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림자 소녀(미셸 뷔시, 임명주 역. 달콤한책. 2014. 527쪽)
: 끔찍한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갓난아기만이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승객 명단에 있는 또래의 여자아기는 두 명. 살아남은 이 아이는 기업 오너 집안의 손녀 리즈로즈일까 아님 푸드트럭 집의 손녀 에밀리일까? 18년간 부잣집의 돈을 받으며 그녀의 신분을 추적하던 탐정은 그녀가 18세가 되고 진실을 깨닫는 순간 살해당하고, 이야기는 당사자가 탐정의 일기를 손에 넣고 실종된 뒤 그 뒤를 좇는 오빠를 따라간다.
흥미진진하긴 했지만 질질 끄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사실 마르크의 행동이 가장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가장 간절한 듯 하면서 가장 굼떴으니. 그냥 한마디면 될 것을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돌리고 꼬아서 얘기해야했나. 결말이 너무 허술해서 허무하기까지 했다. 사실 설정 자체가 좀 답답하긴 했지만 어쨌든 DNA 검사가 없었던 80년대였으니. 어쨌든 작가의 역량이 이 작품에선 별로 발휘되지 않은 듯.
2. 남쪽으로(다니 라페리에르, 박명숙 역. 열린책들. 2012. 308쪽)
: 남쪽의 아름다운 섬나라 아이티의 사람들. 날씨만큼 열정적이고 바다만큼 강한 사랑 이야기들. 장편이라기보다는 연작소설처럼 읽혔다. 라틴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관능이 소설 전체에 흘러 넘치고, 읽고 있으면 마치 스탕달 신드롬처럼 내가 그 뜨거운 열기 속으로 휩쓸리는 듯, 나도 그 안에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전작보다 훨씬 아름다웠던 소설.
3. 트렁크(김려령. 창비. 2015. 214쪽)
: 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이 집어들었다가 예상과 다른 내용에 좀 놀랐다. 재밌었다. 결혼정보업체에 다니는 노인지. 예쁜 얼굴로 스카우트된 그녀는 프리미엄 서비스인 'New Marriage' 팀에서 일하는데 이 팀은 사실 기간제 아내/남편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막 출장에서 다녀온 그녀에게 절친이 소개팅을 시켜주고, 좀 이상한 소개팅남은 다시 출장을 간 그녀의 출장지(결혼해서 살고 있는 집)에 들이닥친다.
결혼과 사랑에 대해 여려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매춘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인지의 회사. 하지만 굳이 그런 서비스가 아니더라도 엄연히 이 사회에는 매매혼이 존재하고, 매매혼까지는 아니더라도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순수한 사랑의 결합 따위가 아니게 된 지는 오래됐으니.
작가의 필력은 여전하다. 난 이 작가의 청소년 소설보다는 이렇게 성인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더 좋다.
4. 파수꾼(하퍼 리, 공진호 역. 열린책들. 2015. 421쪽)
: 『앵무새 죽이기』의 뒷 이야기. 『앵무새 죽이기』는 아주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역시나 이 책은 그 책만큼은 못했다. 작가의 처녀작임을 모르고 읽었다해도 알아차렸을 듯.
『앵무새 죽이기』에서 철사로 뼈대를 만든 햄 의상을 입고 울먹이던 스카웃은 20대의 어엿한 직업인이 되어 뉴욕에 살고 있고, 죽은 젬 오빠의 친구이자 아버지 핀치 변호사의 후계자 역할을 하는 헨리와 사귀고 있다. 오랜만에 고향 메이콤에 내려온 진 루이즈는 도시와는 너무도 다른 메이콤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한다.
앞부분은 조금 지루했다. 하지만 진 루이즈가 아버지의 행적을 안 후 배신감을 느끼고 혼란스러워하고 삼촌과 대화하는 부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핀치 변호사의 궤변적인 변명 또한 그랬다.
아무래도 『앵무새 죽이기』의 그림자를 지우기가 힘들었다. 작가가 그 작품 이후에 절필한 것도 이해가 된다.
5. 천사는 여기 머문다(전경린. 문학동네. 2014. 321쪽)
: 드러낼 수 없는 사랑. 조금은 올드하기도 하고 그래서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절했고 무거웠다. 하지만 진도가 늦게 나간 건 문장 때문이었다. 좋아서, 곱씹느라. 그럼에도 당분간은 전경린을 좀 멀리하고 싶기는 하다.
6. 썩은 잎(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송병선 역. 민음사. 2016. 194쪽)
: 마꼰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지난 밤 사이에 의사가 죽었다. 마을에서 배척받던 의사. 무시무시한 폭력 사태에도 다친 마을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던 그의 집에는 그가 마을에 정착하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퇴역 대령과 대령의 딸 이사벨, 그리고 이사벨의 어린 아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세사람의 시선으로 각각 과거와 현재가 이야기된다.
명확하지도 순차적이지도 않은 서술이어서 더 집중하게 됐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서술 방식이 좀 달라서 신선했다. 닿을 수 있다면 꼭 한 번은 머물고 싶은 마꼰도의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흥미로웠다. 물론 흙먼지 날리는 그 길을 상상하면서 『백년의 고독』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한 번 떠올리기도 했지만. 오타 및 오류는 옥에티.
7. 일곱 가지 이야기(미셸 투르니에, 이원복 역. 소담출판사. 2004. 184쪽)
: 동화 7편. 적당히 재밌고 적당히 교훈적이었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도 있긴 했지만 작가의 다른 글들처럼 생각을 오래 하게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가장 좋았던 건 <아망딘, 두 정원>.
8. 삼국유사(일연, 김원중 역. 민음사. 2008. 655쪽)
: 옛날 이야기 읽는 기분으로 편하게 읽어볼까 집어들었는데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 학창시절 국사 시간에 들었던 재밌고 기이한 이야기들도 물론 있지만 승려가 쓴 책답게 전체 5권 9장(+왕력) 중 상당 부분(5장)이 승려와 절, 탑 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 안에서도 이차돈의 흰 피 이야기라든가, 원효 대사와 설총 이야기 등 익숙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다. 솔직히 스님들의 수행과 깨달음 이야기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선문답들과 계, 게 속에서는 잠깐씩 헤매기도 했지만, 사실 이 부분을 읽던 시기에 심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이 책을 집어들고 승려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서 좋았다. 연도나 왕 이름 등이 뒤의 왕력과 어긋나는 경우도 있었고 해동(한반도)의 시조가 중국 황실의 딸이라 쓰는 등의 사대 사관이 보이기도 했지만 초반 긴장했던 것보다 페이지도 쭉쭉 넘어갔고 재밌게 읽었다.
9. 호밀빵 햄 샌드위치(찰스 부코스키, 박현주 역. 열린책들. 2016. 420쪽)
: 저자의 페르소나인 차나스키의 시작. 폭력적인 아빠와 순종적 방관자 엄마 사이에서 버텨내던 유년기가 담담하게 그려진다. 별 일 아닌 듯 이야기하지만 가난과 그로 인한 학교에서의 따돌림과 부모의 자격지심과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인한 압박감이 마음을 깊이 찌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파르륵 넘어가는 재미는 덤.
당연히 'on rye'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오마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읽는 내내 『호밀밭의 파수꾼』보다 몇 배나 좋은 책이라고, 청출어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뒤의 해설을 읽고는 '도시락' 설이 가장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구원은 문학 뿐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도 21세기 한국에서도.
10. 술, 전쟁같은 사랑의 기록(캐롤라인 냅, 고정아 역. 프롬북. 2003. 341쪽)
: 알콜 중독 극복기. 고백하자면, 나 또한 알콜 중독이란 자신의 의지만으로 극복이 가능한 것이고 굳이 낫지 않아도 본인만 행복하고 주위에 구체적인 피해만 주지 않으면 상관없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저자처럼 자기 일을 제대로 해내고 주위에 큰 피해를 입히지 않고 티도 크게 내지 않으면서도 알콜에 잠식되어가는 '고도 적응형 중독' 역시 질병이며 고치지 않는다면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하리라는 걸 새삼 느꼈다.
사실 읽는 내내 술이 좀 땡겼다. 난 작년말 건강검진 결과가 좋지 않아서 올해 들어선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술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하다가 이 책을 읽으며 너무나도 마시고 싶어서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문득 내가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마음 저변에는 '난 그래도 이 사람만큼은 아니잖아'라는 일종의 우월감(?)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정신 차렸다. 술의 맛, 술이 주는 힘을 알고 있는 이상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것이고, 허공에 발 딛는 건 정말 한순간이기에.
중간에 거식증 얘기가 잠깐 나온다. 사실 거식증의 심리가 더 궁금하여, 이 작가의 3부작 중 나머지를 얼른 읽고 싶다.
11. 아무도 아닌(황정은. 문학동네. 2016. 211쪽)
: 이 사회에서 아무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 덤덤하게 이야기하지만 쓸쓸하다. 갑남을녀이지만, 그들 각자의 고통을 누가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읽기가 쉽지 않았다, 마음이 아파서.
12. 몰타의 매(대실 해밋, 김우열 역. 황금가지. 2012. 385쪽)
: 샘 스페이드 탐정 사무소에 아름다운 여성 의뢰자가 찾아온다. 남자와 도망친 어린 여동생을 찾아달라는 것. 스페이드의 동료가 밤에 그 남자를 미행하다 살해당하고, 스페이드는 여성 의뢰자를 찾아 진실을 추궁한다.
재미없었다. 원래도 하드보일드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특히 이 작품은 더 별로였다. 불친절한 서술도, 매끄럽지 못한 문장(특히 217쪽 '사겨둘 만')도 맘에 안 들었지만 제일 싫었던 건 사무실 직원 성희롱하는 마초 주인공.
13. 핫 하우스 플라워(마고 버윈, 이정아 역. 살림, 2010. 391쪽)
: 이혼 후 영 인간관계에 마음을 열 수 없는 릴라. 우연히 시장에서 극락조화라는 화초를 사게 된다. 화초 키우기가 자신과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된 릴라는 화초를 더 구입하며 화초상 데이비드에게 관심을 표현하게 되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지나던 거리에서 희귀한 식물들이 매달린 빨래방 창문에 이끌려 그 곳으로 들어가 주인 아르망에게서 나비단풍의 가지를 잘라 받는다. 그 가지에서 뿌리가 나면 밀실의 아홉 가지 화초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받는데...
재미가 없지는 않았다. 생각없이 스토리만 따라가면 되어서 편하긴 했다. 뒷부분이 화초찾기 모험담이 되리라는 건 예상 못했지만. 나름 숨가쁘게 스토리를 진행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야기 자체로는 좀 허술했다. 뉴욕에서는 세상 진귀했던 욕망의 화초들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도 그렇고, 인물들의 심리는 너무 널을 뛰어서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묘사 따윈 없었고, 대화나 행동에서 짐작되는 것도 전혀 공감이 되질 않았다. 그냥 가볍게 읽을 만은 했지만, 시간이 조금 아깝기도 했다.
14. 안녕, 다비도프 씨(최우근. 북극곰. 2015. 271쪽)
: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려던 순간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청년의 고군분투기. 가볍게 읽을 만은 했다. 투명 인간에 대해 중의적인 의미를 담으려 나름 노력했고 흔히 '투명인간'이라 하면 떠올릴 장점들보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단점들 - 특히 옆집 안나의 입장을 생각할 때 - 도 균형있게 다룬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시선을 당연시 하는 듯한 서술('겁탈은 몰라도 희롱정도는' 29쪽)과 뻔한 전개는 별로였다. 반전은 무슨... 잘 쓴 한국 작가 좀 찾고 싶다.
15. 사냥꾼들(제임스 설터, 오현아 역. 마음산책. 2016. 316쪽)
: 저자 자신이 참가했던 한국 전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대위 클리브는 2차 대전에서의 활약으로 이미 어느 정도의 명성을 갖고 있다. 한국 전쟁에서 미그기를 격추하는 임무에 투입되지만 시력도 순발력도 예전같지 않다.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가운데, 부하 직원 펠은 윙맨의 위치를 지키지 않으면서 적기 격추에 공을 세우고, 그의 자리 이탈을 제어하지 못하는 클리브의 위상은 떨어진다.
문장은 간결하고 아름다웠고, 전쟁과 전투를 싫어하는 나 조차도 흥분될 만큼 짧은 문장 속에서도 묘사는 정확했다. 하지만 결말은... 아니기를 바랐던 그 지점으로 정확히 달려가는 클리브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내가 무기력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결말 때문에 이 책을 두 번 읽지는 않겠지만, 한국의 겨울을 묘사하는 그의 문장은 계속 맘 속에서 반짝일 것 같다.
16. 마녀의 발견 1, 2(테버러 하크니스, 김민수 역. 엘릭시르. 2014. 643쪽, 470쪽)
: 『트와일라잇』과 『해리 포터』를 합친 판타지 역사 서스펜스 고딕 로맨스. 앞의 두 책에서 영향을 받은 게 확실한 듯한 내용적인 유사성이 곳곳에 보이지만 사랑은 『트와일라잇』보다 진했고 역사적 배경 지식은 『해리 포터』보다 넓었다.
유서 깊은 마녀 집안에서 태어난 다이애나는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마법을 꾹꾹 누르며 평범한 역사학자로 살아가고 있다. 안식년을 맞아 옥스포드에서 연구에 몰두하던 중 중세시대 필사본을 대출받았는데, 그 책에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약간의 의지로 그 책을 열자 책 속의 마법 걸린 글자들이 보였고 다이애나는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책을 반납한다. 하지만 곧 뱀파이어를 비롯한 마법 존재들이 자신을 뒤쫓는다는 걸 알아채는데, 처음 마주쳤던 매슈라는 뱀파이어는 유독 노골적으로 주위를 맴돈다.
진짜 재밌었다. 머리 식히며 빠져들기 안성맞춤이었다. 다만 아쉬운 건, 3부작이라는 이 시리즈의 나머지가 번역출간되는 게 요원하다는 점.
17. 호텔 프린스(안보윤 외. 은행나무. 2017. 244쪽)
: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첫 작품이 좀 맘에 안 들어서 진도가 더디기도 했지만 다른 작품들도 그닥 유니크하지도 개성적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좋았던 건 정지향과 안보윤 정도.
18. 내 손 놓지마(미셸 뷔시, 김도연 역. 달콤한책. 2016. 383쪽)
: 이 작가는 기대 없이 읽어야 괜찮을 듯. 도서관에서 딱히 집어들 책이 없어서 가져왔는데 생각보단 재밌었다. 여섯 살 딸과 함께 레위니옹 섬으로 휴양 온 부부. 셋이서 호텔 수영장에서 놀던 중 방에 잠깐 다녀온다고 올라간 아내가 오지 않자 남편은 호텔로 올라가고, 핏자국이 뿌려진 방 안 어디에도 아내가 없음을 알고 경찰을 부른다. 하지만 남편은 돌연 태도를 바꿔 아이와 함께 도망치는데...
기대보다는 재밌었지만 역시 이 작가의 전작 『검은 수련』에는 한참 못 미친다. 짐작하기 힘든 반전을 만들어두긴 했는데 그걸 위해 장치를 너무 많이 깔아뒀다. 어쨌든 해피엔딩이긴 했다.
: 끔찍한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갓난아기만이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승객 명단에 있는 또래의 여자아기는 두 명. 살아남은 이 아이는 기업 오너 집안의 손녀 리즈로즈일까 아님 푸드트럭 집의 손녀 에밀리일까? 18년간 부잣집의 돈을 받으며 그녀의 신분을 추적하던 탐정은 그녀가 18세가 되고 진실을 깨닫는 순간 살해당하고, 이야기는 당사자가 탐정의 일기를 손에 넣고 실종된 뒤 그 뒤를 좇는 오빠를 따라간다.
흥미진진하긴 했지만 질질 끄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사실 마르크의 행동이 가장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가장 간절한 듯 하면서 가장 굼떴으니. 그냥 한마디면 될 것을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돌리고 꼬아서 얘기해야했나. 결말이 너무 허술해서 허무하기까지 했다. 사실 설정 자체가 좀 답답하긴 했지만 어쨌든 DNA 검사가 없었던 80년대였으니. 어쨌든 작가의 역량이 이 작품에선 별로 발휘되지 않은 듯.
2. 남쪽으로(다니 라페리에르, 박명숙 역. 열린책들. 2012. 308쪽)
: 남쪽의 아름다운 섬나라 아이티의 사람들. 날씨만큼 열정적이고 바다만큼 강한 사랑 이야기들. 장편이라기보다는 연작소설처럼 읽혔다. 라틴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관능이 소설 전체에 흘러 넘치고, 읽고 있으면 마치 스탕달 신드롬처럼 내가 그 뜨거운 열기 속으로 휩쓸리는 듯, 나도 그 안에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전작보다 훨씬 아름다웠던 소설.
3. 트렁크(김려령. 창비. 2015. 214쪽)
: 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이 집어들었다가 예상과 다른 내용에 좀 놀랐다. 재밌었다. 결혼정보업체에 다니는 노인지. 예쁜 얼굴로 스카우트된 그녀는 프리미엄 서비스인 'New Marriage' 팀에서 일하는데 이 팀은 사실 기간제 아내/남편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막 출장에서 다녀온 그녀에게 절친이 소개팅을 시켜주고, 좀 이상한 소개팅남은 다시 출장을 간 그녀의 출장지(결혼해서 살고 있는 집)에 들이닥친다.
결혼과 사랑에 대해 여려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매춘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인지의 회사. 하지만 굳이 그런 서비스가 아니더라도 엄연히 이 사회에는 매매혼이 존재하고, 매매혼까지는 아니더라도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순수한 사랑의 결합 따위가 아니게 된 지는 오래됐으니.
작가의 필력은 여전하다. 난 이 작가의 청소년 소설보다는 이렇게 성인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더 좋다.
4. 파수꾼(하퍼 리, 공진호 역. 열린책들. 2015. 421쪽)
: 『앵무새 죽이기』의 뒷 이야기. 『앵무새 죽이기』는 아주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역시나 이 책은 그 책만큼은 못했다. 작가의 처녀작임을 모르고 읽었다해도 알아차렸을 듯.
『앵무새 죽이기』에서 철사로 뼈대를 만든 햄 의상을 입고 울먹이던 스카웃은 20대의 어엿한 직업인이 되어 뉴욕에 살고 있고, 죽은 젬 오빠의 친구이자 아버지 핀치 변호사의 후계자 역할을 하는 헨리와 사귀고 있다. 오랜만에 고향 메이콤에 내려온 진 루이즈는 도시와는 너무도 다른 메이콤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한다.
앞부분은 조금 지루했다. 하지만 진 루이즈가 아버지의 행적을 안 후 배신감을 느끼고 혼란스러워하고 삼촌과 대화하는 부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핀치 변호사의 궤변적인 변명 또한 그랬다.
아무래도 『앵무새 죽이기』의 그림자를 지우기가 힘들었다. 작가가 그 작품 이후에 절필한 것도 이해가 된다.
5. 천사는 여기 머문다(전경린. 문학동네. 2014. 321쪽)
: 드러낼 수 없는 사랑. 조금은 올드하기도 하고 그래서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절했고 무거웠다. 하지만 진도가 늦게 나간 건 문장 때문이었다. 좋아서, 곱씹느라. 그럼에도 당분간은 전경린을 좀 멀리하고 싶기는 하다.
6. 썩은 잎(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송병선 역. 민음사. 2016. 194쪽)
: 마꼰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지난 밤 사이에 의사가 죽었다. 마을에서 배척받던 의사. 무시무시한 폭력 사태에도 다친 마을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던 그의 집에는 그가 마을에 정착하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퇴역 대령과 대령의 딸 이사벨, 그리고 이사벨의 어린 아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세사람의 시선으로 각각 과거와 현재가 이야기된다.
명확하지도 순차적이지도 않은 서술이어서 더 집중하게 됐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서술 방식이 좀 달라서 신선했다. 닿을 수 있다면 꼭 한 번은 머물고 싶은 마꼰도의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흥미로웠다. 물론 흙먼지 날리는 그 길을 상상하면서 『백년의 고독』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한 번 떠올리기도 했지만. 오타 및 오류는 옥에티.
7. 일곱 가지 이야기(미셸 투르니에, 이원복 역. 소담출판사. 2004. 184쪽)
: 동화 7편. 적당히 재밌고 적당히 교훈적이었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도 있긴 했지만 작가의 다른 글들처럼 생각을 오래 하게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가장 좋았던 건 <아망딘, 두 정원>.
8. 삼국유사(일연, 김원중 역. 민음사. 2008. 655쪽)
: 옛날 이야기 읽는 기분으로 편하게 읽어볼까 집어들었는데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 학창시절 국사 시간에 들었던 재밌고 기이한 이야기들도 물론 있지만 승려가 쓴 책답게 전체 5권 9장(+왕력) 중 상당 부분(5장)이 승려와 절, 탑 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 안에서도 이차돈의 흰 피 이야기라든가, 원효 대사와 설총 이야기 등 익숙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다. 솔직히 스님들의 수행과 깨달음 이야기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선문답들과 계, 게 속에서는 잠깐씩 헤매기도 했지만, 사실 이 부분을 읽던 시기에 심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이 책을 집어들고 승려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서 좋았다. 연도나 왕 이름 등이 뒤의 왕력과 어긋나는 경우도 있었고 해동(한반도)의 시조가 중국 황실의 딸이라 쓰는 등의 사대 사관이 보이기도 했지만 초반 긴장했던 것보다 페이지도 쭉쭉 넘어갔고 재밌게 읽었다.
9. 호밀빵 햄 샌드위치(찰스 부코스키, 박현주 역. 열린책들. 2016. 420쪽)
: 저자의 페르소나인 차나스키의 시작. 폭력적인 아빠와 순종적 방관자 엄마 사이에서 버텨내던 유년기가 담담하게 그려진다. 별 일 아닌 듯 이야기하지만 가난과 그로 인한 학교에서의 따돌림과 부모의 자격지심과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인한 압박감이 마음을 깊이 찌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파르륵 넘어가는 재미는 덤.
당연히 'on rye'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오마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읽는 내내 『호밀밭의 파수꾼』보다 몇 배나 좋은 책이라고, 청출어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뒤의 해설을 읽고는 '도시락' 설이 가장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구원은 문학 뿐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도 21세기 한국에서도.
10. 술, 전쟁같은 사랑의 기록(캐롤라인 냅, 고정아 역. 프롬북. 2003. 341쪽)
: 알콜 중독 극복기. 고백하자면, 나 또한 알콜 중독이란 자신의 의지만으로 극복이 가능한 것이고 굳이 낫지 않아도 본인만 행복하고 주위에 구체적인 피해만 주지 않으면 상관없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저자처럼 자기 일을 제대로 해내고 주위에 큰 피해를 입히지 않고 티도 크게 내지 않으면서도 알콜에 잠식되어가는 '고도 적응형 중독' 역시 질병이며 고치지 않는다면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하리라는 걸 새삼 느꼈다.
사실 읽는 내내 술이 좀 땡겼다. 난 작년말 건강검진 결과가 좋지 않아서 올해 들어선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술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하다가 이 책을 읽으며 너무나도 마시고 싶어서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문득 내가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마음 저변에는 '난 그래도 이 사람만큼은 아니잖아'라는 일종의 우월감(?)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정신 차렸다. 술의 맛, 술이 주는 힘을 알고 있는 이상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것이고, 허공에 발 딛는 건 정말 한순간이기에.
중간에 거식증 얘기가 잠깐 나온다. 사실 거식증의 심리가 더 궁금하여, 이 작가의 3부작 중 나머지를 얼른 읽고 싶다.
11. 아무도 아닌(황정은. 문학동네. 2016. 211쪽)
: 이 사회에서 아무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 덤덤하게 이야기하지만 쓸쓸하다. 갑남을녀이지만, 그들 각자의 고통을 누가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읽기가 쉽지 않았다, 마음이 아파서.
12. 몰타의 매(대실 해밋, 김우열 역. 황금가지. 2012. 385쪽)
: 샘 스페이드 탐정 사무소에 아름다운 여성 의뢰자가 찾아온다. 남자와 도망친 어린 여동생을 찾아달라는 것. 스페이드의 동료가 밤에 그 남자를 미행하다 살해당하고, 스페이드는 여성 의뢰자를 찾아 진실을 추궁한다.
재미없었다. 원래도 하드보일드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특히 이 작품은 더 별로였다. 불친절한 서술도, 매끄럽지 못한 문장(특히 217쪽 '사겨둘 만')도 맘에 안 들었지만 제일 싫었던 건 사무실 직원 성희롱하는 마초 주인공.
13. 핫 하우스 플라워(마고 버윈, 이정아 역. 살림, 2010. 391쪽)
: 이혼 후 영 인간관계에 마음을 열 수 없는 릴라. 우연히 시장에서 극락조화라는 화초를 사게 된다. 화초 키우기가 자신과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된 릴라는 화초를 더 구입하며 화초상 데이비드에게 관심을 표현하게 되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지나던 거리에서 희귀한 식물들이 매달린 빨래방 창문에 이끌려 그 곳으로 들어가 주인 아르망에게서 나비단풍의 가지를 잘라 받는다. 그 가지에서 뿌리가 나면 밀실의 아홉 가지 화초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받는데...
재미가 없지는 않았다. 생각없이 스토리만 따라가면 되어서 편하긴 했다. 뒷부분이 화초찾기 모험담이 되리라는 건 예상 못했지만. 나름 숨가쁘게 스토리를 진행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야기 자체로는 좀 허술했다. 뉴욕에서는 세상 진귀했던 욕망의 화초들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도 그렇고, 인물들의 심리는 너무 널을 뛰어서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묘사 따윈 없었고, 대화나 행동에서 짐작되는 것도 전혀 공감이 되질 않았다. 그냥 가볍게 읽을 만은 했지만, 시간이 조금 아깝기도 했다.
14. 안녕, 다비도프 씨(최우근. 북극곰. 2015. 271쪽)
: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려던 순간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청년의 고군분투기. 가볍게 읽을 만은 했다. 투명 인간에 대해 중의적인 의미를 담으려 나름 노력했고 흔히 '투명인간'이라 하면 떠올릴 장점들보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단점들 - 특히 옆집 안나의 입장을 생각할 때 - 도 균형있게 다룬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시선을 당연시 하는 듯한 서술('겁탈은 몰라도 희롱정도는' 29쪽)과 뻔한 전개는 별로였다. 반전은 무슨... 잘 쓴 한국 작가 좀 찾고 싶다.
15. 사냥꾼들(제임스 설터, 오현아 역. 마음산책. 2016. 316쪽)
: 저자 자신이 참가했던 한국 전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대위 클리브는 2차 대전에서의 활약으로 이미 어느 정도의 명성을 갖고 있다. 한국 전쟁에서 미그기를 격추하는 임무에 투입되지만 시력도 순발력도 예전같지 않다.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가운데, 부하 직원 펠은 윙맨의 위치를 지키지 않으면서 적기 격추에 공을 세우고, 그의 자리 이탈을 제어하지 못하는 클리브의 위상은 떨어진다.
문장은 간결하고 아름다웠고, 전쟁과 전투를 싫어하는 나 조차도 흥분될 만큼 짧은 문장 속에서도 묘사는 정확했다. 하지만 결말은... 아니기를 바랐던 그 지점으로 정확히 달려가는 클리브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내가 무기력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결말 때문에 이 책을 두 번 읽지는 않겠지만, 한국의 겨울을 묘사하는 그의 문장은 계속 맘 속에서 반짝일 것 같다.
16. 마녀의 발견 1, 2(테버러 하크니스, 김민수 역. 엘릭시르. 2014. 643쪽, 470쪽)
: 『트와일라잇』과 『해리 포터』를 합친 판타지 역사 서스펜스 고딕 로맨스. 앞의 두 책에서 영향을 받은 게 확실한 듯한 내용적인 유사성이 곳곳에 보이지만 사랑은 『트와일라잇』보다 진했고 역사적 배경 지식은 『해리 포터』보다 넓었다.
유서 깊은 마녀 집안에서 태어난 다이애나는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마법을 꾹꾹 누르며 평범한 역사학자로 살아가고 있다. 안식년을 맞아 옥스포드에서 연구에 몰두하던 중 중세시대 필사본을 대출받았는데, 그 책에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약간의 의지로 그 책을 열자 책 속의 마법 걸린 글자들이 보였고 다이애나는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책을 반납한다. 하지만 곧 뱀파이어를 비롯한 마법 존재들이 자신을 뒤쫓는다는 걸 알아채는데, 처음 마주쳤던 매슈라는 뱀파이어는 유독 노골적으로 주위를 맴돈다.
진짜 재밌었다. 머리 식히며 빠져들기 안성맞춤이었다. 다만 아쉬운 건, 3부작이라는 이 시리즈의 나머지가 번역출간되는 게 요원하다는 점.
17. 호텔 프린스(안보윤 외. 은행나무. 2017. 244쪽)
: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첫 작품이 좀 맘에 안 들어서 진도가 더디기도 했지만 다른 작품들도 그닥 유니크하지도 개성적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좋았던 건 정지향과 안보윤 정도.
18. 내 손 놓지마(미셸 뷔시, 김도연 역. 달콤한책. 2016. 383쪽)
: 이 작가는 기대 없이 읽어야 괜찮을 듯. 도서관에서 딱히 집어들 책이 없어서 가져왔는데 생각보단 재밌었다. 여섯 살 딸과 함께 레위니옹 섬으로 휴양 온 부부. 셋이서 호텔 수영장에서 놀던 중 방에 잠깐 다녀온다고 올라간 아내가 오지 않자 남편은 호텔로 올라가고, 핏자국이 뿌려진 방 안 어디에도 아내가 없음을 알고 경찰을 부른다. 하지만 남편은 돌연 태도를 바꿔 아이와 함께 도망치는데...
기대보다는 재밌었지만 역시 이 작가의 전작 『검은 수련』에는 한참 못 미친다. 짐작하기 힘든 반전을 만들어두긴 했는데 그걸 위해 장치를 너무 많이 깔아뒀다. 어쨌든 해피엔딩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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