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굴해도 괜찮아(고솜이. 돌풍. 2009. 327쪽)
: 스물 세 살 대학생 고찬의 자아 탐색기랄까. 딱 그 나이만큼 발랄하고 생각이 이리저리 튀고 또 딱 그 나이의 사내아이답게 단순하기도 하다. '적자생존'의 법칙을 신봉하는 잘난 형과 강성 노조 활동으로 회사에 밉보인 호텔리어 누나, 신춘문예 입상 경력을 내세워 책 쓴답시고 빈둥거리는 반백수 아버지와 귀얇은 공인중개사 엄마와 함께 부대끼며, 와중에 나름 예쁜 여자와 연애도 하고 <자본론>이나 <공산당선언>을 읽으며 고민도 한다. 깊은 생각없이 그냥 편하게 읽었다. 애초에 이 책을 집은 것도 머리 식히기 위함이었으니. 하지만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2. 베아트리스와 버질(얀 마텔, 강주헌 역. 작가정신. 2011. 271쪽)
: 성공한 작가 헨리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소설과 평론을 써서 플립북으로 엮어 출간하려다 출판 관계자들에게 탈탈 털린 후 의기소침해져 글을 안 쓰게 된다. 아내와 함께 새로운 도시로 이주한 후 자신에게 온 팬레터 중 희곡 일부와 플로베르의 단편집이 든 소포를 보고, 주소가 마침 그 도시여서 찾아간 헬리는 희곡의 작가인 박제사를 만난다.
좋아하는 작가이고 이제까지 읽은 것 중 가장 맘에 들었다. 물론 『셀프』나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을 다시 읽으면 이 책의 순위는 다시 바뀔 지도 모르겠다. 헨리가 희곡을 듣고 고민하고 해석하는 속도 그대로 함께 걸어가니 머리 속이 복잡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어서 좋았다. 박제사의 마지막 행동 전까지는. 다만 그의 행동이 그가 바라는 대로 그를 구원으로 이끌지는 않았기를 바랄 뿐. 그에게 그렇게 쉽게 구원을 주고 싶지 않다.
3. 기억술사 1, 2(제프리 무어, 윤미연 역. 푸른숲. 2011. 366쪽, 288쪽)
: 모든 것을 기억하는 공감각자 노엘. 그리고 기억을 잃어가는 알츠하이머 환자인 노엘의 엄마 스텔라. 엄마를 예전 상태로 돌리기 위해 자신이 가진 지식을 모두 동원해서 애를 쓰는 노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섹스 중독자 작가 노르발, 데이트 강간약을 복용당한 사마라, 철없이 사는 JJ의 이야기가 맞물린다.
나도 사실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라 노엘의 괴로움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다만 난 노엘만큼 정보가 쓰나미처럼 밀려오지도 않고, 노엘만큼 그걸 컨트롤하지도 못하지. 전작보다 재미있었다. 작가의 박식함이 다다다다 쏟아져 나오는 걸 그저 맘 편히 슬슬 읽어내기만 하면 된다. 물론 내가 그 많은 화학 약품들과 영시들과 민간요법들을 다 알고 이해했더라면 즐거움은 배가 되었겠지만.
기억이란 때로는 양날의 검 같다. 좋은 것만 남겨둘 수 있다면, 혹은 특정 시기만 선택해서 뭉텅 잘라내 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해 왔다. 하지만 그렇게 조정되고 가공된 기억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겠지. 그리고 그렇게 기억을 잃고 자신을 잃는 건 정말 끔찍할 것이다. 해피 엔딩이 고마웠다.
4. 알마의 숲(안보윤. 은행나무. 2015. 140쪽)
: 자살을 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소년. 적당한 소나무에 밧줄을 묶고 목을 매는 순간 허공에 보라색 틈이 보이고, 깨어났을 때는 경계 안에 들어와 있다. 눈물을 흘리면 죽는 소녀 알마와 보라색 문 따위는 보이지 않는 삼촌과 늘 머릿속이 바쁜 올빼미가 사는 산장에서 소년은 노루라 불리며 머물게 된다.
아름다웠던 소설. 짧은 이야기 속에서 마음을 어루만지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부드러움이 가을 바람처럼 흐른다. 특히 '무섭고 두려운 건 삶'(128쪽)이라며 '버티는 게 힘들지 끝은 무서울 거 없'(128쪽)다는 말에 이어 "돌아가. 돌아가서 제대로 정어리를 먹는 거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남김없이 먹은 뒤에 비리거나 느끼하거나 토할 것 같단 생각이 들면"(137쪽) "뱉어. 뱉고 입을 행궈. 삶이란 건 원래 그런 식으로 살아내는 거거든. 정어리를 먹고, 그게 맛이 없으면 뱉고, 그다음엔 고등어나 고래를 먹는 거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지."(137쪽)라는 삼촌의 얘기가 날 많이 위로했다. 맛 없는 건 억지로 삼키지 말고 뱉어가며 살아야 하는데...
5. 열광금지, 에바로드(장강명. 연합뉴스. 2014. 305쪽)
: 에반게리온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까지만 봤다. '뒷심 부족'이라는 생각이 TV 시리즈물 끝무렵에 들어서 극장판도 심드렁하게 보고, 잊었다. 따라서 난 오덕도 아니고 탈덕도 아니다. 발만 조금 담궜을 뿐. 그래도 이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했을 때 꽤 반가웠다. 초반 에반게리온을 볼 때 재밌었던 기억이 떠올라서, 그냥 이 책도 재밌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 재밌었다. 뭉클하기도 했고. 특히 종현이 에반게리온 덕분에 엄마에게 '웃게 해드리겠다'며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장면(234쪽)이나 웹디자이너가 너무 힘들고 무서워서 움직이질 못하겠다고 얘기하는 장면(177쪽)에서는 많이 울컥했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개봉을 앞두고 홍보하기 위해 제작사에서 진행한 이벤트인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에서 세계 유일의 완주자가 된 가난한 청년과 그가 자신의 여정을 찍은 다큐 <열광금지, 에바로드> 의 이야기. 초반 화자의 말대로 '가난한 청년 오타쿠의 맨손으로 일군 인간승리'(17쪽)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이해는 커녕 손가락질이나 안 해줬으면 싶은 작은 무엇에 기대어 자신을 지탱해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울컥하는 장면이 적어도 한 부분은 있을 것이다. 이 작가는 읽을수록 맘에 든다.
6.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데스먼드 모리스, 김석희 역. 한얼미디어. 2006. 426쪽)
: 『털없는 원숭이』의 저자인 데스먼드 모리스의 자서전. 참고로 『털없는 원숭이』는 엄청 재미없었다. 난 그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인간에게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늘 들판에서 동물을 관찰하고 수십 종의 동물을 키우며 유년 시절을 보낸 저자가 군생활과 의과 대학을 거쳐 자신이 좋아하던 동물학을 전공하고, TV 프로그램 진행자를 하며 소심했던 성격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동물원 포유류 관장을 지내기까지의 이야기이다. 스승인 티베르헨과의 일화나 콘라트 로렌츠의 이야기, TV 동물쇼를 생방송으로 진행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들에 정말 쉴새 없이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특히 제인 구달과의 인연이나 조이 애덤슨이 찾아와 자신과 엘자의 사진을 보여줬을 때 충고했던 이야기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물론 '인간화'된 동물들의 이야기나 알타미라 벽화에 대한 새로운 발견(해석) 등 마음 아픈 이야기도 있었다.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7. 엘렌 포스터(케이 기본스, 이소영 역. 작가정신. 2009. 253쪽)
: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열 한 살 소녀의 이야기. 병든 엄마가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 속에 엘렌만을 남기고 자살해 버리자 엘렌은 아버지에게서 최대한 존재를 숨기며 버티다 결국 집을 나온다. 다정한 학교 선생님댁과 엘렌을 딸을 죽게한 사위 대신 복수할 대상으로만 대한 엄마의 엄마 집, 그리고 심술궂은 이모네를 거쳐 원하던 새엄마의 집에 들어가기까지의 이야기. 엘렌은 당연히 자라지만, 그건 단순히 좋은 환경을 얻어내거나 자신을 더 잘 지킬 수 있다거나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미움과 복수심, 부채감을 넘어 자신보다 약한 이를 배려할 수 있는 성숙의 경지에까지 이른다. 여러 면에서 나보다 낫다.
8. 이웃집 두 남자가 수상하다(손선영. 한스미디어. 2014. 424쪽)
: 일러스트레이터 수정. 빌라의 얇은 벽 너머로 범죄를 모의하는 두 옆집 남자의 얘기 소리를 듣고 경찰에 신고한다. 덕분에 추리소설가 손선영과 나이든 저술가 오현리와 안면을 트게 된 수정은 동네 길고양이가 연속으로 죽어가고 그 근처에 특이하게 떠낸 스팸캔이 있자 두 남자(특히 손선영)와 이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한국형 코지 미스터리 어쩌구 하는데 내가 읽기에는 완전 실패. 코믹한 캐릭터들을 통해 편안한 분위기를 유도하고자 했다면 그 캐릭터들이 너무 과장되어 있고 하나같이 어설프게 현학적인 척 하는 모습이 비호감이라 실패했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특히 작가의 이름을 그대로 딴 손선영 캐릭터는 작가가 이 책을 쓰면서 자료조사한 걸 쳐내는 게 아까워서 무조건 쏟아내려고 만든 건가 싶게 지루하도록 말이 많았고 비호감이었다. 편하게 읽고 싶어서 빌렸는데, 실망했다.
9. 프로즌 파이어 1, 2(팀 보울러, 서민아 역. 다산책방. 2010. 279쪽, 279쪽)
: 이제 이 작가는 그만 읽어야겠다. 정말 기대했던 책이었는데 재미 없었다. 역시나 궁지에 몰린 청소년과 그를 도와주는 신비한 존재라는 패턴. 열 다섯 살 소녀 더스티의 오빠 조쉬는 실종됐고 엄마는 떠나 버렸다. 무기력한 아빠와 일상을 꾸려가지만 성격이 거친 더스티는 말썽을 일으키기 일쑤. 어느 날 더스티 혼자 있는 집에 밤늦게 전화가 걸려오고, 전화기 속 소년은 더스티와 오빠만이 아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은 지금 죽으려한다고 하는데...
재미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서의 공감이 힘들어서였다. 주인공의 마음 변화와 마구잡이 행동들이 맥락이 없어서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주인공 외의 인물들도 그렇고. 특히 안젤리카는... 짜증나, 그런 애. 다만 어떤 일이든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지는 말라는 것, 진실을 알기 전까지 휩쓸리지 말라는 이야기는 맘에 들었다.
10.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리안 모리아티, 김소정 역. 마시멜로. 2015. 631쪽)
: 피리위 반도의 초등학교 예비학교 설명회 가는 길, 매들린은 앞차 운전자에게 참견하다 발목이 접질리고 같은 예비학교 학부모인 제인에게 도움을 받는다. 이 일을 계기로 전남편 부부와 같은 지역에 살면서 같은 초등학교 학부모로 늘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매들린, 완벽한 생활을 누리는 듯한 부유한 셀레스트, 하룻밤 사랑으로 임신한 아들을 키우며 이제 막 피리위 반도로 이사온 어린 싱글맘 제인은 친구가 된다. 그리고 6개월 후, 학부모 퀴즈대회 밤에 사망 사건이 일어난다.
전작이 너무 재밌었기 때문에 기대가 큰 탓이었는지 처음에는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작처럼 초등학교 학부모들 사이의 이야기라는 게 특히. 하지만 읽을수록 재미가 붙었다. 셀레스트 때문에, 아니 페리 때문에 화가 나긴 했지만 528쪽에 이르면 사이다 장면이 나와서 다 해소되었다.
역시 이 작가의 진가는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행동/말/표정으로 드러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있는 듯. 어찌보면 뻔할 수도 있지만 그걸 이렇게 촘촘하게 엮어서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뻔하지만은 않다. 재밌었지만 당분간은 이 작가를 안 읽어도 될 것 같다. 국내 출간분은 다 읽긴 했지만.
11. 와일드우드(콜린 멜로이, 이은정 역. 황소자리. 2012. 516쪽)
: '지날 수 없는 숲' 근처에 사는 열 두 살 프루. 갓난 남동생을 데리고 놀러 나갔는데, 까마귀 떼가 동생을 납치해서 숲으로 데려가는 걸 발을 동동 구르며 바라볼 수 밖에. 동생을 찾으러 금지된 숲으로 들어가려는 프루와 옆집 사는 친구 커티스. 숲에 들어가자마자 커티스가 코요테 군대에 끌려간다.
재밌었다. 기대만큼 판타지적인 요소가 강하지는 않았지만, 동화적이었고 한편으로는 꽤나 현실적이어서 편하게 읽었다.
12.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크리스티안 크라흐트, 배수아 역. 문학과지성사. 2012. 223쪽)
: 아프리카 출신이면서 스위스소비에트공화국 뉴베른의 지도원인 화자. 전쟁은 96해째(15쪽)이고 이제는 계절의 구분도, 문자 언어도 사라져간다. 브라친스키라는 유대인을 체포하러 간 그는 브라친스키가 도망간 걸 알고 추격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시적인 문장들에 반했고 곧 신비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정말 매혹적인 소설이다.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과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은 설원은 얼핏 『시르트의 바닷가』를 생각나게 했다. 『시르트의 바닷가』는 바다였고 해군이었지만.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한 발걸음은 닮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작가의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상상력이 보인다. 아멕시코라든지, 연기 언어라든지, 세계 패권 국가로 부상한 한국이라든지. 그러나 작가의 그리고 화자의 지향점은 悟이고, 결국은 이에 도달한다. 초반의 러쉬에 비해 읽기가 마냥 수월하지만은 않았지만, 정말 아름다운 책이었다.
13. 언더 와일드우드(콜린 멜로이, 이은정 역. 황소자리. 2013. 511쪽)
: 전편에서 산적들과 남은 커티스는 오랜만에 올빼미 렉스와 신비주의자 이피게니아 등이 모이는 회합에 가 프루에게 암살자가 붙었다는 걸 알게된다. 커티스는 마침 바깥 세상에서 선생으로 위장한 암살자 검은 여우에게 공격당하는 프루를 새들과 함께 구출해서 사우스우드로 데려온다.
전편보다 좀 더 동화같아졌다. 고아원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학대받는 아이들과 새로운 세계의 발견, 단순한 발견자 혹은 참가자가 아닌 진짜 주인공으로 발돋움한 프루와 커티스. 비록 이야기는 마무리되지 않고 다음 권으로 이어졌지만, 이제야 숲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개되는 느낌이었다.
14. 와일드우드 임페리움(콜린 멜로이, 이은정 역. 황소자리. 2014. 527쪽)
: 이 시리즈의 완결이자 제대로 된 판타지를 보여준다. 전편에서 가까스로 살해 위협을 피한 프루는 언더우드를 통해 다시 사우스우드로 돌아간다. 한편 사우스우드의 오월의 여왕인 열 다섯 지타는 무시무시한 전설이 깃든 폐가에서 위험한 교령회를 하는데...
전편들보다 스케일이 커졌고 이야기도 잘 맞아들어간다. 역시 앞의 두 권은 이 한 권을 위한 전초전에 지나지 않았나보다. 특히 마지막 담쟁이의 공격 장면은 정말이지... 진짜 재밌게 읽었다.
: 스물 세 살 대학생 고찬의 자아 탐색기랄까. 딱 그 나이만큼 발랄하고 생각이 이리저리 튀고 또 딱 그 나이의 사내아이답게 단순하기도 하다. '적자생존'의 법칙을 신봉하는 잘난 형과 강성 노조 활동으로 회사에 밉보인 호텔리어 누나, 신춘문예 입상 경력을 내세워 책 쓴답시고 빈둥거리는 반백수 아버지와 귀얇은 공인중개사 엄마와 함께 부대끼며, 와중에 나름 예쁜 여자와 연애도 하고 <자본론>이나 <공산당선언>을 읽으며 고민도 한다. 깊은 생각없이 그냥 편하게 읽었다. 애초에 이 책을 집은 것도 머리 식히기 위함이었으니. 하지만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2. 베아트리스와 버질(얀 마텔, 강주헌 역. 작가정신. 2011. 271쪽)
: 성공한 작가 헨리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소설과 평론을 써서 플립북으로 엮어 출간하려다 출판 관계자들에게 탈탈 털린 후 의기소침해져 글을 안 쓰게 된다. 아내와 함께 새로운 도시로 이주한 후 자신에게 온 팬레터 중 희곡 일부와 플로베르의 단편집이 든 소포를 보고, 주소가 마침 그 도시여서 찾아간 헬리는 희곡의 작가인 박제사를 만난다.
좋아하는 작가이고 이제까지 읽은 것 중 가장 맘에 들었다. 물론 『셀프』나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을 다시 읽으면 이 책의 순위는 다시 바뀔 지도 모르겠다. 헨리가 희곡을 듣고 고민하고 해석하는 속도 그대로 함께 걸어가니 머리 속이 복잡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어서 좋았다. 박제사의 마지막 행동 전까지는. 다만 그의 행동이 그가 바라는 대로 그를 구원으로 이끌지는 않았기를 바랄 뿐. 그에게 그렇게 쉽게 구원을 주고 싶지 않다.
3. 기억술사 1, 2(제프리 무어, 윤미연 역. 푸른숲. 2011. 366쪽, 288쪽)
: 모든 것을 기억하는 공감각자 노엘. 그리고 기억을 잃어가는 알츠하이머 환자인 노엘의 엄마 스텔라. 엄마를 예전 상태로 돌리기 위해 자신이 가진 지식을 모두 동원해서 애를 쓰는 노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섹스 중독자 작가 노르발, 데이트 강간약을 복용당한 사마라, 철없이 사는 JJ의 이야기가 맞물린다.
나도 사실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라 노엘의 괴로움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다만 난 노엘만큼 정보가 쓰나미처럼 밀려오지도 않고, 노엘만큼 그걸 컨트롤하지도 못하지. 전작보다 재미있었다. 작가의 박식함이 다다다다 쏟아져 나오는 걸 그저 맘 편히 슬슬 읽어내기만 하면 된다. 물론 내가 그 많은 화학 약품들과 영시들과 민간요법들을 다 알고 이해했더라면 즐거움은 배가 되었겠지만.
기억이란 때로는 양날의 검 같다. 좋은 것만 남겨둘 수 있다면, 혹은 특정 시기만 선택해서 뭉텅 잘라내 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해 왔다. 하지만 그렇게 조정되고 가공된 기억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겠지. 그리고 그렇게 기억을 잃고 자신을 잃는 건 정말 끔찍할 것이다. 해피 엔딩이 고마웠다.
4. 알마의 숲(안보윤. 은행나무. 2015. 140쪽)
: 자살을 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소년. 적당한 소나무에 밧줄을 묶고 목을 매는 순간 허공에 보라색 틈이 보이고, 깨어났을 때는 경계 안에 들어와 있다. 눈물을 흘리면 죽는 소녀 알마와 보라색 문 따위는 보이지 않는 삼촌과 늘 머릿속이 바쁜 올빼미가 사는 산장에서 소년은 노루라 불리며 머물게 된다.
아름다웠던 소설. 짧은 이야기 속에서 마음을 어루만지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부드러움이 가을 바람처럼 흐른다. 특히 '무섭고 두려운 건 삶'(128쪽)이라며 '버티는 게 힘들지 끝은 무서울 거 없'(128쪽)다는 말에 이어 "돌아가. 돌아가서 제대로 정어리를 먹는 거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남김없이 먹은 뒤에 비리거나 느끼하거나 토할 것 같단 생각이 들면"(137쪽) "뱉어. 뱉고 입을 행궈. 삶이란 건 원래 그런 식으로 살아내는 거거든. 정어리를 먹고, 그게 맛이 없으면 뱉고, 그다음엔 고등어나 고래를 먹는 거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지."(137쪽)라는 삼촌의 얘기가 날 많이 위로했다. 맛 없는 건 억지로 삼키지 말고 뱉어가며 살아야 하는데...
5. 열광금지, 에바로드(장강명. 연합뉴스. 2014. 305쪽)
: 에반게리온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까지만 봤다. '뒷심 부족'이라는 생각이 TV 시리즈물 끝무렵에 들어서 극장판도 심드렁하게 보고, 잊었다. 따라서 난 오덕도 아니고 탈덕도 아니다. 발만 조금 담궜을 뿐. 그래도 이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했을 때 꽤 반가웠다. 초반 에반게리온을 볼 때 재밌었던 기억이 떠올라서, 그냥 이 책도 재밌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 재밌었다. 뭉클하기도 했고. 특히 종현이 에반게리온 덕분에 엄마에게 '웃게 해드리겠다'며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장면(234쪽)이나 웹디자이너가 너무 힘들고 무서워서 움직이질 못하겠다고 얘기하는 장면(177쪽)에서는 많이 울컥했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개봉을 앞두고 홍보하기 위해 제작사에서 진행한 이벤트인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에서 세계 유일의 완주자가 된 가난한 청년과 그가 자신의 여정을 찍은 다큐 <열광금지, 에바로드> 의 이야기. 초반 화자의 말대로 '가난한 청년 오타쿠의 맨손으로 일군 인간승리'(17쪽)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이해는 커녕 손가락질이나 안 해줬으면 싶은 작은 무엇에 기대어 자신을 지탱해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울컥하는 장면이 적어도 한 부분은 있을 것이다. 이 작가는 읽을수록 맘에 든다.
6.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데스먼드 모리스, 김석희 역. 한얼미디어. 2006. 426쪽)
: 『털없는 원숭이』의 저자인 데스먼드 모리스의 자서전. 참고로 『털없는 원숭이』는 엄청 재미없었다. 난 그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인간에게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늘 들판에서 동물을 관찰하고 수십 종의 동물을 키우며 유년 시절을 보낸 저자가 군생활과 의과 대학을 거쳐 자신이 좋아하던 동물학을 전공하고, TV 프로그램 진행자를 하며 소심했던 성격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동물원 포유류 관장을 지내기까지의 이야기이다. 스승인 티베르헨과의 일화나 콘라트 로렌츠의 이야기, TV 동물쇼를 생방송으로 진행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들에 정말 쉴새 없이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특히 제인 구달과의 인연이나 조이 애덤슨이 찾아와 자신과 엘자의 사진을 보여줬을 때 충고했던 이야기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물론 '인간화'된 동물들의 이야기나 알타미라 벽화에 대한 새로운 발견(해석) 등 마음 아픈 이야기도 있었다.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7. 엘렌 포스터(케이 기본스, 이소영 역. 작가정신. 2009. 253쪽)
: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열 한 살 소녀의 이야기. 병든 엄마가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 속에 엘렌만을 남기고 자살해 버리자 엘렌은 아버지에게서 최대한 존재를 숨기며 버티다 결국 집을 나온다. 다정한 학교 선생님댁과 엘렌을 딸을 죽게한 사위 대신 복수할 대상으로만 대한 엄마의 엄마 집, 그리고 심술궂은 이모네를 거쳐 원하던 새엄마의 집에 들어가기까지의 이야기. 엘렌은 당연히 자라지만, 그건 단순히 좋은 환경을 얻어내거나 자신을 더 잘 지킬 수 있다거나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미움과 복수심, 부채감을 넘어 자신보다 약한 이를 배려할 수 있는 성숙의 경지에까지 이른다. 여러 면에서 나보다 낫다.
8. 이웃집 두 남자가 수상하다(손선영. 한스미디어. 2014. 424쪽)
: 일러스트레이터 수정. 빌라의 얇은 벽 너머로 범죄를 모의하는 두 옆집 남자의 얘기 소리를 듣고 경찰에 신고한다. 덕분에 추리소설가 손선영과 나이든 저술가 오현리와 안면을 트게 된 수정은 동네 길고양이가 연속으로 죽어가고 그 근처에 특이하게 떠낸 스팸캔이 있자 두 남자(특히 손선영)와 이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한국형 코지 미스터리 어쩌구 하는데 내가 읽기에는 완전 실패. 코믹한 캐릭터들을 통해 편안한 분위기를 유도하고자 했다면 그 캐릭터들이 너무 과장되어 있고 하나같이 어설프게 현학적인 척 하는 모습이 비호감이라 실패했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특히 작가의 이름을 그대로 딴 손선영 캐릭터는 작가가 이 책을 쓰면서 자료조사한 걸 쳐내는 게 아까워서 무조건 쏟아내려고 만든 건가 싶게 지루하도록 말이 많았고 비호감이었다. 편하게 읽고 싶어서 빌렸는데, 실망했다.
9. 프로즌 파이어 1, 2(팀 보울러, 서민아 역. 다산책방. 2010. 279쪽, 279쪽)
: 이제 이 작가는 그만 읽어야겠다. 정말 기대했던 책이었는데 재미 없었다. 역시나 궁지에 몰린 청소년과 그를 도와주는 신비한 존재라는 패턴. 열 다섯 살 소녀 더스티의 오빠 조쉬는 실종됐고 엄마는 떠나 버렸다. 무기력한 아빠와 일상을 꾸려가지만 성격이 거친 더스티는 말썽을 일으키기 일쑤. 어느 날 더스티 혼자 있는 집에 밤늦게 전화가 걸려오고, 전화기 속 소년은 더스티와 오빠만이 아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은 지금 죽으려한다고 하는데...
재미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서의 공감이 힘들어서였다. 주인공의 마음 변화와 마구잡이 행동들이 맥락이 없어서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주인공 외의 인물들도 그렇고. 특히 안젤리카는... 짜증나, 그런 애. 다만 어떤 일이든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지는 말라는 것, 진실을 알기 전까지 휩쓸리지 말라는 이야기는 맘에 들었다.
10.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리안 모리아티, 김소정 역. 마시멜로. 2015. 631쪽)
: 피리위 반도의 초등학교 예비학교 설명회 가는 길, 매들린은 앞차 운전자에게 참견하다 발목이 접질리고 같은 예비학교 학부모인 제인에게 도움을 받는다. 이 일을 계기로 전남편 부부와 같은 지역에 살면서 같은 초등학교 학부모로 늘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매들린, 완벽한 생활을 누리는 듯한 부유한 셀레스트, 하룻밤 사랑으로 임신한 아들을 키우며 이제 막 피리위 반도로 이사온 어린 싱글맘 제인은 친구가 된다. 그리고 6개월 후, 학부모 퀴즈대회 밤에 사망 사건이 일어난다.
전작이 너무 재밌었기 때문에 기대가 큰 탓이었는지 처음에는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작처럼 초등학교 학부모들 사이의 이야기라는 게 특히. 하지만 읽을수록 재미가 붙었다. 셀레스트 때문에, 아니 페리 때문에 화가 나긴 했지만 528쪽에 이르면 사이다 장면이 나와서 다 해소되었다.
역시 이 작가의 진가는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행동/말/표정으로 드러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있는 듯. 어찌보면 뻔할 수도 있지만 그걸 이렇게 촘촘하게 엮어서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뻔하지만은 않다. 재밌었지만 당분간은 이 작가를 안 읽어도 될 것 같다. 국내 출간분은 다 읽긴 했지만.
11. 와일드우드(콜린 멜로이, 이은정 역. 황소자리. 2012. 516쪽)
: '지날 수 없는 숲' 근처에 사는 열 두 살 프루. 갓난 남동생을 데리고 놀러 나갔는데, 까마귀 떼가 동생을 납치해서 숲으로 데려가는 걸 발을 동동 구르며 바라볼 수 밖에. 동생을 찾으러 금지된 숲으로 들어가려는 프루와 옆집 사는 친구 커티스. 숲에 들어가자마자 커티스가 코요테 군대에 끌려간다.
재밌었다. 기대만큼 판타지적인 요소가 강하지는 않았지만, 동화적이었고 한편으로는 꽤나 현실적이어서 편하게 읽었다.
12.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크리스티안 크라흐트, 배수아 역. 문학과지성사. 2012. 223쪽)
: 아프리카 출신이면서 스위스소비에트공화국 뉴베른의 지도원인 화자. 전쟁은 96해째(15쪽)이고 이제는 계절의 구분도, 문자 언어도 사라져간다. 브라친스키라는 유대인을 체포하러 간 그는 브라친스키가 도망간 걸 알고 추격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시적인 문장들에 반했고 곧 신비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정말 매혹적인 소설이다.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과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은 설원은 얼핏 『시르트의 바닷가』를 생각나게 했다. 『시르트의 바닷가』는 바다였고 해군이었지만.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한 발걸음은 닮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작가의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상상력이 보인다. 아멕시코라든지, 연기 언어라든지, 세계 패권 국가로 부상한 한국이라든지. 그러나 작가의 그리고 화자의 지향점은 悟이고, 결국은 이에 도달한다. 초반의 러쉬에 비해 읽기가 마냥 수월하지만은 않았지만, 정말 아름다운 책이었다.
13. 언더 와일드우드(콜린 멜로이, 이은정 역. 황소자리. 2013. 511쪽)
: 전편에서 산적들과 남은 커티스는 오랜만에 올빼미 렉스와 신비주의자 이피게니아 등이 모이는 회합에 가 프루에게 암살자가 붙었다는 걸 알게된다. 커티스는 마침 바깥 세상에서 선생으로 위장한 암살자 검은 여우에게 공격당하는 프루를 새들과 함께 구출해서 사우스우드로 데려온다.
전편보다 좀 더 동화같아졌다. 고아원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학대받는 아이들과 새로운 세계의 발견, 단순한 발견자 혹은 참가자가 아닌 진짜 주인공으로 발돋움한 프루와 커티스. 비록 이야기는 마무리되지 않고 다음 권으로 이어졌지만, 이제야 숲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개되는 느낌이었다.
14. 와일드우드 임페리움(콜린 멜로이, 이은정 역. 황소자리. 2014. 527쪽)
: 이 시리즈의 완결이자 제대로 된 판타지를 보여준다. 전편에서 가까스로 살해 위협을 피한 프루는 언더우드를 통해 다시 사우스우드로 돌아간다. 한편 사우스우드의 오월의 여왕인 열 다섯 지타는 무시무시한 전설이 깃든 폐가에서 위험한 교령회를 하는데...
전편들보다 스케일이 커졌고 이야기도 잘 맞아들어간다. 역시 앞의 두 권은 이 한 권을 위한 전초전에 지나지 않았나보다. 특히 마지막 담쟁이의 공격 장면은 정말이지... 진짜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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