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침대(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 정회성 역. 민음사. 2013. 380쪽)
: 7483일 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는 남자 맬컴. 몸무게가 600kg이 넘어버린 그의 동생이 이야기하는 형과 '나', 그리고 가족. '나'는 어릴 때부터 가족의 관심 밖이었고 심지어는 내가 짝사랑하는 여자도 형의 여자친구이다. 어릴 때부터 괴짜이던 형은 25세 생일날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하고 그 뒤로 그저 엄마의 풍성한 사랑을 기반으로 살이 쪄간다.
가족애를 얘기하지만 그 속에 숨은 화자의 아픔도 이야기한다. 부모들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얘기하지만 분명 더 아프거나 덜 아픈 손가락은 있을 것이다. 난 부모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모든 손가락이 똑같이 아플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이 가족에게 더 아픈 손가락은 맬컴이었겠지. 화자의 주눅든 맘, 도망치고 싶은 맘, 비뚤어지는 맘에 크게 공감하며 읽었다. 결말도 흡족하니 맘에 들었다.
2. 꼭두각시 인형과 교수대(앨런 브래들리, 윤미나 역. 문학동네. 2012. 480쪽)
: 어린 화학자 탐정 플라비아 들루스 시리즈 2권. 이 시리즈 첫권을 읽은지 너무 오래 지나서 이 소녀의 맹랑한 사랑스러움을 잊고 있었는데 다시 마주하고 보니 이 이쁜 아이를 왜 미뤄뒀을까 싶다. 꽤나 조용한 시골마을 비숍스 레이시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꼭두각시 극단이 오고, 플라비아는 묘지에서 니알라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들의 일을 돕게 된다. 마을 교구회관에서의 공연 중 인형술사이자 TV 스타 루퍼트 포손이 살해당하고, 플라비아는 그가 이 마을에 첫걸음이 아님을 알고 그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다른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책을 좋아하는 것과는 달리 이 소녀는 실험실이 아지트일만큼 화학적 지식이 풍부한 아마추어 과학자이다. 만약 다른 소설이었다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둘째 대프니가 주인공이었을 듯. 시체를 보고도 호기심이 발동하고 경찰 앞에서도 당당한 맹랑하고 야무진 소녀지만 언니들의 짖궂은 놀림에는 울음을 터뜨리는 아직은 아기같은 열 한살 짜리 아기 탐정 플라비아의 지적 모험이 진짜 재미있었다. 아, 범인은 전혀 짐작 못했다. 난 역시 추리는 약하다.
3. 잠옷을 입으렴(이도우. RHK. 2012. 464쪽)
: 이 작가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먼저 얘기했듯 별로였다. 그래서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은 다행이도 재미있었다. 역시 수안 캐릭터는 살짝 유치했지만, 그 나이대는 그럴 수 있지. (아마 작가가 자신을 가장 많이 투영한 게 수안일 듯). 다만 수안 캐릭터의 결말은, 이해는 되나 공감은 힘들었다. 수안이 그저 어른으로 성장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예민하고 기운없더라도 말이다.
엄마의 가출로 아버지의 손에 의해 외가에 맡겨져 동갑내기 사촌과 자라게 된 둘녕의 이야기이다. 사실 둘녕의 목소리여서 이 소설이 유치함을 벗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둘녕은 대놓고 슬퍼하는 아이가 아니다.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꾹꾹 감출 줄 아는, 자기가 뜨는 손뜨개 스웨터 같은 아이. 아픔이 꿈으로, 회한이 몽유로 나타나는 아이. 그래서 좋았고, 그래서 그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작가가 앞으로도 이만큼만 써줬으면 좋겠다.
4. 내 아들의 아버지(카렐 판 론, 김지현 역. 소담출판사. 2010. 376쪽)
: 아내가 죽은 지 10년. 세 살이던 아들도 이제 다 컸고, 아르민은 새 여친 엘런과 아이를 가지려 한다. 노력해도 안 생기는 아이 때문에 병원을 찾은 이들은 아르민이 클라인펠터 증후군(염색체 이상으로 불임)이라는 걸 알게 되고, 이 때부터 아르민은 아들 보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추적한다.
누구보다 다정하고 좋은 아버지였던 아르민에게 닥친 청천벽력. 아르민의 '보의 생부찾기'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나라면 글쎄... 아마 그냥 덮겠지. 지금 충분히, 이대로도 좋다면. 하지만 아들은 커가고, 자신과 닮은 아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아들의 행동을 보고 다정하고 닮은 부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드는 착작함은 정말 무거울 것이다. 섬세하게 아르민의 마음과 생활을 보여주기만 하는 것도 좋았는데 결말에 이르는 반전 덕에 정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의 보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재미있었다.
5.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조현. 민음사. 2011. 224쪽)
: 제목이 그럴싸해서 꽤 기대를 하고 읽었는데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표제작은 나쁘지 않았지만 다른 작품들은 SF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문학도 아닌 어정쩡한 느낌. 서정성에 집중을 하든지 아니면 발랄함과 아이디어로 승부를 보든지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이 책같은 스타일로 계속 쓰려면 배명훈을 따라잡기 힘들 것이다.
6. 호텔 로완트리(팀 보울러, 유영 역. 놀. 2013. 408쪽)
: 호텔 로완트리를 인수한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이사온 마야. 주위를 둘러보던 중 홀린 듯 숲에 들어갔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떤 여자의 시체 앞에 있다. 연이어 발견되는 다른 두 구의 시체와 어떤 그림자. 마야는 정신없이 그 곳을 벗어나고, 부모님의 신고로 경찰이 숲 속을 뒤지지만 어느 곳에도 시체는 없다. 마야는 호텔에 온 경찰 중 한 명이 자신이 처음 본 여자 시체와 같은 얼굴임을 깨닫는다.
이제껏 읽은 보울러의 소설 중 가장 재미있었다. 가장 흥미진진했고. 보울러 특유의 성장소설적 요소는 가장 적었지만, 가장 빨리 읽었던 소설인 것 같다. 처음에는 '여우가면'으로 밀리를 의심했는데, 역시 난 추리에는 영 소질없음. 다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남은 의문은, 무엇이 마야로 하여금 그런 환상을 보게 했을까? 호텔 자체가? 아니면 가족에 대한 마야의 사랑이? 혹은 계속 죽임 당하는 종족을 보호하고자 했던 여우가? 어쨌든 앞으로의 마야의 이야기도 궁금해졌다. 속편 나왔으면...
7. 어떤 약속(소르주 살랑동, 김민정 역. 아고라. 2007. 256쪽)
8. 옥수동 타이거스(최지운. 민음사. 2013. 236쪽)
: 폭력 & 일진에 대해 건전한 판단이 안 되는 어린이들과 철없는 어른들은 읽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소설. 부드러운 무협지 같다. 재미는 있다. 나름 감동도 있고, 사회 비판 요소도 강하다. 옥수동에 자리하고 있던 용공고에는 이른바 오호장군이라는 일진 조직이 있다.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 조직은 옥수동에서 재편된 부촌 서당동에 사는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중앙외고의 캡틴 파이브. 서당동 주민들의 로비로 용공고는 폐교 위기에 처하는데...
내용 뿐 아니라 문체도 꽤 재기발랄하여 진도가 쓱쓱 나가는 책이다. 오호 장군의 현재 모습이나 책 뒤의 부록(?)은 좀 사족같은 느낌이지만. 이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다만 다음 작품은 이런 무협지 스타일은 아니었으면 한다.
9.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페터 빅셀, 전은경 역. 푸른숲. 2009. 192쪽)
: 나도 그렇다. 나도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러기 위해서는 돈도 아주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었다고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지만, 에밀 아저씨처럼 사는 방법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다림에 대해, 세상에 대해, 고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작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좋았다.
10. 보광동 안개소년(박진규. 자음과모음. 2011. 240쪽)
: 이 작가는 아이디어는 진짜 좋은 듯. 문체는 전작보다 편안해졌고, 현명하게도 분량을 줄임으로써 내용적으로도 부실함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얼굴이 안개로 뒤덮힌 소년을 추앙하다가 한순간 등을 돌려버리는 대중이라든가, 돈으로 모든 걸 지배하려는 회장 등의 이야기는 전형적이었다. 지나의 역할이 미미했던 건 예상 밖. 전반적으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딱히 좋지도 않았다.
11. 인간들이 모르는 개들의 삶(엘리자베스 마셜 토마스, 정영문 역. 해나무. 2003. 223쪽)
: 인류학자인 저자가 애완/반려 동물이 아닌 자체로서의 개를 키우며 관찰한 내용을 정리한 책. 저자의 개입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종국엔 개들은 마치 들개들처럼, 자연 상태의 모습처럼 본성을 드러낸 채 살아간다. 어찌보면 방목이고 어찌보면 자유를 부여한 거지만 난 사실 저자의 행동에 다 공감이 가진 않는다. 물론 그러한 행동이 있었기에 개들 무리 내에서의 서열 관계 - 서열 1위의 암컷은 서열이 높은 혹은 낯선 수컷하고만 교미를 한다던가, 한 무리 내에서는 서열이 높은 암컷의 새끼들만 살아남는다던가 하는 걸 알 수 있었겠지만. 내가 알고 또 동의하기로 개들은 무리 내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지도자가 있을 때 가장 안정적인 상태로 산다. 인간과 함께 사는 개들에게는 인간이 그 역할을 어느 정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저 밥그릇 물그릇이나 채워주고 빗질이나 해주고 목욕이나 시켜주는 게 다가 아니다. 강력한 통제하에 있을 때 안심하고 푹 잠드는, 그런 개들에게 어쩌면 저자는 못할 짓 한 걸 수도 있겠다 싶다.
12. 쿠쿠스 콜링 1, 2(로버트 갤브레이스, 김선형 역. 문학수첩. 2013. 336쪽, 356쪽)
: 충분히 매력적이다. 처음에는 조앤 롤링이 가명으로 출판했다가 책이 재미없어서 반응이 별로인 까닭에 슬쩍 자기 이름을 공개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이 롤링의 이름에 기대지 않았더라도 꽤 승산이 있었을 것 같다. 난 추리 소설 시장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슈퍼모델 룰라 랜드리가 자기 집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고, 경찰은 나름의 수사 끝에 자살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녀의 마약 복용 전적, 양극성 장애와 역시 마약 중독자에다 폭력성향을 지닌 유명인 남자친구와의 불안정한 관계 등을 근거로. 그로부터 몇 달 뒤, 룰라의 오빠 존 브리스토가 망해가는 탐정 코모란 스트라이크를 찾아와 여동생은 살해당한 게 분명하다며 수사를 의뢰한다.
난 처음에는 디자이너 기 소메를 의심했다. 제목 때문에. 그런데 아니었다. 그 뒤로 내가 의심했던 사람들은 다 범인이 아니었다. 역시나 내가 그렇지 뭐, 추리 따위. 이야기 전개가 흥미진진했고 가독성도 좋았다. 범인은 어쩌면 전형적일 수도 있지만 난 예상을 전혀 못했기에 나름 놀랐다. 코모란의 개인사와 로빈과의 관계, 그리고 샬럿과의 이야기 등 이 책이 앞으로 시리즈로 발전하기에도 충분할 만큼 궁금한 이야기가 많았다. 확실히 롤링은 시리즈로 쓰는 게 익숙한 듯, 전작 <<캐주얼 베이컨시>>처럼 이야기를 마구 흩뿌려만 놓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롤링이 코모란 스트라이크 시리즈를 써줬으면 좋겠다.
13. 포에버(주디 블룸, 김영진 역. 창비. 2011. 268쪽)
: 청소년의 성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 출간 당시, 그리고 90년대까지도 이 책이 꽤 많은 학교에서 금서였다니 좀 의아했다. 물론 성관계에 대해 기존 청소년 소설에 비해 묘사가 꽤 길기는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캐서린이 하는 행동들은 정말 전형적인 모범생의 모습이다. 난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한 번씩 읽혀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첫눈에 반한 마이클과 처음 관계를 가지기까지의 망설임과 두려움은 사실적이었고, 관계를 가진 후 스스로 피임법을 공부하고 교육을 받는 모습 등은 진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로 모범적이었다. 솔직히 어른인 내게는 좀 시시하기도 했지만, 청소년들에게는 강력 추천이다.
14.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기자라 이즈미, 이수미 역. 은행나무. 2014. 240쪽)
: 남편과 사별한 지 7년, 데쓰코는 아직도 시아버지와 산다. 정원에 은행나무가 있는 단층집. 남편 가즈키의 소꿉친구였던 옆집 다카라, 가즈키를 동경했던 가즈키의 사촌동생 도라오, 데쓰코가 '시부'라고 부르는 시아버지 렌타로, 그리고 데쓰코의 애인 이와이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일본 소설은 감정선이 공감되지 않아 읽기 힘들다. 일본어투 번역도 거슬리고. 역자는 '시부'나 '등산녀' 등의 단어에서 자신 없어했지만 난 아들에게 조카의 죽음을 알리면서 "가즈키 씨,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번역한 게 더 이상했다. 어떤 분위기인지는 알겠고 존댓말과 정중한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고심했다는 것도 알겠는데, 우리나라 정서에는 정말 안 맞잖아. 그냥 "가즈키가 운명했어" 정도로 번역해도 되지 않았을까? 소설 전반적인 분위기도 좋았고 특히 유코의 이야기와 마지막 표제작이 정말 좋았지만 아무래도 일본 소설은 나한테 안 맞나보다.
15. 최후의 알리바이(로맹 사르두, 정미연 역. 열린책들. 2008. 440쪽)
: 마치 미드를 보는 듯한 스릴러. 한창 공사중인 고속도로 현장에서 스물네 구의 시체가 발견된다. 모두 새로 구입한 중저가 옷을 입었고, 저항의 흔적도 없이 가슴에 총을 맞고 차곡차곡 네 줄로 쌓여 있는 시체들. 뉴햄프셔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자마자 FBI가 끼어들어 엠바고를 선포하고 모든 자료를 가져가 버리고, 셰리든 총경은 이 사건을 더 파헤치기로 맘 먹는다.
꽤 잘 쓴 스릴러이다. 짜임새 있고 속도감 있는 내용. 결말도 충격적이다. 집중해서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상상할 수록 끔찍한 범죄 내용과 찜찜한 결말 때문에 한동안은 스릴러를 멀리 해야겠다 싶었다.
16.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김중혁. 문학과지성사. 2014. 420쪽)
: 경찰 출신 사립탐정 구동치는 딜리터(deleter)다. 계약을 맺은 사람의 사후에 계약 내용에 있는 물건 혹은 데이터를 말끔히 지워준다. 연예 에이전시 배동훈 사장이 죽은 후 구동치는 계약 내용에 있던 태블릿을 추적하고, 배동훈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 의심되는 가운데 태블릿을 둘러싼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서정적인 제목 때문에 집어들었는데 꽤 속도감 있고 재미있었다. 다만 별 역할 없는 캐릭터들이 좀 산만했다. 그 중 최악은 정소윤. 캐릭터 자체도 비호감이었지만 대체 왜 등장했는지 모르겠다. 악어 빌딩 사람들은 다들 꽤나 매력적이었다. 제목에 걸맞는 마지막 챕터도.
17. 테레즈 데케루(프랑수아 모리아크, 조은경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 224쪽)
: 뭐랄까, 전형적이면서도 신선한, 악녀도 성녀도 아닌, 서문에서 얘기했듯 내 모습이 들여다 보이는 여자, 테레즈.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의 당연한 기대 대로 - "둘의 재산이 하나 되는 것이 안성맞춤(48쪽)" - 베르나르 데케루와 결혼을 하지만 이 결혼이 파국을 맞으리라는 건 이미 결혼식날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파국은 테레즈의 손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더 영리하게 굴었다면, 어쩌면 그저 이 결혼을 유지하는 게 맞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그저 자신의 계획대로 행동한다. 아마도 내가 그러했을 듯이. 다른 전형적인 고전 속 기혼 여성 캐릭터처럼 그녀가 자신의 무덤 속 생활을 깨닫는 배경에는 한 남자가 있으나 그녀는 그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그를 찾아 도망가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한다.
마지막 파리 카페에서의 장면이 가장 좋았다. 구제불능인 베르나르와 당당한 테레즈, "행복한 사람처럼 혼자 웃(190쪽)"는 테레즈. 속편이 기대된다.
18. 밤의 종말(프랑수아 모리아크, 조은경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 244쪽)
: 전편의 15년 후 이야기. 테레즈는 너무나 연약해져 있었다. 심장병과 망상. 파리에서 외롭게 혼자 사는 테레즈에게 열 일곱 살이 된 마리가 찾아온다. 사실 마리는 파리에 있는 연인 조르주를 만나러 온 것. 기울어진 데케루 집안 때문에 조르주의 집안에서, 그리고 소작농 출신이라고 데케루 집안에서 둘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얘길 듣고 테레즈는 자신의 재산을 마리에게 주기로 한다.
손에 쥔 것 없이 외로움과 심장병으로 무너져 가는 테레즈가 안쓰러웠다. 뒤늦게 발현된 모성애와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 사이에 혼란스러운 테레즈. 결국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남편과 딸의 동정심에 기대야 하는 테레즈. 그런 그녀가 힘없이 얘기하는 밤의 종말은 마음 아프기만 했다.
19. 레드북(델리아 셔면 외, 송경아 역. 북스피어. 2007. 239쪽)
: 다시 쓰여진 동화들. 『그린북』을 읽을 때 같이 읽을 걸. 벌써 2년이나 지났다. 『그린북』이 동화의 밝은 부분을 보여줬다면 여기의 동화들은 모두 약간은 그로테스크하고 아슬아슬하며 칙칙하다. 『그린북』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 책이 좀 더 엄격한 것 같다. 여기서는 착하지 않으면, 똑똑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므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레고리 매과이어의 「돌아옴의 일곱 단계」- 백설공주 이 나쁜 x. 가장 좋았던 건 퍼트리샤 맥킬립의 「춤추는 열두 공주」.
20. 청춘의 문장들(김연수. 마음산책. 2004. 244쪽)
: 『청춘의 문장들+』가 나왔다는 소식을 몇 달 전에 들었는데 문득 내가 『청춘의 문장들』도 읽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부랴부랴 구입했고 이제야 읽었다. 김연수의 에세이는 위로가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지나갔어야 할 청춘의 미숙함이 왜 아직도 내게는 현재 진행형인지... 왜 이 책이 스테디셀러인지, 10년 후에 +가 왜 출간됐는지 알 것 같다.
21. 노는 인간(구경미. 열림원. 2005. 330쪽)
: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게 있다면 '노는 인간'이다. "선배 하루 일과라는 게 고작 몇 시간씩 게임하고 글 조금 쓰고 다시 게임하고 심심하면 책 읽고 그런 거(표제작. 10쪽)"에서 게임을 웹 서핑으로 치환한 그런 삶. 이 책에는 그런 삶들이 가득하다. 물론 등장인물 모두가 소위 '잉여인간'은 아니다. 직장에 다니고(「초지일관 그녀는」) 이발소도 하고(「형제 이발관」) 매일의 끼니를 마련하(「광대 버섯을 먹어라」)지만, 끊임없이 왜 사는지 고민하고 내일 뭘 먹을지 고민하지만 이런 그들의 고민이나 하는 일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뭔가를 생산해내거나 돈을 벌어들이지 못하는, 그닥 크게 평가받지 못하는 이른바 '잉여짓'인 것. 나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그들이 친근했고 부러웠다. 내가 용기를 내어 갖지 못하는 삶. 때로는 그렇게 될까봐 두렵기도 한 삶. 그러면서도 꼭 그렇게 되고 싶은 삶. 가장 재미있었던 건 「그리고 싱가포르」. 스물 아홉의 해맑은 전업주부 이야기이다. 표제작은,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 7483일 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는 남자 맬컴. 몸무게가 600kg이 넘어버린 그의 동생이 이야기하는 형과 '나', 그리고 가족. '나'는 어릴 때부터 가족의 관심 밖이었고 심지어는 내가 짝사랑하는 여자도 형의 여자친구이다. 어릴 때부터 괴짜이던 형은 25세 생일날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하고 그 뒤로 그저 엄마의 풍성한 사랑을 기반으로 살이 쪄간다.
가족애를 얘기하지만 그 속에 숨은 화자의 아픔도 이야기한다. 부모들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얘기하지만 분명 더 아프거나 덜 아픈 손가락은 있을 것이다. 난 부모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모든 손가락이 똑같이 아플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이 가족에게 더 아픈 손가락은 맬컴이었겠지. 화자의 주눅든 맘, 도망치고 싶은 맘, 비뚤어지는 맘에 크게 공감하며 읽었다. 결말도 흡족하니 맘에 들었다.
2. 꼭두각시 인형과 교수대(앨런 브래들리, 윤미나 역. 문학동네. 2012. 480쪽)
: 어린 화학자 탐정 플라비아 들루스 시리즈 2권. 이 시리즈 첫권을 읽은지 너무 오래 지나서 이 소녀의 맹랑한 사랑스러움을 잊고 있었는데 다시 마주하고 보니 이 이쁜 아이를 왜 미뤄뒀을까 싶다. 꽤나 조용한 시골마을 비숍스 레이시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꼭두각시 극단이 오고, 플라비아는 묘지에서 니알라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들의 일을 돕게 된다. 마을 교구회관에서의 공연 중 인형술사이자 TV 스타 루퍼트 포손이 살해당하고, 플라비아는 그가 이 마을에 첫걸음이 아님을 알고 그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다른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책을 좋아하는 것과는 달리 이 소녀는 실험실이 아지트일만큼 화학적 지식이 풍부한 아마추어 과학자이다. 만약 다른 소설이었다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둘째 대프니가 주인공이었을 듯. 시체를 보고도 호기심이 발동하고 경찰 앞에서도 당당한 맹랑하고 야무진 소녀지만 언니들의 짖궂은 놀림에는 울음을 터뜨리는 아직은 아기같은 열 한살 짜리 아기 탐정 플라비아의 지적 모험이 진짜 재미있었다. 아, 범인은 전혀 짐작 못했다. 난 역시 추리는 약하다.
3. 잠옷을 입으렴(이도우. RHK. 2012. 464쪽)
: 이 작가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먼저 얘기했듯 별로였다. 그래서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은 다행이도 재미있었다. 역시 수안 캐릭터는 살짝 유치했지만, 그 나이대는 그럴 수 있지. (아마 작가가 자신을 가장 많이 투영한 게 수안일 듯). 다만 수안 캐릭터의 결말은, 이해는 되나 공감은 힘들었다. 수안이 그저 어른으로 성장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예민하고 기운없더라도 말이다.
엄마의 가출로 아버지의 손에 의해 외가에 맡겨져 동갑내기 사촌과 자라게 된 둘녕의 이야기이다. 사실 둘녕의 목소리여서 이 소설이 유치함을 벗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둘녕은 대놓고 슬퍼하는 아이가 아니다.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꾹꾹 감출 줄 아는, 자기가 뜨는 손뜨개 스웨터 같은 아이. 아픔이 꿈으로, 회한이 몽유로 나타나는 아이. 그래서 좋았고, 그래서 그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작가가 앞으로도 이만큼만 써줬으면 좋겠다.
4. 내 아들의 아버지(카렐 판 론, 김지현 역. 소담출판사. 2010. 376쪽)
: 아내가 죽은 지 10년. 세 살이던 아들도 이제 다 컸고, 아르민은 새 여친 엘런과 아이를 가지려 한다. 노력해도 안 생기는 아이 때문에 병원을 찾은 이들은 아르민이 클라인펠터 증후군(염색체 이상으로 불임)이라는 걸 알게 되고, 이 때부터 아르민은 아들 보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추적한다.
누구보다 다정하고 좋은 아버지였던 아르민에게 닥친 청천벽력. 아르민의 '보의 생부찾기'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나라면 글쎄... 아마 그냥 덮겠지. 지금 충분히, 이대로도 좋다면. 하지만 아들은 커가고, 자신과 닮은 아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아들의 행동을 보고 다정하고 닮은 부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드는 착작함은 정말 무거울 것이다. 섬세하게 아르민의 마음과 생활을 보여주기만 하는 것도 좋았는데 결말에 이르는 반전 덕에 정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의 보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재미있었다.
5.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조현. 민음사. 2011. 224쪽)
: 제목이 그럴싸해서 꽤 기대를 하고 읽었는데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표제작은 나쁘지 않았지만 다른 작품들은 SF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문학도 아닌 어정쩡한 느낌. 서정성에 집중을 하든지 아니면 발랄함과 아이디어로 승부를 보든지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이 책같은 스타일로 계속 쓰려면 배명훈을 따라잡기 힘들 것이다.
6. 호텔 로완트리(팀 보울러, 유영 역. 놀. 2013. 408쪽)
: 호텔 로완트리를 인수한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이사온 마야. 주위를 둘러보던 중 홀린 듯 숲에 들어갔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떤 여자의 시체 앞에 있다. 연이어 발견되는 다른 두 구의 시체와 어떤 그림자. 마야는 정신없이 그 곳을 벗어나고, 부모님의 신고로 경찰이 숲 속을 뒤지지만 어느 곳에도 시체는 없다. 마야는 호텔에 온 경찰 중 한 명이 자신이 처음 본 여자 시체와 같은 얼굴임을 깨닫는다.
이제껏 읽은 보울러의 소설 중 가장 재미있었다. 가장 흥미진진했고. 보울러 특유의 성장소설적 요소는 가장 적었지만, 가장 빨리 읽었던 소설인 것 같다. 처음에는 '여우가면'으로 밀리를 의심했는데, 역시 난 추리에는 영 소질없음. 다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남은 의문은, 무엇이 마야로 하여금 그런 환상을 보게 했을까? 호텔 자체가? 아니면 가족에 대한 마야의 사랑이? 혹은 계속 죽임 당하는 종족을 보호하고자 했던 여우가? 어쨌든 앞으로의 마야의 이야기도 궁금해졌다. 속편 나왔으면...
7. 어떤 약속(소르주 살랑동, 김민정 역. 아고라. 2007. 256쪽)
8. 옥수동 타이거스(최지운. 민음사. 2013. 236쪽)
: 폭력 & 일진에 대해 건전한 판단이 안 되는 어린이들과 철없는 어른들은 읽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소설. 부드러운 무협지 같다. 재미는 있다. 나름 감동도 있고, 사회 비판 요소도 강하다. 옥수동에 자리하고 있던 용공고에는 이른바 오호장군이라는 일진 조직이 있다.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 조직은 옥수동에서 재편된 부촌 서당동에 사는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중앙외고의 캡틴 파이브. 서당동 주민들의 로비로 용공고는 폐교 위기에 처하는데...
내용 뿐 아니라 문체도 꽤 재기발랄하여 진도가 쓱쓱 나가는 책이다. 오호 장군의 현재 모습이나 책 뒤의 부록(?)은 좀 사족같은 느낌이지만. 이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다만 다음 작품은 이런 무협지 스타일은 아니었으면 한다.
9.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페터 빅셀, 전은경 역. 푸른숲. 2009. 192쪽)
: 나도 그렇다. 나도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러기 위해서는 돈도 아주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었다고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지만, 에밀 아저씨처럼 사는 방법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다림에 대해, 세상에 대해, 고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작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좋았다.
10. 보광동 안개소년(박진규. 자음과모음. 2011. 240쪽)
: 이 작가는 아이디어는 진짜 좋은 듯. 문체는 전작보다 편안해졌고, 현명하게도 분량을 줄임으로써 내용적으로도 부실함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얼굴이 안개로 뒤덮힌 소년을 추앙하다가 한순간 등을 돌려버리는 대중이라든가, 돈으로 모든 걸 지배하려는 회장 등의 이야기는 전형적이었다. 지나의 역할이 미미했던 건 예상 밖. 전반적으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딱히 좋지도 않았다.
11. 인간들이 모르는 개들의 삶(엘리자베스 마셜 토마스, 정영문 역. 해나무. 2003. 223쪽)
: 인류학자인 저자가 애완/반려 동물이 아닌 자체로서의 개를 키우며 관찰한 내용을 정리한 책. 저자의 개입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종국엔 개들은 마치 들개들처럼, 자연 상태의 모습처럼 본성을 드러낸 채 살아간다. 어찌보면 방목이고 어찌보면 자유를 부여한 거지만 난 사실 저자의 행동에 다 공감이 가진 않는다. 물론 그러한 행동이 있었기에 개들 무리 내에서의 서열 관계 - 서열 1위의 암컷은 서열이 높은 혹은 낯선 수컷하고만 교미를 한다던가, 한 무리 내에서는 서열이 높은 암컷의 새끼들만 살아남는다던가 하는 걸 알 수 있었겠지만. 내가 알고 또 동의하기로 개들은 무리 내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지도자가 있을 때 가장 안정적인 상태로 산다. 인간과 함께 사는 개들에게는 인간이 그 역할을 어느 정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저 밥그릇 물그릇이나 채워주고 빗질이나 해주고 목욕이나 시켜주는 게 다가 아니다. 강력한 통제하에 있을 때 안심하고 푹 잠드는, 그런 개들에게 어쩌면 저자는 못할 짓 한 걸 수도 있겠다 싶다.
12. 쿠쿠스 콜링 1, 2(로버트 갤브레이스, 김선형 역. 문학수첩. 2013. 336쪽, 356쪽)
: 충분히 매력적이다. 처음에는 조앤 롤링이 가명으로 출판했다가 책이 재미없어서 반응이 별로인 까닭에 슬쩍 자기 이름을 공개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이 롤링의 이름에 기대지 않았더라도 꽤 승산이 있었을 것 같다. 난 추리 소설 시장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슈퍼모델 룰라 랜드리가 자기 집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고, 경찰은 나름의 수사 끝에 자살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녀의 마약 복용 전적, 양극성 장애와 역시 마약 중독자에다 폭력성향을 지닌 유명인 남자친구와의 불안정한 관계 등을 근거로. 그로부터 몇 달 뒤, 룰라의 오빠 존 브리스토가 망해가는 탐정 코모란 스트라이크를 찾아와 여동생은 살해당한 게 분명하다며 수사를 의뢰한다.
난 처음에는 디자이너 기 소메를 의심했다. 제목 때문에. 그런데 아니었다. 그 뒤로 내가 의심했던 사람들은 다 범인이 아니었다. 역시나 내가 그렇지 뭐, 추리 따위. 이야기 전개가 흥미진진했고 가독성도 좋았다. 범인은 어쩌면 전형적일 수도 있지만 난 예상을 전혀 못했기에 나름 놀랐다. 코모란의 개인사와 로빈과의 관계, 그리고 샬럿과의 이야기 등 이 책이 앞으로 시리즈로 발전하기에도 충분할 만큼 궁금한 이야기가 많았다. 확실히 롤링은 시리즈로 쓰는 게 익숙한 듯, 전작 <<캐주얼 베이컨시>>처럼 이야기를 마구 흩뿌려만 놓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롤링이 코모란 스트라이크 시리즈를 써줬으면 좋겠다.
13. 포에버(주디 블룸, 김영진 역. 창비. 2011. 268쪽)
: 청소년의 성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 출간 당시, 그리고 90년대까지도 이 책이 꽤 많은 학교에서 금서였다니 좀 의아했다. 물론 성관계에 대해 기존 청소년 소설에 비해 묘사가 꽤 길기는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캐서린이 하는 행동들은 정말 전형적인 모범생의 모습이다. 난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한 번씩 읽혀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첫눈에 반한 마이클과 처음 관계를 가지기까지의 망설임과 두려움은 사실적이었고, 관계를 가진 후 스스로 피임법을 공부하고 교육을 받는 모습 등은 진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로 모범적이었다. 솔직히 어른인 내게는 좀 시시하기도 했지만, 청소년들에게는 강력 추천이다.
14.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기자라 이즈미, 이수미 역. 은행나무. 2014. 240쪽)
: 남편과 사별한 지 7년, 데쓰코는 아직도 시아버지와 산다. 정원에 은행나무가 있는 단층집. 남편 가즈키의 소꿉친구였던 옆집 다카라, 가즈키를 동경했던 가즈키의 사촌동생 도라오, 데쓰코가 '시부'라고 부르는 시아버지 렌타로, 그리고 데쓰코의 애인 이와이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일본 소설은 감정선이 공감되지 않아 읽기 힘들다. 일본어투 번역도 거슬리고. 역자는 '시부'나 '등산녀' 등의 단어에서 자신 없어했지만 난 아들에게 조카의 죽음을 알리면서 "가즈키 씨,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번역한 게 더 이상했다. 어떤 분위기인지는 알겠고 존댓말과 정중한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고심했다는 것도 알겠는데, 우리나라 정서에는 정말 안 맞잖아. 그냥 "가즈키가 운명했어" 정도로 번역해도 되지 않았을까? 소설 전반적인 분위기도 좋았고 특히 유코의 이야기와 마지막 표제작이 정말 좋았지만 아무래도 일본 소설은 나한테 안 맞나보다.
15. 최후의 알리바이(로맹 사르두, 정미연 역. 열린책들. 2008. 440쪽)
: 마치 미드를 보는 듯한 스릴러. 한창 공사중인 고속도로 현장에서 스물네 구의 시체가 발견된다. 모두 새로 구입한 중저가 옷을 입었고, 저항의 흔적도 없이 가슴에 총을 맞고 차곡차곡 네 줄로 쌓여 있는 시체들. 뉴햄프셔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자마자 FBI가 끼어들어 엠바고를 선포하고 모든 자료를 가져가 버리고, 셰리든 총경은 이 사건을 더 파헤치기로 맘 먹는다.
꽤 잘 쓴 스릴러이다. 짜임새 있고 속도감 있는 내용. 결말도 충격적이다. 집중해서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상상할 수록 끔찍한 범죄 내용과 찜찜한 결말 때문에 한동안은 스릴러를 멀리 해야겠다 싶었다.
16.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김중혁. 문학과지성사. 2014. 420쪽)
: 경찰 출신 사립탐정 구동치는 딜리터(deleter)다. 계약을 맺은 사람의 사후에 계약 내용에 있는 물건 혹은 데이터를 말끔히 지워준다. 연예 에이전시 배동훈 사장이 죽은 후 구동치는 계약 내용에 있던 태블릿을 추적하고, 배동훈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 의심되는 가운데 태블릿을 둘러싼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서정적인 제목 때문에 집어들었는데 꽤 속도감 있고 재미있었다. 다만 별 역할 없는 캐릭터들이 좀 산만했다. 그 중 최악은 정소윤. 캐릭터 자체도 비호감이었지만 대체 왜 등장했는지 모르겠다. 악어 빌딩 사람들은 다들 꽤나 매력적이었다. 제목에 걸맞는 마지막 챕터도.
17. 테레즈 데케루(프랑수아 모리아크, 조은경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 224쪽)
: 뭐랄까, 전형적이면서도 신선한, 악녀도 성녀도 아닌, 서문에서 얘기했듯 내 모습이 들여다 보이는 여자, 테레즈.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의 당연한 기대 대로 - "둘의 재산이 하나 되는 것이 안성맞춤(48쪽)" - 베르나르 데케루와 결혼을 하지만 이 결혼이 파국을 맞으리라는 건 이미 결혼식날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파국은 테레즈의 손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더 영리하게 굴었다면, 어쩌면 그저 이 결혼을 유지하는 게 맞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그저 자신의 계획대로 행동한다. 아마도 내가 그러했을 듯이. 다른 전형적인 고전 속 기혼 여성 캐릭터처럼 그녀가 자신의 무덤 속 생활을 깨닫는 배경에는 한 남자가 있으나 그녀는 그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그를 찾아 도망가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한다.
마지막 파리 카페에서의 장면이 가장 좋았다. 구제불능인 베르나르와 당당한 테레즈, "행복한 사람처럼 혼자 웃(190쪽)"는 테레즈. 속편이 기대된다.
18. 밤의 종말(프랑수아 모리아크, 조은경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 244쪽)
: 전편의 15년 후 이야기. 테레즈는 너무나 연약해져 있었다. 심장병과 망상. 파리에서 외롭게 혼자 사는 테레즈에게 열 일곱 살이 된 마리가 찾아온다. 사실 마리는 파리에 있는 연인 조르주를 만나러 온 것. 기울어진 데케루 집안 때문에 조르주의 집안에서, 그리고 소작농 출신이라고 데케루 집안에서 둘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얘길 듣고 테레즈는 자신의 재산을 마리에게 주기로 한다.
손에 쥔 것 없이 외로움과 심장병으로 무너져 가는 테레즈가 안쓰러웠다. 뒤늦게 발현된 모성애와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 사이에 혼란스러운 테레즈. 결국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남편과 딸의 동정심에 기대야 하는 테레즈. 그런 그녀가 힘없이 얘기하는 밤의 종말은 마음 아프기만 했다.
19. 레드북(델리아 셔면 외, 송경아 역. 북스피어. 2007. 239쪽)
: 다시 쓰여진 동화들. 『그린북』을 읽을 때 같이 읽을 걸. 벌써 2년이나 지났다. 『그린북』이 동화의 밝은 부분을 보여줬다면 여기의 동화들은 모두 약간은 그로테스크하고 아슬아슬하며 칙칙하다. 『그린북』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 책이 좀 더 엄격한 것 같다. 여기서는 착하지 않으면, 똑똑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므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레고리 매과이어의 「돌아옴의 일곱 단계」- 백설공주 이 나쁜 x. 가장 좋았던 건 퍼트리샤 맥킬립의 「춤추는 열두 공주」.
20. 청춘의 문장들(김연수. 마음산책. 2004. 244쪽)
: 『청춘의 문장들+』가 나왔다는 소식을 몇 달 전에 들었는데 문득 내가 『청춘의 문장들』도 읽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부랴부랴 구입했고 이제야 읽었다. 김연수의 에세이는 위로가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지나갔어야 할 청춘의 미숙함이 왜 아직도 내게는 현재 진행형인지... 왜 이 책이 스테디셀러인지, 10년 후에 +가 왜 출간됐는지 알 것 같다.
21. 노는 인간(구경미. 열림원. 2005. 330쪽)
: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게 있다면 '노는 인간'이다. "선배 하루 일과라는 게 고작 몇 시간씩 게임하고 글 조금 쓰고 다시 게임하고 심심하면 책 읽고 그런 거(표제작. 10쪽)"에서 게임을 웹 서핑으로 치환한 그런 삶. 이 책에는 그런 삶들이 가득하다. 물론 등장인물 모두가 소위 '잉여인간'은 아니다. 직장에 다니고(「초지일관 그녀는」) 이발소도 하고(「형제 이발관」) 매일의 끼니를 마련하(「광대 버섯을 먹어라」)지만, 끊임없이 왜 사는지 고민하고 내일 뭘 먹을지 고민하지만 이런 그들의 고민이나 하는 일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뭔가를 생산해내거나 돈을 벌어들이지 못하는, 그닥 크게 평가받지 못하는 이른바 '잉여짓'인 것. 나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그들이 친근했고 부러웠다. 내가 용기를 내어 갖지 못하는 삶. 때로는 그렇게 될까봐 두렵기도 한 삶. 그러면서도 꼭 그렇게 되고 싶은 삶. 가장 재미있었던 건 「그리고 싱가포르」. 스물 아홉의 해맑은 전업주부 이야기이다. 표제작은,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덧글
벌써 11월이라니 시간 너무 빠르죠ㅠ취한배님 즐거운 11월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