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보다 해먹 – 독재자와 해먹 Yujin's Book Story



남미의 한 나라가 있고, 여기에는 전 대통령을 암살하고 절대 권력을 손에 쥔 독재자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수도의 광장에서 대중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거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리고 그 후, 무한 복제되는 닮은 꼴들의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독재자는 자신과 꼭 닮은 사람을 찾아 교육을 시켜 완벽한 자신의 닮은 꼴을 만들어내고는 유럽으로 탈출(?)한다. 그는 원격으로 닮은 꼴을 조종함으로써 자신의 나라를 통치하며 유럽을 유랑한다. 그런데 이 닮은 꼴은 얼마 후 닮은 꼴 노릇이 지겨워진다. 게다가 자신에게 놀라운 연기력이 있다는 확신까지 갖게 된 그는 다시 자신과 꼭 닮은 사람을 찾아 교육을 시켜 허깨비로 세워 놓고 헐리우드를 향해 탈출한다. 이렇게 이 조그만 나라에는 닮은 꼴들의 탱고가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이게 다가 아니다. 처음 이 책을 펼쳐서 읽어 나갈 땐 그저 광장공포증에 걸린 독재자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이 소설의 주제일 거라 생각했지만, 내가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발견한 건 그보다 훨씬 더 매혹적인 것이었다.

이 소설에는 어느 순간부터 작가가 직접 등장한다. 그렇다고 여타 다른 전지적 작가 시점의 풍자소설처럼 작가의 목소리로 직접 비아냥거리는 걸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작가는 그저 조용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얘기를 들려준다. 자기가 어떻게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는지, 소설의 배경이 되는 도시 이름은 어떻게 지었는지, 독재자와 그 닮은 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또 다름 삶들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내가 정말 좋았던 건 작가의 얘기들이다. 비록 이 얘기들에 허구가 더 많이 있더라도, 아니 허구가 전부일지라도 난 작가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맘이 편안해졌고 소설 속 다른 인생들에 대해 더 큰 애정이 솟아나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작가의 얘기들이 바로 이 소설의 제목이 “독재자”가 아닌 “독재자와 해먹”인 이유라는 걸 알았다. 초여름 바다 근처 숲에서 해먹을 매달고 누워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듣는 것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의 이야기들. 난 ‘독재자’때문에 이 책을 선택했지만, 책을 읽고나니 ‘해먹’이 더 좋았다.

덧글

  • 대쪽 2008/06/09 13:06 #

    책 표지부터가 관심을 끌기에 딱 좋네요.
    리뷰의 첫 부분만 읽었을 땐, 과연 이 책은 어떤 의도일까가 궁금했는데, 리뷰의 끝까지 읽고 나니 작가의 의도를 조금은 알 것 같은...
    유진님의 리뷰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어떠한 책이든 당장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이 책도 보관함에 잘 담아둬야 겠어요.
  • 달을향한사다리 2008/06/12 16:11 #

    칭찬 감사합니다^^ 표지는 사실 책의 절반만 반영한다고 해야하나, 뭐 그래요. 전 책 읽다가 표지 여러 번 다시 봤어요. 왜 이 책을 이런 표지로 했나, 표지 디자이너는 책을 앞 한두 챕터만 읽었나, 싶더라구요^^
  • anita 2008/06/09 21:01 #

    바닷 바람에 흔들리는 '해먹', 제 로망중의 하나라지요^^;
    조용히 조곤조곤 거리는 작가의 이야기들을 듣기 위해서 얘도 장바구니로~~
  • 달을향한사다리 2008/06/12 16:12 #

    그러게요. 바닷 바람에 흔들리는 해먹 안에 누워서,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다른 책들이랑 먹을 거 잔뜩 쌓아두고 책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 orora 2008/06/10 00:55 #

    해먹에 길게 누워서 책을 읽고 싶네요..

    책속에서 만나는 또다른 인생...
    내가 근접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외경을 느끼곤합니다
  • 달을향한사다리 2008/06/12 16:14 #

    저도 이 책에서 작가가 비행기가 착륙하는 시점에 했던 많은 생각들을 읽으며 역시 글을 쓰며 살아간다는 건 일반인들과는 다른 세계를 본다는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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