은 소설을 만나서 기뻤다.


8. 제 2 우주(선자은. 자음과모음. 2012. 235쪽)
: 과학자 엄마와 컬럼니스트 아빠를 둔 중학생 우주. 엄마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아빠와 그럭저럭 우울한 생활을 이어나간다. 저녁을 준비하던 중 엄마의 유품인 반지를 주우려다 폭발음을 듣고난 후 주위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느낀다.

평행우주 이야기.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재미있다. 두 세계의 우주가 다 안쓰럽기도 했고 엄마의 모성애에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친구, 가족, 풋사랑 등에 대해 단순하지만 섬세함을 놓치지 않는 작가의 필력이 꽤 돋보이는 작품.


9. 피로 물든 방(앤젤라 카터, 이귀우 역. 문학동네. 2010. 262쪽)
: 재해석한 동화들. 이 작가의 전작들을 읽은 상태여서인지 이 작품들은 뭔가 워밍업 - 다른 장편들을 쓰기 위한 -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다 좋았다. 특히 표제작의 경우 이제껏 대부분의 푸른 수염의 마지막 아내들이 마지막 순간에 가족에게서 구원받는 것처럼 이 소녀도 그러한데, 다만 다른 이야기의 가족들은 대부분 오빠들이었던 데 반해 여기서는 엄마의 도움으로 구원받는다. 그것도 꽤나 멋진 엄마. 그리고 +a 도 있고. 다른 작품들도 좋긴 했지만 - 「늑대 친구들」도 인상 깊긴 했지만 조금 김이 빠지는 기분도 들었기에 - 가장 강렬했던 건 역시 표제작.


10. 구석의 노인 사건집(에마 오르치, 이경아 역. 엘릭시르. 2013. 476쪽)
: 카페 구석에 앉아서 추리하는 이른바 '안락의자 탐정'인 노인이 자신의 추리를 신참 기자에게 들려주는 단편집. 각각의 작품들이 모두 시놉시스 같은 느낌이었다. 기자 폴리가 카페에 앉아 있으면 어느새 노인이 다가와 우유와 치즈케잌을 앞에 두고 손으로 노끈을 만지작거리면서 사건에 대해 줄줄 읊어대는 형식. 몇몇 이야기는 장편으로 발전시켜도 나쁘지 않겠다 싶긴 했지만 난 이 작가의 장편은 엄청 재미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 게다가 19세기 사람인 걸 감안하더라도 이 작가의 지나친 낭만주의는 이 작품에서도 슬며시 배어난다.


11. 마블러스 웨이즈의 일년(세라 윈먼, 민은영 역. 문학동네. 2018. 398쪽)
: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라니, 도서관에서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집어왔다. 역시나 좋았다. 자신이 인어의 딸이라고 믿는 아흔 살의 마블러스. 전쟁 후 아직 마음을 못 잡고 겨우 찾은 사랑마저 잃은 청년 드레이크의 이야기이다. 마블러스의 단단함이 드레이크를 지탱하고, 드레이크의 뜻밖의 선물이 마블러스에게 기쁨이 되는 걸 지켜보는 건 내게도 경이로움이었다. 마블러스가 드레이크에게 들려주는, 마치 보름달에 반짝이는 먼 바다 같은 이야기 또한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꿈 속에서까지 갖고 가고픈 이야기였다.


12. 미스 플라이트(박민정. 민음사. 2018. 241쪽)
: 가벼운 맘으로 집어들었지만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다. 항공 승무원이었던 유나가 자살을 하고, 유나 장례식에서야 유나의 상황을 조금씩 알게 되는 유나 아버지와 유나의 애인, 그리고 유나 어릴 때와 항공사 입사 후에 인연이 이어졌던 부기장 영훈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던 것 같은데 의도적이었는지 혹은 역량 부족이었는지 여백이 많다. 항공사 노조, 갑을 관계, 치기만으로는 부족했던 저항 등을 조금씩 건드리다 만다. 누군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내게는 조금 미진하게 느껴졌다. 그게 나빴다는 건 아니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찾아 읽어봐야겠다.


13. 장난꾼의 죽음(M.C. 비턴, 문은실 역. 현대문학. 2017. 252쪽)
: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 막대한 부를 가진 앤드루 트렌트.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들은 악의적인 그의 장난에 지칠 대로 지쳤지만 그의 유산을 생각하며 그와의 관계를 끊지 않고 있다. 이런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가족들은 그의 집으로 모여들고, 멀쩡한 앤드루 노인은 또다시 악랄한 장난을 친다. 당한 가족들은 진저리 치며 그를 죽이고 싶다는 얘길 한 번씩 하고, 역시나 그는 시체로 발견된다.

이 시리즈 특성인 죽어도 불쌍하지 않을 인물이 살해당하는 패턴이 여전하다. 우리의 맥베스는 또 슬슬 움직이며 사건을 해결하고, 이제는 프리실라도 한 몫 거든다. 프리실라와 맥베스는 여전히 우정과 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고 있고... 맥베스가 많이 세련되어 진 듯한 건, 프리실라의 도움인걸까 아니면 내가 이 시리즈를 읽으며 그를 좋아하게 되어서일까?


14. 목요일, 사이프러스에서(박채란. 사계절. 2009. 270쪽)
: 엄마와 이혼 후 태정이와의 약속을 점점 잊는 아빠가 미운 태정, 자신을 차버린 남자친구에게 복수하고 싶은 새롬, 조용한 모범생이지만 부모님의 압박에서 벗어나고픈 선주. 전혀 친해 보이지 않는 셋이 어쩌다 서로가 원하는 걸 알게 되어 자살 소동을 벌이기로 한다. 그런데 전학 온 후 아웃사이더로 조용히 있던 하빈이가 이들의 계획을 알고 있다면서 접근한다.

당연하고도 뻔한 얘기를 고루하지 않게 하는 게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단선적이고 짐작 가능한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끝까지 궁금하고 재미있다. 특히, 지금의 자신의 인생은 태어나기 전 자신이 미리 보고 선택한 거라는 개념이, 그 방법이 맘에 들었다. 잠시나마 동화 속에 있는 듯한 느낌. 청소년 소설을 늘 읽지만 동심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는데 이 책은 예쁜 맘을 잠시나마 가질 수 있어서 위로받았다.


15. 대성당(레이먼드 카버, 김연수 역. 문학동네. 2014. 342쪽)
: 얼마 전에 읽은 존 치버가 생각났는데(『기괴한 라디오』), 그걸 레이먼드 카버라고 착각해서 집어들었다. 당연히 느낌은 달랐지만 난 이 작가도 좋아하니까, 뭐. 무뚝뚝한 듯한 문장들 사이사이에 따뜻함이 조금씩 느껴지는 작품들. 때로는 궁금해하며, 때로는 그냥 무심히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만나는 결말들이 작게 충격적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깃털」이었지만 작품들 하나하나가 다 좋았다.


16. 인어남자(칼요한 발그렌, 최세진 역. 현대문학. 2015. 309쪽)
: 판타지 동화라고 생각해서 가벼운 맘으로 집어들었는데 생각보다 어두운 이야기였다. 알콜 중독 엄마와 절도죄로 복역중인 아빠를 둔 열 다섯 넬라. 남동생 로베르트는 지적 장애를 갖고 있다. 남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꾸며 들려주던 넬라. 학교에서 남동생이 괴롭힘을 당하자 맞서지만 역부족이다. 그러던 중 유일한 친구 토뮈가 학교에 계속 안 나오자 찾아간 넬라는 어부의 오두막에서 신기한 생물을 보게 된다.

스웨덴의 복지 제도는 역자가 얘기했듯 80년대에도 현재의 우리나라보다 더 잘 정비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리 복지가 잘 되어 있어도 부모의 무관심과 가난함에 대한 주변의 업신여김, 따돌림까지 해결해 주진 못한다. 그로인해 다친 마음은 더더욱. 그래서 넬라는 인어 남자에게 더 공감할 수 있었을 테지. 인어 남자라는 제목만 판타지일 뿐 지극히 현실적인, 성악설에 입각한 청소년 소설이다.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고 생각하고 긴장하며 읽었고, 지극히 현실적인 결말이었지만 어쨌든 가난한 자에게 현실은 매일매일이 비극이므로 이 책 또한 그럴 수 밖에 없었다.


17.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제프리 포드, 박슬라 역. 샘터. 2010. 445쪽)
: 화가 피암보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초상화가이다.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 막대한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아닐 뿐. 이런 그에게 대상을 보지 않고 이야기만 듣고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의뢰가 오고, 피암보는 이번 의뢰로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마음껏 원하는 풍경화를 그려보고자 의뢰를 수락한다.

큰 기대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기이한 느낌이었다. 19세기의 과학과 신비주의가 뒤섞인 특유의 그로테스크함, 마치 신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느낌으로 병풍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와 행동을 하는 샤르부크 부인의 괴이함, 그리고 의문스럽게 살해당한 사람들. 익숙하면서도 신비로운 요소들이 잘 어우러져 고딕 스릴러로서의 매력을 충분히 뿜어내는 재밌는 이야기였다.


18. 설이(심윤경. 한겨레출판. 2019. 277쪽)
: 드디어!! 신작이다. 마치 <스카이 캐슬> 혜나의 초등학생 버전인 듯한 설이의 이야기. 보육원 출신인 설이. 단순히 보육원에서 자란 게 다가 아니라, 설이는 새해 첫날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바구니에 담긴 채 발견된 '기적의 아기'였다. 설이는 누구보다 총명하지만 파양을 세 번이나 당하고 보육원 직원 출신인 나이든 이모와 임대 아파트에서 산다. 이런 설이가 부유한 집 아이들만 다니는 사립 초등학교에 전학가게 된다.

말했듯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종영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설이와 혜나가 겹쳐 보인다. 드라마를 다 보지 않은 내게도 그러할진대 다른 사람들에겐 더하겠지. 그래서 조금 서운하다. 이 작품만의 매력이 많이 가려지는 느낌. 작가는 뛰어난 필력과 섬세한 시선으로 못 가진 자의 상대적 박탈감과 초라함, 자신보다 많이 가졌지만 자신만큼의 능력은 없는 대상을 바라보는 양가감정,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한 욕망과 본능적인 상황판단력 등을 명민하게 보여준다. 조금이라도, 한 번이라도 자신과 남을 비교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만 어쩌면 누군가는 자신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깨닿지 못했을 수도 있는 그런 감정들.

누군가는 이 소설을 읽고 눈물 흘리고 누군가는 화를 내겠지. 난 좀 더 미묘하고 복잡한 기분이었다. 아이들은 성장하는데, 이렇게 자라면 되는데 어른들은...? 이모나 곽 선생 부부는 성장하는 아이들과 함께 자라면 되지만 나머지 어른들은? 그리고 현실의 그들은?


19. 셰르부르의 저주(랜달 개릿, 강수백 역. 행복한책읽기. 2003. 332쪽)
: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의 후속작인 『마법사가 너무 많다』를 발견하고 이 시리즈의 첫 권부터 읽기 위해 상호대차까지 신청해서 읽은 책인데, 나와 맞지 않았다. 대체역사 스릴러인데, 세계관은 상당히 탄탄하고 아이디어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번역이 고루한 데다가 근본적으로 내가 대체역사를 안 좋아해... 난 그냥 SF 추리물인줄 알았어, 대체역사 말고... 게다가 단편이어서 그런지 아님 SF여서 그런지 사건들이 스르르 해결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방법으로. 작품 앞 부분을 읽으면서 이건 어떻게 된 일인지 흥미가 서서히 올라가는 도중에 갑자기 기상천외한 방법을 제시하면서 그 방법 하나면 범인 검거 및 사건 설명 끝. 그나마 표제작은 나름의 격투신 덕에 조금 재밌었다.


20. 작가님, 어디 살아요?(뉴욕타임즈, 오현아 역. 마음산책. 2018. 392쪽)
: 뉴욕타임즈가 기획하고 연재한, 작가들이 머물렀던 곳을 다녀온 여행기들. 어떤 글은 작가의 작품과 연결해서 장소를 이야기하고 어떤 글은 작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또 어떤 글은 그저 작가가 그 곳에 머물렀던 사실을 장소에 대한 수많은 정보 중 하나로 취급할 뿐이지만 글 한 편 한 편의 시각과 느낌이 다른 것이 오히려 지루하지 않고 좋았다. 당연히 내가 원하는 방향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글도 있었고, 미처 읽어보지 못한 작가라서 위축된 기분으로 읽은 글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 책은 꼭 사서 소장해야겠다 싶었다. 나중에 어느 대륙의 어느 나라를 가든 참고할 만한 글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해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루이스 캐럴의 옥스포드.


21. 시간을 멈추는 법(매트 헤이그, 최필원 역. 북폴리오. 2018. 502쪽)
: 화자는 '앨버트로스'이다. 보통 사람들보다 노화가 약 15배 정도 느린, 아주아주 오래 사는 사람. 태어나서 4백년 넘게 산 그는 이제 8년마다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것도 익숙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인생의 단 한 번의 사랑과 그 결실인, 자신과 같은 부류인 잃어버린 딸이 있다.

난 영생을 바란 적이 없다. 뱀파이어라는 캐릭터는 좋아했지만 그건 늙지 않는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지 영원히 혹은 아주 오래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화자의 셰익스피어와 피츠제럴드를 스치는 삶은 아주 조금 부러웠다. 어떤 삶을 살든 사는 동안에는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결론도, 뻔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22.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서유미. 창비. 2018. 195쪽)
「변해가네」를 읽다 갑자기 울컥 했다. 이게 첫째라는 생각. 소설 속 화자는 한여름에 둘째를 막 출산했는데, 하필이면 여동생도 그 즈음에 첫 아이를 낳아서 친정 엄마는 첫 출산인 여동생의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가 있다. 푹푹 찌는 여름날 몸조리 때문에 선풍기조차 틀어놓지 못한 방안에서 화자는 땀띠 솟은 신생아와 막 세 돌이 지난 첫째를 돌보느라 산후통이 닥치는 것 조차 모른다. 그러다 들른 친정엄마의 '너 나중에 얼마나 아프려고 그렇게 냉장고를 열어대'냐는 말에 소리를 지르고 만다. 첫째는 늘 그렇다. 혼자 알아서도 잘 할 거라는 부모의 기대 때문에 힘겨워도 힘들다는 얘기조차 잘 못 꺼낸다. 속으로는 나도 엄마가 한 번 봐줬으면, 엄마가 달래줬으면, 조금만 도와줬으면 하지만 동생 돌보느라 정신없는 엄마의 모습에, 날 보며 웃어주기는 커녕 내가 여기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듯한 엄마의 모습에 지레 겁먹고 아무 말도 못하다가 엄마의 눈길이 한 번 닿으면 서러움에 소리를 지르게 되는 것이다.

이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이것이다. 비근한 삶의 수없이 많은 결들 중 하나를 포착해서 섬세하게 드러내는 것. 사실 내용만으로 보면 뻔할 수 있다. 「에트르」의 케잌이 어떻게 될 지, 「개의 나날」에서 장이 남긴 봉투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모처럼만의 휴가는 어떻게 흘러갈지(「휴가」), 남편의 흔적 찾기는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 지(「뒷모습의 발견」) 대충은 다 짐작이 간다. 하지만 이 작가가 문득문득 집어내는 감정의 결들이 얼마나 섬세한 지를 느끼게 되면 이 작가를 읽는 걸 멈출 수 없다. 비단 그 감정들이 내가 직접 느껴보거나 겪어보지 못했던 것이라 할 지라도.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또 그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23. 비하인드 도어(B.A. 패리스, 이수영 역. 아르테. 2017. 323쪽)
: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자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물론 어떻게든 벗어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조마조마했었는데. 새삼 여성들의 연대가 고마웠다. 비록 그렇게 얘기하기에는 아주 작을지라도.

그레이스는 완벽한 아내이다. 잭에게. 결혼 전에 쌓았던 커리어를 포기하고 전업주부로서 잭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완벽한 식탁을 차리고 정원을 가꾸며 취미로 틈틈이 그림도 그린다. 잭은 그레이스를 너무나 사랑해서 늘 그녀에게 모든 걸 맞춰주고 그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한다. 하지만 모두가 돌아가고 난 뒤면 그레이스는 2층의 작은 방에 갇히고,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작은 실수라도 저질렀다면 지하실에 갇힌다...

사이코패스는 희생자를 어떻게 고르는 걸까? 그레이스에게는 눈에 보이는 약점이 바로 곁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장 두려웠던 게 바로 그거였다. 내 약점, 내가 어떻게든 감추려고 기를 쓰고 노력하는 부분을 사악한 누군가가 첫눈에 알아볼까봐. 어쨌든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는 여섯번째 감각을 가진 자매들의 도움으로.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9/03/03 01:53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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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이요 at 2019/03/03 11:52
9번 쓰다 말았어요. 푸른 수염의 아내 같은 이야기인가본데...궁금.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9/03/04 16:20
업무 시간에 틈틈이 쓰느라 쓰다가 건너뛰었나 봐요. 다시 보충했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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