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독서 목록

1. 지나치게 사적인 그의 월요일(박지영. 문학수첩. 2013. 331쪽)
: 범죄 프로그램 재연배우 해리. 그의 여자친구 조연출. 그리고 그들이 오가는 현실인듯 몽환적인 세계. 판타지라기 보다는 스릴러에 가깝다. 방송국 PD였지만 입봉작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면서 사표를 쓰고 재연배우로 밥벌이를 하는 해리는 현재 하는 일에 불만도 없고 맡은 역할을 꽤 잘 해낸다. 하지만 케이블의 데이트 프로그램에서 비참하게 까인 후 해당 회차에서 그를 떨어트린 여성 중 하나가 시체로 발견된다.

차분한 문체가 좋았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몽환들도. 등장인물 각자의 목소리로 심리를 이야기해 주는 것도 좋았다. 판타지적인 부분은 결말에 이르러 흐지부지 사라졌지만 - 그래서 더 스릴러 같았다 - 꽤 잘 쓴 소설이었다. 앞으로도 이만큼만 써준다면 난 이 작가를 끝까지 애정할 것이다.


2. 열 일곱, 364일(제시카 워먼, 신혜연 역. 황금가지. 2011. 497쪽)
: 리즈는 열 여덟 생일날 새벽, 요트에서 깨어난다. 어젯밤부터 친한 친구들과만 여기서 파티를 했다. 뭔가가 요트에 부딪치는 소리에 깨어난 리즈는 물 속에서 자신의 시체를 발견한다.

유령인 리즈가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기까지의 과정이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예쁘고 부유한, 고등학교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리즈가 생전에는 존재도 인식 못했던, 가난하고 인기없던, 자신보다 1년 전에 죽은 알렉스와 함께 생전의 기억들과 지금은 남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퍼즐을 한조각씩 끼워맞추는 과정이 차분하게 보여진다. 재미있었다. 가볍게 읽기 원한다면 그냥 쓱 읽어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학생때부터 저절로 알게 되는 사회 신분의 세습이나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집착, 자매 혹은 친구 사이의 시샘과 경쟁 등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툭툭 던진다. 무엇보다 매끄러운 필력이 맘에 들었다. 주위에 청소년이 있으면 권해주고 싶은 소설.


3. 이중인격(마거릿 피터슨 해딕스, 최제니 역. 개암나무. 2010. 368쪽)
: 재미있게 읽은 청소년 소설. 열 세 살 생일을 며칠 앞둔 베서니. 언제부턴가 엄마는 계속 울고 아빠는 초조해 하더니 갑자기 하루종일 차를 달려 처음 보는 동네로 와 생전 처음 보는 부인에게 베서니를 맡긴다. 이모 마일리는 뭔가를 숨기는 듯 했고 밖에서 마주친 마을 사람들은 베서니를 자꾸만 엘리자베스라고 부른다.

이게 진짜 해리성 정체 장애에 관한 이야기였으면 엄청 재밌었을 텐데. 사실 베서니의 비밀은 진작 짐작 가능하고, 그 윤리도덕적인 논점은 그냥 덮힌 채 베서니의 정체성 혼란만 부각시킬 뿐이다. 뭐, 이런 혼란을 통해 윤리 논쟁을 유발하고자 했다면 할 말 없지만 좀 가볍게 다룬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4. 자메이카 여인숙(대프니 듀 모리에, 한애경, 이봉지 역. 현대문학. 2014. 450쪽)
: 첫 단락에 반했다. 비 내리는 11월, 마차 안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의 묘사에. 이야기도 초반에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게 되자 고향을 떠나 하나뿐인 혈육인 이모와 살기 위해 보드민으로 온 메리. 그러나 이모는 보드민에서 떨어진 황야 한가운데의 자메이카 여인숙에서 남편과 살고 있었고, 늘 예쁘고 빛나던 이모는 머리가 하얗게 센 채 신경쇠약으로 마치 어린애처럼 변해 있었다. 이모부의 거대한 체구와 괴팍한 성질에 압도당한 메리는 아무도 자메이카 여인숙을 찾지 않는다며 도망치듯 사라진 마차 마부의 말을 떠올리며 이 곳을 벗어나려 했지만 가여운 이모 때문에 눌러 앉는다. 그리고 밤에 방문하는 수상한 사람들과 마차를 보게 되는데...

고딕 소설의 기본 요건을 다 갖춘 자메이카 여인숙. 혼자된 여주인공과 고립된 장소, 그리고 로맨스까지. 그런데 로맨스는 사실 공감은 커녕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건 사랑이 아냐. 메리가 진취적으로 자신만의 길을 계속 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19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1936년작 소설에서는 이게 최선이었는지도 모르지. 어쨌는 재미는 있었다. 흥미로웠던 작은 반전도. 이 작가의 다른 작품 소개도 얼핏 봤는데, 더 재미있을 것 같다.


5. 히말라야 환상 방황(정유정. 은행나무. 2014. 306쪽)
: 읽는 내내 갑자기 눈물이 터지곤 해서 완독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불쑥 나오는 작가의 어머니 이야기와 아이 이야기 때문에. 아니, 우리 엄마와 엄마의 아이인 나 때문에. 그치만 이건 슬픈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내 맘 상태가 그랬을 뿐. 처음에 목차와 라운딩 코스 지도를 보고 생각보다 건조하고 평범할까봐 기대를 내려놓고 시작했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특히 중반쯤의 영화배우 J씨의 금광 청혼과 '마지막 야크' 이야기에서는 육성으로 빵 터졌다. 역시 명불허전 정유정!


6. 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캐서린 호우, 안진이 역. 살림. 2010. 567쪽)
: 역사 전공 박사과정에 막 합격한 코니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집을 여름 동안 팔 만하게 청소해 달라는 엄마의 부탁을 받고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전기설비조차 안 되어 있고 정원엔 각종 허브가 무성한 집에서 성경 사이에 끼워져있던 열쇠와 '딜리버런스 데인'이라는 이름이 적힌 양피지를 발견한다.

영화 <크루서블>의 모티브가 된 세일럼의 마녀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보여준다. 진짜 마녀들은 기독교 신앙에 충실했고 인간을 사랑했다는, 마녀 재판을 다룬 많은 현대 서적의 주장들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지만, 이 책만의 사랑스럽고 독특한 이야기가 있다. 코니의 사랑 이야기도 나름 재미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샘을 반려자라고 확신했는지는 이해되지 않지만. 역사 전공이라는 작가의 전공을 십분 살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에피소드들을 보여준 것도 맘에 들었다.


7.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눈송이(은희경. 문학동네. 2014. 245쪽)
: 사랑했던 이 작가를 난 이제 더이상은 사랑하지 않게 되었나보다. 더이상 이 작가만의 색이 없어진 것 같다. 각각의 이야기는 나쁘지 않았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저 이야기에서는 배경인물인 것도 새로울 건 없는 방식이었지만 재미있었다. 다만 이 작가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진 게, 사실 이번에 발견한 것만은 아니지만, 이제 이 작가의 작품들을 그저 관성으로 읽게 되었다는 게 씁쓸했을 뿐. 가장 좋았던 작품을 꼽을 만 하지도 않았다. 그저 현재 있는 곳에서 낯설지만 얕게나마 뿌리 내리고자 하지만 결국 밀려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 그나마 기억에 남는 건 <스페인 도둑> 정도. 화자가 나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8. 나비잠(최제훈. 문학과지성사. 2013. 372쪽)
: 중간쯤부터 재미가 없었지만 끝까지 읽었다. 이 작가가 못쓰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최요섭 변호사의 이야기보다 탈주범 쩔곰의 이야기가 더 재밌었다. 꿈인듯 동화인듯. 하지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그 어떤 동화와도 닮지 않았다. 그리고 그래서 더 좋았고. 변호사 최요섭의 여정은 하강하지만 탈주범 쩔곰의 길은 그냥 수평이라는 것도 맘에 들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 작가의 작품을 선뜻 집어들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쩔곰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 책은 진작에 덮어버렸을 지도 모르니까.


9. 블랙스완그린(데이비드 미첼, 송은주 역. 문학동네. 2013. 567쪽)
: 열 세 살 제이슨의 1982년. 학교 내에서의 계급은 찌질이를 간신히 벗어났지만 위태위태하고, 부모는 중산층이지만 삐걱대고 하나뿐인 누나는 까칠하다. 말은 더듬게 하는, 머릿 속에 사는 행맨과 싸우고 몰래 교구 잡지에 가명으로 시를 발표하고 우정과 평판 사이에서 갈등하고 이해하기 힘든 어른들의 세계를 궁금해하는 13개월 동안의 이야기가 차근차근 펼쳐진다. 이 작가의 전작에 비해 평면적인 이야기라 편하게 읽었다. 가장 공감되던 건 머릿 속을 울리는 '태어나지 않은 쌍둥이'의 목소리.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또다른 숨은 계단"(553~554쪽). 인생이 그딴식이라는 걸 이 아이는 왜 이렇게 빨리 깨달아버린 건지. 그리고 그 깨달음이 앞으로 이 아이의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안쓰럽기만 했다.


10. 빨간 구두당(구병모. 창비. 2015. 289쪽)
: 작가가 재해석한 동화들. 전반적으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주 잘 썼다고 할 수도 없다. 작가가 모 인터뷰에서 얘기했던 대로 어떤 작품은 원래 이야기가 뭐였는지 쉽게 떠오르지 않아서 한참을 읽은 후에야 알 법 했기에 재미가 덜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작가가 기존 틀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은 작품 - <거위지기가 본 것>, <개구리 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가 더 재미있었다. 사실 주인공 중에서는 <엘제는 녹아 없어지다>의 엘제가 가장 마음이 쓰였다. 나와 너무 닮아서. 그런데 결론은 너무 웃겨. 그렇게 예민하고 사물을 정확히 보려던 여자가, 결혼 후 주변의 적대적 시선에도 해맑게 꿋꿋하던 여자가 한 번의 낮잠 후 그물에 감긴 자신을 봤단 이유로 자기 존재에 대해 그렇게 백치가 되어버린다는 게 말이 돼? 그냥 결론을 위해 끌어다 붙인 것 같았다. 전반적으로 사회 비판 메시지를 많이 담으려 했고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려 노력했는데, 그 때문에 모든 작품의 화자가 누구든, 인칭이 어떻든 상관없이 같은 말투와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는 게 가장 아쉽다.


11.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 2(앤서니 도어, 최세희 역. 민음사. 321쪽, 462쪽)


12. 알바 패밀리(고은규. 작가정신. 2015. 230쪽)
: 망해버린 가구 제조업자 아빠, 아빠 대신 가계를 부양하려 마트 계산원으로 취직한 엄마, 잘 나가는 온라인 리뷰어였다가 백화점 진상 고객이라는 게 들통나버린 동생 로라, 그리고 휴먼 마케팅학과 전공생이지만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전전하는 오빠 로민. 자본주의의 가장 밑바닥 비정규직 알바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가족의 이야기이다.

돈이 돈을 벌고, 돈이 없는 게 죄가 되는 자본주의의 rule에 치이면서도 체제에 대해선 별다른 불평 없이, 그저 쌓이는 전단지나 혹은 그 전단지를 뿌려대는 또다른 알바들에게나 짜증내며 살아가는 일개미들. 지금의 내 모습과 다르지 않았고, 그래서 더 미웠다. 희망따윈 없다. 그렇게 해맑게 마트의 1+1 상품을 쥐고 있는 한은.


13.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알랭 레몽, 김화영 역. 현대문학. 2003. 194쪽)
: 이 책을 펼쳐 한 단락을 읽자 문득 여러 감정이 밀려왔다. 내가 그 동안 이 작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이 차분하고 꾹 누른 듯한 문장을 얼마나 읽고 싶었는지, 그리고 그래서 지금 얼마나 좋은지.

전작에서 아버지를 이야기했던 작가는 자신이 아버지의 과오를 드러낸 것이 못내 걸린다. 아버지가 젊은 날의 군 복무중 보냈던 편지를 발견하고,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한다. 가난한 카톨릭 집안의 기대대로 신부가 되는 길을 가려던 화자.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회의는 늘 품고 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실망한 얼굴을 마주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점점 자신의 사고를 또렷이 자각하게 되고 결국은 거리로 나오게 된다.

길지 않았지만 좋았다. 마냥 좋았다. 전작도 다시 읽고 싶어졌고, 이 책도 재독, 삼독하고 싶었다. 전작을 읽으며 식구 많은 가난한 시골집 소년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내 맘은 1968년 5월 거리로 나선 이 청년을 뿌듯한 마음으로, 기특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아, 이 작가의 책이 내 책장에 꽂혀있다는 게 얼마나 따뜻한지.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5/12/02 17:59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2)
Commented by 안취한배 at 2015/12/03 22:35
오. 알랭 레몽이 그렇군요. <한 젊은이>와 전작 <하루하루>를 다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출간 순서대로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고맙게 읽었습니당, 사다리 님. 따뜻한 겨울 보내세요.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5/12/07 16:19
네, 출간순서대로^^ 저한테 고마우실 것 까지야...ㅎㅎㅎ 알랭 레몽은 사랑입니당~ㅋㅋㅋ 안취한배님도 따뜻한 겨울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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