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이 랑베르(오노레 드 발자크, 송기정 역. 문학동네. 2010. 200쪽)
: 작가 자신인 듯한 암시를 주는 화자가 이야기하는 억눌린 천재의 가여운 일생. 화자는 수도회 소유의 방돔 기숙학교에 진학 후 자신과 비슷한 기질의 두 살 위인 루이 랑베르와 단짝이 된다. '시인과 피타고라스'로 불리며 주위 학생들의 시샘과 경멸을 동시에 받던 그들은 감옥과도 같은 기숙학교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자신들만의 이론을 설립하고 발전시키는 등 학문적, 정신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화자의 전학으로 중단되고, 졸업 후 화자는 루이의 소식을 오랜 후에 듣게 된다.
사변적인 철학 소설이다. 화자의 애정어린 시선 덕에 루이 랑베르의 이론이 잘 드러나고 있다. 사실 화자는 주인공과 달리 물질주의자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화자는 철저히 주인공의 이론만을 설파한다. 여러가지 면에서 화자는 주인공을 완전하게 해주는 분신같은 존재이다. 학창시절처럼. 만약 화자가 주인공의 곁을 계속 지킬 수 있었다면 비극적인 결말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하지만 그의 사변적인 성향과 환경을 보면 그의 파멸은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화자와 주인공은 분리되어 있으나 왠지 주인공이 곧 화자인 듯 마음 아팠다.
2. 태양의 황금 사과(레이 브래드버리, 조호근 역. 현대문학. 2020. 576쪽)
: 단편집. 쓰여진 지 오래되었지만 전혀 올드하지 않은, 현대에도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들. 이 작가 특유의 SF와 판타지를 오가는 작품들이 특히 좋았다. 「4월의 마녀」, 「황야」, 「자수」, 「발전소」등.「여름이 달려가는 소리」, 「타임머신」도 좋았다.
3. 쓰고 달콤한 직업(천운영. 마음산책. 2021. 300쪽)
: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인데, 소설가로서의 저자보다는 음식점 사장으로서의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는다. 사실 좋아하는 소설가의 산문집이어서 무조건 집어들었다. 이게 '직업 시리즈'인 줄은 나중에 알았다. 저자가 차렸던 '돈키호테의 식탁' 이야기는 다른 산문집에서 이미 읽었지만 그 책이 음식 이야기였다면 이 책은 요리하는 행위 자체에 더 집중하고 있고, 중간중간 식당 운영과 그 가운데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 이야기가 더 많다. 그래서 먼저 읽은 책보다 더 재밌게 읽었고, 식당 마지막 날 이야기에는 나도 깊이 서운했다.
'직업 시리즈'이긴 하지만 이렇게 소설쓰기를 중단한 요리사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니 좋았다. 직업 소개서가 아니어서, 소설처럼 읽혀서. 그리고 작가의 책을 기대하게 해서.
4. 지평(파트릭 모디아노, 권수연 역. 문학동네. 2014. 200쪽)
: 새로운 지평을 찾아 파리를 떠나고 싶어하는 장 보스망스와 마르그레트 르 코즈의 이야기.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의 회상. 저자 특유의 부유하는 젊은이들이긴 하지만 기존 작품들과는 달리 과거가 또렷하고, 그들이 함께했던 시절로부터 한참 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미래 또한 분명하다. '사십 년의 거리를 두고 헤아려'(58쪽) 본다는 건, 모든 걸 알게 되지는 않았을지언정 많은 부분이 선명해지기도 할 테니.
내가 모디아노를 좋아하는 건 그가 늘 이야기하는 망각을 내가 갈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5. 죽은 자들의 메아리(요한 테오린, 권도희 역. 엘릭시르. 2017. 620쪽)
: '욀란드의 사계' 시리즈의 첫 작품. 가을. 옐로프의 손자 옌스가 실종된 지 20여 년이 흘렀다. 엄마 율리아는 아직도 엉망이다. 다섯 살 옌스는 할머니가 자는 사이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혼자서 신발끈을 묶어 신고 나갔다가 욀란드 섬의 문제아 '닐스 칸트'와 마주친다. 그리고 20년 후, 누군가가 옐로프에게 옌스의 신발을 보냈다.
옐로프가 이 시리즈의 중심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 전에 읽은 두 권에서 다 옐로프가 등장했었는데, 그 때는 그냥 주민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옐로프는 이전에 읽은 두 이야기에서도 기준점이었다. 이 책이 시리즈의 첫번째이지만 이 작품을 가장 먼저 읽었다면 이 시리즈를 지금만큼 애정하진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좀 평범한 편이다. 물론 욀란드의 가을은 아름답고 슬프도록 쓸쓸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꼭 욀란드가 아니어도 가능했었을 것이다. 범인은 뜻밖이었고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 작품을 제일 처음 읽었다면 욀란드와 옐로프에 대해 확실한 인상을 갖고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리즈가 진행될 수록 작품이 점점 더 좋아졌겠지. 그건 점점 더 기대되고 즐거워진다는 것이고, 독자로서는 커다란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읽는 것도 좋았다. 이렇게 옐로프의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도.
6. 그리고 문어가 나타났다(정보라 외. 아작. 2022. 324쪽)
: 환상 문학 앤솔러지. 모두 11편인데, 첫 두 작품이 너무 뻔하고 기대했던 정보라도 어디선가 읽었던 거 같아서 실망했는데, 전혜진의 「원점으로 돌아가」와 최지혜의 「위화」가 좋아서 마음이 풀렸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결말이 완벽했는데 사실 「위화」가 좋기는 제일 좋았다.
7. 저 너머의 목소리(요한 테오린, 권도희 역. 엘릭시르. 2021. 736쪽)
: '욀란드의 사계' 시리즈 마지막 작품. 여름. 이제 휴양객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따뜻해지는 날씨에 옐로프는 요양원에서 나와 자신의 집에 머문다. 친구 욘의 도움을 받아 방치되어 있던 낚싯배를 수리하기로 한 옐로프의 보트 창고에 어느날 밤 겁에 질린 소년이 나타난다. 소년은 근방의 리조트 소유주 집안의 요나스 클로스. 사촌들의 따돌림에 혼자서 배를 타고 나섰다가 커다란 배에 사고로 올라가게 되고, 거기서 도끼를 든 남자와 잔뜩 쌓여있는 시체들을 보았다는데...
유령배와 무덤 속의 소리. 내가 이 시리즈에서 좋아하는 신비롭고 쓸쓸한 분위기가 여름이라는 계절적 배경에 의해 살짝 변형됐다. 그래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사실 마지막 죽음이 너무 속상했다. 하지만 옐로프가 생존자라는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래도 눈물을 멈추진 못했다. 옐로프가 하려 했던 일 때문에. 마지막 죽음보다 그게 더 마음 아팠다.
이야기 자체는 먼저 읽은 『죽은 자들의 메아리』와 비슷하게 흘러간다. 현재의 이야기와 귀향자의 과거사가 교차되며 그가 무엇을 왜 하려는지 조금씩 드러난다. 귀향자를 편들어주고 싶은 맘은 조금도 없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의 마음이 납득은 됐다. 역사는 때로 개인을 악마로 만들고 그 가혹함은 부수적인 피해를 일으킨다.
심판 받아야 할 마지막 인물이 제대로 심판받지 않아서 - 물론 법의 심판은 받겠지만 난 유가족의 손으로 처단됐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 아쉬웠다. 사실 가장 아쉬운 건 이 시리즈의 끝이지만.
8. 귀문 고등학교 미스터리 사건 일지(정해연 외. 블랙홀. 2020. 304쪽)
: 앤솔러지. 오컬트인 줄 알고 집어들었는데 아마추어 탐정이 등장하는 미스터리이다. 프롤로그만 그럴 듯. 정해연이 가장 내가 원하던 이야기에 근접했다. 소라의 비밀은 처음부터 알았지만. 정명섭도 나쁘지는 않았다. 읽으면서 가출팸 실상이 코로나 이후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해졌다. 코로나 락다운 때 전세계적으로 가정 폭력이 증가했다는 뉴스를 봤는데 그게 청소년 가출이나 범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걱정스러웠다. 전건우도 재미 있었다. 나머지는 평이했다. 고등학교가 배경이지만 고등학생보다는 중학생에게 적당할 듯.
9. 귀문 고등학교, 수상한 축제(정해연 외. 블랙홀. 2021. 240쪽)
: 앞의 것과 같은 작가들의 앤솔러지. 귀문 고등학교에 축제가 열리고, 갑자기 사이렌을 울리며 등장하는 경찰차. 과연 어떤 사건 때문에 경찰차까지 오는 걸까?
정명섭과 정해연이 궁금해서 읽었다. 작품들이 다 지난 번 거와 연관된다. 몰라도 읽을 수는 있지만. 각 작가들을 연달아 두 번 읽으니 대충 작가들의 분위기와 서술 스타일이 보여서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렸다. 김동식을 한번 더 찾아봐야 겠다.
10. 라 트라비아타(알렉상드르 뒤마 피스, 진형준 역. 살림. 2020. 228쪽)
: 축약본인줄 모르고 읽었다. 난 세세한 서술을 읽고 싶었는데, 완역본을 다시 찾아 읽을 것 같진 않다. 줄거리는 모두 다 아는 그 이야기. 19세기이긴 하지만 그놈의 창녀구원신화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할까. 창녀의 성녀화. 창녀는 죽어야 용서받는다는 귀족남성 중심의 짜증나는 이야기. 아마 다른 때 읽었다면 다르게 읽혔을 지도.
11. 줄어드는 남자(리처드 매드슨, 조영학 역. 황금가지. 2007. 512쪽)
: 스콧은 친형과 낚시를 갔다가 수상쩍은 안개가 몰려오는 동안 갑판에서 이를 온몸으로 닿게 된다. 이후 몸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고, 스콧은 점점 사는 게 생존을 위한 투쟁이 되어간다.
키 뿐 아니라 몸피가, 그리고 모든 것이 점점 줄어든다는 설정 자체는 판타지이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현실적이다. 줄어드는 몸피와 반비례하는 열등감과 가족들의 특히 아내의 괴로움, 어쩌다 마주치는 외부인의 태도, 점점 적응하기 힘들어지는 주위 환경 등이 정말 뛰어난 필력으로 묘사되어 있어 마치 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 이 작품 외에도 단편 9편이 더 수록되어 있는데, 읽다보니 나중에는 좀 지루해서 마지막 두 편은 속독으로 넘겼다. 그래도 「몽타주」는 좋았다.
12. 영국에서 사흘 프랑스에서 나흘(이안 무어, 박상현 역. 남해의봄날. 2016. 484쪽)
: 영국인 스탠딩 코미디언인 저자가 영국 신도시의 교통난과 높은 물가 등에 지쳐 프랑스 시골로 이주를 한다. 프랑스인 아내의 조부모님이 계시는 시골 마을에서 농장을 구입한 저자는 동물에 무한한 애정을 가진 아내와 세 아들과 농장에서의 삶을 꾸려가는데, 정말 만만치 않다.
내가 영국식 유머에 익숙치 않다는 것과 - 사실 익숙치 않은 걸 넘어서 별로 안 좋아한다 - 남의 결혼과 육아에 큰 관심이 없다는 걸 간과하고 집어들었다. 그나마 동물은 좋아하지만 저자가 동물을 워낙 싫어하는 (척 하는) 바람에 모든 동물들이 저자를 괴롭힐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는 사악한 존재로 그려져 있어 괴로웠다. 저자에게 공감을 하며 나도 모르게 동물들을 미워하게 되어서. 사실 이 책은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모드 족 - 패션에 목숨을 건다 - 저자가 프랑스 시골 농장에서 동물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저자의 마음을 몰라주는 가족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 저자는 가족들을 정말 사랑하고 동물들에게도 (아마도) 애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게 다 읽은 다음에야 보일 뿐이지만. 재미가 없지는 않았는데 다음 번에는 영국 에세이 안 읽을 거 같다.
13. 스웨덴 기사(레오 페루츠, 강명순 역. 열린책들. 2020. 336쪽)
: 귀족 부인 마리아 크리스티네는 자신이 살면서 만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낸다. 그 중 가장 인상깊은 이야기는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는 스웨덴 출신의 귀족으로, 스웨덴 왕 칼 12세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마리아가 여섯 살 때 집을 떠난다. 마리아는 하인의 말을 듣고 아버지가 떠나기 전날 아버지의 군복 안감에 흙과 소금으로 채운 오미자를 넣어 꿰맨다. 그리고 몇 주 후, 깊은 밤 아버지는 마리아의 방 창문을 두드렸고 마리아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하다 사라진다. 이후 몇 번 그렇게 아버지는 마리아를 찾아온다. 하지만 곧 전령이 와서 아버지가 3주 전에 죽었다고 하는데...
'왕자와 거지'의 18세기 버전이긴 한데, 독특하게 재미있다. 남의 인생을 빼앗았지만 왠지 응원하게 되는 행보를 보이는 도둑,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는 귀족 청년. 또 종국에는 각자 가야할 길로 간다. 묘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둘의 인생과 또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 과정은 옳지 않았지만 결과는 아름다웠달까. 서문부터 확 끌어당겼던 재밌었던 이야기.
14. 내가 죽였다(정해연. 연담L. 2019. 360쪽)
: 저작권 침해한 중고등학생 들을 주로 대상으로 기획 소송으로 근근이 사무실을 유지하는 일명 변쓰(변호사 쓰레기) 김무일. 어느날 그에게 건물주 노인이 찾아와 자신이 7년 전 사람을 죽였다고, 이제 상황이 달라져서 자수하고 싶다고 고백하고, 김무일은 동창생인 형사 신여주를 찾아가 이야기한다. 그런데 같이 경찰서로 자수하러 가기로 한 건물주 노인이 자수 전날 건물 5층에서 뛰어내린다.
앤솔러지에서 이 작가의 단편을 읽고 기대하며 장편을 집어들었는데 솔직히 좀, 재미없었다. 뭔가 대단한 게 있는 것처럼 부풀리기만 했지 내용은 흔한 음모론에다가 결말도 너무 현실적이어서 맥빠진다. 내용이
15.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앨리스 워커, 김시현 역. 민음사. 2009. 434쪽)
16. 유령생활기록부(나혁진. 몽실북스. 2021. 360쪽)
: 30대의 백수 '나'는 스포츠 토토나 하면서 시간을 죽인다. 구직활동따윈 그만둔 지 오래. 비오는 밤, 술집에서 만취가 되어 기어나오다 골목길에서 칼에 찔려 죽는다. 그런데, 유령이 되어 세상에 머물게 되었다.
대단히 깊이 있는 이야기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주인공이 너무 비호감이어서 좀 짜증났다. 그 걸레같은 젠더의식이라니. '일종의 여흥(95쪽)'으로 알바하는 회사의 여직원을 유혹하는 내기를 하는 지질한 유흥업소 중독자 새끼한테 공감은커녕 비명횡사에도 동정심이 생기지 않았다. 뒷표지의 '세상이 외면한 한 남자'는 무슨. 게다가 전반적으로 내용이 올드하다. 소개팅을 '맞선이 잡히(121쪽)'다라니, '입술을 훔쳤다(130쪽)'니. 무슨 80년대 소설 보는 줄.
17. 읽는 직업(이은혜. 마음산책. 2020. 232쪽)
: 오랜 기간 인문서 편집자로 일한 저자의 이야기. 저자에 대한 생각과 편집자의 일, 독자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담았는데 솔직히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일단 문장을 너무 학술적으로 썼다. 이게 저자가 오랜 시간 학술서를 위주로 읽어서인지 혹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뽐내기 위함인지 모르겠다(후자 같다. 풀어써도 충분히 아름다웠을 문장들을 굳이 한자어와 도치법으로 꼬았다). 그리고 독자 챕터에서도 자신이 독자보다 우위에 있음을, 마치 편집자가 독자에게 '책을 내려주는' 역할을 하는 직업인 양 생각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맞춤법을 틀리고 비문을 방치하는 편집자가 편집한 책을 한 달에도 몇 번씩 만나는 내게 이런 시각은 불편했다. 여러 부분에서 동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쉽지 않게 읽었다.
18. 아름다운 거짓말(리사 엉거, 이영아 역. 비채. 2008. 456쪽)
: 자상한 의사 아버지와 명석한 어머니 밑에서 평범하게 자란 작가 리들리 존스. 평온하고 안정적인 뉴욕 생활 중 우연히 도로에서 아이를 구한다. 마침 근처에 있던 사진기자가 이 순간을 포착하여 보도가 되고 순식간에 리들리는 유명인사가 되는데, 어느날 리들리 앞으로 낡은 사진 한 장과 "네가 내 딸이냐?"는 메모가 배달된다. 사진 속에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성이 자신과 똑닮은 아이를 안고 있는데...
순식간에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붕괴되고, 진실을 외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몰린 리들리의 고군분투가 애처롭다. 그리고 그걸 둘러싼 진실은 꽤 추하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늘 하는 고민이다. 어느 정도는 눈 감아주고 싶지만 이 책 속의 사건들은 그 정도가 과하다. 그 과정에서 너무 깊은 피해가 발생했기에. 그러나 죗값이 치러지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거짓말이 아름다울 수도 있는가보다.
19. 소년소녀 진화론(전삼혜. 문학동네. 2015. 216쪽)
: 7편의 아름다운 단편들. 다 좋았다. 내용도, 등장인물들도, 배경도 정말 예뻤다. 예쁘다는 단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소설들이라니. 물론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희망은 늘 반짝인다. 이 아이들은 진화할 것이므로.
20. 기척(레이철 호킨스, 천화영 역. 모모. 2022. 420)
: 『제인 에어』를 스릴러로 재해석했다. 고급 주택단지 손필드에서 개산책 알바를 하는 제인. 비슷한 정원을 가진 집에서 비슷하게 위선적인 태도를 보이는 부인들을 상대하며 일하던 그녀는 우연히 개성적이고 아름다운 정원의 집에 사는 에디와 마주친다. 한눈에 그에게 반한 그녀는 그와 데이트를 하게 되고, 거지같은 룸메이트의 집에 얹혀살다시피 하던 제인은 에디에게 약간의 압박을 주어 그의 집으로 들어간다.
이야기는 제인의 관점과 몇 달 전 호수에서 보트 사고로 죽은 에디의 아름답고 똑똑했던 아내 베의 관점이 번갈아 보여진다. 제인이 감추고 있는 비밀과 처음에는 완벽한 듯 보였지만 점점 의심스러운 에디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하지만 결말은 좀... 뒷심이 부족하달까. 미진한 기분이다. 제인의 비밀도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잘 쓴 소설이다. 읽는 내내 꽤 흥미진진했다. 마지막 50여 페이지만 제외하고.
21. 내 이름을 불러줘(황여정. 문학동네. 2020. 292쪽)
: 작가의 전작이 괜찮았어서 선택했는데 이 작품은 정말 일취월장했다. '나'는 소유자들의 다툼으로 절반만 철거된 우성빌딩에서 눈을 뜬다. 난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다만 살해당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나를 '고수림'의 혼령이 순간 스쳐지난다. 고수림의 혼령은 사라졌지만 난 이곳에 묶여 있다. 지박령. 1층 헌책방 주인 '오탁조'는 친하게 지냈던 고수림의 사고사에 고수림의 딸 '고미래'를 불러들인다.
정말 잘썼다. 뒷표지의 추천사에 '책다운 책'이라고 했는데 진짜 소설다운 소설이다. 특히 23챕터는 근래 읽은 그 어떤 글보다 유려하다. 전작을 읽을 땐 깊이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잘 쓴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이 소설은 정말 잘 썼다. 특히 인물들의 등장이 매우 자연스럽고 역할이 적절하여 많은 인물과 얽힌 사연에도 전혀 피로감이 없다. 거기에 더해 '나'의 묵직한 존재감과 그 서글픔도 무겁지만은 않으면서 충분히 깊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정말 기대된다.
22. 오, 윌리엄!(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22. 312쪽)
: 루시 바턴의 목소리. 첫 남편 윌리엄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시는 재혼을 해서 너무나 잘맞는 남편 데이비드와 잘 살고 있고, 윌리엄과는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예순아홉 윌리엄은 스무살이 넘게 어린 세번째 아내와 아직 어린 딸과 살고 있고, 가끔 악몽을 꾼다. 악몽을 꾸고 일어난 날이면 루시에게 전화를 걸어 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루시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다. 윌리엄의 이야기이지만 결국 루시의 이야기이고, 첫번째 책에서의 루시 자신의 이야기와 두번째 남매들 이야기와 더불어,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길고 깊은 이야기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 계속 꺠닫고 성장하고 주위를 돌보는 인생을.
23. K의 장례식(천희란. 현대문학. 2023. 136쪽)
: 에밀 아자르는 조카를 내세웠다. 이 책의 K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여학생을 내세웠다. 그녀 정현은 15년 동안 늘 그랬듯 출근을 했고, 늘 같은 시간에 방에서 나오던 K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좀전에 열어본 서재의 책꽂이 빈칸에 놓인 봉투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더랬다.
이건 이름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처럼 복잡할 수도, 길었을 수도 있겠으나 딱 이만큼이면 충분할 이야기이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이며 앞에 나선 이와 뒤에 숨은 이의 이야기, 가야하는 길을 먼저 간 이와 뒤따르고 싶지 않은 이의 이야기이다. 종국에는 모두 자유로워졌으나 그 과정이 특이한만큼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난, K와 전희정 모두 부러웠다.
24. 줄라이, 줄라이(팀 오브라이언, 이승학 역. 섬과달. 2022. 392쪽)
: 1969년 졸업반의 30번째 동창회가 7월에 열린다. 중혼 생활중인 남성 편력 화려한 스푸크. 베트남전에서 다리를 잃은 데이비드. 데이비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혼한 말라. 신혼여행으로 간 카지노에서 대박을 터뜨린 남편과 이혼한 에밀리. 역시 이혼한 못생긴 잔. 졸업하자마자 징집을 피해 캐나다로 간 빌리. 빌리와의 약속을 어긴 도러시. 실직한 목사 폴렛. 비밀의 무게에 눌리고 있는 엘리. 청소용품 사업으로 성공했지만 글쓰기에 목마른 마브. 그리고 살해당한 캐런과 익사한 하먼. 이들의 이야기가 두 동창생의 추도식 전날과 당일 이틀에 걸쳐 일어나는 일들과 번갈아 보여진다.
모든 캐릭터가 뚜렷하다. 어느 한 명도 작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혼자 살아나 혼자 움직이고 생각하는 듯 하다. 심지어는 데이비드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상사의 목소리마저. 흔할 수도 있고 가쉽처럼 소비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 한 명 한 명이 살아온 이야기는 나름의 무게를 지니고 있고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은 서로를 감싸안을 줄 안다. 중년의 나이에도 그건 희망일 것이다. 좋은 작가를 발견하게 되어 기쁘다.
25. 달력 뒤에 쓴 유서(민병훈. 민음사. 2023. 164쪽)
: 김영하 작가의 『아랑은 왜』가 생각나는 메타 소설. 자전 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다. 음독으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 어머니가 떠나버린 후 아버지와 둘이 살던 고등학생 화자는 못질하는 소리를 잠결에 들었다. 다음날 잠긴 문의 창을 깨고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했던 화자는 시간이 흐른 후 옛집이 있던 마을에 돌아온다. 글쓰기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화자는 자신의 의식 깊은 곳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뭔가가 있음을 알고 있다.
묵직하다. 아버지의 죽음만이 아니라 화자의 고민이, 화자와 어머니의 관계가, 글쓰기가 너무 무겁다. 모든 삶은 견뎌야 할 무게를 지니고 있지만 어떤 삶은 옆에서 보기에도 더 무거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무게를 모두 덜어내야 하는 걸까. 모든 상처가 지워지고 모든 흔적이 사라져야 하는 건 아니다. 비록 소설의 말미에도 화자가 편안해 지지는 않으나, 적어도 한발자국 정도는 움직였으리라.
26. 브로큰 하버(타나 프렌치, 박현주 역. 엘릭시르. 2023. 808쪽)
: 더블린 외곽의 브라이언스 타운. 한때 바닷가의 고급 전원주택 단지를 지향했으나 지금은 짓다 만 집들에 중장비와 자재가 흩어져 있는 을씨년스러운 동네일 뿐이다. 이 곳의 몇 안 되는 입주민 중 한 가족이 몰살당한다. 어린 두 아이는 질식사하고 아버지는 과다출혈로 사망한 가운데 어머니만이 얼굴과 몸의 자상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숨이 붙어 있다. 살인수사과에서 높은 해결률을 보이는 마이클 케네디 형사는 막 제복경찰을 벗어난 신입 리처드 커런을 데리고 출동하는데, 외부 침입 흔적은 없지만 온 집안 곳곳에 벽이 뚫려 있고 아기 모니터가 5개나 발견된다.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 범인이 밝혀지는 단 며칠간의 이야기를 상세히 서술했지만 전혀 지루하거나 늘어지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모든 움직임과 대화가 의미있고 흥미롭다. 잠깐씩 등장하는 인물마저 캐릭터가 살아있다. 다만 결말은 좀 맘에 안 들었다. 리치는 공감 능력 때문에 좋아했고 어쩌면 다음 작품의 주인공이 될 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그 성향을 그런 식으로 발휘하다니 정말 실망했고 스코처라 불리는 케네디 형사의 대처 또한 미진했다. 그리고 케네디의 약점이 되어버린 디나는 짜증스러웠다. 그래도 다음 작품에서 다시 케네디가 등장하기를, 다시 재기하기를 바란다.
27. 트러스트(에르난 디아스, 강동혁 역. 문학동네. 2023. 488쪽)
28. 아라의 소설(정세랑. 안온북스. 2022. 216쪽)
: 엽편 소설들. 내가 좋아하는 이 작가의 발랄함과 진중함과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이 모두 드러난다. 지루한 게 하나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 솔직히, 시는 지루했다 - 대체로 다 좋았다. 평범하지만 특별한 아라의 이야기도 있고 아라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매력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도 있다. 가장 좋았던 건 마지막 작품 「현정」. 아마 많은 독자들도 그러하겠지만 나와 가장 비슷했다.
: 작가 자신인 듯한 암시를 주는 화자가 이야기하는 억눌린 천재의 가여운 일생. 화자는 수도회 소유의 방돔 기숙학교에 진학 후 자신과 비슷한 기질의 두 살 위인 루이 랑베르와 단짝이 된다. '시인과 피타고라스'로 불리며 주위 학생들의 시샘과 경멸을 동시에 받던 그들은 감옥과도 같은 기숙학교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자신들만의 이론을 설립하고 발전시키는 등 학문적, 정신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화자의 전학으로 중단되고, 졸업 후 화자는 루이의 소식을 오랜 후에 듣게 된다.
사변적인 철학 소설이다. 화자의 애정어린 시선 덕에 루이 랑베르의 이론이 잘 드러나고 있다. 사실 화자는 주인공과 달리 물질주의자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화자는 철저히 주인공의 이론만을 설파한다. 여러가지 면에서 화자는 주인공을 완전하게 해주는 분신같은 존재이다. 학창시절처럼. 만약 화자가 주인공의 곁을 계속 지킬 수 있었다면 비극적인 결말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하지만 그의 사변적인 성향과 환경을 보면 그의 파멸은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화자와 주인공은 분리되어 있으나 왠지 주인공이 곧 화자인 듯 마음 아팠다.
2. 태양의 황금 사과(레이 브래드버리, 조호근 역. 현대문학. 2020. 576쪽)
: 단편집. 쓰여진 지 오래되었지만 전혀 올드하지 않은, 현대에도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들. 이 작가 특유의 SF와 판타지를 오가는 작품들이 특히 좋았다. 「4월의 마녀」, 「황야」, 「자수」, 「발전소」등.「여름이 달려가는 소리」, 「타임머신」도 좋았다.
3. 쓰고 달콤한 직업(천운영. 마음산책. 2021. 300쪽)
: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인데, 소설가로서의 저자보다는 음식점 사장으로서의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는다. 사실 좋아하는 소설가의 산문집이어서 무조건 집어들었다. 이게 '직업 시리즈'인 줄은 나중에 알았다. 저자가 차렸던 '돈키호테의 식탁' 이야기는 다른 산문집에서 이미 읽었지만 그 책이 음식 이야기였다면 이 책은 요리하는 행위 자체에 더 집중하고 있고, 중간중간 식당 운영과 그 가운데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 이야기가 더 많다. 그래서 먼저 읽은 책보다 더 재밌게 읽었고, 식당 마지막 날 이야기에는 나도 깊이 서운했다.
'직업 시리즈'이긴 하지만 이렇게 소설쓰기를 중단한 요리사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니 좋았다. 직업 소개서가 아니어서, 소설처럼 읽혀서. 그리고 작가의 책을 기대하게 해서.
4. 지평(파트릭 모디아노, 권수연 역. 문학동네. 2014. 200쪽)
: 새로운 지평을 찾아 파리를 떠나고 싶어하는 장 보스망스와 마르그레트 르 코즈의 이야기.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의 회상. 저자 특유의 부유하는 젊은이들이긴 하지만 기존 작품들과는 달리 과거가 또렷하고, 그들이 함께했던 시절로부터 한참 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미래 또한 분명하다. '사십 년의 거리를 두고 헤아려'(58쪽) 본다는 건, 모든 걸 알게 되지는 않았을지언정 많은 부분이 선명해지기도 할 테니.
내가 모디아노를 좋아하는 건 그가 늘 이야기하는 망각을 내가 갈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5. 죽은 자들의 메아리(요한 테오린, 권도희 역. 엘릭시르. 2017. 620쪽)
: '욀란드의 사계' 시리즈의 첫 작품. 가을. 옐로프의 손자 옌스가 실종된 지 20여 년이 흘렀다. 엄마 율리아는 아직도 엉망이다. 다섯 살 옌스는 할머니가 자는 사이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혼자서 신발끈을 묶어 신고 나갔다가 욀란드 섬의 문제아 '닐스 칸트'와 마주친다. 그리고 20년 후, 누군가가 옐로프에게 옌스의 신발을 보냈다.
옐로프가 이 시리즈의 중심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 전에 읽은 두 권에서 다 옐로프가 등장했었는데, 그 때는 그냥 주민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옐로프는 이전에 읽은 두 이야기에서도 기준점이었다. 이 책이 시리즈의 첫번째이지만 이 작품을 가장 먼저 읽었다면 이 시리즈를 지금만큼 애정하진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좀 평범한 편이다. 물론 욀란드의 가을은 아름답고 슬프도록 쓸쓸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꼭 욀란드가 아니어도 가능했었을 것이다. 범인은 뜻밖이었고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 작품을 제일 처음 읽었다면 욀란드와 옐로프에 대해 확실한 인상을 갖고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리즈가 진행될 수록 작품이 점점 더 좋아졌겠지. 그건 점점 더 기대되고 즐거워진다는 것이고, 독자로서는 커다란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읽는 것도 좋았다. 이렇게 옐로프의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도.
6. 그리고 문어가 나타났다(정보라 외. 아작. 2022. 324쪽)
: 환상 문학 앤솔러지. 모두 11편인데, 첫 두 작품이 너무 뻔하고 기대했던 정보라도 어디선가 읽었던 거 같아서 실망했는데, 전혜진의 「원점으로 돌아가」와 최지혜의 「위화」가 좋아서 마음이 풀렸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결말이 완벽했는데 사실 「위화」가 좋기는 제일 좋았다.
7. 저 너머의 목소리(요한 테오린, 권도희 역. 엘릭시르. 2021. 736쪽)
: '욀란드의 사계' 시리즈 마지막 작품. 여름. 이제 휴양객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따뜻해지는 날씨에 옐로프는 요양원에서 나와 자신의 집에 머문다. 친구 욘의 도움을 받아 방치되어 있던 낚싯배를 수리하기로 한 옐로프의 보트 창고에 어느날 밤 겁에 질린 소년이 나타난다. 소년은 근방의 리조트 소유주 집안의 요나스 클로스. 사촌들의 따돌림에 혼자서 배를 타고 나섰다가 커다란 배에 사고로 올라가게 되고, 거기서 도끼를 든 남자와 잔뜩 쌓여있는 시체들을 보았다는데...
유령배와 무덤 속의 소리. 내가 이 시리즈에서 좋아하는 신비롭고 쓸쓸한 분위기가 여름이라는 계절적 배경에 의해 살짝 변형됐다. 그래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사실 마지막 죽음이 너무 속상했다. 하지만 옐로프가 생존자라는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래도 눈물을 멈추진 못했다. 옐로프가 하려 했던 일 때문에. 마지막 죽음보다 그게 더 마음 아팠다.
이야기 자체는 먼저 읽은 『죽은 자들의 메아리』와 비슷하게 흘러간다. 현재의 이야기와 귀향자의 과거사가 교차되며 그가 무엇을 왜 하려는지 조금씩 드러난다. 귀향자를 편들어주고 싶은 맘은 조금도 없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의 마음이 납득은 됐다. 역사는 때로 개인을 악마로 만들고 그 가혹함은 부수적인 피해를 일으킨다.
심판 받아야 할 마지막 인물이 제대로 심판받지 않아서 - 물론 법의 심판은 받겠지만 난 유가족의 손으로 처단됐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 아쉬웠다. 사실 가장 아쉬운 건 이 시리즈의 끝이지만.
8. 귀문 고등학교 미스터리 사건 일지(정해연 외. 블랙홀. 2020. 304쪽)
: 앤솔러지. 오컬트인 줄 알고 집어들었는데 아마추어 탐정이 등장하는 미스터리이다. 프롤로그만 그럴 듯. 정해연이 가장 내가 원하던 이야기에 근접했다. 소라의 비밀은 처음부터 알았지만. 정명섭도 나쁘지는 않았다. 읽으면서 가출팸 실상이 코로나 이후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해졌다. 코로나 락다운 때 전세계적으로 가정 폭력이 증가했다는 뉴스를 봤는데 그게 청소년 가출이나 범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걱정스러웠다. 전건우도 재미 있었다. 나머지는 평이했다. 고등학교가 배경이지만 고등학생보다는 중학생에게 적당할 듯.
9. 귀문 고등학교, 수상한 축제(정해연 외. 블랙홀. 2021. 240쪽)
: 앞의 것과 같은 작가들의 앤솔러지. 귀문 고등학교에 축제가 열리고, 갑자기 사이렌을 울리며 등장하는 경찰차. 과연 어떤 사건 때문에 경찰차까지 오는 걸까?
정명섭과 정해연이 궁금해서 읽었다. 작품들이 다 지난 번 거와 연관된다. 몰라도 읽을 수는 있지만. 각 작가들을 연달아 두 번 읽으니 대충 작가들의 분위기와 서술 스타일이 보여서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렸다. 김동식을 한번 더 찾아봐야 겠다.
10. 라 트라비아타(알렉상드르 뒤마 피스, 진형준 역. 살림. 2020. 228쪽)
: 축약본인줄 모르고 읽었다. 난 세세한 서술을 읽고 싶었는데, 완역본을 다시 찾아 읽을 것 같진 않다. 줄거리는 모두 다 아는 그 이야기. 19세기이긴 하지만 그놈의 창녀구원신화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할까. 창녀의 성녀화. 창녀는 죽어야 용서받는다는 귀족남성 중심의 짜증나는 이야기. 아마 다른 때 읽었다면 다르게 읽혔을 지도.
11. 줄어드는 남자(리처드 매드슨, 조영학 역. 황금가지. 2007. 512쪽)
: 스콧은 친형과 낚시를 갔다가 수상쩍은 안개가 몰려오는 동안 갑판에서 이를 온몸으로 닿게 된다. 이후 몸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고, 스콧은 점점 사는 게 생존을 위한 투쟁이 되어간다.
키 뿐 아니라 몸피가, 그리고 모든 것이 점점 줄어든다는 설정 자체는 판타지이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현실적이다. 줄어드는 몸피와 반비례하는 열등감과 가족들의 특히 아내의 괴로움, 어쩌다 마주치는 외부인의 태도, 점점 적응하기 힘들어지는 주위 환경 등이 정말 뛰어난 필력으로 묘사되어 있어 마치 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 이 작품 외에도 단편 9편이 더 수록되어 있는데, 읽다보니 나중에는 좀 지루해서 마지막 두 편은 속독으로 넘겼다. 그래도 「몽타주」는 좋았다.
12. 영국에서 사흘 프랑스에서 나흘(이안 무어, 박상현 역. 남해의봄날. 2016. 484쪽)
: 영국인 스탠딩 코미디언인 저자가 영국 신도시의 교통난과 높은 물가 등에 지쳐 프랑스 시골로 이주를 한다. 프랑스인 아내의 조부모님이 계시는 시골 마을에서 농장을 구입한 저자는 동물에 무한한 애정을 가진 아내와 세 아들과 농장에서의 삶을 꾸려가는데, 정말 만만치 않다.
내가 영국식 유머에 익숙치 않다는 것과 - 사실 익숙치 않은 걸 넘어서 별로 안 좋아한다 - 남의 결혼과 육아에 큰 관심이 없다는 걸 간과하고 집어들었다. 그나마 동물은 좋아하지만 저자가 동물을 워낙 싫어하는 (척 하는) 바람에 모든 동물들이 저자를 괴롭힐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는 사악한 존재로 그려져 있어 괴로웠다. 저자에게 공감을 하며 나도 모르게 동물들을 미워하게 되어서. 사실 이 책은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모드 족 - 패션에 목숨을 건다 - 저자가 프랑스 시골 농장에서 동물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저자의 마음을 몰라주는 가족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 저자는 가족들을 정말 사랑하고 동물들에게도 (아마도) 애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게 다 읽은 다음에야 보일 뿐이지만. 재미가 없지는 않았는데 다음 번에는 영국 에세이 안 읽을 거 같다.
13. 스웨덴 기사(레오 페루츠, 강명순 역. 열린책들. 2020. 336쪽)
: 귀족 부인 마리아 크리스티네는 자신이 살면서 만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낸다. 그 중 가장 인상깊은 이야기는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는 스웨덴 출신의 귀족으로, 스웨덴 왕 칼 12세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마리아가 여섯 살 때 집을 떠난다. 마리아는 하인의 말을 듣고 아버지가 떠나기 전날 아버지의 군복 안감에 흙과 소금으로 채운 오미자를 넣어 꿰맨다. 그리고 몇 주 후, 깊은 밤 아버지는 마리아의 방 창문을 두드렸고 마리아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하다 사라진다. 이후 몇 번 그렇게 아버지는 마리아를 찾아온다. 하지만 곧 전령이 와서 아버지가 3주 전에 죽었다고 하는데...
'왕자와 거지'의 18세기 버전이긴 한데, 독특하게 재미있다. 남의 인생을 빼앗았지만 왠지 응원하게 되는 행보를 보이는 도둑,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는 귀족 청년. 또 종국에는 각자 가야할 길로 간다. 묘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둘의 인생과 또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 과정은 옳지 않았지만 결과는 아름다웠달까. 서문부터 확 끌어당겼던 재밌었던 이야기.
14. 내가 죽였다(정해연. 연담L. 2019. 360쪽)
: 저작권 침해한 중고등학생 들을 주로 대상으로 기획 소송으로 근근이 사무실을 유지하는 일명 변쓰(변호사 쓰레기) 김무일. 어느날 그에게 건물주 노인이 찾아와 자신이 7년 전 사람을 죽였다고, 이제 상황이 달라져서 자수하고 싶다고 고백하고, 김무일은 동창생인 형사 신여주를 찾아가 이야기한다. 그런데 같이 경찰서로 자수하러 가기로 한 건물주 노인이 자수 전날 건물 5층에서 뛰어내린다.
앤솔러지에서 이 작가의 단편을 읽고 기대하며 장편을 집어들었는데 솔직히 좀, 재미없었다. 뭔가 대단한 게 있는 것처럼 부풀리기만 했지 내용은 흔한 음모론에다가 결말도 너무 현실적이어서 맥빠진다. 내용이
15.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앨리스 워커, 김시현 역. 민음사. 2009. 434쪽)
16. 유령생활기록부(나혁진. 몽실북스. 2021. 360쪽)
: 30대의 백수 '나'는 스포츠 토토나 하면서 시간을 죽인다. 구직활동따윈 그만둔 지 오래. 비오는 밤, 술집에서 만취가 되어 기어나오다 골목길에서 칼에 찔려 죽는다. 그런데, 유령이 되어 세상에 머물게 되었다.
대단히 깊이 있는 이야기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주인공이 너무 비호감이어서 좀 짜증났다. 그 걸레같은 젠더의식이라니. '일종의 여흥(95쪽)'으로 알바하는 회사의 여직원을 유혹하는 내기를 하는 지질한 유흥업소 중독자 새끼한테 공감은커녕 비명횡사에도 동정심이 생기지 않았다. 뒷표지의 '세상이 외면한 한 남자'는 무슨. 게다가 전반적으로 내용이 올드하다. 소개팅을 '맞선이 잡히(121쪽)'다라니, '입술을 훔쳤다(130쪽)'니. 무슨 80년대 소설 보는 줄.
17. 읽는 직업(이은혜. 마음산책. 2020. 232쪽)
: 오랜 기간 인문서 편집자로 일한 저자의 이야기. 저자에 대한 생각과 편집자의 일, 독자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담았는데 솔직히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일단 문장을 너무 학술적으로 썼다. 이게 저자가 오랜 시간 학술서를 위주로 읽어서인지 혹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뽐내기 위함인지 모르겠다(후자 같다. 풀어써도 충분히 아름다웠을 문장들을 굳이 한자어와 도치법으로 꼬았다). 그리고 독자 챕터에서도 자신이 독자보다 우위에 있음을, 마치 편집자가 독자에게 '책을 내려주는' 역할을 하는 직업인 양 생각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맞춤법을 틀리고 비문을 방치하는 편집자가 편집한 책을 한 달에도 몇 번씩 만나는 내게 이런 시각은 불편했다. 여러 부분에서 동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쉽지 않게 읽었다.
18. 아름다운 거짓말(리사 엉거, 이영아 역. 비채. 2008. 456쪽)
: 자상한 의사 아버지와 명석한 어머니 밑에서 평범하게 자란 작가 리들리 존스. 평온하고 안정적인 뉴욕 생활 중 우연히 도로에서 아이를 구한다. 마침 근처에 있던 사진기자가 이 순간을 포착하여 보도가 되고 순식간에 리들리는 유명인사가 되는데, 어느날 리들리 앞으로 낡은 사진 한 장과 "네가 내 딸이냐?"는 메모가 배달된다. 사진 속에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성이 자신과 똑닮은 아이를 안고 있는데...
순식간에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붕괴되고, 진실을 외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몰린 리들리의 고군분투가 애처롭다. 그리고 그걸 둘러싼 진실은 꽤 추하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늘 하는 고민이다. 어느 정도는 눈 감아주고 싶지만 이 책 속의 사건들은 그 정도가 과하다. 그 과정에서 너무 깊은 피해가 발생했기에. 그러나 죗값이 치러지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거짓말이 아름다울 수도 있는가보다.
19. 소년소녀 진화론(전삼혜. 문학동네. 2015. 216쪽)
: 7편의 아름다운 단편들. 다 좋았다. 내용도, 등장인물들도, 배경도 정말 예뻤다. 예쁘다는 단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소설들이라니. 물론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희망은 늘 반짝인다. 이 아이들은 진화할 것이므로.
20. 기척(레이철 호킨스, 천화영 역. 모모. 2022. 420)
: 『제인 에어』를 스릴러로 재해석했다. 고급 주택단지 손필드에서 개산책 알바를 하는 제인. 비슷한 정원을 가진 집에서 비슷하게 위선적인 태도를 보이는 부인들을 상대하며 일하던 그녀는 우연히 개성적이고 아름다운 정원의 집에 사는 에디와 마주친다. 한눈에 그에게 반한 그녀는 그와 데이트를 하게 되고, 거지같은 룸메이트의 집에 얹혀살다시피 하던 제인은 에디에게 약간의 압박을 주어 그의 집으로 들어간다.
이야기는 제인의 관점과 몇 달 전 호수에서 보트 사고로 죽은 에디의 아름답고 똑똑했던 아내 베의 관점이 번갈아 보여진다. 제인이 감추고 있는 비밀과 처음에는 완벽한 듯 보였지만 점점 의심스러운 에디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하지만 결말은 좀... 뒷심이 부족하달까. 미진한 기분이다. 제인의 비밀도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잘 쓴 소설이다. 읽는 내내 꽤 흥미진진했다. 마지막 50여 페이지만 제외하고.
21. 내 이름을 불러줘(황여정. 문학동네. 2020. 292쪽)
: 작가의 전작이 괜찮았어서 선택했는데 이 작품은 정말 일취월장했다. '나'는 소유자들의 다툼으로 절반만 철거된 우성빌딩에서 눈을 뜬다. 난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다만 살해당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나를 '고수림'의 혼령이 순간 스쳐지난다. 고수림의 혼령은 사라졌지만 난 이곳에 묶여 있다. 지박령. 1층 헌책방 주인 '오탁조'는 친하게 지냈던 고수림의 사고사에 고수림의 딸 '고미래'를 불러들인다.
정말 잘썼다. 뒷표지의 추천사에 '책다운 책'이라고 했는데 진짜 소설다운 소설이다. 특히 23챕터는 근래 읽은 그 어떤 글보다 유려하다. 전작을 읽을 땐 깊이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잘 쓴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이 소설은 정말 잘 썼다. 특히 인물들의 등장이 매우 자연스럽고 역할이 적절하여 많은 인물과 얽힌 사연에도 전혀 피로감이 없다. 거기에 더해 '나'의 묵직한 존재감과 그 서글픔도 무겁지만은 않으면서 충분히 깊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정말 기대된다.
22. 오, 윌리엄!(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22. 312쪽)
: 루시 바턴의 목소리. 첫 남편 윌리엄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시는 재혼을 해서 너무나 잘맞는 남편 데이비드와 잘 살고 있고, 윌리엄과는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예순아홉 윌리엄은 스무살이 넘게 어린 세번째 아내와 아직 어린 딸과 살고 있고, 가끔 악몽을 꾼다. 악몽을 꾸고 일어난 날이면 루시에게 전화를 걸어 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루시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다. 윌리엄의 이야기이지만 결국 루시의 이야기이고, 첫번째 책에서의 루시 자신의 이야기와 두번째 남매들 이야기와 더불어,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길고 깊은 이야기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 계속 꺠닫고 성장하고 주위를 돌보는 인생을.
23. K의 장례식(천희란. 현대문학. 2023. 136쪽)
: 에밀 아자르는 조카를 내세웠다. 이 책의 K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여학생을 내세웠다. 그녀 정현은 15년 동안 늘 그랬듯 출근을 했고, 늘 같은 시간에 방에서 나오던 K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좀전에 열어본 서재의 책꽂이 빈칸에 놓인 봉투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더랬다.
이건 이름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처럼 복잡할 수도, 길었을 수도 있겠으나 딱 이만큼이면 충분할 이야기이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이며 앞에 나선 이와 뒤에 숨은 이의 이야기, 가야하는 길을 먼저 간 이와 뒤따르고 싶지 않은 이의 이야기이다. 종국에는 모두 자유로워졌으나 그 과정이 특이한만큼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난, K와 전희정 모두 부러웠다.
24. 줄라이, 줄라이(팀 오브라이언, 이승학 역. 섬과달. 2022. 392쪽)
: 1969년 졸업반의 30번째 동창회가 7월에 열린다. 중혼 생활중인 남성 편력 화려한 스푸크. 베트남전에서 다리를 잃은 데이비드. 데이비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혼한 말라. 신혼여행으로 간 카지노에서 대박을 터뜨린 남편과 이혼한 에밀리. 역시 이혼한 못생긴 잔. 졸업하자마자 징집을 피해 캐나다로 간 빌리. 빌리와의 약속을 어긴 도러시. 실직한 목사 폴렛. 비밀의 무게에 눌리고 있는 엘리. 청소용품 사업으로 성공했지만 글쓰기에 목마른 마브. 그리고 살해당한 캐런과 익사한 하먼. 이들의 이야기가 두 동창생의 추도식 전날과 당일 이틀에 걸쳐 일어나는 일들과 번갈아 보여진다.
모든 캐릭터가 뚜렷하다. 어느 한 명도 작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혼자 살아나 혼자 움직이고 생각하는 듯 하다. 심지어는 데이비드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상사의 목소리마저. 흔할 수도 있고 가쉽처럼 소비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 한 명 한 명이 살아온 이야기는 나름의 무게를 지니고 있고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은 서로를 감싸안을 줄 안다. 중년의 나이에도 그건 희망일 것이다. 좋은 작가를 발견하게 되어 기쁘다.
25. 달력 뒤에 쓴 유서(민병훈. 민음사. 2023. 164쪽)
: 김영하 작가의 『아랑은 왜』가 생각나는 메타 소설. 자전 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다. 음독으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 어머니가 떠나버린 후 아버지와 둘이 살던 고등학생 화자는 못질하는 소리를 잠결에 들었다. 다음날 잠긴 문의 창을 깨고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했던 화자는 시간이 흐른 후 옛집이 있던 마을에 돌아온다. 글쓰기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화자는 자신의 의식 깊은 곳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뭔가가 있음을 알고 있다.
묵직하다. 아버지의 죽음만이 아니라 화자의 고민이, 화자와 어머니의 관계가, 글쓰기가 너무 무겁다. 모든 삶은 견뎌야 할 무게를 지니고 있지만 어떤 삶은 옆에서 보기에도 더 무거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무게를 모두 덜어내야 하는 걸까. 모든 상처가 지워지고 모든 흔적이 사라져야 하는 건 아니다. 비록 소설의 말미에도 화자가 편안해 지지는 않으나, 적어도 한발자국 정도는 움직였으리라.
26. 브로큰 하버(타나 프렌치, 박현주 역. 엘릭시르. 2023. 808쪽)
: 더블린 외곽의 브라이언스 타운. 한때 바닷가의 고급 전원주택 단지를 지향했으나 지금은 짓다 만 집들에 중장비와 자재가 흩어져 있는 을씨년스러운 동네일 뿐이다. 이 곳의 몇 안 되는 입주민 중 한 가족이 몰살당한다. 어린 두 아이는 질식사하고 아버지는 과다출혈로 사망한 가운데 어머니만이 얼굴과 몸의 자상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숨이 붙어 있다. 살인수사과에서 높은 해결률을 보이는 마이클 케네디 형사는 막 제복경찰을 벗어난 신입 리처드 커런을 데리고 출동하는데, 외부 침입 흔적은 없지만 온 집안 곳곳에 벽이 뚫려 있고 아기 모니터가 5개나 발견된다.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 범인이 밝혀지는 단 며칠간의 이야기를 상세히 서술했지만 전혀 지루하거나 늘어지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모든 움직임과 대화가 의미있고 흥미롭다. 잠깐씩 등장하는 인물마저 캐릭터가 살아있다. 다만 결말은 좀 맘에 안 들었다. 리치는 공감 능력 때문에 좋아했고 어쩌면 다음 작품의 주인공이 될 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그 성향을 그런 식으로 발휘하다니 정말 실망했고 스코처라 불리는 케네디 형사의 대처 또한 미진했다. 그리고 케네디의 약점이 되어버린 디나는 짜증스러웠다. 그래도 다음 작품에서 다시 케네디가 등장하기를, 다시 재기하기를 바란다.
27. 트러스트(에르난 디아스, 강동혁 역. 문학동네. 2023. 488쪽)
28. 아라의 소설(정세랑. 안온북스. 2022. 216쪽)
: 엽편 소설들. 내가 좋아하는 이 작가의 발랄함과 진중함과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이 모두 드러난다. 지루한 게 하나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 솔직히, 시는 지루했다 - 대체로 다 좋았다. 평범하지만 특별한 아라의 이야기도 있고 아라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매력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도 있다. 가장 좋았던 건 마지막 작품 「현정」. 아마 많은 독자들도 그러하겠지만 나와 가장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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