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독서 목록

1. 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톰 미첼, 박여진 역. 21세기북스. 2016. 351쪽)
: 아르헨티나의 영국계 기숙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된 영국인 저자는 우루과이의 푼타델에스테로 여행을 갔다가 기름을 뒤집어 쓴 채 죽어있는 펭귄 떼를 보게 된다. 그 사체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한 마리를 발견하고 구출해 온 그는 급한 맘에 가정용 세제로 펭귄을 씻기고, 털의 방수 기능이 떨어진 그 펭귄을 아르헨티나의 자신의 기숙사로 데려와 함께 생활한다.

마젤란 펭귄의 상상 이상의 귀여움에 정말 홀딱 반했다. 물론 저자가 많이 의인화하긴 했지만 펭귄이 본래 가진 습성 자체가 단체 생활을 하고 동료와 소통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인간과 친근하게 함께 지내기에 적합했을 듯. 물론 그렇다고 무턱대고 펭귄을 납치해 온 게 잘한 건 아니다. 책 말미에 저자도 얘기했듯 더 바르고 미래지향적인 건 개체 유지를 위한 활동들이니까. 이 부분이 좀 더 강하게 서술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지만 이건 에세이지, 교과서가 아니니까. 재밌었다.


2. 도시의 시간(박솔뫼. 민음사. 2014. 190쪽)
: 아주아주 긴 꿈 같은 소설. 문장 또한 그러하다. 미묘하게 비문인 듯 아닌 듯. 쉼표가 필요할까 싶지만 막상 문장 가운데 어디다 쉼표를 넣어야 할 지 모르겠고, 이야기도 그렇다. 10대의 마지막을 함께 보낸 나와 우미와 우나와 배정의 이야기. 모두 학교 밖에서 그저 떠다닌다.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그들의 이야기여서, 나중에 그들이 그저 밋밋하게 헤어지고 그들 중 하나가 죽었어도 슬프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그 이야기 속에서는 마치 분홍신을 신은 소녀처럼, 혹은 한 밤의 파티에 몰래 간 열 두 명의 공주들처럼 계속 그렇게 빙빙 돌고만 있을 것 같아서 안쓰러웠다. 화자가 얘기했듯, "후덥지근한 여름 오후에 나는 아직 10대이고 그 곳에서는 늘 10대이고 매일매일 길을 헤매고 있다. 아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곳에서는 말이다".(159쪽)


3. 시간의 딸(조지핀 테이, 권도희 역. 문학동네. 2014. 342쪽)
: 내가 왜 이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정말 꾹 참고 끝까지 겨우 읽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역사 미스테리를, 게다가 침대에 누워 다른 사람에게 자료 조사 시키면서 입만 놀리는 이런 주인공 진짜 내 타입 아닌데. 런던 경시청의 그랜트 형사는 사고를 당해 누워있는 김에 역사 속 인물에 대해 조사해 보기로 하고, 여러 인물들의 초상화를 보던 중 들여다볼수록 선한 인상을 한, 그러나 조카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인물로 역사 속 가장 악한 인물 취급을 받는 리처드 3세를 파헤쳐 보기로 한다. 얘기했듯, 그랜트가 여러 책을 읽고 자료조사 도우미 캐러딘이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리처드 3세가 조카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는 과정이다. 내가 직접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면 모를까, 그냥 읽고만 앉아 있으려니 지루했다.


4. 러브 레플리카(윤이형. 문학동네. 2016. 357쪽)
: 정말 좋았다. 이 작가의 예전 작품들이 SF 성향이 강했던 게 나를 좀 멈칫하게 했으나 이 책에서야 비로소 난 알았다. 먼 미래 이야기 같지만 옛날 이야기 같기도 했던 이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은 지금 여기의 이야기라는 걸. 손자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조부모(<대니>)의 이야기나 가짜 나 뒤에 숨어 자라지 못하는 어른아이(<쿤의 여행>), 개발 논리에 밀려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는 외계 생물체(<캠프 루비에 있었다>) 이야기가 아무리 육아 로봇이나 더미 같은 형상이나 외계 행성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어찌 지금 이곳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나.

모든 작품들이 다 좋았다. 하나를 읽고 좋다, 하며 다음 걸 읽기 시작하면 더 좋고, 또 그 다음 건 더더 좋아서 읽는 내내 행복했고 그만큼 맘 아팠다. 그래서 가장 좋았던 건 마지막 작품인 <엘로>.


5.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앤드루 포터, 김이선 역. 21세기북스. 2011. 290쪽)
: 정말 좋았다. 이 작가의 장편보다 훨씬 좋았다. 첫 작품부터 매력적이었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더 아름다운 작품들이 나왔다. 그래도 가장 좋았던 건 <머킨>과 <폭풍>. 표제작도 좋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한 개인의 내면을 정말 섬세하게 들여다 볼 줄 아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한 작품들 외 다른 작품들 중에도 반짝이는 장면들이 하나씩은 있어 책장 넘어가는 게 아까웠다.


6. 메신저(마커스 주삭, 졍영목 역. 문학동네. 2009. 475쪽)
: 나이를 속이고 택시 기사로 일하는 열 아홉 에드. 한심한 친구들과 카드놀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는 한심한 청춘이다. 우연히 어리바리한 은행 강도를 제압했다가 지역 신문에 소개되고, 그 후 우편함에 3개의 주소가 쓰여진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가 들어있는 걸 발견한다. 그 주소지에 가 본 에드는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신이 해결해야 함을 깨닫는다.

이 작가의 전작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아이디어와 그걸 풀어나가는 솜씨가 좋은 작가라서 꽤 따뜻하고 재미있었다. 어쩌면 작위적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잃었던 사랑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지.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조금 아쉬웠다. 난 불분명한 건 별로라서. 그래도 이만큼의 따뜻함과 해피엔딩이면 난 됐다.


7. 천국주식회사(사이먼 리치, 이윤진 역. 열린책들. 2014. 313쪽)
: 하느님이 최고 경영자인 천국 주식회사. 기적부 천사 크레이그는 늘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작은 기적들을 만들어주며 이번 달에도 이달의 천사상을 노린다. 기도 수취부에서 막 승진되어 올라온 일라이자는 크레이그의 도움을 받으며 적응해 나간다. 한편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재결합이나 축구 외의 기적이나 기도 따위에 관심없는 하느님. 이 지겨운 사업(=지구 운영)을 접고 퓨전 레스토랑을 열고 싶어하는데...

해피엔딩이 보장된 뻔한 로맨틱 코미디. 머리 식히려 읽었고 딱 원하는 만큼 가벼웠다. 샘과 로라는 좀 답답했지만. 재미있었다.


8. 라틴 아메리카, 춤추듯 걷다(김남희. 문학동네. 2014. 397쪽)
: 사실 난 내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마르케스, 아옌데, 보르헤스, 망구엘, 세뿔베다 등등을 통해. 그런데 문득 내가 아는 게 뭘까 생각하니 정말 아무 것도 없구나 싶어 이 책을 골라 읽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이 작가, 여행기를 많이 써왔다더니 역시 뭔가 먹히는 포인트를 잘 골라서 쓰는구나 싶었다. 좋게 말하면 프로페셔널이라는 의미지만 나쁘게 말하면 정형화된 테크닉을 정확하게 영혼없이 구사할 줄만 아는, 기계적인 서술의 느낌이 없지 않았다는 얘기. 그런데 읽어나가다 이 작가가 자신의 고민을 드러내는 순간 맘이 확 열렸다. 자신의 이 발걸음이 다른 사람들을 이 아름다운 자연으로 이끌어 결국에는 자연 보전에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이 걱정은 책 전반에 흐른다. 그리고 또다른 걱정은 나이 들어가면서 약해지는 자신에 대한 것. 이 두가지에 공감이 되었고, 감성적인 문체가 좋았다. 모범적인 여행기답게 라틴 아메리카 곳곳의 명품 자연에 대한 발로 뛰어 얻은 정보와 사진들이 가득하기도 하다.

여행기를 잘 읽지 않는 내게도 이 책은 참 좋은 여행기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9. 수상한 라트비아인(조르주 심농, 성귀수 역. 열린책들. 2011. 290쪽)
: 이 작가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처음 읽는데, 재미있었다. 페이지가 쭉쭉 넘어갔다. 파리 경찰청의 매그레 반장은 사기꾼으로 유명한 라트비아인이 파리 북역을 지나는 열차에 타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움직인다. 그러나 그 열차 안에는 라트비아인과 동일한 인상착의의 시체가 있을 뿐. 매그레 반장은 본능적으로 잠시 전에 스쳐 지나간 신사가 향한 마제스틱 호텔로 쫓아가고, 그가 미국인 갑부 레빙스턴 부부와 만나는 것을 목격한다.

쓰여진 시대답게 좀 올드한 느낌이 강했지만 말했듯 재미있었다. 다만 올드한 분위기는 번역 탓도 있는 듯. 그래도 이야기와 매그레 반장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10. 주말(베른하르트 슐링크, 박종대 역. 시공사. 2013. 303쪽)
: 23년간 복역한 적군파 테러리스트 외르크. 그의 갑작스런 사면에 그를 돌봐주던 누나 크리스티아네는 그의 친구들을 불러 주말을 함께 보내며 외르크를 위로하고 사회에 나갈 마음의 준비를 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지난 시간만큼 친구들은 변했고 각자의 입장이 있다. 사업가가 된 울리히와 그의 아내, 딸. 목사가 된 카린과 그녀의 남편. 기자인 헤너. 교사인 일제 그리고 외르크의 변호사 안드레아스와 추종자 마르크, 여기에 크리스티아네의 파트너 마르가레테까지 모두 모인 별장의 주말.

꽤 흥미진진했다. '유행이 지난' 이데올로기와 더이상은 공유하지 못하는 이상. 아니, 과거에도 어쩌면 일치하지는 못했던 생각들과 현재에도 동일할 수는 없는 기억들. 호기심과 반목, 이기심을 포장하려 내세우는 대의명분. 그리고 사랑. 이건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보통의 주말이다. 앞으로의 수많은 월요일을 맞이할.


11. 크리스티앙(앤서니 버크, 존 렌달, 강주헌 역. 갤리온. 2010. 254쪽)
: 2007년 유투브에서 화제가 되었던, 사자 크리스티앙과 그의 두 인간 친구 앤서니와 존의 재회 동영상의 주인공들이 쓴 책. 사자 크리스티앙을 1969년 런던 해롯 백하점 동물 코너에서 구입하여 1970년 케냐의 야생으로 돌려보내기까지의 이야기이다. 초반에는 크리스티앙을 너무 의인화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동물의 제왕을 몇 대 탁탁 치는 걸로 길들이고자 했던 두 청년보다 훨씬 영리하고 현명했던 이 숫사자는 스스로 알아서 인간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찾았고, 이 영리함은 나중에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고향' 아프리카에 훌륭하게 적응하도록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여러 인간적인(=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해 준 조지 애덤슨을 비롯한 인간들의 노력이 있기는 했다. 유투브의 유명한 동영상은 두 청년이 크리스티앙을 야생에 돌려보내고 1년 후 방문했을 때 이루어진 재회 모습이다.

반려 동물을 키우는 누구나라면 자신과 함께 하는 이 동물이 영원히 내 곁에서 행복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함께 지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가능한 한 원래의 서식지와 가장 비슷한 환경에서 완벽히 적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 주길 바란다. 다만 날 잊지 않고. 하지만 당연하게도 완벽한 야생 적응과 인간을 기억하는 건 양립하기 힘들다. 굳이 여러 사례를 들 빌요도 없이. 그러나 크리스티앙은 그 어려운 걸 해냈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사자는 다시는 없겠지.


12. 그리고 남겨진 것들(염승숙. 문학동네. 2014. 332쪽)
: 담벼락 가운데의 벽돌처럼 사방이 막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답답했다. 글 솜씨가 아니라 그냥 내 마음이. 이 작품들을 읽기에는 내 마음이 편안하지가 않아서, 작가는 잘 썼는데 내가 상태가 안 좋아서 그랬다. 사방이 꽉 막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 같지 않아서, 내 이야기가 될까봐, 옮을까봐 힘들어하며 읽었다. 그래도 역시 잘 쓰는 작가다. 한동안은 이 작가를 피하겠지만 그건 작가가 아닌 나 때문이다.


13. 폴리팩스 부인 미션 이스탄불(도로시 길먼, 송섬별 역. 북로드. 2015. 359쪽)
: 원예로 소일하며 다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폴리팩스 부인. 이제는 가라테까지 시작했다. 일요일판 타임스를 보며 이스탄불에서 실종된 스파이 마그다에 관한 기사를 보고있는데 CIA에서 연락이 온다. 하루만에 이스탄불로 날아갈 폴리팩스 부인의 간단한 미션은 역시나 아무도 짐작 못할 방향으로 흘러간다.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폴리팩스 부인이 꽃무늬 모자를 잃어버렸을 땐 좀 아쉬웠지만. 역시나 행운을 몰고 다니는 해맑은 이 할머니는 이제 못하는 게 없다. 전편에서도 관절염따위는 알지도 못한다는 걸 강철 체력으로 사지에서 탈출한 폴리팩스 부인은 이제는 번뜩이는 기지마저 갖췄고 원래 갖고 있던 대담함은 더더욱 커져 하늘을 찌를 지경이다. 다음 이야기가 정말 기대된다.


14. 안녕, 주정뱅이(권여선. 창비. 2016. 273쪽)
: 모두가 다 술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술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나오긴 했다. 요즘 혼자 술 마시는 양이 부쩍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얘기 아닌 듯 편하게 읽었다. 하지만 이건 결코 편한 이야기들은 아니다. 그리고 내 얘기 아닌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특히 <이모>는 맘이 많이 아팠다. 하루에 만 원을 쓰면서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지내는 생활은 내가 바라는 삶이긴 하다. 물론 췌장암은 빼고. 그래도 가장 덜 슬프고 가장 좋았던 건 <역광>.


15. 작가의 책(패멀라 폴, 정혜윤 역. 문학동네. 2016. 590쪽)


16. 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해?(존 업다이크 외, 이은선 역. 창비. 2009. 255쪽)
: '친구와 적에 대한' 이야기라 해서 읽었는데 사실 큰 재미는 없었다. 처음 읽는 작가들의 분위기 파악에는 큰 도움이 됐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늘 읽어야지 생각만 가득했는데, 이 단편으로 한걸음 더 멀어지게 됐다. 물론 이 한 편만 읽고 판단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이 책에 실린 <어디 가, 어디 있었어?>는 정말 잘 쓴 글이면서 정말 공포스러웠다. 책의 부제를 보고 했던 나의 기대를 가장 잘 충족시켜준 건 레이 브래드버리의 <이럴 수가> 정도일 뿐, 나머지는 모두 소설로서는 매우 훌륭했고, 내 취향에는 조금씩 불편했다. 뭔가 숙제를 자꾸 떠안기는 기분. 이 숙제를 아주 잊지는 말아야겠지만.


17.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주노 디아스, 권상미 역. 문학동네. 2016. 295쪽)
: 이 작가의 전작 『드라운』의 등장인물 유니오르의 사랑 이야기. 전작에서 유니오르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의 유니오르는 때로는 비겁하고 때로는 지질하고, 호구 같기도 하고 가끔은 나쁘다. 그래서 때로는 짜증나고 때로는 밉고, 안쓰럽다가 또 화나게 한다. 재미보다는 '그의 다음 이야기는 어떨까'하는 호기심이 그 다음 이야기로 이끌었다. 다 읽고 나선 『드라운』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아마 이걸 먼저 읽고 『드라운』을 읽었더라면 유니오르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18. 두 번의 자화상(전성태. 창비. 2015. 327쪽)
: 한국 단편들의 소재 겹침에 늘 불만이었는데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은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다만 서사는 좀... 뻔한 전개라고 할까. 개인의 삶을 이야기할 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의 이야기들. 단순히 재미있었다,고 얘기하기에는 '재미'라는 단어가 가벼운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거창하게 시대 정신 따위를 갖다 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저 다만 범인들의 이야기일 뿐.


19. 문신 속 여인과 사랑에 빠진 남자(마크 해스켈 스미스, 남명성 역. 아르떼, 2014. 407쪽)
: 범죄증거물 운반일을 하는 밥은 문신에 관심이 많다. 어느 날 증거물로 들어온 잘린 팔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본 밥은 어딘가에 그 여인이 실재할 거라는 느낌은 받는다. 한편 라틴계 갱단의 아마도는 버릇없는 녀석을 차고에서 처리하다 한쪽 팔이 잘려버리고, 그 팔을 차고에 놓고 오는 바람에 경찰의 추적을 당할 위험에 놓인다. 이에 갱단의 브레인 마틴은 그 증거물을 바꿔치기할 계획을 세우는데...

재미있었고 우중충하면서도 웃겼다. 근래에 읽은 것 중 가장 맘에 드는 블랙 코미디. 게다가 결말은 매우 교훈적이고 착하기까지 하다. 죽은 사람 외에는 모두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루기까지 하니,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작가의 위트가 맘에 들었고, 글솜씨도 나쁘지 않았다. 이 작가, 계속 찾아읽어야 겠다.


20. 어느 날 서점 주인이 되었습니다(페트라 하르틀리프, 류동수 역. 솔빛길. 2015. 272쪽)
: 독일에서 문학 비평가로 일하는 저자는 휴가 중 빈에 놀러갔다가 폐업 위기에 놓인 유서 깊은 서점을 둘러본다. '그냥 한 번' 서점 경매에 입찰했다가 덜컥 낙찰된 후 모든 걸 정리하고 빈으로 와 서점을 운영하는 이야기.

난 서점을 운영해 볼 생각은 없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마치 나도 빈의 그 서점 안에 있는 듯 함께 동동거리고 함께 걱정하고 함께 웃었다. 다만 아마존에 대한 근거 없는 비판은 좀 거슬렸다. 아마존의 직원 착취라든가 세금 등의 문제는 차치하고, 단지 아마존을 비롯한 인터넷 서점들이 온라인에서 판매를 하고 독자들은 책을 직접 보거나 서점 직원들과 얘기를 나누지 않고 책을 사서 하루 기다려 받는다는 이유로 '쿨하지 않다'고 까대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은 자기네도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으면서! 물론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품을 판매"(167쪽)하는 자부심은 높이 산다. 하지만 인터넷이 악은 아니다. 인터넷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걸, 그리고 모든 독자가 모든 서점 직원들을 맘에 들어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좀 생각해 보기를. 뭐, 그것 빼곤 다 괜찮았다.


21. 헬로, 미스터 디킨스(하성란 외. 이음. 2012. 292쪽)
: 디킨스를 모티브로 한 단편 모음들. 각 작가들이 다 자신의 signature같은 작품들을 써냈다. 하성란은 신비로웠고 배명훈은 감상적이었고 윤성희는 담담하면서도 아렸다. 백가흠은 역시 불편하고 안쓰러운 인물을 내세웠고 박솔뫼는 이번에는 자기만 재밌고 내게는 재미를 안 줬다. 가장 내 취향을 저격한 건 최제훈. 연속으로 단편집을 읽은 탓에 조금 피곤했는데 <유령들>을 읽으면서 피로가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좋았다.


22. 키스와 바나나(하성란 외. 한겨레출판. 2014. 406쪽)
: 여러 작가의 단편들. 묵직했다. 다만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얼른 집어내기가 쉽지 않았고, 해설을 읽은 후에야 '역사, 또는 역사적 인물이라는 키워드'(389쪽)를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엮은이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들은 내 취향에 따라 갈렸고, 좋아하는 작가는 왜 내가 그 작가를 좋아하는지, 안 읽는 작가는 왜 안 읽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가장 좋았던 건 역시 하성란의 <젤다와 나>.


23. 더 리버(마이클 닐, 박종윤 역. 열림원. 2013. 295쪽)
: 다섯 살 가브리엘은 급류타기 가이드인 아빠와 산길 여행을 나선다. 강 상류 협곡 근처에서 위험하게 카약을 타는 젊은이들을 발견한 아빠 존은 그들을 말리려 하지만 한 명은 폭포로 떨어져버리고, 그를 구하러 강에 뛰어든 존은 뒤집힌 카약 밑에서 그를 구하고 강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가브리엘은 캔자스에서 엄마와 살게 된다.

너무 무겁지 않아서 좋았다. 누구든 뭔가를 위해 태어났다는 메시지도, 진부하긴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이야기가 많이 촘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스무 살 남자애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제이컵의 비밀(?)을 알게 된 후 가브리엘이 그에게 겪한 반응을 보인 후, 그에 대한 마음을 반나절도 안 되어서, 아무리 에즈라와 애기를 했다지만 바꾼 건 이해 안 된다. 좀 더 긴 고민과 생각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구슬 이야기는 좋았다. 작가가 의도한 만큼 신비롭게 그려지진 않은 것 같지만. 주위에 열 서너 살 남자애가 있다면 권해주고 싶은 책.


24. 빈 배처럼 텅 비어(최승자. 문학과지성사. 2016. 124쪽)
: 나는 아,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는데 당신은 자꾸 손을 놓으려 하는 것 같아서, 약해졌다 해도, 오래도록 시달렸다는 그 병 때문에 계셨다는 그 병실에서라도 꼭 붙잡고 계셔 주시길 바라는 건 아직 덜 자란 제 이기심이겠지요. 자꾸만 희미해지는 것만 같은 싯구 하나하나를 손으로 움켜잡고 싶었고, 모든 책장에 도그지어를 만들고 싶었고, 모든 시어를 통째로 삼키고 싶었어요. 그것이 당신을 지상에 붙드는 주문이 될 수 있다면.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6/10/04 16:15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10)
Commented by 이요 at 2016/10/04 16:37
이번 달엔 유난히 많이 읽으셨네요. 윤이형은 저도 그래서(SF라서) 선뜻 손이 안가는데, 좋다고는 하지만 단편 제목들이 다 외국이름이라....역시나 아직 좀 거리감이 있네요. <주말>은 내용만 보면 꼭 영화 <오래된 정원>의 첫 장면 같아요.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6/10/05 12:30
9월엔 좀 한가했답니당ㅋㅋㅋ 영화 <오래된 정원>은 지금 네이버에서 검색해 봤는데, '추억과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네요... 근데 <주말>은 '현재'에 초점이 있어요^^ 사랑은 아주아주 부수적이고요... 근데 영화도 보고 싶어요^^
Commented by 우람이 at 2016/10/04 17:49
우와아아 포터가 사다리님에게 책장이 넘어가는 게 아까웠다는 칭찬을 들으니 제가 왜이리 좋죠 덩실덩실 :D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6/10/05 12:32
ㅎㅎㅎ 포터가 우람이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네요^^ 우리 포터의 신작이 빨리 번역 출간되기를 함께 바래보아요~!! 아, 우람이님은 원서로도 읽으실 수 있겠구나... 급 달무룩...;;
Commented by 정메롱 at 2016/10/04 18:38
와 지난달도 정말 많이 읽으셨네요 전 1번 펭귄 이야기 넘 궁금해요ㅎ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6/10/05 12:35
1번 귀여워요^^ 메롱님도 좋아하실 듯. 머리 식히기 좋아요ㅋㅋㅋ
Commented by 지노 at 2016/10/04 22:58
역시 다독가십니다. 박솔뫼 작가와 윤이형 작가의 작품 만 제가 근래에 읽는 책들인데, 사실 가물가물 합니다. 뭔가 읽고 있지만, 독서일기를 남기는 일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가을이 되니 시집이라도 한 권 사서 읽고 싶어집니다. 지난 여름 구입하고 묵혀둔 책들을 요즘 하나씩 꺼내 읽고 있어요.

참, 다독의 비법이 궁금합니다!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6/10/05 12:39
저도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너무 압박이에요ㅋ근데 도서관 반납일이 더 압박이라...ㅋㅋㅋㅋ 전 요즘 자기 전에 류근 작가의 <어떻게든 이별>을 한 두편씩 읽고 있는데, 좋아요^^

저도 책 읽고 돌아서면 잊혀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책장 덮은 후 바로 리뷰를 쓰려고 노력하는데, 간혹 쓰기 싫거나(쓰는 것보다 읽는 게 더 재밌으니까) 하면 그냥 미뤄버려요ㅎㅎㅎ 다독의 비법이랄 것도 없지만 굳이 생각해보자면, 길어진 출퇴근길 + 도서관 반납일의 압박 정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Commented by 취한배 at 2016/10/05 17:32
24. <빈 배처럼 텅 비어> 찌찌뽕이에욤.ㅠㅠ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6/10/06 11:46
매번 이번이 마지막 시집이면 어쩌나... 두려워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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