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의 멘붕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 1시 난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던 이런저런 일들을 했다. 우선 방 안에 늘어놓았던 컵이랑 주전자 등을 손에 쥐고 마루로 나갔다. 그런데 저녁 때 끓인 김치찌개 냄새가 너무 진하게 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방문을 꼭 닫았다. 내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잠자리에서 음식 냄새 나는 것이라서.

마루로 나온 김에 화장실에 들렀다가 작은 방에 들어가 이런저런 것들을 정리하고 다시 큰 방으로 가서 문 손잡이를 돌렸는데, 문이 꿈쩍도 안 했다. 아, 아까 자야겠다 생각하면서 무심결에 문을 잠갔는데! 문 열고 나오면서 그게 안 풀렸나보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쩌지? 난 지금 자야하는데! 아니 그것보다, 나 지금 암것도 없다. 핸드폰도 없고 집 열쇠도 없어... 다행히 식탁 의자에 가방을 놔둔 덕에 현금 지갑은 있었다. 그런데 어쩌지? 현금 조금 갖고 뭘 할 수 있지?

일단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갖고 있던 열쇠 비슷한 것은 다 넣어 돌려봤다. 그래봐야 회사 문 열쇠랑 서랍 열쇠... 이 와중에 회사 서랍 열쇠가 부러졌다. 안 되겠다. 나 지금 뭐 한거니? 애먼 열쇠만 하나 더 부러졌잖아! 영화나 드라마 보면 이런 문은 금방 따던데... 칼! 칼을 넣어보자. 안 들어간다. 이러다 칼 끝도 부러지겠다. 하긴 칼 끝 부러지면 어때, 문만 열린다면... 근데 식도도 과도도 다 안 된다. 그럼 어쩌지? 가위! 아, 이러다 손 베겠다. 마침 가방 안에 굴러다니던 가죽 장갑을 끼면 되겠구나. 가죽 장갑을 오른손에 끼고 가위 날을 벌려 집어넣어 본다. 꽤 깊숙히 들어간다. 희망이 보인다.... 하지만 안 돌아간다.

마룻바닥에 멍하니 앉았다. 어떡하지? 난 열쇠집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전화기만 있으면 검색해 볼 수 있는데! 아, 전에 누가 현관문에 스티커 붙여놨지. 문을 열고 나가보니 붙어있다. 그렇지만 전화할 방법이 없잖아... 혹시나 싶어서 집 앞 슈퍼를 보니 이미 불이 꺼져있다. 아, 예전 본가 근처는 슈퍼도 새벽 2시까지 했는데... 편의점은 너무 멀다. 거기까지 이 밤중에 현관문도 안 잠그고 걸어갈 순 없다.

그래. 일단 내일 아침에 뭔가를 해볼 수 밖에 없다. 일단 자자. 다행히 작은 방에 한겨울에 덮는 솜이불과 얼마 전에 빨아놓은 담요가 있다. 깔고 덮었다. 춥다. 베개도 없어서 스웨터를 뭉쳐서 위에 수건을 깔았다. 불편하다. 그리고 심란하다. 살다살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전에도 종종 밤에 문을 잠그고 자다가 중간에 깨서 화장실 갈 때마다 문이 안 풀려 있어서 이러다 닫히면 완전 큰일인거다 라는 생각 했던 적 있는데, 왜 오늘은 까맣게 잊은 거니...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화장실이 잠긴 것보다 낫잖아. 아냐, 차라리 작은 방이 잠겼으면 좋았을 걸. 아냐아냐, 그런 생각 하지마. 그래도 이번 일로 앞으로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살면 되지. 아,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방문 닫기 전에 문 손잡이를 한 번만 돌려봤더라면... 아냐, 그래도 방 안에 갇힌 것보단 나아. 여긴 물도 있고 먹을 것도 있고 화장실에도 맘대로 갈 수 있고 정 뭐하면 부모님 댁으로 갈 수도 있고... 그런데 지금 몇 시일까? 답답하네. 다행히 밥솥을 예약해 두었으니 밥이 다 되면 아침 8시인거야. 그럼 일어나서 대충 씻고 옷도 갈아입고, 그래, 옷들이 다 작은 방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수면 바지에 노브라 차림으로 열쇠 아저씨를 맞이하지 않아도 되잖아? 어쨌든 아침에 일어나서 일단 주인 아주머니한테 방 열쇠가 있는 지 여쭤보고 없다면 열쇠 아저씨를 불러서... 근데 일이 커지면 어쩌지? 돈은 얼마나 들까? 나 현금 얼마 없는데... 그것보다, 주인 아주머니가 없으면 어쩌지? 그럼 101호에 도움을 청해보자. 전화 좀 빌려달라고... 101호는 일찍 출근하는 거 같던데 타이밍 못 맞추면 어쩌지? 그렇다고 너무 일찍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를 수도 없고... 아, 맞다, 나 방 안에 속옷 널어놨는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뒤척이다가 잠들었고, 101호의 문소리에 잠이 깼다. 취사가 시작도 안 한 걸 보니 아마 7시 좀 넘은 것 같다. 좀 더 누워 있다가 밥이 되자 일어났다. 씻으려다가 기초 화장품이 모두 방 안에 있어서 씻고 나면 얼굴이 종잇장처럼 찢어질 것 같아서 안 씻고 그냥 밥을 조금 먹었다. 입맛이 없어서 두어 숟갈 겨우 뜨고 대신 익어서 물러터지기 직전인 바나나를 한 개 더 먹었다. 설거지를 한 후, 시간을 몰라서 마루와 작은 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이것저것 정리하며 방황하다가 나가서 주인집 초인종을 눌렀다. 아주머니께 자초지종을 얘기했는데 아주머니는 역시 방 열쇠가 없다 한다. 뭐, 기대도 안 했다. 지은 지 20년이 다 된 집에 방문 열쇠가 남아 있을리가...

아주머니 핸드폰으로 열쇠 아저씨를 불렀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벨이 한참 가다가 통화가 되었고, 열쇠를 만들어달라는 아주머니 말에 손잡이를 교체해야 한다고, 4만원 가량 든다고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와달라고 했고, 내 느낌으로는 하룻밤만큼의 기다림 끝에 앳된 얼굴의 열쇠 청년이 왔다. 문을 열기만 하는 건 돈이 덜 든단다. 그래서 그렇게 해달라 했다. 꽤 한참을 낑낑 거리는데 쳐다보면 더 오래 걸리지 않을까 싶어 괜히 작은 방에 들락날락 하다가 나오는데 큰 방 문이 열려 있었다!

와~ 이 방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파란 이불 위에 널부러져 있는 브라는 좀 민망하지만. 어쨌든 열었다. 밤새 켜 있던 불을 끄고 돈은 계좌이체 해주기로 한 후 열쇠 청년을 보내고 나니 힘이 빠진다. 9시간 동안 나 뭐 한거니.

얼른 씻고 출근 준비 하면서 문득, 기다리는 동안 세탁기라도 돌릴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애시당초 정신줄을 잘 붙잡고 살았어야지. 세탁기 돌리는 1시간을 아까워할 게 아니라. 어쨌든 9시간 동안 내가 한 짓은, 그냥 늙는 거였다.

사실 PMS라 존재의 이유에 대해 계속 고민하며 우울해하던 중이었는데, 그런 형이상학적인 고민 따윈 한 방에 날려준 멍청한 짓이었다. 이제는 집 안에서도 어딜 가든 손에 핸드폰 쥐고 다니기로.

PS> 회사 서랍은, 여분 열쇠가 없어서 역시 이래저래 열어보려고 시도하다가 동료가 부숴(!) 줬다.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5/12/09 17:26 | 힘내서 살아가기 | 트랙백 | 덧글(10)
Commented by 이요 at 2015/12/09 17:37
토닥토닥. 얼마전 빨간 고무장갑 끼고 슬리퍼 바람에 수면바지 입고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갔다가, 번호키 번호를 3번 연속 잘못 누르는 바람에 계단에 서 있을 때 생각이 나네요. ㅠ.ㅠ 수면바지에 맨발 슬리퍼에 속옷도 안입었는데 이거 어떡하지? 멘붕스러웠던. 다행히 5분쯤 지나서 다시 제대로된 번호를 누르니 열리더라구요. 정말 하늘이 노랬었는데....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5/12/10 16:52
에궁... 이요님 겪으신 상황이 제가 상상한 최악의 상황... 한밤중에 밖에서 그러면 진짜 멘붕이었을 거에요. 바로 해결되서 진짜 다행이었네요^^ 토닥토닥 감사^^
Commented by 정메롱 at 2015/12/09 18:24
어흙 고생하셨어요ㅜ 저는 유선청소기 쓰던 시절에 청소기 줄이 문틈에 끼어서 움직이지를 않았는데 이것만 해결되면 착하게 살거라고 누군지 모르는 상대방한테 기도까지 했었어요ㅋㅋ 어떻게 하다가 빠졌을때 어찌나 감사하던지ㅜ 그래도 문단속 잘하는 습관이 안하는 습관보다 훨씬 좋은거니까 힘내세요^^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5/12/10 16:54
저두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순하게 살겠다고...ㅎㅎㅎ진짜 멘붕이었어요ㅋㅋㅋ어젯밤에는 자기 전에 문을 잠갔다 풀었다... 평소 습관대로 잠그고 자고 싶은데 괜히 방 안에 있으면서도 문을 닫기만 하고 자야하지 않을까 싶고...ㅋㅋㅋ
Commented by 당고 at 2015/12/09 22:39
와 진짜 고생하셨네요ㅠ.ㅠ
그래도 한밤의 해프닝으로 끝나서 다행입니다!
전 문 열어놓고 나가서 참이 탈출할 뻔한 적도 있어요ㅠ.ㅠ 다행히 참이가 겁이 많아서 안 나갔지만요ㅜ.ㅜ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5/12/10 16:58
네, 진짜 다행이에요^^ 사실 대범하게 그냥 내일 아침에 해결하면 되지, 하는 맘으로 편하게 자고 일어났어도 결과는 같은 거였는데 제가 워낙 소심해서...ㅠ 예전에 제 직장 동료는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어떤 고양이가 집 앞 계단에서 야옹거려서 구출하려고 나가봤더니 자기 고양이었다고...현관문이 꽉 안 닫혀서 잠금장치가 헛돌았나봐요ㅠ 당고님 경우도 진짜 다행이었네요!
Commented by 따뜻한 허스키 at 2015/12/10 06:42
ㅜㅜㅜㅜㅜ힝 힘드셨을텐데 중간에 긍정적인 부분보고 빵터졌어요^//////^ 캔디처럼 귀여우시다...ㅎ독립 생활 화이팅입니다!! 액땜일 거에요!!^^!!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5/12/10 16:59
화이팅 감사합니당^^ 즐거움 드렸다니 뿌듯해요 ㅎㅎㅎ 사실 평상시의 저는 비관주의자에 가깝지만요...ㅋㅋㅋ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어요 ㅋㅋㅋ
Commented at 2015/12/12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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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15/12/14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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