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 종말 전쟁 1, 2(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김현철 역. 새물결. 2010. 1036쪽)
: 19세기말 브라질, 막 공화국이 출범했고 나라에는 가뭄이 들어 사람들은 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왕정 때는 없던 세금을 공화국에 바쳐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마치 예수처럼 자신을 낮추고 신을 향한 믿음만을 강조하는 선지자를 따르게 되고, 그를 공화국의 적으로 간주한 정부는 그 무리를 토벌하기 위한 전쟁을 벌인다.
좋아하는 작가인데, 기대보다 지루했다. 읽는 데 상당히 오래 걸렸다. 읽으면서 문득, 난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떠올리고 왜 내가 이 책을 샀는지 당황스러웠다. 이야기는 나쁘지 않았다. 야비한 정치인과 지질한 기자, 와중에 희생되는 가여운 민중들. 남미 특유의 해학도 있었고 질펀함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두 번 읽을 것 같지는 않다.
2.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윤성근. 이매진. 2009. 302쪽)
: 저자의 사고방식과 생각들에는 동의하나, 글을 너무 못 써서 읽기 힘들었다. 머릿속에서 윤문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지치더라. 저자의 거친 문장과 불안한 구성은 그걸 지켜보는 날 너무나 힘들게 해서, 나중엔 그저 책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건성으로 읽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다만 앞으로 책은 그만 써주기를. 다른 책들도 몇 권 냈던데, 불쌍한 나무들도 기억해주길.
3. 막스 티볼리의 고백(앤드루 숀 그리어, 윤희기 역. 시공사, 2008, 414쪽)
: 태어날 땐 일흔 살 노인의 모습이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외모는 '70 - 실제 나이'의 모습으로 보여지게 변한다. 세 살 땐 예순 일곱의 모습으로, 열 살 땐 예순 살의 모습으로.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 대로 행동하라'는 어머니의 말씀 대로 그저 조용히 살아가던 막스에게 열 일곱의 어느 날 열 네 살의 앨리스가 나타나 막스의 사랑은 시작되고, 평생의 친구인 휴이를 그녀가 좋아하게 되면서 막스의 사랑은 꼬이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막스의 평생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틈새의 사랑을 놓치지 않는 내게는 막스의, 어쩌면 '성공한' 사랑 이야기보다는 **의 사랑 이야기가 더 크게 다가왔다. 힘겨웠기로는 막스의 사랑이나 **의 사랑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어쨌든 막스는 그녀의 곁에 머물 수 있었잖아. 어떤 모습으로든, 만질 수 없고 안을 수 없다해도. 아, 그런 시각이라면 **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그래도 **의 사랑은 축복받을 수 없었으니... 한 번도 갖지 못했던 사람의 곁에 머무르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라면 도망쳤을 텐데. **의 시각으로 씌여진 이야기를 읽고 싶다.
4. 리틀 스트레인저(세라 워터스, 엄일녀 역. 문학동네. 2015. 716쪽)
: 이봐요 ***, 난 당신을 믿었는데! 마지막 문장을 읽기 전까지 난 당신을 정말 철석같이 믿었다구요!
마지막 문장 그 하나가 내겐 가장 큰 반전이었다. 어쩌면 그 문장을 나처럼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지만 당신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지. 처음 등장에서 그러했듯이.
2차 대전 직후 영국 워릭셔의 대저택 헌드레즈 홀. 의사 패러데이는 어린 하녀 베티의 꾀병때문에 이 저택에 왕진을 오게 된다. 저택의 주인 에어즈 가문은 몰락해 가고 있다. 상속자 로더릭은 전쟁에서의 부상 때문에 불안정한 상태이고 어머니 에어즈 부인은 과거의 영화를 기억 속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딸 캐럴라인만이 온 힘을 다해 저택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역시 힘에 부치는 건 어쩔 수 없다. 점점 쇠락해 가는 저택에서 오랜만에 열린 파티에서 끔찍한 사고가 나고, 그 이후 저택에는 이상한 일들이 계속된다.
이 작가의 작품답게 흡입력이 대단했다. 사실 다른 작품들보다 이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고 좋았다. 어쩌면 쇠락해 가는 저택에서의 괴기스러운 일이란 클리셰일 지 모르지만 작가는 이 이야기들 중에 전쟁 직후의 무너져가는 기존 계급 사회와 재편되는 계급에의 저항감, 그 와중에도 자신의 구 계급을 벗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계급 사회에서도 바닥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묘한 심리 등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특히 닥터 패러데이가 공사 현장에서 자신의 육촌과 마주치는 장면은 정말이지 작가의 필력에 새삼 감탄하게 했다. 빅토리아 시대를 벗어난 이 작가의 다른 이야기들이 정말 기대된다.
5. 밤의 여행자들(윤고은. 민음사. 2013. 250쪽)
6. 메이블 이야기(헬렌 맥도널드, 공경희 역. 판미동. 2015. 455쪽)
: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저자가 참매를 길들이며 슬픔을 이겨내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매잡이가 되고 싶어했는데, 어릴 때 읽었던 T.H. 화이트의 매 길들이기 책을 다시 읽으며 화이트의 오류들을 나름대로 바로잡으며 자신만의 매 메이블을 길들인다.
사실 생각보다 구성이 탄탄하지는 않아서 편하게 읽히지는 않았다. 자신의 행동과 마음을 객관적으로 보고자 애쓰는 저자 때문에 공감도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득문득 터져나오는 상실의 아픔에는 눈물이... 잘 쓴 책은 아닐 지 모르지만 좋은 책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7. 장미와 주목(애거사 크리스티, 공경희 역. 포레. 2014. 327쪽)
: 저자가 다른 필명으로 발표한 이른바 순문학 소설 중 하나. 그냥 저자 이름만 보고 빌려왔는데 정말 재밌게 읽었다.
장애인 휴 노리스는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낯선 여자가 막무가내로 클레멘트 신부의 임종 자리에 함께 가달라고 하는 것에 당황을 하는데, 그녀로부터 그가 바로 오래전 자신이 알던 존 게이브리얼이라는 사실을 듣고 함께 간다. 죽음 직전의 게이브리얼에게서 이사벨라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얘길 듣고 휴는 과거를 떠올린다.
사실 이사벨라의 죽음의 진실은 그닥 대단하지는 않았다. 다만 난 이사벨라가 되고 싶었다. 그녀처럼 그저 상황을,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죽음은 그녀와 다르고 싶다. 그런 죽음이라니... 어쩌면 그녀의 성격에 맞는 죽음일지 모르겠지만. 이사벨라에게 장미의 순간과 주목의 순간은 결국 같았을까? 내게는 과연 어떨까? 죽음의 자리에서 난 이 질문을 떠올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8. 걸 온 더 트레인(폴라 호킨스, 이영아 역. 북폴리오. 2015. 455쪽)
: 주인공 캐릭터가 맘에 좀 안 들긴 했지만 재밌게 읽었다. 범인도 내게는 나름의 반전이었고. 다만 시간이 왔다갔다 하는 게 처음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뿐.
레이첼은 아침마다 런던으로 향하는 통근 열차를 탄다. 이혼한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혼자인 자신의 삶이 싫고, 전남편이 그리운 레이첼은 창 밖에 늘 보이는 집과 완벽해 보이는 부부를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편다. 어느 날 그 부인이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하는 걸 보게 되고, 며칠 뒤 그녀가 실종됐다는 기사가 난다.
스릴러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답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읽으면서 했다. 나도 초중반에는 좀 지루했다. 그래도 세 여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사건이 나름 흥미로웠고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흡입력도 꽤 있었다. 다만 다음 번에도 이 작가를 선뜻 선택할 지는 모르겠다.
9. 범인은 바로 뇌다(한스 J. 마르코비치, 베르너 지퍼, 김현정 역. 알마. 2010. 270쪽)
: 뇌과학의 관점에서 강력범들을 살펴본다. 전반적인 내용은 당연하게도 뇌의 특정부위 손상이 범죄를 일으킨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여러 실험 증거들의 제시가 많아서, 어렵지 않게 읽었다. 다만 구성이 잘 짜여있는 것은 아니어서 좀 중구난방의 느낌이... 다시 들춰볼 것 같진 않다.
10. 백년의 시간(미르치아 엘리아데, 기영인 역. 뿔. 2010. 289쪽)
: 너무 기대가 컸나보다. 생각보다 시시했다.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의 부활절 밤, 자살을 결심하고 길을 나선 70세의 교사 도미닉은 벼락을 맞고 병원에 실려온다. 모든 의사들이 그가 죽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탄 피부가 벗겨지면서 그는 30세 정도의 몸으로 되살아나고, 모든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아이디어나 스토리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저자가 이야기를 쓰다가 지쳤나보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그 끝은... 저자가 일생동안 공부한 신화학, 역사학, 종교학 등이 집대성된 세계관이 들어있다고 하는데 실상 그 세계관이라는 건 단편적으로 주인공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드러날 뿐, 딱히 인상적이지 않다. 표제작 외의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 왠지 쓰다가 서둘러 마무리한 느낌.
11. 계속해보겠습니다(황정은. 창비. 2014. 228쪽)
: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소라와 나나 자매.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엄마 애자씨와 함께 이사간 지하방에서 나기를 알게 되고 셋이 모두 성인이 되어서도 돈독히 지낸다. 소라는 어느 날 나나가 임신을 한 걸 알게 되는데...
저자 특유의 짧고 단단한 문장이 좋았다. 간략하지만 가볍지 않은 이야기. 담담하게 아무 것도 아닌 양 이야기하지만 행간에서 스며나오는 따스함.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벗어날 수 있는 나나의 심플한 단단함이 특히 좋았다.
12. 엉덩이에 입맞춤을(에펠리 하우오파, 서남희 역. 들녘. 2008. 332쪽)
: 이 책도 광고에 낚였다고 해야하나. 생각처럼 해학적이지도 않았고 웃기지도 않았다. 젊은 시절 복싱 챔피언으로 인기있던 오일레이. 정치적으로도 승승장구할 일만 남은 그에게 어느 날 항문의 고통이 찾아오고, 그걸 고치기 위해 각계각층의 이른바 '도토레'(치유사)들을 찾아다니면서 겪는 해프닝이 주요 내용이다. 일단 초반의 묘사들은 식사하면서 읽기에는 좀 부담스러웠고 중간중간 잊을 만 하면 튀어나오는 교정오류들이 거슬렸다. 피지라는 섬나라 내부의 인간관계 양상을 알게 된 게 이 책을 읽은 유일한 성과랄까.
13. 야구란 무엇인가(김경욱. 문학동네. 2013. 253쪽)
: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 어머니가 돌봐주고 있던 자폐기가 있는 아들을 데리고 일주일간 떠도는 화자. 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어린 남동생이 80년 광주에서 계엄군에게 어이없이 죽은 후 늘 품고만 있던 그 인간을 찾아 다닌다. 동생의 복수를 위해.
읽기 시작할 때부터 화자의 상황 때문에 막막하고 먹먹했다. 늘 정해진 데로만 해야 하는 아들. 노란색에만 집착하는 그 아들이 파랗게 변해버리기 전에 달래야만 하는 화자. 저자의 말대로 이건 야구 이야기는 아니다. 삶의 이야기이고 집을 떠나 집으로 가는 이야기일 뿐. 결말이 김경욱 답지 않게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14. 에이전시 - 소롤드 저택의 스파이(잉 리, 정해영 역. 아일랜드. 2012. 431쪽)
: 가볍고 발랄한 빅토리아 시대 이야기. 솔직히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시대 이야기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일단 부담이 없었고, 메시지가 분명했으므로.
교수형 선고를 받은 어린 도둑 메리는 험악해 보이는 간수에 의해 기절한 채 어딘가로 옮겨진다. 눈을 떠보니 우아해 보이는 어떤 부인이 앞에 있고 그녀는 자신이 여성들의 교육기관 스크림쇼 아카데미 교장이라고 한다. 여성 스스로의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은 메리. 어느 덧 17살이 되었지만 자신에게 맞는 진로를 찾지 못하는 그녀에게 교장은 여성 첩보기관 '에이전시'의 수습요원 자리를 제안하고, 메리는 무역상 소롤드의 저택에 고용되어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천방지축 나대는 메리가 좀 불안하긴 했지만, 주인공이니까. 시대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존재 가치를 넓혀가는 메리가 맘에 들었다. 사실 이 이야기도 그렇고 앞으로의 전개도 뻔하기는 하지만, 이 시리즈를 계속 읽을 생각이다.
15. 사적인 문제(벱페 페놀리오, 이소영 역. 인간희극. 2010. 237쪽)
: 기대 안 했는데 생각보다 정말 재미있었다.
2차 대전이 채 끝나기 전의 이탈리아. 전체주의와의 싸움에 뛰어든 파르티잔 청년 밀턴은 마음 속에 예전에 자기 마을로 피난왔던 소녀 풀비아를 품고 있다. 그녀와의 추억으로 버티던 그는 그녀가 머물던 빌라를 찾았다가 관리인으로부터 그녀와 자신의 절친 조르주와의 깊은 관계를 암시하는 얘길 듣고 다른 부대에 있는 조르주를 찾아가 따지기로 하는데, 조르주가 파시스트 군에게 잡혔다는 얘길 듣는다.
밀턴에게 풀비아는 어쩌면 삶의 이유 그 이상이었다. 사랑에 냉소적인 지금 상태의 나로서는 밀턴의 순수함이 귀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에게 진실을 아는 것은 당면 과제인 셈이다. 파시스트 축출보다 더 시급한. 이 여정의 끝이 비극일 수 밖에 없는 건 전쟁 때문일 지도 모르지만, 밀턴 자신의 맹목성과 천진난만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밀턴의 사적인 문제를 전쟁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섞어 놓았고 따라서 독자들은 전쟁의 참혹함과 밀턴의 답답함을 분리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이 몰입해서 읽게 된다. 잘 쓴 소설. 이 저자의 다른 책도 읽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책들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 19세기말 브라질, 막 공화국이 출범했고 나라에는 가뭄이 들어 사람들은 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왕정 때는 없던 세금을 공화국에 바쳐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마치 예수처럼 자신을 낮추고 신을 향한 믿음만을 강조하는 선지자를 따르게 되고, 그를 공화국의 적으로 간주한 정부는 그 무리를 토벌하기 위한 전쟁을 벌인다.
좋아하는 작가인데, 기대보다 지루했다. 읽는 데 상당히 오래 걸렸다. 읽으면서 문득, 난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떠올리고 왜 내가 이 책을 샀는지 당황스러웠다. 이야기는 나쁘지 않았다. 야비한 정치인과 지질한 기자, 와중에 희생되는 가여운 민중들. 남미 특유의 해학도 있었고 질펀함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두 번 읽을 것 같지는 않다.
2.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윤성근. 이매진. 2009. 302쪽)
: 저자의 사고방식과 생각들에는 동의하나, 글을 너무 못 써서 읽기 힘들었다. 머릿속에서 윤문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지치더라. 저자의 거친 문장과 불안한 구성은 그걸 지켜보는 날 너무나 힘들게 해서, 나중엔 그저 책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건성으로 읽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다만 앞으로 책은 그만 써주기를. 다른 책들도 몇 권 냈던데, 불쌍한 나무들도 기억해주길.
3. 막스 티볼리의 고백(앤드루 숀 그리어, 윤희기 역. 시공사, 2008, 414쪽)
: 태어날 땐 일흔 살 노인의 모습이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외모는 '70 - 실제 나이'의 모습으로 보여지게 변한다. 세 살 땐 예순 일곱의 모습으로, 열 살 땐 예순 살의 모습으로.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 대로 행동하라'는 어머니의 말씀 대로 그저 조용히 살아가던 막스에게 열 일곱의 어느 날 열 네 살의 앨리스가 나타나 막스의 사랑은 시작되고, 평생의 친구인 휴이를 그녀가 좋아하게 되면서 막스의 사랑은 꼬이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막스의 평생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틈새의 사랑을 놓치지 않는 내게는 막스의, 어쩌면 '성공한' 사랑 이야기보다는 **의 사랑 이야기가 더 크게 다가왔다. 힘겨웠기로는 막스의 사랑이나 **의 사랑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어쨌든 막스는 그녀의 곁에 머물 수 있었잖아. 어떤 모습으로든, 만질 수 없고 안을 수 없다해도. 아, 그런 시각이라면 **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그래도 **의 사랑은 축복받을 수 없었으니... 한 번도 갖지 못했던 사람의 곁에 머무르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라면 도망쳤을 텐데. **의 시각으로 씌여진 이야기를 읽고 싶다.
4. 리틀 스트레인저(세라 워터스, 엄일녀 역. 문학동네. 2015. 716쪽)
: 이봐요 ***, 난 당신을 믿었는데! 마지막 문장을 읽기 전까지 난 당신을 정말 철석같이 믿었다구요!
마지막 문장 그 하나가 내겐 가장 큰 반전이었다. 어쩌면 그 문장을 나처럼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지만 당신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지. 처음 등장에서 그러했듯이.
2차 대전 직후 영국 워릭셔의 대저택 헌드레즈 홀. 의사 패러데이는 어린 하녀 베티의 꾀병때문에 이 저택에 왕진을 오게 된다. 저택의 주인 에어즈 가문은 몰락해 가고 있다. 상속자 로더릭은 전쟁에서의 부상 때문에 불안정한 상태이고 어머니 에어즈 부인은 과거의 영화를 기억 속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딸 캐럴라인만이 온 힘을 다해 저택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역시 힘에 부치는 건 어쩔 수 없다. 점점 쇠락해 가는 저택에서 오랜만에 열린 파티에서 끔찍한 사고가 나고, 그 이후 저택에는 이상한 일들이 계속된다.
이 작가의 작품답게 흡입력이 대단했다. 사실 다른 작품들보다 이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고 좋았다. 어쩌면 쇠락해 가는 저택에서의 괴기스러운 일이란 클리셰일 지 모르지만 작가는 이 이야기들 중에 전쟁 직후의 무너져가는 기존 계급 사회와 재편되는 계급에의 저항감, 그 와중에도 자신의 구 계급을 벗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계급 사회에서도 바닥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묘한 심리 등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특히 닥터 패러데이가 공사 현장에서 자신의 육촌과 마주치는 장면은 정말이지 작가의 필력에 새삼 감탄하게 했다. 빅토리아 시대를 벗어난 이 작가의 다른 이야기들이 정말 기대된다.
5. 밤의 여행자들(윤고은. 민음사. 2013. 250쪽)
6. 메이블 이야기(헬렌 맥도널드, 공경희 역. 판미동. 2015. 455쪽)
: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저자가 참매를 길들이며 슬픔을 이겨내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매잡이가 되고 싶어했는데, 어릴 때 읽었던 T.H. 화이트의 매 길들이기 책을 다시 읽으며 화이트의 오류들을 나름대로 바로잡으며 자신만의 매 메이블을 길들인다.
사실 생각보다 구성이 탄탄하지는 않아서 편하게 읽히지는 않았다. 자신의 행동과 마음을 객관적으로 보고자 애쓰는 저자 때문에 공감도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득문득 터져나오는 상실의 아픔에는 눈물이... 잘 쓴 책은 아닐 지 모르지만 좋은 책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7. 장미와 주목(애거사 크리스티, 공경희 역. 포레. 2014. 327쪽)
: 저자가 다른 필명으로 발표한 이른바 순문학 소설 중 하나. 그냥 저자 이름만 보고 빌려왔는데 정말 재밌게 읽었다.
장애인 휴 노리스는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낯선 여자가 막무가내로 클레멘트 신부의 임종 자리에 함께 가달라고 하는 것에 당황을 하는데, 그녀로부터 그가 바로 오래전 자신이 알던 존 게이브리얼이라는 사실을 듣고 함께 간다. 죽음 직전의 게이브리얼에게서 이사벨라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얘길 듣고 휴는 과거를 떠올린다.
사실 이사벨라의 죽음의 진실은 그닥 대단하지는 않았다. 다만 난 이사벨라가 되고 싶었다. 그녀처럼 그저 상황을,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죽음은 그녀와 다르고 싶다. 그런 죽음이라니... 어쩌면 그녀의 성격에 맞는 죽음일지 모르겠지만. 이사벨라에게 장미의 순간과 주목의 순간은 결국 같았을까? 내게는 과연 어떨까? 죽음의 자리에서 난 이 질문을 떠올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8. 걸 온 더 트레인(폴라 호킨스, 이영아 역. 북폴리오. 2015. 455쪽)
: 주인공 캐릭터가 맘에 좀 안 들긴 했지만 재밌게 읽었다. 범인도 내게는 나름의 반전이었고. 다만 시간이 왔다갔다 하는 게 처음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뿐.
레이첼은 아침마다 런던으로 향하는 통근 열차를 탄다. 이혼한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혼자인 자신의 삶이 싫고, 전남편이 그리운 레이첼은 창 밖에 늘 보이는 집과 완벽해 보이는 부부를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편다. 어느 날 그 부인이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하는 걸 보게 되고, 며칠 뒤 그녀가 실종됐다는 기사가 난다.
스릴러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답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읽으면서 했다. 나도 초중반에는 좀 지루했다. 그래도 세 여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사건이 나름 흥미로웠고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흡입력도 꽤 있었다. 다만 다음 번에도 이 작가를 선뜻 선택할 지는 모르겠다.
9. 범인은 바로 뇌다(한스 J. 마르코비치, 베르너 지퍼, 김현정 역. 알마. 2010. 270쪽)
: 뇌과학의 관점에서 강력범들을 살펴본다. 전반적인 내용은 당연하게도 뇌의 특정부위 손상이 범죄를 일으킨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여러 실험 증거들의 제시가 많아서, 어렵지 않게 읽었다. 다만 구성이 잘 짜여있는 것은 아니어서 좀 중구난방의 느낌이... 다시 들춰볼 것 같진 않다.
10. 백년의 시간(미르치아 엘리아데, 기영인 역. 뿔. 2010. 289쪽)
: 너무 기대가 컸나보다. 생각보다 시시했다.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의 부활절 밤, 자살을 결심하고 길을 나선 70세의 교사 도미닉은 벼락을 맞고 병원에 실려온다. 모든 의사들이 그가 죽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탄 피부가 벗겨지면서 그는 30세 정도의 몸으로 되살아나고, 모든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아이디어나 스토리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저자가 이야기를 쓰다가 지쳤나보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그 끝은... 저자가 일생동안 공부한 신화학, 역사학, 종교학 등이 집대성된 세계관이 들어있다고 하는데 실상 그 세계관이라는 건 단편적으로 주인공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드러날 뿐, 딱히 인상적이지 않다. 표제작 외의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 왠지 쓰다가 서둘러 마무리한 느낌.
11. 계속해보겠습니다(황정은. 창비. 2014. 228쪽)
: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소라와 나나 자매.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엄마 애자씨와 함께 이사간 지하방에서 나기를 알게 되고 셋이 모두 성인이 되어서도 돈독히 지낸다. 소라는 어느 날 나나가 임신을 한 걸 알게 되는데...
저자 특유의 짧고 단단한 문장이 좋았다. 간략하지만 가볍지 않은 이야기. 담담하게 아무 것도 아닌 양 이야기하지만 행간에서 스며나오는 따스함.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벗어날 수 있는 나나의 심플한 단단함이 특히 좋았다.
12. 엉덩이에 입맞춤을(에펠리 하우오파, 서남희 역. 들녘. 2008. 332쪽)
: 이 책도 광고에 낚였다고 해야하나. 생각처럼 해학적이지도 않았고 웃기지도 않았다. 젊은 시절 복싱 챔피언으로 인기있던 오일레이. 정치적으로도 승승장구할 일만 남은 그에게 어느 날 항문의 고통이 찾아오고, 그걸 고치기 위해 각계각층의 이른바 '도토레'(치유사)들을 찾아다니면서 겪는 해프닝이 주요 내용이다. 일단 초반의 묘사들은 식사하면서 읽기에는 좀 부담스러웠고 중간중간 잊을 만 하면 튀어나오는 교정오류들이 거슬렸다. 피지라는 섬나라 내부의 인간관계 양상을 알게 된 게 이 책을 읽은 유일한 성과랄까.
13. 야구란 무엇인가(김경욱. 문학동네. 2013. 253쪽)
: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 어머니가 돌봐주고 있던 자폐기가 있는 아들을 데리고 일주일간 떠도는 화자. 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어린 남동생이 80년 광주에서 계엄군에게 어이없이 죽은 후 늘 품고만 있던 그 인간을 찾아 다닌다. 동생의 복수를 위해.
읽기 시작할 때부터 화자의 상황 때문에 막막하고 먹먹했다. 늘 정해진 데로만 해야 하는 아들. 노란색에만 집착하는 그 아들이 파랗게 변해버리기 전에 달래야만 하는 화자. 저자의 말대로 이건 야구 이야기는 아니다. 삶의 이야기이고 집을 떠나 집으로 가는 이야기일 뿐. 결말이 김경욱 답지 않게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14. 에이전시 - 소롤드 저택의 스파이(잉 리, 정해영 역. 아일랜드. 2012. 431쪽)
: 가볍고 발랄한 빅토리아 시대 이야기. 솔직히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시대 이야기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일단 부담이 없었고, 메시지가 분명했으므로.
교수형 선고를 받은 어린 도둑 메리는 험악해 보이는 간수에 의해 기절한 채 어딘가로 옮겨진다. 눈을 떠보니 우아해 보이는 어떤 부인이 앞에 있고 그녀는 자신이 여성들의 교육기관 스크림쇼 아카데미 교장이라고 한다. 여성 스스로의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은 메리. 어느 덧 17살이 되었지만 자신에게 맞는 진로를 찾지 못하는 그녀에게 교장은 여성 첩보기관 '에이전시'의 수습요원 자리를 제안하고, 메리는 무역상 소롤드의 저택에 고용되어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천방지축 나대는 메리가 좀 불안하긴 했지만, 주인공이니까. 시대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존재 가치를 넓혀가는 메리가 맘에 들었다. 사실 이 이야기도 그렇고 앞으로의 전개도 뻔하기는 하지만, 이 시리즈를 계속 읽을 생각이다.
15. 사적인 문제(벱페 페놀리오, 이소영 역. 인간희극. 2010. 237쪽)
: 기대 안 했는데 생각보다 정말 재미있었다.
2차 대전이 채 끝나기 전의 이탈리아. 전체주의와의 싸움에 뛰어든 파르티잔 청년 밀턴은 마음 속에 예전에 자기 마을로 피난왔던 소녀 풀비아를 품고 있다. 그녀와의 추억으로 버티던 그는 그녀가 머물던 빌라를 찾았다가 관리인으로부터 그녀와 자신의 절친 조르주와의 깊은 관계를 암시하는 얘길 듣고 다른 부대에 있는 조르주를 찾아가 따지기로 하는데, 조르주가 파시스트 군에게 잡혔다는 얘길 듣는다.
밀턴에게 풀비아는 어쩌면 삶의 이유 그 이상이었다. 사랑에 냉소적인 지금 상태의 나로서는 밀턴의 순수함이 귀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에게 진실을 아는 것은 당면 과제인 셈이다. 파시스트 축출보다 더 시급한. 이 여정의 끝이 비극일 수 밖에 없는 건 전쟁 때문일 지도 모르지만, 밀턴 자신의 맹목성과 천진난만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밀턴의 사적인 문제를 전쟁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섞어 놓았고 따라서 독자들은 전쟁의 참혹함과 밀턴의 답답함을 분리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이 몰입해서 읽게 된다. 잘 쓴 소설. 이 저자의 다른 책도 읽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책들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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