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독서 목록

1. 기나긴 하루(박완서. 문학동네. 2012. 290쪽)
: 박완서 유작집. 꼭 박완서스러운 세 편의 단편과 꼭 자신 같은 작품을 골라낸 김윤식, 신경숙, 김애란의 추천 작품 세 편이 실려 있다. 이미 읽은 것도 있고 처음 읽는 것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빨갱이 바이러스>. 그리고 <닮은 방들>은 박완서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지, 새삼 신선했다.


2. 나는 세계의 배꼽이다(살바도르 달리, 이은진 역. 이마고. 2012. 465쪽)
: 달리가 서른 일곱에 쓴 자서전.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읽는 듯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비롯, 자의식 강하고 오만하면서도 여렸던 화가의 이야기가 꽤 흥미로웠지만 부분부분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다. 가장 재미있었던 건 프로이트와의 일화. 이 책을 읽고도 달리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 듯 해서 다른 책들을 더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한지혜. 실천문학사. 2010. 280쪽)
: 제목이 정말 적절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소설집. 죽지도 않은 남편을 사망신고하고 조등을 매달거나(표제작), 분명히 존재하는 노인과 아이를 찾지도 않고(<실종>), 아내의 저녁을 준비하다가 집 앞 슈퍼에 가겠다며 사라지(<당신이 그린 그림은>)기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전반적으로 안타깝고 아팠고 불행했다. 가장 좋았던 건 <그 집 앞 골목길>.


4. 그렌델(존 가드너, 김전유경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232쪽)
: 베어울프 이전의 이야기.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고 사고를 하는 이 존재를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괴물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 중 누구라도, 이 사회를 살면서 다른 사람을 안 잡아먹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불러도 될 것이다. 누구든 죄가 없는 자만이 그렌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에 이 외로운 동족에게 주어진 죽음은 차라리 자비로울 것이다.


5.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장은진. 자음과모음. 2011. 259쪽)
: 이 작가의 전작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가 생각나는 여행 소설. 옥탑방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와이에게 어느날 전기와 물 밖에 먹을 수 없다는 여자 제이가 나타나고 전기세가 부담스러웠던 가난한 와이는 부자 친구 케이의 집에 그녀를 버리러 갔다가 케이의 자살을 막고는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러 함께 여행을 떠난다. 처음엔 짜증났던 제이가 점점 가여워지다가 나중에는 도리어 내가 제이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소설 속 와이와 케이가 그러했듯. 그리고 그러한 위로는 절대 일방적이지 않다는 작가의 생각도 좋았다. 내가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를 읽고 이 작가에게 반했던 게 다시금 떠올려질 만큼. 그런데 마지막에 밝혀진 제이의 비밀은... 흠, 그럼 그동안 어떻게 한 거야?


6.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린 살라모, 빅터 피셔, 마이클 B. 프랭크 엮음, 유슬기 역. 막내집게. 2009. 224쪽)
: 마크 트웨인이 남긴 각종 잡문(?)들. 신문에 쓴 컬럼도 있고 에세이도 있으며 항의 서한도 있다. 가볍고 재밌게 읽었다. 유쾌하고 명랑했지만 한편으론 고지식하고 고루한 면도 있었던, 아이 같은 사람이었으리라 짐작되었다. 마크 트웨인의 책은 어릴 때 읽은 게 다지만 문득 다시 찾아 읽고 싶어졌다.


7. 청혼(배명훈. 문예중앙. 2013. 260쪽)
: 문체도 아름답고 내용도 좋았다. 무엇보다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화자의 목소리가 가장 좋았다.


8. 철수 사용 설명서(전석순. 민음사. 2011. 228쪽)
: 형식은 꽤 기발했지만 내용은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살기 힘든 청춘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는 좀 진부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형식면에서 그런 진부함을 극복하기는 했지만 뒷심이 좀 부족하달까.


9. 세월의 거품(보리스 비앙, 이재형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288쪽)
: 아름답고 환상적인 사랑 이야기. 인생을 건 사랑이 얼마나 삶을 피폐하게 하는지... 평생 놀고 먹을 수 있을 만큼 재산이 많았던 청년 콜랭은 운명적으로 클로에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신혼여행에서부터 불길한 징조(깨진 창문)가 보였던 그들의 삶은 클로에에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생기면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클로에를 향한 콜랭의 헌신을 상징하는 꽃과 피폐해지는 삶을 상징하는 집, 지적 허영을 조롱하는 파르트르의 책 등의 묘사가 시적이면서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10. 곡두(함정임. 열림원. 2009. 328쪽)
: 죽음에 천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들이 끊임없이 부유하는 이유는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서일까 혹은 죽음을 찾기 위해서일까. 쓸쓸하고 외로웠던, 하지만 곁에 누군가가 필요하지는 않았던 이야기들.


11. 레스토랑 체리의 계절(니콜라 바로, 전은경 역. 현대문학. 2013. 356쪽)
: 진상 독자와 사랑에 빠지는 얼빠진 편집자 이야기. 로맨틱 코미디로서는 훌륭한 이야기 전개였지만 또 그만큼 진부하기도 했다. 어쨌든 내게는 짜증나고 어이없는 여주인공이 가장 인상깊었다. 책이라고는 평생 요리책 외엔 읽지도 않다가 남자친구에게 제대로 뒤통수 맞은 날 우연히 혹은 운명적으로 들어간 서점에서 발견한 책이 자신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자신과 똑닮은 여주인공의 이야기라는 걸 알았다면 나 또한 출판사와 작가에게 편지 정도는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한 행동들은 진짜 진상. 그나마 여주인공의 친구가 내 마음을 많이 대변해 줘서 뒷골 안 잡을 수 있었다.


12. 채털리 부인의 연인 1, 2(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최희섭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372쪽, 368쪽)
: 예상보다 꽤 노골적이었던 작품. 도리스 레싱의 해설이 좋긴 했지만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어서 아쉬웠다. 읽으면서 든 의문은, 작품에서의 사투리를 번역할 때 과연 번역자는 어떤 지방 사투리를 선택할 지 어떻게 결정할까 하는 것. 난 충청도 사투리가 꽤 익숙한 편이지만 작품 속 멜로즈의 충청도 사투리는 자꾸만 이물감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다른 지방 사투리로 했다고 해서 덜 이물스러웠을까 생각하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성에 관한 저자의 생각에는 일부 동의하고 일부 반대하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시대를 생각하면 저자가 기대고 싶었던 인간애에 나 또한 크게 기대고 싶다.


13. 정크노트(명지현. 문학동네. 2009. 270쪽)
: 중학생 호준이는 어느 날 마을에 슬그머니 나타나 언덕 집에 사는 아저씨의 온실 일을 용돈벌이 삼아 도와주게 된다. 아저씨의 온실 속에서 자라는 건 양귀비. 호준이는 양귀비를 잘 키워서 순도 높은 아편을 얻는 데 온 정성을 쏟는다.

재료가 아편일 뿐, 이 책은 호준이의 성장기이다. 엄마는 도망가고 아빠는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병원에 있고, 암굴같은 집에서 할머니 밥을 먹으며 그럭저럭 학교 다니고는 있지만 동네 노는 형들에게 껍데기뿐인 컴퓨터를 강매당하고 그 할부를 갚고 있는 비루한 현실에서 호준이가 일궈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 화려한 꽃들 뿐. 어른들은 모두 자기만의 중독에 빠져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호준이가 피워낸 꽃들은 그 선명함만큼 기특하기까지 했다.


14. 꽃으로 말해줘(버네사 디펜보, 이진 역. 노블마인. 2011. 406쪽)
: 블로그 이웃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는데, 꽃만큼 예쁜 이야기였다. 고아 빅토리아는 여러 차례 입양되지만 번번이 제대로 된 입양 부모를 만나지 못하고 파양된다. 계속된 파양으로 비뚤어진 성격이 된 그녀는 열 여덟살이 되자 시설에서도 쫓겨나 노숙자로 전락한다. 사실 그녀에겐 딱 한 번의 아름다웠던 기억이 있고, 그 추억을 만들어 준 엘리자베스에게서 배운 꽃말을 늘 간직하며 꽃에 집착하는데, 꽃에 대한 지식을 밑천 삼아 생활을 개척해 나간다.

해피엔딩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헤매는 빅토리아가, 서툰 빅토리아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파란 방에 자물쇠를 걸고 숨어버리는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도, 또 나라도 그녀처럼 굴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마음으로 빅토리아에게 손을 내밀라고, 먼저 내밀지 못하겠으면 저쪽에서 내민 손 잡기라도 하라고 얘기하게 되었던, 읽는 내내 품에 안긴 커다랗고 무거운 꽃다발 같았던 소설.


15. 원더보이(김연수. 문학동네. 2012. 322쪽)
: 김연수의 사랑 얘기는 항상 아프다. 사랑이 안 아픈 적 있었냐고 한다면 대답할 수는 없다. 이 책을 읽고도 몇 년 전 그의 책을 읽고 했던 말을 또 해야겠다. 그냥도 아픈 사랑인데 왜 하필 그런 시대인가. 시대가 그러할진대, 머리 속 재능 따윈 차라리 저주일 뿐.

그런데, 이 이야긴 과연 해피엔딩인가? 정훈이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을 지금이 그 때와는 다르다고 하나, 과연 그 때보다 낫긴 한 걸까?


16. 목요일이었던 남자(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김성중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222쪽)
: 뻔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독특하고 재미있었다. 유난히 노을이 붉던 어느 날 시인 사임은 자신이 무정부주의자라 주장하는 그레고리를 만나 비밀회의에 가게 되고, 사실은 무정부주의자들을 추적하는 비밀경찰이었던 사임은 이 비밀단체의 지부 대표인 '목요일'로 선출되어 이 단체의 두목인 일요일을 만나러 간다.

이 작품에 대해, 그리고 '일요일'의 상징성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난무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작가가 이야기했듯 부제(악몽)에 충실히 입각해서 읽어나가는 것도 꽤 좋았다. 환상적이고도 시적인 묘사는 정말 꿈 속인양 충분히 몽환적이었고, 마지막 장면 그레고리 동생의 미소도 충분히 아름다웠으므로.


17. 일곱 개의 고양이 눈(최제훈. 자음과모음. 2011. 384쪽)
: 이 작가의 전작 『퀴르발 남작의 성』같은 이야길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첫 챕터는 추리 소설 같았고 두 번째 챕터는 첫 챕터를 설명해 주리라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했을 뿐. 세 번째 챕터부터는 전에 읽은 김하서의 『레몽 뚜 장의 상상력 발전소』가 떠올랐다. 아이디어도 기발하고 흡입력도 있었지만 좀 산만한 느낌. 기대 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작가의 다음 작품도 읽을 생각이다.


18. 악어와 레슬링하기(캐런 러셀, 정윤희 역. 21세기북스. 2012. 404쪽)
: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환상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우화, 혹은 그 무엇보다 잔인한 현실. 이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미노타우로스와 늑대 인간, 유령 애인은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상징일 수도 있지만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지만 되어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화자들. 갓 태어난 아기 바다거북 같은 그들이 정말 원하는 건, 바다가 아닌 차라리 망태 속일지도.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4/05/02 14:37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2)
Commented by 메롱씨 at 2014/05/03 00:23
13번과 14번 재미있게 읽었어요ㅎ 꽃 관련 책 사는걸 좋아해서 14번은 갖고 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어볼까봐요ㅎ

이번 리뷰에는 궁금해지는 책들이 많네요^^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4/05/07 15:39
13번 결론 꽤 파격적이지 않나요? 전 딱 중2스러워서 귀엽기도 하고 괜히 뒷탈이 걱정되기도 하고 그렇더라구요ㅋㅋㅋ 이번 달에는 저도 대체로 다 재미있고 만족스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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