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독서 목록

1. 미니어쳐리스트(제시 버튼, 이진 역. 비채. 2016. 507쪽)
: 17세기 암스테르담. 시골 소녀 넬라는 얼마 전 결혼한 남편의 지에 도착한다. 도시의 영향력있는 상인인 남편 요하네스는 넬라에게는 관심이 없고 시누이인 마린은 차갑기만 하다. 집안 전체를 관리하는 마린의 청교도적인 생활 방침과 요하네스의 건조한 태도에 힘들어하는 넬라에게 요하네스는 실제 집과 똑같은 미니어쳐를 선물하고, 넬라는 상인 명부에서 미니어쳐리스트를 찾아내 자신의 미니어쳐 집을 채울 물건을 주문한다. 예상보다 정교한 물건들이 배달되자 겁먹은 넬라는 '앞으로 거래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내지만, 미니어쳐는 계속 배달된다.

미스터리 형식이긴 하지만 난 성장소설로 읽었다. 막연한 기대감만 가지고 쭈뼛거리는 태도를 보였던 넬라가 남편 없이도 집안을 꾸려갈 수 있을 만큼 자라는 이야기. 물론 시련은 당연히 닥치고 기대는 무참히 깨진다. 운명은 늘 뒤통수를 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 거니까.

해피엔딩은 아니다. 미니어쳐리스트를 처리(?)한 방식도 맘에 안들었다. 작가가 좀 서툰 느낌. 미니어쳐리스트의 정체와 능력을 제대로 다 까발리던가 아니면 아예 신비롭게 덮어두었어야지. 그래도 이 책이 맘에 들었던 건 순전히 넬라 때문이었다. 그냥 주저앉지 않은 넬라. 비틀거리지만 쓰러지지 않은 넬라. 넬라를 창조해낸 것만으로도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읽을 이유가 됐다.


2. 파르마의 수도원 1,2(스탕달, 원윤수, 임미경 역. 민음사. 2001. 384쪽, 392쪽)
: 19세기 이탈리아. 밀라노 대귀족의 차남 파브리스는 어릴 때부터 진보적인 고모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나 형과 달리 나폴레옹 지지자로 자란다. 얼떨결에 워털루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쟁의 실상을 목격한 후 집으로 귀가했지만 형의 모함으로 도망자 신세가 된다. 고모와 엄마의 도움으로 도망친 그는 고모가 파르마 공국의 실세 모스카 백작의 마음을 사로잡자 고모와 그의 도움으로 파르마 공국의 대주교가 되기 위한 길을 밟기 시작한다.

진짜 재밌었다. 마치 어릴 때 읽었던 공주와 왕자가 나오는 동화책의 성인 버전을 읽는 느낌. 당시 귀족들의 생활상이 솔직하고도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었고, 인물들이 각자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며 매력을 발산했다. 급하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감이 있긴 했지만 페이지 페이지가 모두 재밌었다. 책장이 넘어가는 게 아쉬울 정도. 9월에 읽은 책들 중 재미로는 최고였다.


3. 밤에 우리 영혼은(켄트 하루프, 김재성 역. 뮤진트리. 2016. 196쪽)
: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남녀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 각자 남편,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사는 70대의 에디와 루이스. 에디는 갑자기 루이스를 찾아가 함께 자자고 얘기한다. 섹스가 아니라 나란히 누워 얘기하다가 잠들자고. 루이스는 에디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가을 밤 같은 소설이다. 조용하고 서늘하고, 하지만 따뜻하고. 작가는 노년의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고 얘기해 주고 싶었을까? 굳이 노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렇게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다만 현실적인 결말은 마음 깊이 아팠다.


4. 어둠 속의 일격(로런스 블록, 박산호 역. 황금가지. 2014. 264쪽)
: 매튜 스커더 시리즈 중 하나. 시리즈 시작은 아니어서 좀 아쉬웠지만 작가를 믿고 선택했고 재미있게 읽었다. 9년 전 얼음 송곳으로 대낮에 혼자 있는 여성들을 죽이고 다녔던 연쇄 살인범이 잡혔다. 그런데 살인범은 모든 살인을 인정했지만 단 한 명, 바버라 에팅거는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하고 바버라의 아버지는 매튜 스커더를 찾아온다.

얘기했듯 정말 재밌었다. 주인공이 차분하게 단서를 좇는 게 딱 내 스타일. 난 긴장감을 주는 스릴러도 좋지만 덤덤하게 진실을 밝혀내는 이런 탐정도 좋다. 약간은 건조한 문체도 좋았다. 이 시리즈 부지런히 찾아 읽어야겠다.


5. 눈사자와 여름(하지은. 새파란상상. 2015. 535쪽)
: 전작을 기대없이 읽기 시작해서 '나쁘지 않네'로 끝냈다면 이 책은 초반에는 '어휴 이게 뭐야'였다가 '나쁘지 않네'로 끝냈다. 코믹 스릴러. 범죄 없이 조용한 그레이힐 경시청의 레일미어 경위. 3년 동안 쫓아다니던 조 마르지오 극장장의 딸 세라바체 양에게 뺨을 맞은 후 1년 동안 그 극장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극장 전속 작가인 대문호 오세이번 경이 사망하고 그의 원고가 사라지자 그 곳으로 가서 조사를 시작한다.

기대없이 읽었던 전작과 달리 이 책에서는 초반부터 상당히 유치한 설정과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사, 그리고 무엇보다 비문이 꽤 많이 거슬렸다. 하지만 말했듯 읽다보니 스토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남주와 여주가 왜 사랑에 빠졌는지 이해가 안 돼. 아마 그래서 작가도 사건 해결 후에 그렇게 둘의 이야기를 길게 썼겠지. 독자와 자신을 설득하느라. 하지만 사족이었다. 당분간 이 작가 안 읽을 듯. 이거 읽고 나니 고전이 매우 땡겼다.


6. 나의 눈부신 친구(엘레나 페란테, 김지우 역. 한길사. 2016. 449쪽)
: 1950년대에 나폴리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엘레나. 절친 릴라의 아들에게서 '엄마가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은 나이든 레누가 회상하는 그들의 유년기와 사춘기 시절이다. 나폴리 외곽의 가난한 동네에서 절친이자 라이벌로 함께 자라나는 두 소녀. 천재적인 두뇌를 타고났지만 가정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릴라와 부모를 설득해준 선생님 덕분에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까지 가지만 늘 피나는 노력을 해야했던 레누의 생활과 생각과 삶이 무심한 듯 섬세하게 보여진다. 두께에 비해 책장이 정말 쭉쭉 넘어간다. 엄청나게 흥미진진하거나 긴장되지는 않지만 당시의 사회 분위기나 여성(딸)들의 사회적 지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관계들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아무 생각없이 이 연작을 1권만 빌린 게 후회됐을 정도.(아직 3권까지 밖에 안 나왔다. 4권 완결)

어쩌면 우리나라 60년대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풍경들과 일화들 속에서 이 책이 더욱더 특별했던 건, 평범할 수 있는 이야기를 빛나게 할 줄 아는 작가의 필력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 소설 안에서 누구보다 눈부시게 빛나던 릴라와 레누 때문이겠지. 인형을 지하실에 던져 버리던 릴라. 돈 아퀼레에게 찾아가 인형을 달라고 말하던 릴라. 그리고 릴라의 손을 놓지 않았던 레누. 이 둘의 남은 이야기가 기대된다.


7. 거짓말(한은형. 한겨레출판. 2015. 331쪽)
: 첫 자살 시도는 3살 때였다, 고 말하는 열 일곱 살의 이야기. 발가벗은 채 교실에서 남학생과 커튼을 덮고 자다 발견되어 자퇴해 버린 후 대안 학교에 가서도 위악적으로 구는 소녀의 이야기가 담백하게 서술된다. 열 일곱의 시선이지만 허세가 없다는 게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장점. 오히려 허세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가득. 아마 작가는 이 액자식 구조를 짜면서 '이게 제일 큰 거짓말'이라고 뿌듯해 했을 지 모르지만, 하석은 이 구조 안에 있지 않았어도, 그녀 자신 그대로 보여졌대도 충분히 이야기 밖의 사람들을 빨아들였을 것이다. 다만 소설 구조적인 이유로, 이야기의 끝맺음이 미진한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듯.


8. 러브 인 뉴욕(그웬 쿠퍼, 김지연 역. 샘터. 2013. 478쪽)
: 귀여운 고양이 프루던스가 얘기해주는 모녀 이야기. 프루던스는 아기였을 때 사라를 간택해서 그녀와 함께 지내지만, 어느 날 사라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사라의 딸 로라와 사위 조시가 와서 사라의 물건과 프루던스를 그들의 아파트로 데리고 간다. 사라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작은 침실에서 사라의 물건들과 지내는 프루던스. 조시는 사라가 가진 음반들을 비롯해서 많은 걸 들여다보고 정리하고 싶어하지만 프루던스가 볼 때마다 사라와 어색하기만 했던 로라는 엄마 사라의 물건들을 외면하기만 한다.

이야기는 마음을 깊숙히 건드렸고 프루던스는 사랑스러웠지만 교정은 최악이었다. 수많은 오타와 오역, 교정 실수들은 꾹꾹 참으며 넘겼지만 살다살다 '두루마기 휴지'라는 단어를 인터넷이 아닌 책에서 보게 될 줄은... 책 던질 뻔 했다. 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프루던스의 귀여움이 책을 계속 읽게 했지만 뒷부분에서는 그마저도 좀 약해졌다. 암튼 앞으로 이 출판사는 패스.


9. 금요일 밤의 뜨개질 클럽(케이트 제이콥스, 노진선 역. 대산출판사. 2008. 528쪽)
: 싱글맘 조지아. '워커 모녀 수예점'을 운영하며 흑백 혼혈인 딸 다코타를 키우고 있다. 조지아의 멘토이며 이 수예점을 시작하도록 도와준 애니타를 중심으로 금요일 밤마다 각자의 뜨개질 감을 들고 모이는 모임이 자연스레 시작되고, 이 모임의 고정 멤버이자 수예점 단골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뜨개질엔 관심도 없으면서 자신의 여성학 논문에 이 수예점 손님들을 이용하고 싶어하는 다윈, 프리랜서 프로듀서인 루시, 알바생이자 디자이너를 꿈꾸는 페리, 조지아의 옛 동료인 K.C. 어느 날 조지아의 고등학교 때 절친이었다가 그녀를 배신했던 캣이 나타나고, 다코타의 아버지이자 조지아가 임신한 걸 알자마자 그녀를 버렸던 제임스도 돌아온다.

겨울 스웨터처럼 따뜻한 이야기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해피 엔딩은 아니다. 그렇다고 새드 엔딩이라고 볼 수도 없겠지만. 사실 새드한 그 요소는 무리수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인생이라면 할 말은 없지.


10. 천국에서(김사과. 창비. 2013. 349쪽)
: 뉴욕에서 부잣집 딸과 함께 약에 취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온 케이는 모든 게 지루하다. 망한 집과 히키코모리가 된 남동생. 집 밖으로 돌던 케이는 우연히 뉴욕에서 살았던 재현과 만나 사귀지만 여전히 공허하다.

88만원 세대의 현실적인 생각을 잘 대변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내가 읽기에 케이도 재현도 한심하기만 하고, 조금은 낫나 싶었던 통닭집 남자는 쓰레기였다. 케이의 초등학교 동창 지원은 불쌍했지만 그런 불행은 단순히 88만원 세대라고 해서 겪는 건 아니니까. 나쁘진 않았지만 솔직히 공감도 동정도, 혹은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작가가 꽤 잘 쓴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기대를 져버린 느낌. 당분간은 이 작가 읽지 말아야겠다.


11. 어쨌든 밸런타인(강윤화. 창비. 2014. 280쪽)
: 고등학생들의 귀여운 사랑 이야기. 물론 내가 어른이라서 귀여워 보이는 것. 나름의 아픔과 고민이 가득하긴 하다. 아기 때부터 친구였던 유현을 바라보는 재운. 어릴 때 무슨 일인가를 겪고난 후 소리에 예민해지고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유현. 늘 모든 일에 열심인 다운. 문제아 쌍둥이 동생이 버거운 홍석과 모범생 쌍둥이 형 때문에 맘이 복잡한 진석. 그리고 친구를 만들 줄 모르는 유이의 이야기이다.

하나같이 아프고 예쁜 아이들. 모두 사랑스러웠다. 무겁지 않은 필치로 산뜻하게 그려낸 이야기도, 마냥 장밋빛은 아닌 결론도 맘에 들었다. 다만 진석의 얘기는 좀 멀리 간 것 같기도.


12. 사포(알퐁스 도데, 김종태 역. 예문. 2014. 319쪽)
: 진상과 쓰레기의 사랑 이야기랄까. 고대 그리스의 시인 사포와 닮은 여자 파니와 지방 명문가 출신인 외교부 소속 장의 이야기이다. 연상이자 뭇 남성들의 품을 옮겨다니며 살았던 파니에게서 벗어나려는 장의 끊임없는 시도와 한 번 사랑에 빠지면 그에게 모든 걸 바치는 파니의 몸부림이 반복된다.

조금 지루하기도 했지만 아는 작가의 새로운 이야기라는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섬세하게 잡아낸 남녀 간의 심리 변화와 사랑 이야기는 지금이나 3백여 년 전이나 마찬가지인 듯. 이 작가의 새로운 면을 보아서 좋았다.


13. 개의 심장(미하일 불가꼬프, 정연호 역. 열린책들. 2013. 337쪽)
: 러시아 혁명기 과학자의 우스운 실험 이야기. 혁명에 대한 작가의 삐딱한 시선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길에서 살며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는 등 학대를 받은 개 샤릭. 소시지를 주며 꼬여내는 신사를 따라 그의 아파트로 가서 배부르고 등 따숩게 지내다가 어느 날 죽은 지 얼마 안 된 부랑자의 뇌를 이식받는다.

표제작과 중편 「악마의 서사시」가 실려 있었는데 두 편 다 러시아 혁명을 비판하고 조롱한다. 표제작은 재밌었지만 뒤의 중편은 좀 혼란스러웠다.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서술들. 역시 이 작가의 역량은 명불허전이었다.


14.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이기호. 마음산책. 2017. 247쪽)
: '가족 소설'이라고는 하는데 에세이처럼 읽힌다. 부제는 '아내는 현명했다', 저자는 '답없는 남편' 정도. 아이 셋 낳고 지지고 볶으며 꾸려가는 가족 이야기. 여느 집과 별반 다르지 않는 소소한 갈등과 유쾌함과 기발함이 보인다. 재밌게 읽었다. 다만 아내 노릇도, 엄마 노릇도 난 정말 못할 것 같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15. 바다 사이 등대(M.L. 스테드먼, 홍한별 역. 문학동네. 2015. 472쪽)
: 1926년 호주. 인도양과 남방양 사이의 작은 섬 야누스 록에 있는 등대지기 톰은 해안가로 밀려온 보트를 발견한다. 앉은 채 죽은 남자의 시신과 여자 가디건에 싸여 있는 갓난 아기. 2주 전 아기를 사산한 톰의 아내 이저벨은 이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키우자고 매달린다. 수 개월에 한 번씩 생필품을 실어다주는 배만 드나드는 이 조그만 섬에서 아기 루시는 톰과 이저벨을 부모로 알고 자란다.

톰과 이저벨, 그리고 그 외 모든 인물들이 다 이해가 되면서도 모두가 원망스러웠던 이야기. 새드 엔딩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으니 비극이었다. 전쟁 직후의 험악한 사회 분위기, 특히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하는 사람들과 전쟁 무공 훈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을 위악적으로 표출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많이 씁쓸했다. 옳은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모든 거짓을 바로잡는 것이 과연 사람을 위한 일일까? 맘이 많이 아팠다.


모두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시기를...

by 달을향한사다리 | 2017/10/01 22:00 | Yujin's Book Story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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