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독서 목록

1. 예술과 중력 가속도(배명훈. 북하우스. 2016. 322쪽)
: 작가의 역량이 드러나는 색다른 이야기들. 낯선 소재들과 특유의 서술 방식으로 인한 새로움 덕분에 즐겁게 읽었다. 역시 난 이 작가의 장편이 더 좋긴 하지만 그래도 이 단편집에선 SF적인 미래만이 아닌 과거를 많이 이야기해서 좋았다. 특히 <유물위성>과 <예언자의 거울>이.


2. 누가 나를 죽였을까(방진하. 주니어김영사. 2016. 217쪽)
: 꽤 유치했던 청소년 소설. 재밌을 줄 알았는데... 가상의 대한민국. 권력자 집안의 둘째 아들 영준은 죽었다가 '소생술'을 받고 깨어나지만 기억을 잃은 상태이다. 자신과 집안에 대해 알아가면서 자신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청소년 대상이라고 해도, 짜임새가 많이 허술하다. 책 소개를 읽고 갖게 되는 긴장감이 정작 책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고 뭔가 있을 듯 보였던 인물들의 비밀도 시시하게 풀려버린다.


3. 이름을 말해줘(존 그린, 반신호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4. 313쪽)
:기억력 신동 열 아홉살 콜린. 이제껏 사귀었던 여자 친구들 이름은 모두 캐서린이었고, 이제 막 열 아홉 번째 캐서린에게 가열차게 차였다. 친구 하산과 함께 캐서린을 잊고자 자동차 여행을 떠난 콜린은 문득 자신이 차인 역사를 되짚어 보면 연인 사이에 누가 차이는지 관한 공식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연구에 돌입한다.

내용이야 예상대로 흘러가긴 했지만 역시 재밌게 읽었다. 이 작가는 선택한 걸 한 번도 후회하게 한 적이 없다. 늘 일상 속에서 작은 철학과 기쁨을 발견하게 하니까. 이제껏 읽은 이 작가의 책들 중 상대적으로 여주인공의 비중도 적고 매력도 덜하지만 정말 재밌게 읽었다.


4. 끝없는 사랑의 섬(다이나 차비아노, 조영실 역. 문학동네. 2010. 495쪽)
: '오컬트 시리즈'라는 책 소개에 집어들었는데 오컬트라기보다는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 미국 마이애미의 쿠바계 신문사에서 일하는 기자 세실리아. 고향 아바나에 대해 애증을 갖고 있는 그녀는 쿠바 출신들이 자주 모이는 바에 갔다가 구석에 있는 노파에게 이끌려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노파의 이야기와 세실리아 부모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처음에는 뜬금없이 나타나는 유령의 집과 세실리아의 고통, 그리고 아주 멀리서 시작하는 이야기 때문에 스토리가 좀 혼란스럽게 느껴졌지만 금방 줄기를 잡으며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따라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쿠바 현대사의 큰 줄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과 『세피아빛 초상』이 생각나게 하는 이 소설은 아옌데 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훌륭하게 쿠바의 아픔과 이민자의 외로움을 이야기해 주었다.


5. 끝까지 이럴래?(한창훈 외. 한겨레출판. 2010. 388쪽)
: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가들의 작품집. 편하게 읽었다. 대체로 이런 책들은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고 싶어서 읽기 시작하는데 이 책에서 발견한 작가는 김곰치. 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심윤경이었다(작가님, 새 책 좀...).


6. 12월 10일(조지 손더스, 박아람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15. 321쪽)
: 미래의 어딘가이기도 하고 지금 여기이기도 한 이야기들. 처음에는 단편집인줄 모르고 읽다가 첫 작품에서 좀 멈칫했지만 곧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비극들. 지금 여기를 사는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책 초반에 망설였던 것과는 달리 작품 하나하나가 흡입력이 강해서 빠르게 읽혔다. 모든 작품들이 강렬했고 잔상이 진했다. 가장 여운이 길었던 건 표제작과 <강아지>, <거미머리 탈출기>.

이렇게 깊은 어둠들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고 한다면 내가 너무 순진한 걸까. 어쩌면 이 짙은 어둠 때문에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집어들 땐 망설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좋은 작가를 읽게 되어서 기쁘다.


7. 한여름 밤의 꿈(셰익스피어, 최종철 역. 민음사. 2008. 139쪽)
: 머리 식히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뭐라 말할 수 없이 거지같은 번역과 교정 때문에 짜증만. 내용이야 다들 아는 대로 요정왕과 그 신하 퍽의 실수로 인한 연인들의 하룻밤 소동인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유쾌한 이야기가 이 판본에서는 정말 어이없게 바뀌어버렸다. 운문 형식으로 번역하면서 우리 고유의 3.4조와 4.4조를 맞추려 한 취지는 좋지만 모든 대사를 칼같이 맞추려다 보니 과도한 조사 생략으로 다들 덜 떨어진 문장들만 구사하는 멍청이들이 되었고 비문이 마치 낙엽처럼 수북하게 쌓여버렸다. 백미(?)는 나누스의 무덤을 박혁거세 무덤으로 바꿔버린 것. 그건 역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의역이 아니다. 명백한 오역이지.


8. 밤에 살다(데니스 루헤인, 조영학 역. 황금가지. 2013. 599쪽)
: 오랜만에(혹은 처음?) 읽은 정통 누아르. 금주법 시대 보스턴, 어둠의 세계로 뛰어든 조의 이야기이다. 자잘한 강도짓이나 하다가 갱 두목의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점점 진짜 갱이 되어가는 조의 파란만장한 건달로서의 삶. 하지만 냉혈한이 되기에는 너무 부드럽고 동정심이 많았던 조의 상실은 어쩌면 당연했던 건지도.

역시 이 작가의 책답게 촘촘히 재밌었다. 건달들의 정신없는 싸움 와중에도 조의 인간적인 캐릭터는 빛났다. 앞으로 한동안은 이 작가를 안(못) 읽을 것 같지만 종종 생각날 것 같다.


9. 우리들의 다정한 침묵(리안 쇼, 최설희 역. 뜨인돌. 2016. 312쪽)
: 뮤지컬을 좋아하는 렉스. 하나뿐인 친구와 파티에 갔다가 친구가 무면허 음주운전하는 것을 말리지 못하고 동승했다가 혼자만 살아남는다. 이후로 노래는 커녕 말조차 안 하게 된 렉스에게 사회봉사 명령이 내려지고, 렉스는 날 때부터 장애로 인해 자신의 의지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조니를 만나게 된다.

새드 엔딩이어서 놀랐다. 설마 했는데. 사실 남은 사람들이 더 가엽긴 하지만. 말없는, 말하지 못하는 두 소녀가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알게 된다는 건 클리셰일지 모르지만 조니의 비범함 덕분에 무엇보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다.


10. 3월의 제비꽃(필립 커, 박진세 역. 북스피어. 2017. 376쪽)
: 유대인 박해가 천천히 시작된 1936년의 베를린. 경찰 출신 사립탐정 베른하르트 귄터는 철강 재벌 직스에게서 얼마 전 살해당한 딸 부부의 금고에서 사라진 보석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누아르에서는 사건이 일단락되거나 범인이 잡히면 일단 해피 엔딩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지만 그녀는 결국 두 번 죽은 셈이 되었고 전쟁 발발 직전의 참담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의 귀환은 다행이긴 했지만 차마 '무사'했다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래도 나름 추리 소설들을 열심히 읽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이 소설의 '하드보일드'함은 꽤나 뻑뻑했다. 그래도 이 시리즈의 출간을 즐겁게 기다린다.


11. 아쿠아리움(데이비드 벤, 조연주 역. 아르떼. 2016. 356쪽)


12. 캐나다(리처드 포드, 곽영미 역. 학고재. 2016. 560쪽)
: 스릴러인 줄 알고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우선 우리 부모가 저지른 강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다음에는 나중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라는 첫문장은 이 소설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딱 요약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화자가 담담하게 털어놓는 부모와 쌍둥이 누이, 그리고 부모가 감옥에 간 후 보내진 캐나다의 서스캐처원 평원에서의 삶은 이 이야기 중간중간 반복되는 서사로 인한 지루함을 이겨내고도 남는다. 열 다섯 소년이 해체된 가족과 삶을 이야기하면서 되풀이할 수 밖에 없었던 중얼거림. 어쩌면 내가 끝까지 놓을 수 없었던 건 이야기 속 델의 손이었을지도.


13. 5년 만에 신혼여행(장강명. 한겨레출판. 2016. 252쪽)
: 솔직하고 편안한 에세이. 아내를 해바라기처럼 바라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여행기 중간중간 사회의 문제점을 짚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가 드러나는 모습도 보였다. 즐겁게 읽었다. 소설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작가 자신의 모습이 보여서 좋았다.


14. 운명과 분노(로런 그로프,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17. 606쪽)
: 성공한 극작가 로토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마틸드. 부유한 집안 출신이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과 청소년기의 방황, 그리고 대학 졸업 후의 좌절로 의기소침한 로토는 우연히 쓴 희곡이 대성공을 거둔다. 22살에 만나 충동적으로 결혼한 아내와의 아슬아슬한 결혼 생활이 이어지고, 이야기의 중반에 갑자기 그는 사망한다. 그리고 천천히 시작되는 마틸드의 이야기.

『일년 동안의 과부』와 『인터레스팅 클럽』을 섞어놓은 듯한 이 이야기는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작은 반전들을 연달아 내밀며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차마 앞의 두 작품보다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뭐랄까, 현대인들의 입맛에 더 맞는다고 할까. 어쨌든 꽤나 영리한 작품이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이 작품이 마음을 덜 움직인다는 얘긴 물론 아니다. 읽는 내내, 특히 '분노' 챕터를 읽으며 줄곧 삶이, 사랑이 주는 무게를 가슴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마틸드가 이 모든 것들에게서 도망치지 않은 것이 내겐 경이로울 뿐.


15. 개들이 식사할 시간(강지영. 자음과모음. 2017. 303쪽)
: 강지영은 각오하고 읽어야 한다. 특히 단편은. 알고 시작했지만 첫 작품(표제작)부터 강렬했다. 아니, 강렬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욕지기가 치밀어오른 건 내가 강아지를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9편의 이상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작가의 전 단편집인 『굿바이 파라다이스』보다는 부드러운 이야기들이라는 것. 간혹 나름의 해피엔딩이 있기도 하다.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스틸레토」.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7/12/04 11:20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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