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덕 시티(레나 안데르손, 홍재웅 역. 민음사. 2010. 267쪽)
: 거대 자본에 의해 고칼로리 음식 섭취와 다이어트를 동시에 강요받는 현대 사회를 풍자한 소설. 주인공들 이름이 도널드, 데이지이다(그렇게 귀엽진 않다). 모든 것을 튀겨서 파는 고칼로리 음식 공장에서 일하면서 급여마저 음식으로 받는 도널드 D, 대학교수이고 주관이 뚜렷한 듯 보이지만 자존감이 낮은 데이지, 거대기업의 수장이지만 자신의 논리에 잠식당한 존과 그에 휘둘리는 대통령 등의 인물들을 통해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건들이 도널드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자꾸만 자기합리화를 하며 고칼로리 음식을 줄이지 못하는 모습 때문에 도널드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긴 하지만 등장 인물들의 심리는 좀 따라가기 버거웠다. 일관성이 없고 급변하는 게 캐릭터를 정립하지 못한 듯한 느낌.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말하려는 바가 명확해서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갔다.
2. 분노의 날들(실비 제르맹, 이창실 역. 문학동네. 2016. 382쪽)
: 프랑스 모르방의 깊은 숲 속 마을. 이 작은 벌목꾼 마을 주변의 숲은 모두 모페르튀 소유이다. 가난한 벌목꾼 출신인 그가 어떻게 해서 숲의 원래 주인인 코르볼로부터 이 숲을 모두 넘겨받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뭔가 비열한 짓을 했을 거라는 짐작 뿐. 모페르튀의 두 아들 중 큰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마을의 신앙심 깊은 노인 에드메의 딸 레네트와 결혼해서 아홉 아들을 낳고, 둘째 아들은 코르볼의 딸과 결혼한다.
깊은 겨울 숲 속 한가운데 혼자 서 있는 듯, 서늘하고 창백한 아름다움이 진하게 뿜어져 나오는 이야기.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이야기가 가진 처절한 아름다움에선 귀기마저 느껴진다. 못난이 블레즈가 말했듯("아름다움에는 늘 광기가 서려 있지 않던가요(141쪽)") 말이다. 온전히 소유하는 법을 알지 못했던 남자의 욕망과 분노를 이 작가만큼 잘 그려낼 수 있을까. 왜 이제서야 이 작가를 읽었는지, 모르고 산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3. 내일은 내일에게(김선영. 특별한서재. 2017. 223쪽)
: 이복동생 보라와 새엄마와 함께 사는 고등학생 연두. 친엄마와 아빠는 돌아가셨고 연두는 새엄마에게서마저 버림받을까봐 두렵다. 가난하고 못사는 동네 저지대에서 근근히 버티는 연두네 앞집에 카페 이상이 오픈하고, 새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연두는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한다.
이 작가의 청소년 소설들을 꾸준히 읽고 있는데 이 작품이 가장 좋았다. 자전적 요소가 들어갔다던데 그래서인지 연두는 내가 이제껏 읽었던 어떤 청소년 소설의 주인공보다 마음이 쓰였다.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 쓰임이 아니라 그냥 따뜻하게 지켜만 봐주고 싶은 마음. 잘 해 낼 거라는 믿음을 말없이 무한정 불어넣어주고 싶은 마음. 결말 부분 보라 얘기는 살짝 오버같았지만 그래도 참 좋은 작품이었다.
4. 멜랑콜리의 묘약(레이 브래드버리, 이주혜 역. 아작. 2017. 349쪽)
: SF라기에는 너무나 서정적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표면을 살짝 들춰보면 날카로움이 번뜩이고 있다. 이 작가를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더 좋아지는 듯. 사실 표제작은 좀 평범한 듯 했고 <멋진 바닐라 아이스크림색 양복>은 어디선가 읽어본 듯 했지만 그래도 모든 작품들이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영원히 비가 내린 날>.
5. 거울의 책(E. O. 키로비치, 이윤진 역. 민음사. 2017. 481쪽)
: 출판업자 피터에게 제안서가 온다. 오래전 프린스턴 대학 교수 살인사건 관련자였다는 작가 지망생이 쓴 원고 샘플을 읽으며 흥미를 느낀 피터는 나머지 원고를 받으려 하지만 제안서를 보낸 리처드는 말기암으로 죽어버린다.
챕터마다 시점이 다르다는 점만 아니었다면 이 책의 사건은 그저 시시한 이야기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각자의 위치와 상황 때문에 다른 관점과 의견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상당히 영리한 서술로 보여준다. 첫 챕터의 리처드의 소설에서 흥미를 확 끌어올리고 두 번째에서는 기자의 객관적인 시선을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형사의 집요한 시선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끝까지 잡아둔다. 오랜만에 맘에 드는 작가를 발견해서 기쁘다.
6.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파트릭 모디아노, 김윤진 역. 문학동네. 2015. 175쪽)
: 카페 '르 콩데'에는 늘 말없이 앉아 있던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발자취를 그녀를 바라보던 여러 사람의 시선을 통해 좇는다. 그녀 자신의 목소리도 포함해서.
이 작가 특유의 안개 낀 거리를 헤매는 듯한 분위기의 소설이다. 모호하고 방향성을 모르겠지만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안심이 되는. 시제를 유려하게 넘나드는 서술 방식 때문에 간혹 헤매기도 했지만 이 작가의 절제된 쓸쓸함은 늘 그렇듯 내게 위로를 주었다.
7. 라운드(마커스 주삭, 정미영 역. 우리교육. 2011. 248쪽)
: 청소년 소설. 형제 루벤과 카메론은 일없이 몰래 경마장에나 드나들며 시간을 죽이는 10대 아이들이다. 루벤의 뛰어난 싸움 솜씨 덕분에 내기 권투 선수로 스카웃된 형제. 형 루벤은 승승장구하며 돈을 벌지만 동생 카메론은 계속 지면서 겨우 버틴다.
그냥 전형적이고 평범한 청소년 소설이다. 울프 형제의 모습이 『메신저』에 등장하는 형제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하지만 이 작가만의 반짝임 따윈 없다. 이 작가의 책은 앞으로 뭘 읽어도 『책도둑』만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조금 서글펐다.
8. 가수는 입을 다무네(정미경. 민음사. 2017. 334쪽)
: 작가의 전작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는 좀 별로였는데, 이 책도 비슷한 소재인 듯 해서 별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기대보다는 좋았다. 꽤 밀도 있는 내용. 혼자서 모든 걸 꾸려나가야 하는 대학생 이경. 아르바이트에 치여서 교양 수업 성적을 망칠 지경이 되자 과제라도 잘 해보려고 한때 전설이었던 락커 율의 다큐를 찍기로 한다. 아티스트로서 정점을 찍었지만 지금은 바닥에서 헤매는 율의 생활에 뛰어든 이경과 율의 아내 여혜, 그리고 율의 추종자인 젊은 음악인 호영의 이야기가 보여진다.
말했듯 기대보다 재밌고 잘 짜여 있는 이야기에 반해서 열심히 읽어 나갔는데 한 가지, 문장 중간의 잦은 쉼표 사용이 좀 불편했다. 이제까지 이 작가를 읽으면서 문장이 문제된 적은 없었는데... 그래도 문장 자체는 단단한 느낌이어서 안정적인 기분으로 읽었다. 비록 이야기 속 율은 그렇지 못했지만. 정말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럴 수 있다면 그게 아무리 아픈 이야기라 할 지라도, 그 이야기로 세상이 던지는 돌을 맞을 지라도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9. 모든 저녁이 저물 때(예니 에르펜베크, 배수아 역. 한길사. 2018. 313쪽)
10. 살인자의 기억법(김영하. 문학동네. 2013. 173쪽)
: 사이코패스도 늙는다. 늙어서 치매에 걸리기도 한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은퇴한 연쇄 살인범.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고, 마을에서 자신과 같은 연쇄 살인범이 분명한 남자와 마주친다. 그도 화자를 알아본 듯, 그 이후로 화자의 집 근처를 맴돌고 화자는 하나뿐인 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행간이 깊어서 천천히 읽었다. 마지막의 '반전'은, 초반에 언급된 空 때문에 미리 짐작하기는 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 화자의 입장이 되어버려서인지 좀 허무하긴 했다.
11. 계단 위의 여자(베른하르트 슐링크, 배수아 역. 시공사. 2016. 339쪽)
: 안정된 법무법인의 시니어인 화자. 시드니에 출장을 왔다가 우연히 들어간 갤러리에서 40여 년 전 자신을 황당한 사건에 휘말리게 했던 그림을 발견한다. 그 때부터 그림의 모델이자 주인인 이레네의 행방을 좇아 결국 그녀를 만나 그녀 곁에 머물게 된다.
그림은 실재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실제의 그림과 이 이야기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래도 검색해서 그림을 들여다 본 게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느낄 수 있게 했다. 이레네의 생각을, 마음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었지만 이레네를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에는 푹 젖어들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계단 아래로 한발짝 한발짝 힘겹게 내려가는 그녀 곁에 마지막까지 선 화자의 마음을.
12. 달기지여 안녕(스튜어트 깁스, 이도영 역. 미래인. 2018. 327쪽)
: 아쉬운 달기지 시리즈 마지막 권. 대시는 열 세 번째 생일을 맞아 아빠와 한밤중에 몰래 기지 밖으로 나와 캐치볼을 한다. 바로 니나 대장에게 들켜 한 소리 듣던 중 갑자기 재수없는 억만장자 쇼버그가 골골대며 걸어나오고, 청산가리 중독으로 밝혀진다. 니나 대장은 대시에게 범인을 찾아내라고 지시한다.
니나 대장은 전권에서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융통성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재수없어지고, 살인 미수 사건의 전말은 뻔하긴 하지만 달기지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다. 이 시리즈가 너무 짧다는 게 아쉬울 뿐.
13. 벨킨 이야기, 스페이드 여왕(푸슈킨, 최선 역. 민음사. 2002. 191쪽)
: '벨킨'이라는 가상의 저자를 내세워서 이야기하는 삶의 패러독스들. 옛날 이야기 듣는 듯도 하고, 러시아 민화 같기도 했다. 들어본 듯 하지만 여전히 재미있는 이야기들. 가장 재밌었던 건 <눈보라>. 뒤의 <스페이드 여왕>은 조금 지루했다.
14. 800만 가지 죽는 방법(로렌스 블록, 김미옥 역. 황금가지. 2004. 491쪽)
: 매튜 스커더에게 창녀 킴이 찾아와 자신이 일을 그만둔다는 걸 포주 챈스에게 말해달라고 의뢰한다. 무사히 벗어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매튜는 챈스를 찾아 전달하고, 젠틀한 챈스의 대답에 매튜는 안심하지만 다음 날 킴은 시체로 발견되고, 챈스는 스커더에게 수사를 의뢰한다.
여전히 설렁설렁 수사하는 매튜. 하지만 이번에는 전권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스커더의 진정성이 느껴졌달까. 재미있게 읽었다. 챈스 캐릭터도 흥미로웠고.
15. 템페스트(셰익스피어, 이경식 역. 문학동네. 2010. 166쪽)
: 밀라노 대공이었다가 동생의 계략에 의해 외동딸과 함께 외딴 섬으로 떠밀려 와 살게 된 푸로스퍼로. 세월이 흐르고 이 섬으로 푸로스퍼로의 동생 앤토니오와 나폴리 왕 알론조 일행이 푸로스퍼로가 일으킨 태풍에 의해 조난을 당해 불시착한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관용과 대통합의, 약간은 시시한 결말. 멍청이의 깨달음은 있으나 악인의 뉘우침은 없다. 진정한 사과의 대사 한 두줄 넣어줘도 좋았을 걸. 푸로스퍼로는 왜 마법을 버려서는...
16. 포르투갈의 높은 산(얀 마텔, 공경희 역. 작가정신. 2017. 415쪽)
: 장편이라기 보다는 연작 소설들로 읽힌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과 관련된 세 남자의 이야기. 아내와 아이를 잃고 뒤로만 걷는 것으로 애도를 하다가 책에서 본 수난상을 찾아가는 토마스. 새해로 넘어가는 섣달 그믐밤 자신의 병리학 연구실이자 해부실에서 남편의 시체를 들고온 여인과 맞닥뜨리는 에우제비오. 가진 걸 모두 정리하고 침팬지 한 마리를 위해 부모의 고향으로 이주를 결정한 피터. 각각의 이야기는 아주 작은 접점을 갖고 있고, 마지막에 곱게 갈무리된다.
집. 침팬지. 존재의 근원. 존재해야 할 이유. 존재할 수 있는 이유...... 가파른 산을 오르듯 힘겹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닿는 곳은 내 존재의 깊은 곳이다. 그 심연에는 침팬지가 웅크리고 있다.
신을 믿는 자와 신을 부정하는 자 모두 읽어야 할 책이 성경만은 아니다.
17.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한강. 열림원. 2003. 160쪽)
: 작가가 아이오와 대학의 국제 창작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예전에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최승자 시인의 에세이가 시인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다면 한강은 사람에게 포커스를 둔다. 짧아서 아쉬웠다.
18. 고양이발 살인사건(코니 윌리스, 신해경 역. 아작. 2017. 445쪽)
: 이 저자의 크리스마스 단편들 두 번째. 먼저 읽은 『빨간 구두 꺼져!』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덜 난다. 그래도 <동방 박사들의 여정>과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은 눈 쌓인 배경 덕분에 좀 나았다. 이 작가를 좋아하긴 하지만 연달아 읽으니 비슷한 패턴이 보여서 좀... 쉬었다 읽어야겠다.
19.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에드 용, 양병찬 역. 어크로스. 2017. 503쪽)
: 태초에 미생물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한다. 미생물은 진화의 대상을 선택하고, 질병과 성격을 결정하며, 나아가 생물의 운명을 이끈다. 하지만 동물들이 숙주로 미생물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건 아니다. 특정 미생물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 미생물을 유지하는 것도 동물의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또 받아들인 미생물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만도 아니다. 자신에게 맞게 변형시키기도 한다. 미생물과 숙주는 공생관계이다.
중간중간 지루하기도 했고 - 너무 많은 실험 예시 -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흥미롭게 읽었다. 아무래도 특성상 소화기 계통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요즘 특히 소화기 질환을 앓고 있어서 더 집중이 되기도 했다. 정작 도움은 별로 안 됐지만.
20. 용감한 친구들 1, 2(줄리언 반스, 한유주 역. 다산책방. 2015. 409쪽, 311쪽)
: 셜록 홈스를 창조한 아서 코난 도일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로 복역한 조지 에들리라는 사무 변호사와 엮이는 이야기. 1권이 끝나가도록 이 둘이 어떤 접점을 갖게 되는지 나오지 않기에 읽기에 따라서는 지루할 수도 있지만 난 읽기 전부터 상상하던 게 있어서 나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솔직히 이 작가의 책들 중 가장 몰입을 강하게 했다. 상상은 빗나갔지만.
작가는 아서와 조지의 어린 시절과 집안 분위기부터 아주 세세하게 묘사를 한다. 이 과정에서 인물들은, 당연하지만 너무도 생생하게 입체화되고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움직여서, 이야기되는 속도보다 내 머릿속에서 더 앞서나가기까지 하는 듯 했다. 실존 인물들로 이렇게 아름다운 fiction을 지어낼 수 있다니, 역시 이 작가의 필력은 명불허전이다.
21. 세일즈맨의 죽음(아서 밀러, 강유나 역. 민음사. 2009. 188쪽)
: 평생 세일즈맨으로 일해 온 윌리. 이제는 자꾸 정신이 깜빡깜빡하고, 당연히 실적도 엉망이다. 평생 일해 온 직장에서는 밀려나고 아들들은 아직도 자리를 못 잡고 있다. 윌리는 좋았던 시절을 회상한다.
내용이야 대충 알고 있었지만 연극이 상영되는 것을 상상하며 읽으니 더 감정이입이 됐다. 1949년에 초연된 작품이라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축의 삶도 다르지 않다. 세대 간의, 그리고 가치관이 다른 남자 대 남자로서의 갈등 또한 간과할 수 없다.
22. 잃어버린 것들의 수집가(루스 호건, 김지원 역. 레드박스. 2017. 354쪽)
: 잘못된 남자를 선택했다 빠져나온 로라. 작가 앤서니의 집사 겸 비서로 아름다운 장미 정원이 있는 집에서 일한다. 앤서니는 로라에게 모든 것을 남기고 눈을 감고, 로라는 앤서니가 그 동안 절대 못 들어가게 했던 서재를 열어보고 놀란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물. 나쁜 남자 - 성실함에 대한 보상 - 약간의 환상과 도움 - 멋진 남자와의 행복한 삶의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그래도 재밌게 읽었던 건 앤서니가 쓴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따뜻함과 유니스와 바머의 유대감 때문이었다. 이런 보장된 해피엔딩은 늘 휴식같다.
23. 빨간 공책(폴 오스터, 김석희 역. 열린책들. 2004. 131쪽)
: 에세이. 저자가 겪거나 들은 '이상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이 책을 읽으면 이 작가의 소설에서 왜 그렇게 우연이 반복되는지, 그리고 그게 왜 그렇게 자연스러운지 알게 된다. 재밌게, 단숨에 읽었다.
24. 밤의 파수꾼(켄 브루언, 최필원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16. 355쪽)
: 아일랜드 경찰 출신 잭 테일러 시리즈의 시작. 재무부 간부를 원칙에 따라 검문하려다 짤린 테일러는 근근이 탐정 노릇을 하며 술에 절어 살고 있다. 그가 있는 술집으로 한 여성이 찾아와 딸의 자살 사건을 수사해 달라고 의뢰한다.
상당히 독특한 탐정물이다. 하드보일드인 줄 알았는데 뜻밖의 서정성 발견. 테일러는 수사를 거의 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다. 테일러가 가장 많이 하는 건 술 마시기 & 안 마시려 노력하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구의 전직 경찰은 상당히 호감이다. 단지 책을 좋아해서만은 아니고. 사건은 뻔하디 뻔하지만 난 이 탐정의 인간적인 면이 너무나 좋다.
25. 마그누스(실비 제르맹, 이창실 역. 문학동네. 2015. 308쪽)
: 프란츠게오르크였다가 프란츠였다가 다시 프란츠게오르크로 돌아갔지만 곧 아담 슈말커가 되어야 하고 그러다 자신의 이름을 찾은 청년 디아스포라 이야기. 그리고 2차 대전 중의 베를린에서 독일 남부, 다시 런던, 멕시코, 미국을 거쳐 빈, 그리고 프랑스 모르방에 이르기까지 그의 곁을 지킨 곰인형 마그누스.
먼저 읽은 『분노의 날들』이 아름답고 끔찍했다면 이 책은 아름답고 안쓰럽다. 짧게 끊어 들려주는 시처럼 아름다운 이야기의 행간에 모든 것을 부정당한 아이의 아픔이 배어있고, 그 진한 아픔과 상실에 나 또한 아팠지만 그 모든 상실은 결국 구원으로 이어진다. 마그누스가 평안을 잃지 않기를. ps.오랜만에 만난 못난이 블레즈도 반가웠다.
26.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실비나 오캄포, 김현균 역. 열림원. 2005. 245쪽)
: 마술적 리얼리즘 단편들. 해설에는 환상주의 문학이라 했지만 내가 읽기엔 마술적 사실주의에 더 가깝다. 이 작가는 처음 읽지만 작가만의 유니크한 서정성과 낭만과 블랙 유머가 가득하다. 가장 처음 나온 표제작부터 두서너 편까지는 그저 그랬는데 읽다보니 점점 작가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로맨티시즘에 빠져들었다. 가장 좋았던 건 <연인 속의 연인>.
: 거대 자본에 의해 고칼로리 음식 섭취와 다이어트를 동시에 강요받는 현대 사회를 풍자한 소설. 주인공들 이름이 도널드, 데이지이다(그렇게 귀엽진 않다). 모든 것을 튀겨서 파는 고칼로리 음식 공장에서 일하면서 급여마저 음식으로 받는 도널드 D, 대학교수이고 주관이 뚜렷한 듯 보이지만 자존감이 낮은 데이지, 거대기업의 수장이지만 자신의 논리에 잠식당한 존과 그에 휘둘리는 대통령 등의 인물들을 통해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건들이 도널드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자꾸만 자기합리화를 하며 고칼로리 음식을 줄이지 못하는 모습 때문에 도널드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긴 하지만 등장 인물들의 심리는 좀 따라가기 버거웠다. 일관성이 없고 급변하는 게 캐릭터를 정립하지 못한 듯한 느낌.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말하려는 바가 명확해서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갔다.
2. 분노의 날들(실비 제르맹, 이창실 역. 문학동네. 2016. 382쪽)
: 프랑스 모르방의 깊은 숲 속 마을. 이 작은 벌목꾼 마을 주변의 숲은 모두 모페르튀 소유이다. 가난한 벌목꾼 출신인 그가 어떻게 해서 숲의 원래 주인인 코르볼로부터 이 숲을 모두 넘겨받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뭔가 비열한 짓을 했을 거라는 짐작 뿐. 모페르튀의 두 아들 중 큰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마을의 신앙심 깊은 노인 에드메의 딸 레네트와 결혼해서 아홉 아들을 낳고, 둘째 아들은 코르볼의 딸과 결혼한다.
깊은 겨울 숲 속 한가운데 혼자 서 있는 듯, 서늘하고 창백한 아름다움이 진하게 뿜어져 나오는 이야기.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이야기가 가진 처절한 아름다움에선 귀기마저 느껴진다. 못난이 블레즈가 말했듯("아름다움에는 늘 광기가 서려 있지 않던가요(141쪽)") 말이다. 온전히 소유하는 법을 알지 못했던 남자의 욕망과 분노를 이 작가만큼 잘 그려낼 수 있을까. 왜 이제서야 이 작가를 읽었는지, 모르고 산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3. 내일은 내일에게(김선영. 특별한서재. 2017. 223쪽)
: 이복동생 보라와 새엄마와 함께 사는 고등학생 연두. 친엄마와 아빠는 돌아가셨고 연두는 새엄마에게서마저 버림받을까봐 두렵다. 가난하고 못사는 동네 저지대에서 근근히 버티는 연두네 앞집에 카페 이상이 오픈하고, 새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연두는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한다.
이 작가의 청소년 소설들을 꾸준히 읽고 있는데 이 작품이 가장 좋았다. 자전적 요소가 들어갔다던데 그래서인지 연두는 내가 이제껏 읽었던 어떤 청소년 소설의 주인공보다 마음이 쓰였다.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 쓰임이 아니라 그냥 따뜻하게 지켜만 봐주고 싶은 마음. 잘 해 낼 거라는 믿음을 말없이 무한정 불어넣어주고 싶은 마음. 결말 부분 보라 얘기는 살짝 오버같았지만 그래도 참 좋은 작품이었다.
4. 멜랑콜리의 묘약(레이 브래드버리, 이주혜 역. 아작. 2017. 349쪽)
: SF라기에는 너무나 서정적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표면을 살짝 들춰보면 날카로움이 번뜩이고 있다. 이 작가를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더 좋아지는 듯. 사실 표제작은 좀 평범한 듯 했고 <멋진 바닐라 아이스크림색 양복>은 어디선가 읽어본 듯 했지만 그래도 모든 작품들이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영원히 비가 내린 날>.
5. 거울의 책(E. O. 키로비치, 이윤진 역. 민음사. 2017. 481쪽)
: 출판업자 피터에게 제안서가 온다. 오래전 프린스턴 대학 교수 살인사건 관련자였다는 작가 지망생이 쓴 원고 샘플을 읽으며 흥미를 느낀 피터는 나머지 원고를 받으려 하지만 제안서를 보낸 리처드는 말기암으로 죽어버린다.
챕터마다 시점이 다르다는 점만 아니었다면 이 책의 사건은 그저 시시한 이야기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각자의 위치와 상황 때문에 다른 관점과 의견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상당히 영리한 서술로 보여준다. 첫 챕터의 리처드의 소설에서 흥미를 확 끌어올리고 두 번째에서는 기자의 객관적인 시선을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형사의 집요한 시선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끝까지 잡아둔다. 오랜만에 맘에 드는 작가를 발견해서 기쁘다.
6.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파트릭 모디아노, 김윤진 역. 문학동네. 2015. 175쪽)
: 카페 '르 콩데'에는 늘 말없이 앉아 있던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발자취를 그녀를 바라보던 여러 사람의 시선을 통해 좇는다. 그녀 자신의 목소리도 포함해서.
이 작가 특유의 안개 낀 거리를 헤매는 듯한 분위기의 소설이다. 모호하고 방향성을 모르겠지만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안심이 되는. 시제를 유려하게 넘나드는 서술 방식 때문에 간혹 헤매기도 했지만 이 작가의 절제된 쓸쓸함은 늘 그렇듯 내게 위로를 주었다.
7. 라운드(마커스 주삭, 정미영 역. 우리교육. 2011. 248쪽)
: 청소년 소설. 형제 루벤과 카메론은 일없이 몰래 경마장에나 드나들며 시간을 죽이는 10대 아이들이다. 루벤의 뛰어난 싸움 솜씨 덕분에 내기 권투 선수로 스카웃된 형제. 형 루벤은 승승장구하며 돈을 벌지만 동생 카메론은 계속 지면서 겨우 버틴다.
그냥 전형적이고 평범한 청소년 소설이다. 울프 형제의 모습이 『메신저』에 등장하는 형제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하지만 이 작가만의 반짝임 따윈 없다. 이 작가의 책은 앞으로 뭘 읽어도 『책도둑』만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조금 서글펐다.
8. 가수는 입을 다무네(정미경. 민음사. 2017. 334쪽)
: 작가의 전작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는 좀 별로였는데, 이 책도 비슷한 소재인 듯 해서 별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기대보다는 좋았다. 꽤 밀도 있는 내용. 혼자서 모든 걸 꾸려나가야 하는 대학생 이경. 아르바이트에 치여서 교양 수업 성적을 망칠 지경이 되자 과제라도 잘 해보려고 한때 전설이었던 락커 율의 다큐를 찍기로 한다. 아티스트로서 정점을 찍었지만 지금은 바닥에서 헤매는 율의 생활에 뛰어든 이경과 율의 아내 여혜, 그리고 율의 추종자인 젊은 음악인 호영의 이야기가 보여진다.
말했듯 기대보다 재밌고 잘 짜여 있는 이야기에 반해서 열심히 읽어 나갔는데 한 가지, 문장 중간의 잦은 쉼표 사용이 좀 불편했다. 이제까지 이 작가를 읽으면서 문장이 문제된 적은 없었는데... 그래도 문장 자체는 단단한 느낌이어서 안정적인 기분으로 읽었다. 비록 이야기 속 율은 그렇지 못했지만. 정말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럴 수 있다면 그게 아무리 아픈 이야기라 할 지라도, 그 이야기로 세상이 던지는 돌을 맞을 지라도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9. 모든 저녁이 저물 때(예니 에르펜베크, 배수아 역. 한길사. 2018. 313쪽)
10. 살인자의 기억법(김영하. 문학동네. 2013. 173쪽)
: 사이코패스도 늙는다. 늙어서 치매에 걸리기도 한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은퇴한 연쇄 살인범.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고, 마을에서 자신과 같은 연쇄 살인범이 분명한 남자와 마주친다. 그도 화자를 알아본 듯, 그 이후로 화자의 집 근처를 맴돌고 화자는 하나뿐인 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행간이 깊어서 천천히 읽었다. 마지막의 '반전'은, 초반에 언급된 空 때문에 미리 짐작하기는 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 화자의 입장이 되어버려서인지 좀 허무하긴 했다.
11. 계단 위의 여자(베른하르트 슐링크, 배수아 역. 시공사. 2016. 339쪽)
: 안정된 법무법인의 시니어인 화자. 시드니에 출장을 왔다가 우연히 들어간 갤러리에서 40여 년 전 자신을 황당한 사건에 휘말리게 했던 그림을 발견한다. 그 때부터 그림의 모델이자 주인인 이레네의 행방을 좇아 결국 그녀를 만나 그녀 곁에 머물게 된다.
그림은 실재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실제의 그림과 이 이야기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래도 검색해서 그림을 들여다 본 게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느낄 수 있게 했다. 이레네의 생각을, 마음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었지만 이레네를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에는 푹 젖어들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계단 아래로 한발짝 한발짝 힘겹게 내려가는 그녀 곁에 마지막까지 선 화자의 마음을.
12. 달기지여 안녕(스튜어트 깁스, 이도영 역. 미래인. 2018. 327쪽)
: 아쉬운 달기지 시리즈 마지막 권. 대시는 열 세 번째 생일을 맞아 아빠와 한밤중에 몰래 기지 밖으로 나와 캐치볼을 한다. 바로 니나 대장에게 들켜 한 소리 듣던 중 갑자기 재수없는 억만장자 쇼버그가 골골대며 걸어나오고, 청산가리 중독으로 밝혀진다. 니나 대장은 대시에게 범인을 찾아내라고 지시한다.
니나 대장은 전권에서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융통성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재수없어지고, 살인 미수 사건의 전말은 뻔하긴 하지만 달기지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다. 이 시리즈가 너무 짧다는 게 아쉬울 뿐.
13. 벨킨 이야기, 스페이드 여왕(푸슈킨, 최선 역. 민음사. 2002. 191쪽)
: '벨킨'이라는 가상의 저자를 내세워서 이야기하는 삶의 패러독스들. 옛날 이야기 듣는 듯도 하고, 러시아 민화 같기도 했다. 들어본 듯 하지만 여전히 재미있는 이야기들. 가장 재밌었던 건 <눈보라>. 뒤의 <스페이드 여왕>은 조금 지루했다.
14. 800만 가지 죽는 방법(로렌스 블록, 김미옥 역. 황금가지. 2004. 491쪽)
: 매튜 스커더에게 창녀 킴이 찾아와 자신이 일을 그만둔다는 걸 포주 챈스에게 말해달라고 의뢰한다. 무사히 벗어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매튜는 챈스를 찾아 전달하고, 젠틀한 챈스의 대답에 매튜는 안심하지만 다음 날 킴은 시체로 발견되고, 챈스는 스커더에게 수사를 의뢰한다.
여전히 설렁설렁 수사하는 매튜. 하지만 이번에는 전권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스커더의 진정성이 느껴졌달까. 재미있게 읽었다. 챈스 캐릭터도 흥미로웠고.
15. 템페스트(셰익스피어, 이경식 역. 문학동네. 2010. 166쪽)
: 밀라노 대공이었다가 동생의 계략에 의해 외동딸과 함께 외딴 섬으로 떠밀려 와 살게 된 푸로스퍼로. 세월이 흐르고 이 섬으로 푸로스퍼로의 동생 앤토니오와 나폴리 왕 알론조 일행이 푸로스퍼로가 일으킨 태풍에 의해 조난을 당해 불시착한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관용과 대통합의, 약간은 시시한 결말. 멍청이의 깨달음은 있으나 악인의 뉘우침은 없다. 진정한 사과의 대사 한 두줄 넣어줘도 좋았을 걸. 푸로스퍼로는 왜 마법을 버려서는...
16. 포르투갈의 높은 산(얀 마텔, 공경희 역. 작가정신. 2017. 415쪽)
: 장편이라기 보다는 연작 소설들로 읽힌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과 관련된 세 남자의 이야기. 아내와 아이를 잃고 뒤로만 걷는 것으로 애도를 하다가 책에서 본 수난상을 찾아가는 토마스. 새해로 넘어가는 섣달 그믐밤 자신의 병리학 연구실이자 해부실에서 남편의 시체를 들고온 여인과 맞닥뜨리는 에우제비오. 가진 걸 모두 정리하고 침팬지 한 마리를 위해 부모의 고향으로 이주를 결정한 피터. 각각의 이야기는 아주 작은 접점을 갖고 있고, 마지막에 곱게 갈무리된다.
집. 침팬지. 존재의 근원. 존재해야 할 이유. 존재할 수 있는 이유...... 가파른 산을 오르듯 힘겹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닿는 곳은 내 존재의 깊은 곳이다. 그 심연에는 침팬지가 웅크리고 있다.
신을 믿는 자와 신을 부정하는 자 모두 읽어야 할 책이 성경만은 아니다.
17.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한강. 열림원. 2003. 160쪽)
: 작가가 아이오와 대학의 국제 창작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예전에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최승자 시인의 에세이가 시인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다면 한강은 사람에게 포커스를 둔다. 짧아서 아쉬웠다.
18. 고양이발 살인사건(코니 윌리스, 신해경 역. 아작. 2017. 445쪽)
: 이 저자의 크리스마스 단편들 두 번째. 먼저 읽은 『빨간 구두 꺼져!』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덜 난다. 그래도 <동방 박사들의 여정>과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은 눈 쌓인 배경 덕분에 좀 나았다. 이 작가를 좋아하긴 하지만 연달아 읽으니 비슷한 패턴이 보여서 좀... 쉬었다 읽어야겠다.
19.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에드 용, 양병찬 역. 어크로스. 2017. 503쪽)
: 태초에 미생물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한다. 미생물은 진화의 대상을 선택하고, 질병과 성격을 결정하며, 나아가 생물의 운명을 이끈다. 하지만 동물들이 숙주로 미생물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건 아니다. 특정 미생물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 미생물을 유지하는 것도 동물의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또 받아들인 미생물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만도 아니다. 자신에게 맞게 변형시키기도 한다. 미생물과 숙주는 공생관계이다.
중간중간 지루하기도 했고 - 너무 많은 실험 예시 -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흥미롭게 읽었다. 아무래도 특성상 소화기 계통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요즘 특히 소화기 질환을 앓고 있어서 더 집중이 되기도 했다. 정작 도움은 별로 안 됐지만.
20. 용감한 친구들 1, 2(줄리언 반스, 한유주 역. 다산책방. 2015. 409쪽, 311쪽)
: 셜록 홈스를 창조한 아서 코난 도일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로 복역한 조지 에들리라는 사무 변호사와 엮이는 이야기. 1권이 끝나가도록 이 둘이 어떤 접점을 갖게 되는지 나오지 않기에 읽기에 따라서는 지루할 수도 있지만 난 읽기 전부터 상상하던 게 있어서 나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솔직히 이 작가의 책들 중 가장 몰입을 강하게 했다. 상상은 빗나갔지만.
작가는 아서와 조지의 어린 시절과 집안 분위기부터 아주 세세하게 묘사를 한다. 이 과정에서 인물들은, 당연하지만 너무도 생생하게 입체화되고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움직여서, 이야기되는 속도보다 내 머릿속에서 더 앞서나가기까지 하는 듯 했다. 실존 인물들로 이렇게 아름다운 fiction을 지어낼 수 있다니, 역시 이 작가의 필력은 명불허전이다.
21. 세일즈맨의 죽음(아서 밀러, 강유나 역. 민음사. 2009. 188쪽)
: 평생 세일즈맨으로 일해 온 윌리. 이제는 자꾸 정신이 깜빡깜빡하고, 당연히 실적도 엉망이다. 평생 일해 온 직장에서는 밀려나고 아들들은 아직도 자리를 못 잡고 있다. 윌리는 좋았던 시절을 회상한다.
내용이야 대충 알고 있었지만 연극이 상영되는 것을 상상하며 읽으니 더 감정이입이 됐다. 1949년에 초연된 작품이라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축의 삶도 다르지 않다. 세대 간의, 그리고 가치관이 다른 남자 대 남자로서의 갈등 또한 간과할 수 없다.
22. 잃어버린 것들의 수집가(루스 호건, 김지원 역. 레드박스. 2017. 354쪽)
: 잘못된 남자를 선택했다 빠져나온 로라. 작가 앤서니의 집사 겸 비서로 아름다운 장미 정원이 있는 집에서 일한다. 앤서니는 로라에게 모든 것을 남기고 눈을 감고, 로라는 앤서니가 그 동안 절대 못 들어가게 했던 서재를 열어보고 놀란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물. 나쁜 남자 - 성실함에 대한 보상 - 약간의 환상과 도움 - 멋진 남자와의 행복한 삶의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그래도 재밌게 읽었던 건 앤서니가 쓴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따뜻함과 유니스와 바머의 유대감 때문이었다. 이런 보장된 해피엔딩은 늘 휴식같다.
23. 빨간 공책(폴 오스터, 김석희 역. 열린책들. 2004. 131쪽)
: 에세이. 저자가 겪거나 들은 '이상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이 책을 읽으면 이 작가의 소설에서 왜 그렇게 우연이 반복되는지, 그리고 그게 왜 그렇게 자연스러운지 알게 된다. 재밌게, 단숨에 읽었다.
24. 밤의 파수꾼(켄 브루언, 최필원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16. 355쪽)
: 아일랜드 경찰 출신 잭 테일러 시리즈의 시작. 재무부 간부를 원칙에 따라 검문하려다 짤린 테일러는 근근이 탐정 노릇을 하며 술에 절어 살고 있다. 그가 있는 술집으로 한 여성이 찾아와 딸의 자살 사건을 수사해 달라고 의뢰한다.
상당히 독특한 탐정물이다. 하드보일드인 줄 알았는데 뜻밖의 서정성 발견. 테일러는 수사를 거의 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다. 테일러가 가장 많이 하는 건 술 마시기 & 안 마시려 노력하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구의 전직 경찰은 상당히 호감이다. 단지 책을 좋아해서만은 아니고. 사건은 뻔하디 뻔하지만 난 이 탐정의 인간적인 면이 너무나 좋다.
25. 마그누스(실비 제르맹, 이창실 역. 문학동네. 2015. 308쪽)
: 프란츠게오르크였다가 프란츠였다가 다시 프란츠게오르크로 돌아갔지만 곧 아담 슈말커가 되어야 하고 그러다 자신의 이름을 찾은 청년 디아스포라 이야기. 그리고 2차 대전 중의 베를린에서 독일 남부, 다시 런던, 멕시코, 미국을 거쳐 빈, 그리고 프랑스 모르방에 이르기까지 그의 곁을 지킨 곰인형 마그누스.
먼저 읽은 『분노의 날들』이 아름답고 끔찍했다면 이 책은 아름답고 안쓰럽다. 짧게 끊어 들려주는 시처럼 아름다운 이야기의 행간에 모든 것을 부정당한 아이의 아픔이 배어있고, 그 진한 아픔과 상실에 나 또한 아팠지만 그 모든 상실은 결국 구원으로 이어진다. 마그누스가 평안을 잃지 않기를. ps.오랜만에 만난 못난이 블레즈도 반가웠다.
26.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실비나 오캄포, 김현균 역. 열림원. 2005. 245쪽)
: 마술적 리얼리즘 단편들. 해설에는 환상주의 문학이라 했지만 내가 읽기엔 마술적 사실주의에 더 가깝다. 이 작가는 처음 읽지만 작가만의 유니크한 서정성과 낭만과 블랙 유머가 가득하다. 가장 처음 나온 표제작부터 두서너 편까지는 그저 그랬는데 읽다보니 점점 작가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로맨티시즘에 빠져들었다. 가장 좋았던 건 <연인 속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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