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독서 목록

1. 일곱 성당 이야기(밀로시 우르반, 정보라 역. 열린책들. 2014. 494쪽)
: 프라하의 여섯 성당을 배경으로 하는 고딕 스릴러. 이 책을 읽은 직후 프라하에 갈 수 있다면 정말 좋을 듯.

어릴 때부터 중세 건물에 손을 대면 그 건물에 얽힌 역사적 사건 속으로 들어가 직접 겪는 환상을 보는 K. 역사학도였다가 경찰이 된 그는 맡은 임무에서 실패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가 성당 종루에 매달린 사람을 구한 것을 계기로 복직한다. 서장에게서 그뮌드라는 의문의 남자를 소개받고 함께하게 된다.


이 책은 성당을 배경으로 하긴 하지만 스릴러답게 등장 인물들의 행동과 심리에 더 눈길이 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지식은 체코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체코인들 자신의 시선. 학창시절 기독교와 뗄 수 없는 유럽의 역사를 그저 훑듯 주워들은 게 다인 내게 또다른 시선을 갖게 해 주었다. 다만 부족한 내 지식은 또 다른 곳에서 더 채워야겠지.


2. 저녁이 깊다(이혜경. 문학과지성사. 2014. 284쪽)
: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뭐랄까, 한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느꼈달까. 이건 단순히 내가 이 책 속의 시대보다 늦게 태어나서도 아니고 시골 소읍에서 살아본 적 없어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작가 탓을 하는 건 더더욱 아니고.

아마도 이런 소설이 드물지 않아서일 것이다. 시골 출신 국민학교 동창의 인생사. 가난하기 때문에 유일하게 잘 하는 공부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지표, 비교적 넉넉한 집안이지만 예민한 기주, 졸부의 사생아로 또 유일한 아들로 태어나 내세울 거라곤 돈 밖에 없는 못난 인간 형태 등 인물들이 꽤 전형적인 것도 내 맘을 짜게 식혔다. 그래도 기주만큼은 맘에 들었다. 드문 캐릭터라서. 어쨌든 읽다 보니 조금은 지치는 느낌이었다. 지표는, 그리고 병묵은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사회면에서,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이라서 특히 더.


3. 내 러시아 할머니의 미제 진공 청소기(메이어 샬레브, 정영문 역. 시공사. 2013. 323쪽)
: 화자의 외할머니 토니아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이스라엘 '모샤브'(촌락 공동체) 나할랄의 초창기 이주자이다. 할머니는 결벽증이 있다. 인생 최대의 적인 먼지를 집에 들이지 않기 위해 손님도 현관 밖에서 맞고 샤워실도 외양간에 설치했을 정도. 외할아버지 아하론에게는 힘들게 새 나라를 세우는 동족을 외면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버린 형이 있는데, 미국에서 성공한 이 형 예사야후는 동생에게 계속 달러를 보내지만 고스란히 되돌려 받을 뿐. 멀리 바다 건너에서도 제수인 토니아의 결벽증을 들은 그는 동생에게 미국제 진공청소기를 보낸다.

진짜 재미있었다. 작가의 유머 감각과 따뜻한 시선은 단지 이게 자전적인 이야기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먼저 읽은 작품과는 또다른 맛이 있었다. 토니아의 괴팍함을 실제로 맞닥뜨렸다면 감당할 수 없었겠지만 책 속의 그녀는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장례식 장면은 말 그대로 내게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흘리게 했다. 사실 가장 맘에 들었던 장면은 화자와 에이미의 침대(?)신.


4. 지푸라기 여자(카트린 아를레, 홍은주 역. 북하우스. 2015. 309쪽)
: 영화 <은밀한 유혹>의 원작. 모르고 대출했다. 영화를 이미 봤기 때문에 알았으면 안 빌렸을 것. 내용도 영화랑 거의 똑같다. 굳이 책과 영화를 비교하자면, 책이 영화보다 더 매력적이기는 하다. 다만 회장의 비서와 간병인의 관계, 그리고 결말은 다르다. 영화를 안 보고 책을 읽었더라면 좋았을 걸...


5. 마리오네트의 고백(카린 지에벨, 이승재 역. 밝은세상. 2015.544쪽)
: 먼저 읽은 이 작가의 『빅 마운틴 스캔들』처럼 엄청난 흡입력과 긴장감, 그리고 약간의 찜찜함을 남기는 스릴러. 보석상을 턴 강도단 네 명. 리더격인 라파엘은 다친 동생 윌리암을 치료하기 위해 도주 중 시골의 수의사 상드라를 납치하여 그녀의 집을 아지트로 삼는다. 상드라를 제압한 강도단은 상드라의 이간질에 분열되고, 곧 출장갔던 상드라의 남편이 들이닥친다.

책 소개에 이미 나와 있지만 스포일러 같아서 직접 얘기하기 싫은 이 소설의 주요 포인트는 괴물 대 괴물이라는 점. 초반에는 이 사람이 괴물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더한 괴물이 등장하고, 상대적으로 덜 악한 사람을 응원하게 된다. 하지만 '덜 악한'이라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그 구렁텅이에 걸어 들어간 건 그 자신이다. 스스로의 악이 더한 악 속으로 그를 던져 넣은 것이다. 읽은 직후에는 그의 최후가 안타까웠지만 어쩌면 그건 그에게 가장 합당한 결말이었을 지도.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그녀의 독백은 내게 찜찜함을 안겨 주었다. 그녀의 너덜너덜한 머릿속은, 그리고 마음은 이제 무엇을 향할 것인가.


6.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프레드릭 배크만, 이은선 역. 다산책방. 2016. 522쪽)
: 이 작가는 처음인데, 하도 주위에서 『오베라는 남자』에 대한 찬사를 많이 들어서 편견을 좀 갖고 있었다. 어디, 얼마나 잘 쓰는지 볼까 하는 생각. 그런데 읽다보니 작가에게 미안해졌다. 이렇게 따뜻한 시선이라니. 마치 이 이야기가 소설적인 계산이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꾸밈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소망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정말 이런 할머니와 이런 아파트와 이런 상처를 극복한 사람들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따뜻함.

나이에 비해 똑똑한 일곱 살 엘사와 이혼 후 각자의 새로운 인생 파트너를 만나 새로운 가족을 이룬 부모. 욕과 담배를 달고 사는 의사 출신의 할머니. 그리고 아파트의 이웃들. 예상보다 빨리 할머니는 암으로 죽고, 할머니가 남긴 편지들을 배달하는 엘사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깊은 이야기일 줄, 이렇게 눈물 나는 이야기일 줄 몰랐다.


7. 미안해, 벤자민(구경미. 문학동네. 2008. 270쪽)
: 읽으면서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어, 싶었다. 정신병원에 드나들면서 삼촌 회사에서 결재 서류에 기계처럼 사인만 하는 화자야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그렇다 치고, 불륜을 저지르는 아내를 경매 사이트에 올리는 무능력 지질이 남편이나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어이없게 당당한 그의 아내나, 잘 알지도 못하는 대학 동창을 아내로 점찍어두고 자신만의 상상을 펼치는 인간이나 다 어이없기는 마찬가지. 화자의 약을 받아먹는 벤자민만 불쌍하다. 요절하기까지...

이 작가는 늘 사회의 낙오자에게 관심이 많은 듯. 그래도 전에 읽은 작품들의 등장 인물들은 어느 정도 공감을, 혹은 공감까진 아니더라도 그럴 수 있겠다는 이해를 불러일으켰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계속 혀를 차게 했다. 그래도 재미없거나 짜증나지는 않았다.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건 결국 작가의 능력이겠지. 리뷰를 쓰다보니 나 이 작가도 꽤 좋아하는 것 같다.


8. 스톤 다이어리(캐롤 실즈, 한기찬 역. 비채. 2015. 483쪽)
: 읽기 전에 기대가 좀 컸기에 읽으면서 약간은 시시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재미없지는 않았다. 캐나다의 시골에서 엄마를 잃으며 탄생해서 미국의 플로리다에서 죽기까지, 한 여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비록 자신을 출산하며 엄마가 죽긴 했지만, 그리고 신혼여행에서 첫번째 남편을 잃긴 했지만 무해하고 평범한 듯 하지만 자신만의 색을 빛냈던 한 여인의 생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거면 됐다.


9. 뉴욕 미스터리(리 차일드 외, 메리 히긴스 클라크 엮음, 박미경 외 역. 북로드. 2016. 446쪽)
: 이 책에서 말하는 미스터리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작품들에 대한 내 느낌도 장방형으로 쫙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좋았던 건 정말 좋았지만 아무 맛도 안 나는 작품도 꽤 있었다. 뉴욕의 랜드마크들을 배경으로 하기에 역시나 여행 전에 혹은 여행 중에 들고다니며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전의 미드나 영화에서 보던 뉴욕과는 다른 느낌. 가장 좋았던 건「이상한 나라의 그녀」와 「진실을 말할 것」. 「지옥으로 돌아온 소녀」는 많이 슬펐다.


10. 아오리를 먹는 오후(김봄. 민음사. 2016. 283쪽)
: 어리고 서툰 청춘들이 상처 받는 이야기...라고 해야하나. 생각보다 빨리 어미에게서 떨어져 나온 어린 짐승들이 비틀거리다 결국 천적에게 당하는 이야기들 같았다. 모든 주인공들이 10대는 아니었으나 그만큼 미숙하고 어리석었다. 하지만 손 내밀 수 없는 느낌. 내 시선이 끝까지 따뜻해지지 않았던 건 내 탓만은 아닐 것이다.


11. 픽션(닉 혼비 외, 이현수 역. 미디어2.0. 2009. 247쪽)
: 역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아름답고 이상한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아름다운 이야기는 없었고 이상한 이야기만 가득했다. 그래도 「태양새」와 「여섯 번째 마을」은 좋았다. 아무래도 이렇게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은 책은 나랑 안 맞나 보다. 최근 들어 다 실패네.


12. 한 스푼의 시간(구병모. 예담. 2016. 253쪽)
: 아내를 잃었고, 어릴 때 유학 보내 그 곳에서 정착해서 살던 하나뿐인 아들도 죽었다고 한다. 어느 날 국제택배로 아들이 보낸 상자가 도착하고 그 안에는 10대 소년의 모습을 한 가사 로봇이 있다. 혹시 둘째가 생기면 주려고 했던 이름 '은결'을 붙여주고 자신의 세탁소 일을 돕게 하는 명정. 은결과 명정과 동네의 소녀 시호와 소년 준교의 이야기.

내가 반려동물을 들이지 않으려는 가장 큰 이유는 나보다 수명이 너무나도 짧기 때문이다. 그 이별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하지만 내가 죽은 뒤에도 남을 로봇이라면. 게다가 내 죽음이 상처가 되지 않기까지 한다면. 거기에 더해 비록 수많은 연산과 학습과 기억의 결과일지라도 조금씩 사랑을 알게 된다면... 내가 책에서 만난 비생물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애틋했다. 사실 내가 그를 '비생물'이라 칭하는 것도 인간의 오만일 뿐이지만, 그리고 로봇이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된다는 것도 클리셰일 뿐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특히 동화같은 마지막 장면이.


13.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패니 플래그, 김후자 역. 민음사. 2015. 531쪽)
: 1980년대 버밍햄, 주부 에벌린은 남편과 함께 요양원에서 지내는 시어머니를 방문한다. 시어머니와의 불편한 시간을 피해 밖으로 나온 에벌린은 휴게실에서 스레드굿 부인과 마주치고, 스레드굿 부인은 친근하게 그녀에게 자신이 살았던 휘슬스톱과 스레드굿 집안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특히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에 직진했던 사랑스런 이지의 이야기를.

아, 내게도 꿀벌조련사가 있었으면. 이 곳에서 휘슬스톱 카페가 있었으면. 흑인이건 떠돌이건 누구든 배가 고프면 바비큐 샌드위치를, 풋토마토 튀김을 먹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트럭을 몰고 달려오는 여인이 있으며, 굶는 흑인들을 위해 기차에서 생필품을 빼돌리는 미지의 인물이 있었으면. 그렇다면 대공황이 닥쳐도, 폭력 남편이 쫓아와도, KKK단이 몰려와도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웃어넘길 수 있을 텐데.


14. 나는 농담이다(김중혁. 민음사. 2016. 239쪽)
: 그래. 농담으로 남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백퍼센트 코미디 클럽 송우영의 농담들은 내 유머코드와 맞지 않았지만, 검은 지면의 흰 글씨들은 슬프면서도 아름다웠고 조금 웃겼다. 그리고 어머니의 편지는... 글쎄.

낮에는 컴퓨터 수리공, 밤에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화자 송우영이 어머니 유품 중 이부 형에게 남긴 편지를 발견하고, 우주 미아로 사라진 그에게 편지를 전달하려는 이야기. 이야기가 짧아서 아쉬웠다.


15.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로버트 A. 하인라인, 최세진 역. 아작. 2016. 404쪽)
: 이 작가의 작품은, 그리고 SF는 내게 모 아니면 도였기 때문에 약간 긴장하며 읽었는데, 다행히 재미있었다. 우연히 우주복을 손에 넣은 고등학생 킵의 우주 모험기. 킵이 우주복을 개조하는 초반부는 좀 흥미가 떨어졌지만 처음 우주복 오스카를 입고 나간 마을 공터에서 교신에 성공하고 우주선을 타게 된 뒤부터는 정말 재미있었다. 예상보다 멀어지는 출장. 특히 맘에 들었던 건 엄마생물. 어쩜 이 작가는 이런 캐릭터를 생각해낼 수 있는지. 최근에 만났던 지인에게 보내주고 싶은 엄마생물. 어쨌든 내가 SF에서 더 멀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16. 담배를 든 루스(이지. 웅진지식하우스. 2016. 303쪽)
: 방세와 학비를 벌기 위해 '날씨연구소'에서 일하는 '나'. 이 곳에 방문해서 한 잔 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의,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있는 사물들을 볼 수 있다. 반도네온이거나 연필깎기거나 혹은 또다른 무엇이거나. 텐트를 치고 살아야 하는 예비감독, 내 키와 천장 높이가 똑같은 싸구려 전셋집, 가출해 버린 베개... 이상한 나라에 있는 것 같지만 돌아보면 바로 지금 이 곳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N포 세대의 이야기가 식상함과 신선함의 경계에 서 있는 건 작가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 책은 나쁘지는 않았다. '나'의 진짜 이름이 한번도 불리지 않은 것도, 사연이 구구절절 풀어지지 않은 것도.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7/03/05 01:39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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