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독서 목록

1. 열 일곱 제나(조앤 바우어, 이순영 역. 꽃삽. 2011. 263쪽)
: 구두 판매에 소질이 있고 자기 일을 사랑하는 고등학생 제나의 성장기. 작은 모험은 덤이다. 비현실적인 만남과 모험의 시작, 그리고 꽤나 현실적인 결론 둘 다 과하지 않아 좋았다.


2.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백영옥. 자음과모음. 2012. 432쪽)
: 트위터를 통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 칙릿 특유의 속도감과 흡입력은 있었지만 역시 딱히 인상이 깊게 남지는 않는 소설이었다. 막 실연당한 사람이 읽는다면 어느 정도는 위로가 될 지도. 그러나 난 '~로써'와 '~로서'를 구분 못한 편집자가 미울 뿐이고. 그래도 <슬픔이여 안녕>과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고 싶어진 건 득.


3. 사이더 하우스 1, 2(존 어빙, 민승남 역. 문학동네. 2008. 481쪽, 550쪽)
: 지금까지 읽은 존 어빙의 책들 중 가장 좋았다. 아마 고아가 주인공임에도 이전에 내가 읽었던 작품들에서만큼의 불행은 없었기 때문일지도. 끝까지 나쁜 사람도, 끌까지 지켜야 할 규칙도 없는 삶. 결국 삶의 규칙이란 사이더 하우스 벽에 붙어 있는 종이조각과도 같은 것이다. 꼭 지켜야 할 최소한일지는 모르겠지만 읽지 못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랴. 그걸 지켜야만 행복한 것도, 어긴다고 불행해지는 것도 아닌데 뭐.


4.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로버트 뉴턴 펙, 김옥수 역. 사계절. 1994. 182쪽)
: 슬픈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제목만 보고서 해맑게 선택한 책. 1920년대 가난하고 검소한 셰이커 교도 부모 밑에서 작은 농장의 유일한 아들로서 자란 저자의 자전 소설이다. 어릴 때 읽었던 ABE 전집 중 한 권이 생각났다. 제목도 어렴풋하긴 하지만, 제목이나 등장인물의 이름을 얘기하면 이 책에 대해서도 스포일러가 되니 패스. 그 책보다 이 책이 더 밝았고 덜 무거웠지만, 산다는 건 늘 즐거울 수만은 없는 일이고 때로는 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도, 힘든 결정도 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그걸 깨달은 소년의 성장기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날 짠하게 했다. 아마 이 저자의 다음 책은 한동안은 못 읽을 것 같다.


5. 개는 농담을 하지 않는다(루이스 새커, 장현주 역. 돌베개. 2011. 236쪽)
: 스탠딩 코미디언이 꿈이라 늘 입에 농담을 달고 사는 게리는 학교에서 얼간이로 불린다. 친구들은 그의 농담을 시시껄렁한 헛소리일 뿐,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 학교에서 장기자랑 대회가 열리게 되고, 게리는 참가 신청을 하지만 금세 회의감에 빠진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난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이 어린 아이조차 자기 길을 잘 알고 확실히 가는데, 하는 생각에 우울했었지만 곧 게리에 동화되어서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유머는 오직 인간만이 누릴 수 있다는 얘기 때문에.


6. 컨설턴트(임성순. 은행나무. 2010. 295쪽)
: 세상에는 많은 죽음이 있다. 누군가가 죽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죽음은 자연사, 사고사, 자살 등일 것이다. 그런데 살인이 아닌, 이런 '자연스러운' 죽음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설계된 거였다면? 이 책은 그런 시나리오를 쓰는 컨설턴트의 이야기이다.

우연히(?) '회사'에 의해 선택된 '나'. 처음에는 순진하게도 추리소설 작가 노릇을 하는 줄 알고 인물의 죽음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고민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화자는 곧 이 일은 세상의 구조조정이라며 덤덤히 일 자체로서 받아들인다, 모든 사회인들이 그러하듯.

이야기 자체는 재미있었다. 비록 전개가 전제만큼 신선하지는 않았지만. 특히 결론을 맺기 위해 화자를 아프리카로 보낸 건, 그리고 거기서 그 남자를 만나게 한 건 너무 작위적이었다. 하지만 작가가 얘기하고자 했던 것 - 누군가를 직접 죽이지 않더라도 그가 살 수 없도록 삶을 조인다면 그것 또한 살인이라는 - 에 대해서는 오래 생각했다. 나는 이제껏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니 그저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질렀을까? 이 작가의 다음 책이, 특히 단편이 기대된다.


7. 우울의 심리학(수 앳킨슨, 김상문 역. 소울. 2010. 330쪽)
: 우울증을 앓았던 저자가 얘기해 주는 우울증 극복 방법. 저자는 우울증을 이겨내는 과정을 높은 암벽으로의 긴 '등반'으로 표현하며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저자가 직접 겪었고 또 아직도 가끔은 겪는 병이라서 정말 세심하게 우울증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우울증은 환자 자신이 하기 나름'이라는 얘기에 대한 부정. 우울증에 걸린 것도 극복하지 못하는 것도 환자의 나약함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이런 무신경한 말들에 상처받았던 환자라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정말 큰 힘을 얻을 것 같다. 다만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종종 튀어나오던 '신께서도 용서하셨으므로', '신이 우리를 사랑하므로' 같은 얘기. 나 같은 유신론자도 조금은 거부감이 드는데, 무신론자 입장에서는 더 우울해질 듯.


8. 에코와 소름 마법사 1,2(발터 뫼르스, 이광일 역. 들녘. 2008. 320쪽, 288쪽)
: 이번에는 '코양이'다. 고양이가 아니다. 차모니아에만 있는 말하는 코양이. 차모니아의 병에 찌든 도시 슬레트바야에서 같이 살던 할머니가 죽고 거리로 내몰린 코양이 에코는 굶주린 채 도시의 지배자 소름마법사와 마주치고, 연금술의 완성을 위해 코양이 기름이 꼭 필요했던 소름마법사가 기름진 음식들을 무한정 제공할 테니 자신의 성에서 보름까지 같이 살고 후에 코양이 기름을 주라는 제안을 하자 덥석 받아들인다.

차모니아 대륙 이야기 답게 재미있었다. 이전에 읽었던 <꿈꾸는 책들의 도시>나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 등에서 만났던 에피소드들이 슬쩍 언급된 걸 발견하는 것도 즐거웠다. 차모니아 시리즈에서 만났던 다른 주인공들의 경우 내가 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진 않았지만 이 책에서는 진짜 에코가 되고 싶었다. 모든 언어를 다 아는 고양이라니... 이제 국내에 출간된 발터 뫼르스의 책은 다 읽었다. 아쉽다.


9. 변두리 괴수전(이지월. 민음사. 2010. 236쪽)
: 변두리 도시의 고등학생들의 허세 반항기라고 하면 이 작품을 너무 폄훼하는 게 될까? 작품 해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책 뒤의 해설에서는 그럴싸한 해석을 해준 듯 했다. 다만 난 초반부터 어설프게 무협지를 흉내낸 대화들이 거슬려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용 전개 또한 너무 식상했다. 뒷부분의 나름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에피소드는, 사실 나 고등학교 때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던 만큼 최대한 맘을 열고 공감해보려 했으나 시시한 마무리에 맥이 빠졌다. 물론 현실에서도 결과는 시시했고, 그런 면에서 작가 또한 어쩔 수 없었으리라 생각했지만 기왕 무협지 흉내낸 거, 결론이 좀 황당하더라도 무협지처럼 장대했다면 난 작가의 유치한 대화체를 인정해 주었을 지도 모르는데.


10. 빅 픽처(더글라스 케네디, 조동섭 역. 밝은세상. 2010. 492쪽)
: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은 그 명성(?)에 비해 초라한 것 같다. 처음 읽었는데, 그저 그랬다. 그럭저럭 만들어진 미드 한 시즌 정도 보고난 느낌. 시간 때우기 용으로는 괜찮을 듯.


11. 표백(장강명. 한겨레출판. 2011. 349쪽)
: 1978년 이후 출생자는 모두 표백세대이다. 세상은 '빅 그레이트 화이트 월드'. 너무 완벽해서 더 보탤 것이 없고, 모든 것을 흰 색으로 탈색시켜버린다. 이전세대에게 모든 위대한 발명과 발견과 성취는 모두 빼앗겨버린 표백세대가 할 수 있는 건 순응, 소극적 반항 그리고 저항. 저항의 방법으로 '자살 선언'을 제시한 세연. 책에는 순응을 택한 화자와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세연의 목소리가 교차된다. 너무도 잘났던, 예쁘고 똑똑했던 세연이 삼성전자 입사라는 순응의 정점으로 보이는 성취를 일구어낸 직후 50cm의 연못물에 익사할 때까지만 해도 난 세연의 목소리를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들이 왜 뜬금없이 튀어나오는지... 그게 세연의 목소리인 걸 알았을 때에도 사실 크게 공감이 되거나 재미있지는 않았다. 화자의 이야기는 시시했어도 그랬기에 더더욱 나같은 凡人에게는 공감이 됐지만 세연의 이야기는 안타깝기만 했다. 그렇게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다면 살아남았어야지. 어떤 행동도 살아남기보다 더 길게, 강하지는 않을지라도 길게 이야기를 남기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12. 아령하는 밤(강영숙. 창비. 2011. 241쪽)
: 실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도시의 불안들. 짐작 가능하기도 하고(<문래에서>, 표제작 등) 실체가 분명해도 이미 지났기도 하지만 (<라디오와 강>,<재해지역투어버스>) 작품들 밑에는 늘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외부로부터의 공포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화자들은 이 공포를 피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실체에 다가서고자 한다. 아마 이게 도시인들이 실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의인걸까? 들여다보는 것. 피비린내의 근원지를 찾아가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고(<문래에서>),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난 곳의 투어버스를 타고(<재해지역투어버스>), 동료가 죽은 건물에 들어가고(<라디오와 강>). 그래, 뭘 할 수 있겠어. 들여다보고 잊지 않는 것. 머리 속 창고 한 군데를 비워 그 기억으로 채워두는 것(<프리퍄트 창고>), 그것만으로도 쉽지 않겠지. 그것만이라도 해야하는 거겠지.


13. 꼴찌들이 떴다(양호문. 비룡소. 2008. 345쪽)
: 춘천에서 공고를 다니는 3학년생들이 실습을 나가고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성장하는 이야기. 디테일이 너무나 올드해서 읽는 내내 한숨이 나왔다. 내가 읽어도 이럴진대 이 책의 진짜 타겟독자인 청소년들이 읽으면 어떨까. 청소년 이야기라고 다 청소년 소설은 아니다. 꼰대가 쓰고 꼰대가 심사해서 상주니 이런 책이 나오지. 순진한 결말은 맘에 들었다.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3/04/03 14:01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6)
Commented by 메롱씨 at 2013/04/03 18:51
전 미드를 안봐서 그런가 빅픽처 재밌게 봤어요 회사 그만두고 좋아하는 일 찾아볼까 고민하던 때라 더 그랬는지도ㅎ 근데 더글러스 케네디는 머리로 글쓰는 사람 같더라구요..막 열심히 공부해서 쓰는 것 같은?ㅎ

3월에도 책 많이 읽으셨네요 사다리님 리뷰 늘 잘 보고 있어요^^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3/04/05 15:36
제 생각에도 더글러스 케네디가 자료조사는 참 성실히 하는 것 같아요ㅋㅋㅋ 근데 스토리가 신선하지는 않더라구요. 다른 작품들도 왠지 비슷할 거 같구요^^

저도 메롱씨님 포스팅 늘 잘 읽고 있어요. 덧글을 매번 달지는 못하지만요...^^
Commented by 지노 at 2013/04/03 22:34
사다리 님의 다독이 부럽습니다. 강영숙 씨의 소설을 좋아하지만, <아령하는밤>은 깜빡했어요. 리뷰 잘 보고 갑니다. (/^^)/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3/04/05 15:35
전 강영숙 작가의 책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앞으로도 믿고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지노님의 글솜씨가 부럽습니당^^
Commented by 새날 at 2013/04/04 11:32
생존신고하러 왔습니다 달을향한사다리님, 잘 계시지요?
저 중에 빅픽쳐 하나 읽었군요. 시간 때우기용으로 꽤나 재밌던데요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13/04/05 15:37
잘 지내고 있습니당ㅋㅋㅋ 새날님 포스팅도 잘 보고 있어요. 덧글은 못 달았지만요^^

더글러스 케네디는 진짜 시간 때우기용인 듯 해요. 왠지 다른 작품들도 다 그럴 것 같아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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