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독서 목록 Yujin's Book Story

1. 워터 댄서(타네히시 코츠, 강동혁 역. 다산책방. 2020. 551쪽)
: 마술적 사실주의가 가미된 19세기 노예 해방 이야기. 버지니아 주에 사는 하이람은 비상한 기억력을 지니고 있다. 어릴 때 물항아리를 들고 아름답게 춤을 추던 엄마와 헤어지게 된 후 생부인 백인 주인의 저택에 들어가 배다른 형의 시중을 들게 되지만 곧 환멸을 느낀다.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자신에게 '인도'의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고, 사랑하는 소피아와 함께 도망을 계획하지만 같은 노예 출신의 흑인에게 배신당한다.

어릴 때 읽었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그야말로 그냥 모험담, 동화였다. 이 책에는 노예제도의 현실이 담겨 있다. 물론 실상은 더 끔찍했겠지. 어쩌면 서술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나이먹고 비참함이 뭔지 육체적 아픔이 어떤지, 마음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서 더 강하게 와닿는 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라면 소피아가 '대니얼 삼촌'의 집에 일요일마다 차려 입고 가야하는 게 어떤 건지 깊이 있게 느끼지 못했을테지.

하이람이 가진 '인도'의 능력을 발휘하는 부분이 의외로 상당히 담담하게 그려졌다. 아님 내가 그렇게 받아들였거나. 사실 읽기 전에 기대했던 만큼 아름답거나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예제도 피해자들과 방관자, 조력자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2. 우리 사이의 그녀(그리어 헨드릭스, 세라 페카넨, 강선재 역. 솟을북. 2018. 472쪽)
: 버네사는 얼마 전 이혼했다. 완벽한 남편 리처드는 역시 아름답고 어린 여자와 약혼을 했고, 버네사는 이모 집에 얹혀 살며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지만, 전남편의 약혼녀 주위를 맴도는 짓을 멈출 수가 없다. 버네사와 어린 약혼녀 넬리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18챕터 195페이지에 반전이 있다. 장르 문학을 많이 읽고 추리도 잘 하는 사람이라면 짐작했을 수도 있겠지만 난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이야기는 주로 심리 묘사에 치중하기 때문에 난 각각 - 이혼 후 망가진 여자와 결혼 적 불안과 행복을 동시에 느끼는 여자 - 의 심리를 따라가느라 반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교묘한 가스라이팅에 계속 신경이 곤두서서... 암튼 재밌게 몰입해서 읽었다. 악인의 마지막이 좀 싱겁긴 하지만.


3. 마마 탄두리(에르네스트 판 테르 크바스트, 지명숙 역. 비채. 2019. 272쪽)
: 에세이 같은 소설. 자전적 소설이라지만 허구는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인도에서 여행가방 두 개에 귀금속을 채워들고 네덜란드에 간호사일을 하러 온 엄마. 몇 년 뒤 인턴이던 아빠에게서 청혼을 받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의 말을 들어준 엄마.

책 표지의 광고문처럼 포복절도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민폐 중 최고다. 말 안 듣는 자식들에게 밀방망이를 휘두르고 물건값을 루피로 환산해서 깎는 건 귀여운 정도. 지적장애인인 화자의 큰 형으로 발급받은, 공공기관에만 해당되는 장애인 보호자 동행권을 이용해서 프랑스까지 공짜로 여행하고 아들을 휠체어에 태워 신체장애인 흉내를 내 새치기하고... 솔직히 나라면 감당 못 할 듯. 하지만 늘 그렇듯 이 모든 관찰에는 애정이 깔려 있다.

마마에 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인도의 친척들과 네덜란드의 친척들 이야기도 잘 섞여있다. 사실 마마는 감당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이 좋았던 건 차분하고 촉촉한 문체 때문이었다. 역자의 역량이었는지 원서가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역자가 형용사를 신경써서 고른 흔적은 보인다. 어쨌든 깊은 생각없이 편안하게 읽었다. 하지만 2권이 나와도 읽지는 않을 것 같다.


4. 데스 머신(C.E. 귀몽 외 저, 라이언 노스 외 엮음, 변용란 역. 문학수첩. 2015. 582쪽)
: 소량의 혈액이면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를 알려주는 기계가 있다. 이 책은 이 기계에 대한 34명의 작가들의 상상을 보여준다. 모든 작품이 다 재밌지는 않았다. 이 흥미진진한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지루해질 수 있다니, 싶은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재미있었고 가벼운 작품들도 있었지만 무게감있게 풀어낸 작품들도 꽤 있었다. 특히 「굶주림」은 수작.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갖다 탈진」은 재치있었고 나 자신의 고정관념을 반성했다. 물론 대전제가 가상이긴 했지만. 「과다출혈」은 꽤 신박했고 응축적이었다. 단편의 정석.


5. 제레나폴리스(조선수. 솔. 2021. 238쪽)
: 6편의 단편. 일상 속을 헤집는 미묘한 거슬림들. 이물감을 극복하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사람들. 첫 작품이 흥미로워서 열심히 읽었고 나쁘지 않았다. 약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비참함을 대놓고 드러낼 필요는 없다. 그러지 않아도 읽는 사람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기에.


6. 열세 번째 시간(리처드 도이치, 남명성 역. 시작. 2010. 485쪽)
: 출장에서 돌아와 사랑하는 아내 메리와 마주한 닉. 메리는 저녁에 닉이 싫어하는 부부와 약속을 잡았다고 한다. 닉은 메리와 말다툼을 했고 하루종일 재택근무를 하다 내려가보니 메리가 총에 맞아 피웅덩이 속에 누워있다. 닉은 용의자로 체포되고 한참 심문을 받던 중 수상한 남자가 들어와 봉투를 주며 아내를 구하라고 한다.

재밌었다. 이제까지의 시간 여행 이야기의 모순점을 가볍게 무시해서 내 머릿속을 덜 복잡하게 만들어주었다. 난 늘 시간 여행 이야기에서 '과거의 나'는 어떻게 하나 하는 게 의문이었는데. 닉은 그냥 깔끔하게 이동한다. 정시마다 두 시간 전으로. 설정 덕분에 이야기가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효과가 있고, 주인공도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씩 드러나는 음모도 꽤 흥미롭다. 이 작가를 기억해둬야 겠다.


7. 바람의 잔해를 줍다(제스민 워드, 황근하 역. 은행나무. 2012. 389쪽)
: 미시시피 연안의 가난한 마을 부아 소바주. 열 다섯 살 흑인 소녀 에쉬는 숲 가까이의 판잣집에서 아빠, 랜들 오빠, 스키타 오빠, 남동생 주니어 그리고 무시로 드나드는 오빠들의 친구들과 함께 지낸다. 스키타 오빠는 투견을 위해 키우는 암컷 강아지 차이나를 애지중지하고, 랜들 오빠는 농구로 성공하고 싶어한다. 에쉬는 매니 오빠를 좋아하지만 매니는 여자친구가 따로 있으면서도 에쉬와 성관계만 갖고 싶어한다.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오기 12일 전, 아빠는 집 곳곳을 손보지만 주위에서는 이전 몇 년 동안 그랬듯 그냥 비바람만 좀 불고 지나갈 것이라 한다.

집안의 유일한 여성으로 산다는 건... 거절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쉬운 에쉬. 난 에쉬가 좀더 그악스러워지길 바랐다. 아무도 에쉬를 돌보지 않으니까. 스키타가 임신한 차이나를 돌보듯 누군가 에쉬를 돌봐준다면... 그래서 난 더더욱 차이나가 출산 후 덜 회복된 몸으로라도 킬로를 이기길 바랐다. 그래야 에쉬나 매니를 이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에쉬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는 게 아닐까? 새끼를 품은 어미라서가 아니라 더 사랑하는 쪽이어서. 사랑은 그 어떤 요소보다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이다.

살아남는 게 다가 아니다. 살아남음은 시작일 뿐이다. 이제부터 헤쳐나가야 할 모든 일들의 시작. 기다림도 그 중 하나겠지. 하지만 난 왠지 에쉬의 마지막 말이 너무나 공허했다. 헛된 희망 같아서.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8. 라우라 화이트가 사라진 밤(파시 일마리 야스켈라이넨, 김미란 역. 북로그. 2017. 367쪽)
: 작가 지망생이지만 고향에서 임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엘라. 그녀의 고향 래빗백은 위대한 문호 라우라 화이트의 고향이기도 하다. 엘라는 숙제로 내준 『죄와 벌』에 관한 에세이를 읽다가 자신이 알던 내용이 아님을 알고 도서관을 방문하고, 사서의 수상쩍은 행동을 목격한다. 지역 신문에 실린 엘라의 습작 단편 덕분에 엘라는 라우라 화이트의 절대적인 지지와 총애를 받는 '래빗백 문학회'의 열 번째 회원이 되고, 파티가 열리던 밤 라우라 화이트가 사라진다.

처음엔 타겟 독자층이 의문이었다. 청소년 대상이라기엔 어둡고 성인 대상이라기엔 유치해서. 그러다 성인 대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마음을 좀 열고 읽어 볼까 했지만 등장인물 중에 매력적인 캐릭터가 한 명도 없었다. 사실 초반에 엘라가 도스토옙스키의 책 내용이 확실하지 않다고 바로 지도교수한테 쪼르르 전화하는 데서 인물에 흥미가 확 떨어졌다. 작가지망생이 도스토옙스키를 안 읽어?

하지만 이 책은 엘라 자신이나 라우라 화이트의 실종 자체보다는 래빗백 문학회 회원들의 마음 속 심연을 들여다보는 데에 초점을 맞춰 읽어나가야 한다. 그걸 깨닿는 순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어쩌면 엘라가 말한 "핀란드 문학의 현실적인 전통에 따라 제대로 된 심리소설을 쓰고 싶었다(347쪽)"는 말이 이 책의 집필의도인지도. 전반적으로 어두웠고 드러난 진실도 허무했다.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9. 뜀뛰는 개구리(마크 트웨인, 김소연 역. 예문. 2005. 375쪽)
: 단편집. 저자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가 가득하다. 깔깔보다는 피식 정도. 그래도 읽다보면 스며든다. 제일 웃겼던 건 「보험사 사장님께 묻겠습니다」. "강도의 화를 돋워서 입은 피해와 구분"(96쪽)해야 한다는 말에 빵 터졌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해골들의 행진」.


10. 장미의 이름은 장미(은희경. 문학동네. 2022. 256쪽)
: 낯선 땅에서의 생활들. 연작 소설들이라지만 하나하나 단편으로만 읽어도 좋다. 최근 몇 년 간 읽었던 이 작가의 소설들 중 가장 괜찮았다. 좋아했던 작가가 꼰대스러워지고 식상해져서 슬펐는데 이 작품들을 읽고 조금 나아졌다.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는 특히 작가의 예전 단편들에서 보였던 젊은 여성의 심리에 대한 통찰이 보여서 좋았다. 그래도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11. 슈퍼 히어로의 단식법(샘 J. 밀러, 이윤진 역. 열린책들. 2021. 454쪽)
: SF같지만 아니다. 아주 현실적이다. 맷은 게이이다. 록밴드를 하는 누나는 얼마전 가출했고 돼지고기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는 늘 피곤하다. 맷은 자신의 몸, 집, 이름까지 뭐 하나 맘에 드는 게 없다. 누나의 가출에 학교 축구부 스타 타리크가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타리크를 포함한 3명의 무리에게 괴롭힘 당하는 처지이다. 맷은 자신이 유일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몸을 통제하고자 극단적으로 굶기 시작하고, 감각은 점차 예민해진다.

맷에게 일어나는 감각의 향연들이 모두 진짜이기를 바랐다. 역자가 얘기했듯 이 모든 게 현실인지 상상인지 작가는 말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맷의 목소리로 전개되고, 난 그의 단식을 지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의 초감각을 이용해 상황을 정리할 때만큼은 맷을 응원할 수 밖에 없었다. 엔딩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었다. 그냥도 답답한 청소년기, 모든 게 숨막히는 듯한 상황에서 어쩌면 맷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걸 해야만 했을 거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인다.

현실적이지만 무겁지만은 않아서 좋았다. 해야할 말들을 모두 하면서도 유쾌할 수 있는 것, 진짜 부러운 능력이다.


12. 완전한 행복(정유정. 은행나무. 2021. 522쪽)


13. 기억되지 않는 여자, 에디 라뤼(V.E. 슈와브, 황성연 역. 뒤란. 2021. 705쪽)


14.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김희선. 민음사. 2021. 292쪽)
: 한때는 광산 작업으로 활발했지만 이제는 황량해진 극동리. 특이한 토양 때문에 횡한 벌판이 마치 화성처럼 보이는 이 곳에서 화성을 배경으로 하는 SF영화가 한창 촬영중이다. 게다가 곧 신재생에너지발전소도 들어온다고 한다. 이에 관해 기사를 쓰고 있던 기자 김영주의 눈 앞에서 극동리 주민이자 발전소 건립을 반대해 온 노인이 스스로 머리를 드릴로 뚫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설 본문에서도 언급되지만, 유명 SF영화와 내용이 같다. 그게 너무 뻔해서 안타까웠다. 이 작가 꽤 좋아하는데... 잘 쓰는 작가라서 내용이 매끄럽게 잘 흘러가고 마치 그 영화의 한국 버전을 보는 듯하지만 내용면에서 너무 예상대로 흘러갔다. 특히 결말이.


15. 클레이의 다리(마커스 주삭, 정영목 역. 문학동네. 2021. 743쪽)
: 던바 보이의 첫째 매슈는 오래전 아버지가 살았던 집으로 가서 'TW영감'을 마당에서 파낸다. 늙은 영감을 파내기 위해 마당을 뒤지다가 오래된 개의 해골과 뱀의 뼈도 파냈다. 프롤로그를 읽으며, 왜 클레이가 아니라 매슈가 영감을 파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사실, TW영감은 중요하지 않다. (오래된 타자기일 뿐). 다섯 명의 던바 보이 매슈, 로리, 헨리, 클레이, 토미. 클레이는 육상 훈련을 위해 로리, 토미와 강아지 로지를 데리고 나갔고 매슈와 헨리도 집에 없는 사이 '살인범'이 집에 돌아온다. 가장 먼저 노새 아킬레우스와 마주친 그는 차례로 금붕어 아가멤논과 고양이 헥토르, 비둘기 텔레마코스와 만나고 결국 다섯 던바 보이와 얼굴을 맞댄다. 자신이 사는 곳 근처에 비가 오기 전에 다리를 놓아야하니 도와달라는 그의 말에 모두 고개를 젓지만 그날 밤 클레이는 '살인범'의 주소가 적힌, 매슈가 버린 쪽지를 찾는다.

이 작가의 작품 중 『책도둑』을 가장 먼저 읽었고 그 뒤로 간간이 그 전에 이미 발표했던 작품들을 읽어왔기에 이 작품이 오랜만에 쓰인 장편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겐 『책도둑』이후 작가의 작풍이 좀 변했다가 다시 『책도둑』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근데 『책도둑』만큼 좋지는 않았다. 클레이의 시지프스 같은 행동이 - 물론 시지프스보다는 결과가 나았지만 - 갑갑하기도 해서. 물론 이 작품이 다리만 짓다가 끝나는 건 아니다. '살인범'이 되어버린 과거가 교차되고, 다섯 던바 보이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경마 기수인 케리의 이야기도. 시적인 문장 또한 아름답다. 하지만 『책도둑』의 리젤을 대체할 수는 없다. 문장 또한 은유가 과도하게 사용되어 여러번 읽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저자가 『책도둑』의 성공에 너무 고무되어 매몰된 건 아닐까 걱정된다.


16. 그녀를 만나다(정보라. 아작. 2021. 353쪽)
: 표제작이 인상깊었다. 작품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와 의의도 좋았지만 기술 발전 이후에도 노년의 삶은 힘들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화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다는 게 좋았다. 다른 작품들도 좋았지만 사실 가장 좋았던 건 「One More Kiss, Dear」. 머릿속에 흐르는 BGM을 들으며 읽었는데, 많이 슬펐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메시지와 재미, 둘 다 놓치지 않고 너무 무겁지 않게 또 너무 가볍지 않게 잘 풀어냈다. 이 작가 끊임없이 읽고 싶다.


17. 지진 새(수재나 존스, 전행선 역. 북로드. 2019. 300쪽)
: 도쿄에 사는 영국인 여성 루시. 지진의 진동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고 몇 시간 뒤 경찰에 체포된다. 루시는 릴리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믿고, 릴리가 자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살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릴리와의 과거를 회상한다. 자신이 일본인 남자친구 데이지를 만났던 그 순간부터.

조금은 몽환적이고 축축하다. 추리물로서의 재미보다는 심리 미스터리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화자는 루시인데 가끔 '나는'대신 '루시는'이라는 단어로 문장을 시작하여 독자에게 혼란을 유도한다. 사실 사건의 전말은 단순하지만 루시에겐 어떻게 흘러갔느냐가 더 중요했을 테니. 재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역량은 다른 작품을 읽어본 후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18. 검은색 사륜마차(낸시 스프링어, 김진희 역. 북레시피. 2022. 302쪽)
: 에놀라 홈즈 시리즈 7. 오랜만이다. 그래서인지 앞쪽에 셜록 홈즈의 목소리로 그간의 사건들을 요약해준다. 여성 클럽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는 에놀라. 어느날 왓슨 박사의 방문을 받는다. 셜록의 우울증이 위험한 상태라고. 에놀라는 셜록을 찾아가지만 그를 침대에서 일으키는 데엔 실패하고, 대신 셜록을 찾아온 여성 의뢰인의 사건을 수임한다. 의뢰인의 쌍둥이 언니는 백작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는데 얼마전 갑자기 사망했다는 편지를 받았다고. 이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백작가에서 보내준 유골은 심지어 사람의 유골도 아니었다. 에놀라는 조사를 시작하고, 당연히 셜록도 합류한다.

이번 사건은 특이할 것도 복잡할 것도 없다. 의뢰인의 설명을 듣는 순간 의문 없이 사건의 전말을 어느 독자든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풀어내어 희생자를 구출해 낼 지가 관건이지. 역시나 머리 식히며 즐겁게 읽었다. 다른 시리즈들에 비해 의뢰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19.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백수린. 마음산책. 2019. 231쪽)
: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 이야기. 일요일 오후에 어울리는 짧고 짧은 이야기들이 모두 13편이다. 다는 아니지만 대체로 좋았다. 생각없이 편안하지만은 않았지만 머리 아플 것도 없었다. 그냥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믿고 싶었던 이야기들.


20. 메인 - 꿈이 끝나는 거리(트리베니언, 정태원 역. 비채. 2010. 439쪽`)
: 조금 쓸쓸한 추리 소설. 몬트리올의 뒷골목 메인이 배경이다. 라프왕트 경위는 메인을 늘 순찰하며 크고작은 문제들을 해결한다. 경찰서 임무는 횡적으로 분류 - 살인, 절도, 경범죄 등- 되지만 라프왕트는 종적으로 메인의 모든 범죄를 처리한다. 메인에서는 물론 경찰서 내에서도 라프왕트의 신적인 능력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어느날, 메인의 골목에서 무릎 꿇은 채 칼에 찔려 죽은 시체가 발견된다.

긴장감은 없다. 고독하고 추운 이야기일 뿐. 범인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고 의외의 곳에서 풀리는데 그 실마리도 이야기의 거의 끝부분에서 나타난다. 그렇다고 라프왕트가 헛고생을 하며 뛰어다니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불쌍하고 어린 여자와, 늙은 군인과, 새파란 새내기 형사와 그리고 늘 모이는 카드 게임 멤버들과 묵직하고도 차근차근한 관계가 이루어진다. 서류 작업이나 사내 정치, 권력에는 전혀 무관심하며 살 날 또한 얼마 남지 않은 나이든 남자의 페이소스가 짙다. 맘에 드는 캐릭터는 하나도 없었지만 라프왕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미래에는 고개를 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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