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독서 목록

1. 밤은 고요하리라(로맹 가리, 백선희역. 마음산책. 2014. 323쪽)
: 로맹 가리가 이야기하는 로맹 가리. 오랜 친구의 이름을 빌어 스스로의 과거와 현재를 말한다. 『새벽의 약속』에서 이야기했던 여리고도 강했던 어머니의 손길로 만들어진 자신과 자신이 보는 유럽과 미국, 그리고 강한 자기확신과 자기애.

그의 책을 읽을 땐 늘 그렇기는 하지만 이 책도 모든 페이지에 도그지어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느꼈다, 내가 왜 그를 사랑하는지.


2. 도시와 나(정미경 외. 바람. 2013. 274쪽)
: 여러 작가들이 쓴 세계 도시의 이야기. 윤고은과 한은형을 기대하며 집어들었는데 백영옥이 예상보다 더 좋았다. 물론 윤고은과 한은형도 좋았지만.

원래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낯선 곳을 무작정 헤매고 싶은 기분. 이 책의 작품들은 여행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더 많았지만, 그리고 난 내가 그런 작품들을 더 좋아할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막상 읽고 나니 그 여정을 따라가고 싶은 것은 함정임의 <어떤 여름>.


3. 658, 우연히(존 버든, 이진 역. 비채. 2011. 588쪽)
: 은퇴한 강력계 형사 데이브. 아내와 한적한 시골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왠지 아내는 조금씩 불만을 가지는 것 같고, 은퇴 후 시작한 살인자들의 머그샷을 갖고 하는 회화 작업도 지지부진하다. 어느 날 대학 동창인 마크가 협박 편지를 받았다며 찾아오고 얼마 후 마크는 살해당한다.

재밌었다. 시간적 배경이 겨울이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소설 자체도 차갑고 눅눅한 느낌. 범인은 프롤로그에서 어슴프레 실루엣을 비치고, 이 사건의 연루된 사람들 중 가장 먼저 의심이 드는 한 명이 바로 그 사람이기도 했지만 범인의 동기가 궁금하기도 하고 연속되는 살인 때문에도 흥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시리즈 계속 찾아 읽어야겠다.


4. 일은 소설에 맡기고 휴가를 떠나요(러셀 뱅크스 외, 강주헌 외 역. 홍시. 2015. 760쪽)
: 일과 직업에 관한 소설들. 출근길에 들고 나가기는 힘들었지만 - 손목 나갈 뻔 - 차근차근 읽다보니 책장 넘어가는 게 아쉬웠다. 작품들 수가 많아서이기도 했고 작가들이 워낙 쟁쟁해서이기도 했지만 가장 좋은 작품을 몇 개만 꼽기는 힘들 정도로 다 괜찮았다. 그래도 그 중에서 꼽자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5. 소각의 여왕(이유. 문학동네. 2015. 234쪽)
: 고물상을 운영하는 지창씨. 한때는 엄청난 호황을 누렸지만 이제 고물상은 현상유지도 힘들다. 재수 하다 때려치고 아버지의 일을 돕기로 한 딸 해미. 언제부턴가 몰래 일을 나갔다가 집에 들러 샤워까지 하고 오는 수상한 지창씨를 다그쳐 죽은 사람의 집을 청소한다는 걸 알고 해미는 그 일을 맡아서 하기로 한다.

해미에게 의뢰되는 유품정리 일의 여러 사연들과 지창씨가 홀딱 넘어간 휴대폰 부품 속 희귀금속 추출 등의 에피소드가 무심한 듯 묵직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뒤늦게 가슴이 아린다. 결국 아무도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못 벗어나는구나. 그래서 결말이 더 마음 아팠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빨리 주어진 행운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쨌든 오랜만에 소재도 신선하고 글솜씨도 나쁘지 않은 우리 작가를 발견해서 기쁘다.


6. 향수를 모으는 여자(캐슬린 테사로, 한정은 역. 영림카디널. 2015. 483쪽)
: 1950년대 런던, 아이가 없는 그레이스는 남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가기 싫은 파티에 참석해야하는 현실이 싫다. 이런 그레이스에게 파리의 법무법인으로부터 거액의 유산 상속자가 되었다는 편지가 오고, 그레이스는 파리로 날아간다.

그레이스의 현재와 그레이스에게 유산을 물려준 에바 돌시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이 책에 대한 정보 없이 집어들었는데 예상보다 가벼운 이야기라 의외였지만 부담없이 편하게 읽었다. 교정 오류는 잦았지만(특히 불어 발음은 정말...하아...). 50년대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레이스의 마지막 망설임은 꽤나 답답했다. 하지만 이런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해피엔딩. 어쨌든 그레이스는 부러웠다.


7. 일곱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김미월 외. 열림원. 2011. 249쪽)
: 비와 관련된 일곱 편의 소설들. 각자의 개성이 드러났고, 일곱 편 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비와 관련 없어 보이는 - 억지로 끌어다 붙인 듯한 - 작품도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역시 김이설. 무기력한 그녀에게 화도 났고 물론 마음 아프기도 했지만 역시 결말의 강렬함이란.


8. 박물관의 뒤 풍경(케이트 앳킨슨, 이정미 역. 현대문학. 2016. 580쪽)
: 한 소녀가 자신이 잉태되던 순간부터 그 이전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 그리고 이후 자신과 자매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저 덤덤한 여인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나름의 비밀이 숨어 있었다. 사실 그 비밀은 화자인 루비가 이모 집으로 보내졌던 4살의 이야기에서 이미 눈치챌 수 있었지만 그 후의 작은 반전은 가슴 아팠다.

어쩌면 그 시기에 자란 아이들의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을 이야기이지만 사실 평범함이라 칭하는 많은 삶들 중 어느 것도 특별하지 않은 삶은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 살아 있는 한은 살아가야 하고, 그 살아냄이란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으니.


9. 양 목에 방울달기(코니 윌리스, 이수현 역. 아작. 2016. 365쪽)
: 단발머리 유행을 연구하는 샌드라. 하이텍 연구소에 소속된 그녀는 연구보조원 플립이 또다시 소포를 잘못 갖다주자 직접 주인을 찾아주려다 혼돈을 연구하는 생물학부의 베넷과 알게 된다.

결국엔 사랑 이야기. 처음에는 플립이 너무 비호감인데다가 화자와 계속 마주치며 에피소드를 만들어가는 바람에 조금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냥 체념하고 받아들이면 편한 법. 이 이야기는 모두가 알지만 샌드라만 모르는 그 사랑을 향해 흘러간다. 누군가는 이 책에서 유행의 사회학, 특히 혐오 유행에 주목할 테지만 난 그저 샌드라가 언제 깨달을 지가 가장 흥미진진했다. SF지만 SF같지 않아서 나같은 초심자도 쉽게 읽을 수 있었던 재밌는 책.


10. 디어 랄프 로렌(손보미. 문학동네. 2017. 357쪽)
: 지도교수로부터 연구실 퇴출을 통보받은 종수. 오랜 유학생활을 정리하려 짐을 싸던 중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받은 오래된 청첩장을 발견한다. 열 여덟 살, 랄프 로렌에게 쓴 편지를 영역해 달라던 수영의 기억을 떠올리던 종수는 랄프 로렌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작가의 전작보다는 좀 뭐랄까, 비어 있는 듯 하달까. 허술하다고까지 할 건 아니지만 헐렁한 느낌이었다. 단편은 쫀쫀했는데. 그래도 담담하게 얘기해 나가는 종수의 목소리가 싫거나 재미없었던 건 아니었다. 결말도 평이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뭔가를 기대하진 않았다. 어쨌든 이 작가는 계속 읽을 생각이다.


11. 옥스포드 살인 방정식(기예르모 마르티네스, 김주원 역. 웅진지식하우스. 2007. 290쪽)
: 아르헨티나에서 옥스포드로 유학을 온 화자. 지도교수가 소개해 준 노부인의 집에 짐을 풀었는데 며칠 뒤 집 앞에서 저명한 수학자 아서 셀덤과 마주치고, 노부인을 방문하러 온 그와 함께 집안에 들어갔다 살해된 노부인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살인사건의 단서가 셀덤의 우편함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책을 집어들 때 복잡한 수학 공식 얘기가 나오면 그 부분은 그냥 지나가야지 했는데 지나갈 부분이 딱히 없었다. 다만 추리소설로서 이 책은 글쎄... 재미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결론은 허무했다. 그런 짐을 화자에게 던져놓으면 어쩌라는 건지. 그냥 그 죽음들에게 책임을 느낀다는 한마디면 끝인건가. 구미를 당길만한 단서를 제때 뿌려주지 않는 것도 별로였다.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진범'이 처음부터 의심스러웠던 그 사람이라는 것도, 그리고 동기와 은닉해 준 사람의 이유가 뻔하다는 것도 별로. 암튼 이 작가는 앞으로 패스. 범인 너무 얄미워.


12. 수영하는 사람(추차 방크, 김완균 역. 시공사. 2015. 419쪽)
: 어느 날 엄마는 말없이 떠나버렸다, 독일로. 아버지는 엄마의 사진을 보면서 문득 '잠수'해 버린다. 어린 남동생 이스티와 나(카타)를 데리고 아버지는 여기저기를 떠돈다. 잠시 동안은 소피 고모네서, 또 그 후에는 아기 아줌마와 졸탄 아저씨네서... 나는 에바 아줌마와 아버지와 카르치 아저씨, 아기 아줌마와 졸탄 아저씨, 비락 언니를 지켜 보며 그리고 외할머니가 들려주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른이 되어간다.

1950년대 헝가리 서민들이 이어가는 소박한 삶의 이야기이면서도 호수 위에 피어나는 물안개처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기도 했다. 카타의 나직하면서도 담담한 목소리는 이 모든 일들이 그저 심상히 흘러가는 듯 느껴지게도 하지만 가장 묵직한 슬픔은 아주 늦게야 떠오르기 마련이니까. 아름다운 이야기들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수영하는 법을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13. 빛 혹은 그림자(로런스 블록 외, 이진 역. 문학동네. 2017. 439쪽)
: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소설로 쓴 단편집. 사실 스릴러들인 줄 알았다가 예상 외로 잔잔한 작품들이어서 정말 좋았다. 나 이 책 리뷰도 읽었는데 왜 스릴러라고 생각했지... 암튼 책이 꽤 묵직해서 손목이 좀 아팠는데 그 아픔을 잊게 해준 이야기들이 꽤 있었다. 가장 재밌게 읽은 건 <밤의 창문>인데 계속 생각나는 건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 그림과 가장 어울렸던 건 <바닷가 방> 이었다.


14. 달이 뜨면 네가 보인다(전아리. 문학동네. 2016. 255쪽)
: 막장인 듯 아닌 듯, 사랑(?) 이야기. 화자는 대학생. 문제 많은 오빠의 교통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간 병원에서 사고의 상대방인 학교 강사 박승안과 알게 되고, 그와 연애 비슷한 걸 시작한다. 여기에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을 매혹시키던 오빠와 그가 교도소에 가게 된 사건의 피해자이면서 '나'의 친구인 진아, 그리고 박승안의 아내까지 가세 된 이야기가 전개된다.

부분부분은 아주 현실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스토리. 등장 인물 누구에게도 공감할 수 없고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향도 살짝 어긋나는 느낌. 뭐랄까, 시청자들의 댓글 때문에 이야기의 방향이 바뀌어버리는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를 놓지 못하는 건 뛰어난 문장력 때문. 문장 하나만 놓고 보면 정말 아깝고도 안타까운 기분이다.


15. 눈에서 온 아이(에오윈 아이비, 이원경 역. 비채. 2016. 523쪽)
: 1920년대 알래스카. 오래 전 아이를 사산한 후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한 메이블과 잭 부부는 이 곳에서 힘겹게 정착하려 노력 중이지만 외로움과 궁핍함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 부부 사이마저 멀어져 가는 듯 하던 어느 눈 오던 밤, 예전 기분을 오랜만에 느끼며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어린 소녀처럼 예쁘게 꾸며주고 잠들었는데 다음 날 반짝이는 눈 사이에서 눈사람에게 입혀줬던 목도리와 장갑을 낀 아름다운 금발 소녀가 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목격된다.

(아래는 스포)
동화 같기도, 조금은 현실적이기도 한 이야기. 사실 동화 쪽 비중이 더 높기는 하지만, 사랑 때문에 가야할 곳에 가지 못하고 머물다가 사라져 버리는 여인은 비단 20세기 초반에만 혹은 알래스카라는 척박한 땅에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차라리 파이나가 겨울 동안만 머물 수 있음을 모두가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항상 함께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잠시의 부재를 감수하고라도 긴 세월을 함께 하는 차선을 선택해야 함을 알았다면. 결말을 읽은 누군가는 그 안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을 지 모르지만 난 아니다. 내게 이 결말은 꽉 닫힌 비극이었다. 그래도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은 기대된다.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8/02/02 17:31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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