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독서 목록

1. 아담의 사라진 여인(아스트리드 로젠펠트, 전은경 역. 다산책방. 2011. 455쪽)
: 대학 졸업 후 이리저리 부유하는 삶을 살던 유대인 에드워드는 할머니의 부고를 받고 옛집에 갔다가 다락방에서 집안의 문제인물이었던 작은 할아버지 아담의 일기를 발견한다. 2차 대전 발발시 집안의 돈을 모두 갖고 도망가버려 할머니와 어머니를 미국으로 빼낼 수 없게 했다던. 아담이 폴란드에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펼쳐진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이야기들 중 그나마 덜 끔찍했다. 초중반까지는 장미 품종 개발에 천재성을 보이는 아담이 꽤 효율적으로 숨어 있는 이야기라 큰 동요없이 읽을 수 있었다. 다만 에드워드의 사랑은 한심하고 게을렀고, 아담의 사랑은 맹목적이었고 허무했다. 차라리 부슬러 중령의 사랑이 더 애틋하고 아름다웠을 정도.

난 아직도 모르겠다. 사랑이 이긴 걸까? 무엇에? 인간이 저지른 짓에? 하지만 사랑도 인간의 일인걸. 계속 생각해 봐야겠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건지. 에다와 엄마와 결국엔 아담까지. 자유와 자유를 맞바꿨다지만 이건 등가교환이 아니었다. 다만 안나가 행복했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해야할런지도...


2.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조영아. 한겨레출판. 2006. 302쪽)
: 다리에 철심을 박은 뒤 아무 것도 못하는 무력한 폭파기술자 아버지와 생활력 강한 엄마, 지적 장애인 형과 함께 옥탑방에 사는 열 세 살 소년의 눈으로 본 세상. 조금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맘이 아플 수도, 불편할 수도 있다. 내게는 뻔하게 읽혔다. 여우라는 상징이 의미하는 소년의 꿈, 희망, 미래는 맘에 들었지만 그 또한 낯설지는 않다. 도심에서 눈에 띈 여우가 개 혹은 고양이일 것이라 취급당하는 현실도. 그래도 편하게 읽히는 건 이 작가의 큰 장점인 듯. 이 책이 이 작가의 첫번째 장편이었고 난 다른 장편이 이 책보다 나았음을 기억하고 있으니 앞으로 이 작가를 꾸준히 읽을 생각이다.


3.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한강. 문학과지성사. 2013. 165쪽)
: 난 확실히 소설가 한강보다 시인 한강이 더 좋다. 그의 소설들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소설보다 때로는 덜, 때로는 더 처연한 싯구들을 읽으며 왠지 그녀를 좀 더 알게 된 기분이었다. 가장 좋았던 시는 <괜찮아>. 평범한 시어가 날 가장 깊이 위로해 주었다.


4. 미친 별 아래 집(다이앤 애커먼, 강혜정 역. 미래인. 2008. 403쪽)
: 2차 대전 중 폴란드 바르샤바의 동물원장 부부 이야기. 에세이도 소설도, 전기도 아니다. 나치 점령하에서 나치의 이른바 순수혈통 되살리기 연구의 중심이었다가 식량 공급을 위한 돼지 양육장이었다가 다시 채소밭으로 바뀌었다가 곧 병사들의 추위를 막아줄 모피 생산장으로 바뀌는 동물원을 지키면서 끝까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그 와중에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도망시킨 이야기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라면, 그냥 시간순으로 쭉 서술하기만 해도 엄청난 감동을 줄 수 있었을텐데. 하지만 이 책의 서술은, 한마디로 엉성하다. 게다가 너무 자주 옆길로 샌다. 이 책을 선택한 사람들은 나치의 순수혈통동물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는 것만 알면 되지 타팬말이나 오록스의 모습이나 생몰사에는 관심이 없다. 모은 자료를 모두 책 안에 넣으려는 욕심을 좀 버렸다면 정말 써야했던 다른 이야기 - 처음부터 어떻게 유대인들이 동물원 빌라를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얀이 레지스탕스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전쟁 중 동물들에 관한 더 많은 에피소드 등 - 를 뛰어넘지 않아도 되었을 테고 나도 읽으면서 이렇게 자주 책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5. 데스케어 주식회사(고은규. 뿔. 2012. 295쪽)
: 몽유병이 있는 청미는 끊임없이 달리기를 하는 먹규를 만나 사귄다. 먹규의 엄마에게서 교제 허락을 받는 조건 중 하나인 '주식회사에 다닐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청미는 독거인들을 위한 데스케어 주식회사를 차린다.

고독사는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볍게 혹은 깊게 걱정해 본 일일 것이다(나같은 경우에는 PMS때 꽤 자주 등장하는 걱정거리 중 하나이다). 이렇게 매일 생존확인을 해주고 사후처리까지 해주는 서비스라면, 시장성 있을 듯. 하지만 이야기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예상하기 싫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래서 결국에는 좀 흔해져버렸다. 용두사미랄까. 물론 별비의 이야기는 슬펐지만... 한국 소설들의 전형을 본 느낌이었다. 소재 때문에 기대했는데, 아쉬웠다.


6. 나의 아름다운 책방(로널드 라이스 엮음, 박상은, 이현수 역. 현암사. 2014. 522쪽)
: 음... 별점을 준다면 10점 만점에 5.5점 정도? 아름답고 아늑한 서점들을 상상 속에서 구경하는 재미는 괜찮았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대동소이했다. 동네의 (작은) 서점을 우연히(운명적으로) 발견해서 들어갔다가 뛰어난 능력자인 서점 주인과 이래저래 친분을 맺게 되고, 작가 자신에게 닥친 위기(대부분은 생전 처음하는 낭독회)를 훌륭한 서점 주인의 도움으로 이겨낸 후 더 돈독해진 관계...의 전개이다. 글을 쓴 작가 대부분을 모르는 무식자라서 이 책이 더 회의적으로 느껴졌을 지도 모르고, 온라인 서점과 맺는 정도의 인간적인 관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대인기피증 환자라서 시큰둥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동네 서점 살리기에는 이 책은 하등 도움이 안 된다, 도서정가제 만큼이나.


7.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구효서. 해냄. 2016. 435쪽)
: 이 작가의 책들 중 가장 좋았다. 부모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동양계 입양아 수. 사고로 기억을 잃고 친구 엘린과 엘린의 애인 리의 보호를 받으며 아프리카의 시골 음바니에 머물고 있다. 기억을 찾기 위해 쥐고기를 꼭꼭 씹어 먹으며 엘린과 리의 사랑을 지켜보는 수와 미국에서 수를 찾기 위해 아프리카까지 와서 그녀를 돌봐주는 엘린, 그리고 비밀을 가진 리의 이야기의 파편들이 수의 기억이 살아옴에 따라 조금씩 맞춰져 큰 무늬를 만들어간다.

원래도 이 작가의 서늘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좋아했지만 이 책은 정말 아프리카의 새벽처럼 차갑고도 깊었다. 마치 촛불의 불꽃 한가운데에 손가락을 넣으면 뜨거움 대신 차가움이 느껴지듯. 엘린의 마지막 행동을 보면서 이건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그녀답지 못해, 라고 생각했다가 문득 스스로에게 너라면 어떡할건데?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괜히 리가 미웠다.


8.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알레산드로 보파, 이승수 역. 민음사. 2010. 171쪽)
: 카멜레온이거나 사자, 쇠똥구리거나 엘크 혹은 단세포 생물인 모든(?) 비스코비츠에 관한 20편의 이야기. 우화라거나 의인화라기보다는 동물의 습성을 가진 혹은 동물의 탈을 쓴 인간 이야기였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전갈 비스코비츠. 강렬했다. 그 다음은 상어. 아무래도 크고 강한 동물을 좋아하는 내 취향때문이겠지만 이야기 자체도 꽤 화끈했다.


9. 고요한 밤의 눈(박주영. 다산책방. 2016. 323쪽)
: 결국엔 한 권의 책에 관한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입중해 줄 일란성 쌍둥이 언니가 실종된 D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가, 곧 병원에서 스무 살 이후의 기억을 잃을 채 깨어나 자신이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X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들 뿐 아니라 X의 대학 친구라는 Y, 매너리즘에 빠진 소설가 Z, 스파이 보스 B 등 모두 결국에는 한 권의 책을 향하게 된다. 우리 모두 한 번쯤은 들어보았지만 결코 들어본 그 책은 아닐 한 권의 책.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난 매혹과 실망을 동시에 느꼈다. 그 책에 대한 매혹과 작가에 대한 실망. 하지만 이건 이 이야기 속에 온전히 빠져들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밖에서 바라보지도 못한 독자로서의 내가 판단할 사안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바로 뒤따랐다. 그 책은 기시감과 신선함을 동시에 줄 테지만, 작가의 순진한 생각처럼 그렇게 쓰여지진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어디선가 이미 수천 수만 권이 쓰여졌고 쓰여질 테지만 그 책은 그 책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10. 어디갔어, 버나뎃(마리아 셈플, 이진 역. 문학동네. 2016. 447쪽)
: 시애틀 초트 로즈메리 사립학교 졸업반 우수생 비. 졸업 선물로 온 가족이 남극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여행 이틀 전, 엄마 버나뎃이 사라졌다. 화장실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춘 버나뎃. 이 이야기는 버나뎃이 사라지기 전과 그녀를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건축계에서 '천재 장학금'을 유일하게 받을 만큼 뛰어났던 그녀가 왜 모든 것에 손을 놓아버리고 이웃은 물론 남편에게까지 맘을 닫았는지.

예상보다 깊고 따뜻하고 진했다. 그 와중에 버나뎃 남편, 비 아빠 엘긴은 완전 비호감.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가족 좀 돌아보라구. 이웃이나 혹은 생전 초면인 남 얘기는 믿으면서 왜 와이프는 안 믿는 건데? FBI 전화를 받았으면 아내에게 먼저 물어보기라도 했어야지. 어쨌든 이야기 자체는 맘에 들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우리나라보단 낫다고 생각했던 미국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현재 진행형이라니... 그래도 결말이 희망적이어서 다행이었다.


11. 특별한 배달(김선영. 자음과모음. 2013. 239쪽)
: 부모와 자식의 관계, 꿈을 잃은 혹은 꿀 수 없는 청소년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선택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왜 여기 있지?"(219쪽)라는 물음에 대한 답.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모든 게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태봉이가 전자(부정하는 사람)였다면 슬아는 후자였다. 그리고 난, 후자이면서 의심하는 사람이다(난 늘 그랬다. 내 부모도, 성격도 내가 이 곳에 놓여지기 전 모두 선택했던 것이라면? 사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더 즐거이 견딜 수 있을 테니). 그래서 슬아가 부러웠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건 분명 행운이니까.

사실 이 책의 스토리가 탄탄하다고 보긴 힘들다. 조금 헐겁다. 아버지와 태봉의 이야기도 그렇게까지 가슴을 깊이 울리지는 않고, 슬아와 엄마의 이야기도 완전하게 마무리되지 않는다(물론 상하 이야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완전한 화해도 큰 이해도 꾸준히, 끝까지 만들어 가는 거니까.


12. 탐정 매뉴얼(제더다이어 베리, 이경아 역. 엘릭시르. 2014. 498족)
: 무심코 집어온 책인데 의외로 대작(?)이었다. 그야말로 메타 추리극이랄까. 꿈을 매우 세세하게 꾸는 탐정회사 서기 찰스 언윈. 그가 담당하는 회사의 스타탐정 시바트가 꿈에 나온 어느날 아침, 그답지 않게 평소보다 늦게 집을 나선 언윈은 빗속을 뚫고 자전거를 달려 중앙역으로 간다. 며칠 전 눈에 띈 아름다운 그녀를 바라보기 위해. 그런데 회사 소속의 탐정 피스가 갑자기 나타나 언윈이 탐정으로 승진했다며 탐정 매뉴얼을 건넨다.

진짜진짜 재미있었다. 몽환적이었고(늘 비가 오는 항구도시, 몽유병자들, 사라진 11월 12일) 은유적이었으며(도시의 유일한 마천루인 탐정회사 건물, 도시의 수호자이자 지배자같은 탐정회사의 역할, 하급서기-서기-탐정-관찰자-감독관으로 명확히 구분지어진 계급) 연극적(몽유병자들의 행진(176~177쪽)과 피스 탐정의 죽음의 순간(187쪽))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작은 눈송이에서 시작되어 점점 불어나는 눈덩이처럼 거대해지고 싶어진다. 장주지몽을 가장 서양식(?!)으로 잘 구현한 작품이라는 느낌. 영화 <Now *** *** **>와 <Inc******>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에도 열광할 수 있을 것이다.


13. 기적이 일어나기 2초전(아네스 르디그, 장소미 역. 푸른숲. 2014. 406쪽)
: 아, 이게 그저그런 신데렐라 스토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냥 마트에서 일하는 이제 막 소녀를 벗어난 미혼모가 돈많은 부자 아저씨를 만나 행복해지는 이야기였다면. 하지만 스무 살 줄리는 그녀의 한줄기 눈물을 본 나이든 싱글남 폴과 역시 아내를 잃은 폴의 아들 제롬과 함께 떠난 휴가여행에서 사랑하는 아들이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는 불행에 맞닥뜨린다. 이 책은 그녀가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이면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에서 눈을 들어 서로를 바라보고 손을 내밀어 지탱해 주게 되는 이야기이다.

책 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행복한 이야기만 읽고 싶었던 내게 이 책의 뒷표지는 허위정보를 줬다. 이야기는 따뜻했고 결국에는 해피엔딩으로 가는 건 맞았지만 그래도 내겐 힘들었다. 불행이란, 사고란 일어나지 않으면, 피해갈 수 있으면 더 좋은 거다. 그래도 굳이 인생에 스며들어왔다면 극복하는 건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게 바로 정석일테지. 그래도 극복방법 따위 써먹을 일 없었으면.


14. 중국식 룰렛(은희경. 창비. 2016. 214쪽)
: 이 작가도 점점 평범해진다. 오랜만의 단편집인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얼마 전에 읽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장미의 왕자>에선 예전의 냉철한 시선과 날카로움이 느껴져서 다행이었다.


15.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박연선. 놀. 2016. 394쪽)
: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혼자 남겨진 할머니 곁을 지키기 위해 남겨진 삼수생 무순. 한여름 시골의 밭일은 하기 싫고, 해가 똥구멍에 뜰 때까지 쳐잔다는 할머니 성화는 더 듣기 싫은 무순은 자신이 여섯 살 때 이곳에 놀러와 그려놓은 보물지도를 발견하고 유씨 종갓집 마당에서 보물상자를 파낸다. 그 안에 들어있던 소년과 자전거 나무조각상이 종갓집 딸 유선희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된 후 조각의 모델에게 돌려주려 찾다가 15년 전 마을 소녀 네 명이 한꺼번에 사라진 사건을 추적하게 된다.

진짜 재미있었다. 이 작가 유머코드가 나랑 딱 맞는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읽으면서 빵 터지는 웃음을 입 안에 꾹 눌러 놓느라 입술을 악물어야 했고 내릴 역을 지나칠 뻔 하기까지 했다. 구성도 탄탄했고 캐릭터들도 살아있었다. 각각의 사연 자체의 신선함은 조금 떨어질 지라도 유기적으로 잘 결합되어 있어 흡입력이 진짜 대단했다. 게다가 권선징악까지. 맘에 드는 코믹 미스테리였다.


16. 앨리스와 앨리스(페넬로페 부시, 정윤희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12. 341쪽)
: 부모님의 이혼이 아빠를 쫓아내 버린 엄마 탓이라고 생각하는 열 네 살 앨리스. 아빠는 재혼을 하려 하고, 일곱 살짜리 남동생을 돌보는 일부터 모든 일에 잔소리만 퍼붓는 엄마와 어릴 땐 친했지만 왠일인지 자기를 괴롭히기만 하는 같은 반 사샤까지 모든 게 짜증난다.

부제에도 있지만 앨리스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몰랐던 진실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이다. 재미는 있었지만, 앨리스도 얘기했듯 내용상 왠지 억울한 감이 좀 있다. 모든 걸 바로잡았지만 행복하고 따뜻했던 순간은 못 즐긴 앨리스. 그래도 그랬기에 지금의 행복이 있을 수 있던 거니까.

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 없다. 어차피 성격이 운명인 거다. 아예 다시 태어나면 모를까, 이 성격과 이 사고방식을 그대로 갖고 과거로 간다한들 뭐가 얼마나 달라지겠어. 하지만 너무 늦지 않았다면, 가능하다면 한번 쯤은 돌아가 보는 것도 꽤 괜찮을 수 있을 것도 같다.


17. 미스터 모노레일(김중혁. 문학동네. 2011. 409쪽)
: 두 개의 주사위로 유럽 전역의 모노레일을 타고 여행을 떠나는 대박 게임 '헬로, 모노레일'을 개발한 모노. 절친 고우창과 그의 아버지 고갑수를 회사에 취직시키고 일을 맡겼던 모노는 유럽 출장 중 고갑수와 고우창이 사라지도 공금도 빈다는 얘길 듣는다.

재미도 있었고, 이 작가 특유의 빈 듯 하면서도 정신없는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부담없이 슬슬 읽었지만 사실 '이게 인생이지, 뭐'하는 이야기를 좀 특이하게 한 것 외에는 특별할 것 없는 소설이었다. 그게 이 작가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을 듯.


18. 저스트 원 데이(게일 포먼, 이진 역. 문학동네. 2016. 457쪽)
: 역자 후기를 보고 나서야 이 책의 듀엣 소설인 빌럼의 입장에서의 이야기가 출간예정이라는 걸 알았다. 진작 알았더라면 그 책이 나온 뒤에 같이 읽었을 텐데. 그 책이 출간될 때까진 당분간은 빌럼을 미워할 것 같다. 엘리슨은 아니겠지만 나는, 엘리슨과 닮았지만 다른 나는 빌럼이 미울 것이다.

고교 졸업반인 엘리슨은 10대를 위한 유럽 일주를 떠난다. 투어 마지막 날,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랫퍼드에서 극단 '게릴라 윌'에서 공연하는 빌럼과 마주치고, 그의 <십이야>를 보기 위해 <햄릿>을 포기한 엘리슨은 다음날 절친 멜라니와 함께 런던으로 가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가 다시 빌럼과 만난다. 빌럼과 딱 하룻동안 파리를 여행하기로 한 엘리슨. 난생 처음 자신이 아닌 '룰루'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일탈을 한 엘리슨은 빌럼과 잠들었다 깨어난 아침, 그가 사라진 걸 발견한다.

나도 안다, 빌럼이 최선을 다했다는 걸. 그리고 이 이야기가 전적으로 엘리슨의 입장과 생각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걸. 그래도 빌럼이 미운 건 어쩔 수 없다. 비록 엘리슨이 크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게 도와주기는 했지만... 듀엣 소설을 기다린다.


19. 고독한 시월의 밤(로저 젤라즈니, 이수현 역. 시공사. 2010. 310쪽)
: 할로윈까지 한 달. 감시견 스너프와 주인 잭은 그 날을 위한 재료들을 모으기 시작하고, 스너프는 영특함으로 '게임 참가자'들과 그 조력자들을 만나 매일매일 정보를 교환하고 게임을 위한 계산을 한다.

무난한 판타지일 거라 생각하고 빌렸는데 - 나 이 작가는 처음 읽는 듯 - 스릴러 혹은 탐정 소설의 토대 위에 SF적인 서술방식으로 환성적인 세계를 이야기한다. 결말은 조금 허무했지만 등장인물들이 다 괜찮았고, 무엇보다 화자가 맘에 쏙 들어서 재밌게 읽었다.


20. 타락(구효서. 현대문학. 2014. 311쪽)
: 앞서 읽은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가 꽤 좋았어서 선택했는데, 이 책은 그보다는 좀 허했다. 낯선 나라로 유학 온 산. 버스 정류장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그의 품으로 떨어진 듯 이니를 만났고, 그날로 그녀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채소만 먹고, 부겐빌리아 길을 산책하고, 애플민트를 들여다 보는 삶. 그 사이 고국에는 연락이 끊기고, 산과 이니를 찾는 사람들이 입국한다.

허하다는 건, 스토리 뿐 아니라 결말에 관해서이기도 하다.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의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제대로 된 첫 멜로라고 했는데,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 이 책이 더 먼저 출간됐다 - 이것도 멜로인데 왜 그런 말을 했지? 했다가 결말을 읽고 납득했다. 이건 사랑이 아니구나. 하지만 역시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산을 이해했다. 외면이 최선일 수 밖에 없는. 그래도 이 책은 참 좋았다. 이 작가가 점점 더 좋아진다.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7/04/03 17:09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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